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복사나무 (5)
-쿠구구구!
하늘에서 나무가 빗발친다.
주변에는 어떻게 만들었는지도 모를 기공탄이 날아오고 있었다.
하나같이 만화에서나 볼 법한 기술들. 그것들이 직접 내 눈앞에 나타나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하하하!”
얼굴을 찌푸리며 남은 마력을 가늠해본다.
백도의 물복 혐오적인 방해 탓에 쉴 새 없이 빠져나간 마력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콰앙! 쾅! 쾅!
그리고 이를 알고 있다는 듯 백도의 방해는 더욱 심해져 갔다.
하늘에서 떨어진 화살이 폭풍을 일으키며 나무를 무너뜨린다. 화살이 내 근처에 박힐 때마다 자동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시발, 시발, 시발!”
하염없이 내리막길을 달려간다. 전속력으로 뛰는 내리막은 내 생각 이상으로 빨랐다.
그러다 툭- 나무 뿌리에 발이 걸려 몇 초간 하늘을 날았다.
“이런-”
젠장할.
-후드드득!
꼴사납게 경사로를 구른다.
옷 사이사이에 낙엽이 박히고, 팔과 다리에는 생채기가 새겨진다. 한참을 구른 뒤에야 나는 커다란 나무에 막혀 겨우 구르기를 멈출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뉘우치겠느냐 삼등제자! 네놈의 재능은 쓸만하니, 진심으로 나를 따르겠다면 직속 제자로 받아들여 주겠다!”
하늘 위에서 날벼락처럼 쏟아지는 몇 마디.
이를 꽉 깨물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에는 피멍이 가득했다.
세상이 아무리 협과 의를 찾아볼 수 없다지만, 여기서 마저 내 의지를 꺾을 순 없었다.
딱딱한 복숭아? 물렁한 복숭아? 솔직히 아무래도 좋았다. 그냥 복숭아면 복숭아지 거기에 무슨 의의를 두겠어. 맛만 있으면 되지.
말마따나 여기서 내가 좀 굽혀주면 앞으로의 훈련이 탄탄대로가 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말해라! 말랑한 복숭아는 맛이 없다고!”
그런데. 진짜 이상하게 내 속을 긁는 백도만 생각하면 짜증이 난다.
생긴 것과 다르게 노는 백도를 보기만 해도 팔꿈치로 인중을 찍어버리고 싶었다.
‘190만원짜리 노트북을 사촌이 망가뜨렸을 때와 같은 기분이야.’
솔직히 다 상관없다.
그냥 내 기질인 분조장의 아집이 나를 가만두지 않는단 말이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있는 힘껏 소리쳤다.
“지랄 마라!!!!”
이윽고 달렸다.
공중 위에 유유하게 서 있는 백도는 그런 나를 보며 가소로운 듯이 웃고 있었다.
“알겠다. 삼등제자의 뜻이 그렇다면-”
나지막한 한 마디. 체념이 서려 있는 말이다.
거대한 마력의 기운이 산등성이를 가득 메웠다.
“-물복을 안고 익사해라.”
-웅웅!
시야를 가득 메운 새하얀 구슬이 금방이라도 나를 덮쳐올 것처럼 발광했다.
나는 감탄과 황당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친.”
이건 못 피한다.
딱복에 진심인 새끼… 그래서 더 역겨운 새끼.
-쿠구구구!
나를 향해 몰려오는 새하얀 구슬들을 바라보며, 나는 눈을 감았다.
…….
소리가 그쳤다.
….
그런데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
파들파들 떨리던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방금까지만 해도 나를 덮쳐오던 마력 구슬이 온데간데없었다.
공중 위에 서 있던 여성은 천천히 내려오며 내게로 걸어왔다.
매우 귀찮아 보이는 눈꼬리. 반달눈. 주홍색의 중단발은 잘 말아 올린 다음 암갈색의 비녀를 꽂아 깔끔하게 정리 되어 새하얀 목덜미를 드러낸다.그녀는 거만하게 팔짱을 낀 채 고고하면서도 유려한 발걸음으로 내게 걸어오고 있었다.
황도의 순딩한 발걸음과는 달랐다.
백도의 거만한 팔자걸음과도 달랐다.
얼굴에 서린 무표정은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산수유같이 무구한 얼굴과는 다른 무표정. 그녀의 뒤로 황도를 보았을 때처럼 나무가 솟아 올랐다.
“……천도?”
"흐음, 내 이름을 알고 있나? 그렇다면 이야기는 빠르지.”
살짝 붉은 기운을 머금은 머리카락이 나무 사이로 파고든 바람에 휘말려 흩날린다.
그 얼굴에 담긴 분위기는 황도와 백도와는 사뭇 달라서, 황도를 처음 봤을 때처럼 백도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삼중 인격이었습니까?”
"이상한 건 아니네. 우리 복사나무의 후계자가 져야만 하는 문제이니.”
천도는 헛기침을 한 번 했다.
“그리고. 백도의 일은 미안하네. 방금은 위험했을 테지.”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게 왜 유치한 싸움을 하고 그러나? 애새끼같이.”
나는 천도의 핀잔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맞는 말이니까. 아마 이 자리에 산수유가 아니라 진달래나 이세영이 서 있었다면 최소한 욕 한 바가지는 족히 먹었으리라.
어찌 보면 나와 백도의 싸움은 당연한 결과였다.
과열되기 쉬운 주제에 고집 센 사람이 둘이나 있었으므로.
“다시 백도를 만나게 되거든, 한 번 굽혀 주거라.”
