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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를 따먹다-25화 (26/657)

< 25화 >두견낙화(杜鵑落華) (8)

질척한 진창 같은 지하실은 서 있는 것만으로도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신발에는 미끄덩한 액체가 밟혔다. 코를 찌르는 악취는 석유같이 역겨웠다.

얼룩이 가득한 침대와 핏자국이 남은 이불. 거기서 애써 고개를 돌리니 팔짱을 낀 이성한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네. 이시헌 형제여.”

“부탁인데 그 형제라는 말 좀 그만하면 안 됩니까?”

“그렇게 우리 딸이 마음에 들었나? 목숨까지 걸 생각을 다 하다니.”

"무슨, 저는 사람 살리려고 목숨을 건다거나 그런 선인은 못됩니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눈다.

나는 손안에 쥐고 있던 마력석에 찬찬히 마력을 불어 넣으며 뇌까렸다.

“믿을 구석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흠?”

테러리스트의 아지트는 발견해내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하물며 세계적인 테러 집단은 어떠할까. 뒷세계를 장악하고, 정보를 감추는 그들의 아지트를 특정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고도의 마력 조사, 인공위성. 가지고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만 겨우 찾는다고 하지.’

그러나 직접 들어가서 좌표를 수신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수십억을 들여 찾아내야만 볼 수 있는 결과를 위치 수신기 하나면 해결할 수 있었다.

이성한은 거물이다.

나름대로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기업의 회장과도 같은 인물이었으니. 이번 소탕의 의의는 막중했다.

-우웅! 우웅!

내 수신기를 본 이성한이 쓰게 웃었다.

“그건..."

“이걸 아십니까?”

“형제는 처음부터 우리와 함께할 생각이 없었군.”

그건 당연한 거지.

한 방 먹었다는 듯 이마를 쓸어 올린 이성한이 허리 춤에 있는 검을 빼 들었다.

“하지만 도망칠 수는 없을 거라네. 지하실 내부에서는 텔레포네이션을 발동할 수 없으니."

장담하는 듯한 말에 나는 품 안에 있던 마지막 마석을 꺼내 들었다.

아카데미를 목적지로 설정한 텔레포트. 그러나 발동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위치만 수신하고 도망치려던 내 계획이 살짝 틀어졌다.

“염병.”

...이거 나도 한 방 먹었다.

-쿠구구구!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위치만 알면 찾아오는 것은 금방이니, 아마 한 시간 이내로 모든 일이 끝날 성싶었다.

“형제여. 난 아직 자네를 믿네.”

“아직도 그 소리냐? 사이비들이 제 정신이 아니라더니.”

“신탁은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으니. 자네는 언젠가 우리를 돕게 되어있네."

스르릉- 어둠 속에서도 성한의 칼은 달빛을 머금은 듯 빛이 뿜어 나오고 있었다.

내 몸은 이미 너덜너덜했다. 생도들이 도망갈 수 있도록 사이비 놈들이랑 치고 박고 싸우다 보니, 잔여 마력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여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얼마나 버티는 게 가능할까. 솔직히 승산 자체는 보이지 않았다.

“너네가 믿는 신이 대체 누구냐?”

“속이 뻔한 질문이지만 답해 주지.”

전신에 마력을 넓게 퍼뜨린 성한이 기괴한 낯빛으로 말을 이었다.

“이 안쪽에 그분의 성물이 위치해 계신다. 그걸 본다면 자네는 교화할지도 모르겠군. 한 번 보겠는가?”

후드득 후득.

천장에서 돌 가루가 떨어지고 있었다. 벽이 무너지는 소리 속 군데군데에 처절한 아우성이 들려왔다.

그런 긴박한 상황에도 이성한은 낄낄댈 뿐이었다. 어디서 저런 여유가 나오는 건지. 그는 지하실의 안쪽 문을 벌컥 열었다.

-스스스스.

문 안쪽에서 흰 안개가 흘러나온다.

바닥을 가득 메운 새빨간 적토(赤土). 그 위로 우뚝 솟은 거목이 눈에 들어온다.

이름은 모르겠다. 이세영이나 산수유, 구슬처럼 머릿속을 팍 강타하는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작은 수목은 자신의 몸을 지키는 거친 갑피도 없이, 살구색 나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잎새 하나 덮지 않았다. 매끈한 곡면이 눈에 띄었다. 줄기의 중간에 꽉 막힌 균열이 눈에 띄었다.

"어떤가 형제?”

의기양양하게 웃어 보이는 그를 보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네 눈엔 이게 신으로 보여? 이거 세계수 아냐?”

“그분을 세계수와 비하려 들지 마라.”

그의 검에 마력이 요동친다.

갑자기 분기탱천한 이성한에 나는 기겁했다.

광기의 영역에 접어든 놈인 줄은 알았지만, 이거 완전 단단히 미친놈이다.

-파앙!

마력이 얽힌 공기의 파동이 날아왔다.

몸의 중심을 급히 낮춰 피한다. 전신 깊숙한 곳까지 마력을 끌어올렸다.

“내가 틀린 말 했냐? 똑같은 세계수 가져다가 숭배하면서 지랄하는 거였어?"

"......!"

얼굴을 와락 구긴 이성한이 핑장한 기세로 내게 덤벼들었다.

각자 꼬나쥔 검이 서로 교차했다.

목각검술 3형, 가지치기.

-째앵!

마력이 튀기고 피가 흩뿌려졌다. 양 어깨에 격통이 느껴졌다.

서로 검을 맞댄 것 뿐인데,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 돌아왔다.

“신이시어. 이 어린 양에게 철퇴를.”

이성한의 목걸이가 붉게 빛난다. 그 목걸이에 박힌 보석이 낯이 익었다. 놈이 일전에 내게 보여주었던 보석이다.

목인을 지배한다더니. 시발 저런 힘을 숨겼던 건가.

달달 떨리는 두 팔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왼팔에 이르러선 아예 힘줄이 끊어진 건지 아무리 애를 써도 도통 움직이지를 않았다.

“......애미.”

나지막이 욕설을 뇌까리며 한 손 검의 자세로 뒤바꾼다.

알고는 있었지만, 수틀리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엄습해온다. 등을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교화를 시작하겠네. 형제여.”

차갑게 피부가 식어간다. 정신 차리자. 속으로 수십 번 되뇌며 마력을 끌어올린다.

심장의 중심부, 그릇의 핵심.

부족한 마력은 주변에서 끌어모아 보충했다. 정순하지 않은 마력을 받아 들인 몸이 거부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주르륵.

오버히트. 코피가 흐른다.

정체 모를 저 힘에 당하지 않으려면 무리를 해서 마력을 끌어모아야 했다. 솔직히 아직 채 갈무리 되지 않은 힘이다.

어떤 결과로 이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투기의 극치(極致).

심장부에서 검게 타오른 마력이 스멀스멀 바깥으로 튀어나온다.

이성한의 신체가 내게로 뻗어 온다. 그에 반응에 내 몸을 음직였다.

-스슥!

시야가 아득히 넓어진다. 검의 음직임, 마력의 경로. 방금까지 볼 수 없었던 내 전신을 향해 뻗어 오는 마력 칼날이 동공 안에 담긴다.

찔러야 할 곳이 눈에 보인다. 몸을 굽히고 화살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화르르르.

팔뚝 위로 새까만 암영이 점점 피어 올랐다.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그 마력의 형태는 아름다운 꽃도, 새파란 잎새도 아니었다.

그저 살육만을 위한 단조로운 투기. 흉악한 기세를 내뿜으며 전진한다.

-쿠구구구!

발을 내딛자 블록이 파였다. 갑자기 늘어난 신체 능력에 온몸의 근육이 팽창했다.

다가오는 그를 본다. 노려야 할 곳을 확신한다.

-콰직!

올곧게, 그러나 그가 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뻗어 나간 검날이 이성한의 볼을 꿰뚫고 들어갔다.

"-케르르륵"

두개골을 관통한 검날이 뇌를 짓이겼다.

세차게 솟구치는 마력이 상처를 터뜨렸다.

머리를 관통하는 손맛이 꺼림칙하다. 대롱대롱 매달린 남성의 신체가 축 늘어진다.

발로 시체를 걷어찼다. 깊게 박힌 검에서 육편이 짓이겨지는 소리가 났다.

머리가 어질거린다.

죽은 이성한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되어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헉.”

땀이 줄기차게 흐른다. 결국, 혼자 이성한을 죽였다.

자신의 무력에 대한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경황은 아니었다.

시발. 죽을 것 같다.

환각이 눈에 아른거린다. 독버섯을 먹은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고 전신이 간지러웠다.

“보, 보석?"

그 와중에도 무의식적으로 시체의 목에서 보석을 빼내어 눈에 담았다.

▶양산된 분홍색 여명(B)

[ 분류 : 장비 ]

-효과 1 : 정사, 혹은 대화를 통해 사용자에게 굳은 믿음을 심어준다.

-효과 2 : 일시적으로 투명한 검날을 만들어낸다.

보석을 품 안에 집어넣고, 나는 음직이는 오른팔을 미간에 얹었다.

-쿠구구구!

바깥은 아직인가?

대체 언제 끝이 나는 건지.

퀴퀴한 혈액의 악취가 너무 지독해서 엉금엉금 나무가 있는 쪽으로 기어갔다.

시원한 냉기가 기분이 좋다.

수목의 몸체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으니, 내 머리 위로 그늘이 졌다.

나는 눈을 감았다.

*****

굳게 솟은 나무의 갑피가 떨어져 나간다.

질척이는 수액이 쭉 늘어지고, 새하얀 피부가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따가우면서도 이질적인 감각에 얼굴을 찡그리기도 한 편, 다리에 힘이 풀린 진달래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는지. 진달래의 눈동자는 공허한 하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떠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손이 덜덜 떨렸다.

“핑챙. 지금 일어나. 강당으로 가야 해.”

"사, 산수유님.”

“왜?”

“이시헌, 그, 그 사람. 문제없겠죠?"

수유에게 묻는 목소리가 세차게 떨린다.

여전히 무표정한 산수유의 얼굴에는 감정이 깃들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산수유는 말없이 바닥을 응시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언이는 괜찮아."

"......"

“전부 시원이의 계획대로야.”

자신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이시헌은 살아주었으면 했다.

그러한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니 가슴 깊숙한 곳에서 후회가 몰려왔다.

차라리 처음부터 그를 믿어주었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왜 그렇게까지 나를...'

그렇게까지 나를 위해 희생을 해야만 했는가 이유를 들어야 했다. 듣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달래야!”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정시우가 상처투성이가 된 채 그녀에게 달려왔다.

“괜찮아? 방금 뭐였어?”

“장시우. 그게 중요한게 아니야.”

“......산수유님?”

“빨리 강당으로.”

산수유는 꿋꿋하게 진달래를 일으켜 세웠다. 정시우는 허둥지둥거리면서도 산수유의 의견을 따랐다.

부축을 받은 진달래의 몸이 기를 잃은 것처럼 축 처져 있었다.

-저벅. 저벅.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후회와 괴로움과 미덥지 않은 자신을 향한 경멸이 차올랐다.

괜찮을 거라고. 괜찮으리라고, 눈을 돌리면 경박한 그 남자가 해맑게 웃고 있을 것 같았다.

진달래는 인연을 붙잡지 못한 자신이 너무 미웠다.

강당을 향하는 내내.

산수유는 그런 그녀에게 괜찮다는 말을 계속해서 반복했지만.

-잘 있어요.

마지막으로 들은 시헌의 말은 꼭 작별 인사를 의미하는 것 같아서.

진달래는 죄책감에 젖은 목소리로 그 말 만을 연거푸 뱉을 뿐이었다.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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