“안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굽혀서는 안 된다.
“이원보원(以怨報怨). 원한은 원한으로 갚듯, 눈에는 눈, 아집을 없애는 것은 추잡한 고집밖에 없습니다. 솔직히 복숭아는 아무 상관 없어요. 그냥 백도 그 인간만 보면 화딱지가 납니다.”
“……세상에 백도같은 군상이 둘이나 있었군.”
천도는 혀를 차며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화가 난 듯 눈썹이 팔(八)자가 되었다.
그녀는 내 겉을 유심히 보며 한숨을 쉬었다.
“가진 그릇도 드넓을 진데. 어찌 타고난 연놈들은 하나같이 병신같으니. 원.”
“…천도님은 그럼 딱딱한 복숭아가 좋습니까? 말랑한 복숭아가 좋습니까?”
“그딴 게 알 바더냐?”
천도는 팔짱을 낀 채 바락 성을 내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굵기니 경도니 상관 않는다. 시면 좋다.”
“신 거 좋아하면 변태라던데.”
“백도와 똑같은 말을 하는군.”
나는 정색했다.
백도만 들으면 발작 버튼이라도 눌린 것처럼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백도가 싫나?”
“이게 뭐라 설명하기가 좀 그런데. 사람 간에 맞지 않는 그런 게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예.”
“서로 밀어내는 성질이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해가 되지. 같잖은 주제로 싸운 것도 말이야.”
같잖은 주제는 아니었다고, 구태여 말을 꺼내진 않았다.
천도는 손을 공중 위로 뻗었다. 주변의 낙엽이 그녀의 손아귀에 모이더니 곧 검의 형태를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나는 가보겠다. 그 사이에 훈련을 끝내든 말든 마음대로 하거라.”
“어디로 가는 겁니까?”
“그만큼 일방적으로 시달리게 하였으니, 그쪽 처자도 비슷한 수준의 시련을 주어야만 응당 훈련이라 할 수 있겠지.”
“그렇습니까.”
천도는 그리 말하며 검을 쥐고 뚜벅뚜벅 걸어갔다.
나는 그런 그녀의 라텍스 엉덩이를 바라보다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말해라.”
“누가 몸의 주인입니까?”
한 차례 침묵이 산속을 감돌았다.
눈치를 보던 청설모가 나무를 타고 도망간다. 나무 사이를 타고 바람이 불어오면, 잇달아 그녀의 머리가 휘날렸다.
“주인이라. 그런 것을 신경 써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녀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었다.
“복사나무란, 그래. 그리 명예로운 가문은 아니지.”
발에 맞춰, 왼발을 뻗는다.
“과거의 업은 분명 미래까지 이어지는 것일 테니. 저주라 부른다면 이는 분명 저주이겠지.”
철컥- 천도는 나뭇잎으로 이루어진 단단한 검을 라텍스의 허리 부분에 채웠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는 한 시에 같은 몸에서 태어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바깥세상을 보기 위해 빠듯한 시간을 조각조각 쪼개지 않아도 되었겠지.”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만약 같은 몸이 아니었다면? 글쎄. 세쌍둥이가 되었을까? 어쩌면 연년생인 자매였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망상은 어디까지나 망상으로 끝나는 거라네. 아무리 추론을 하여도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모르는 것이지. 이 몸의 주인을 묻거든, 겪어보지 않았으니 어느 누가 대답할 수 있겠느냐?”
여전한 무표정으로 그녀는 중얼거렸다.
“나이지만 내가 아니다. 천륜을 저버린 복사나무가 지은 업은, 그러한 것이니라.”
“그게 무슨 업입니까?”
“한마디 많다. 예의가 없군.”
“백도랑 같은 취급을 받은 마당에 알고 싶은 건 막 묻기로 했습니다.”
천도는 그에 희미하게 웃었다. 처음 보는 웃음은 몹시 아름다웠다.
“그건 말 못 해주겠고, 충고는 하나 해줄 수 있네.”
“뭡니까?”
천도는 나를 바라보며 팔을 한 차례 움직였다.
-서걱.
내 허리춤에 있던 검이 그대로 반으로 잘려 떨어져 나간다.
“시헌.”
"예.”
“자네는 검보다 무투가 어울릴세.”
나뭇잎이 움직인다.
돌풍과 함께 나타난 각양의 풀이 천도의 신체를 뒤덮더니, 곧 그녀는 모습을 감추었다.
*****
오두막의 바닥에 누워 멍하니 그녀의 말을 되새긴다.
-자네는 검보다 무투가 어울릴세.
무투(武鬪)
검을 내려두고, 권을 내질러라.
난생 그러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을까.
머릿속으로 수차례 시뮬레이션을 굴려봤다. 하지만 몇 번을 거듭해도 나오는 답은 동일했다.
주먹보단 검이 강하다. 검보단 창이 강한 것이고. 대인과의 전투에는 언제나 리치가 중했다.
멀쩡한 무기 놔두고 왜 주먹을 쓸까?
막말로 주먹 들고 검을 이기면 무기라는 단어의 명제 자체가 뒤흔들릴 것이다.
‘그럼에도.’
천도는 무의 길을 걸으라 하였다.
농인지 거짓인지조차 구분 못 할 내가 아니다.
그녀는 진심이었고, 나도 진실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누구한테 무를 배워?’
백도? 그 여자는 싫었다. 그 여자는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곤 몸과 얼굴 빼면 아무것도 없었다.
“끙…….”
두 팔을 가지런히 모아 뒷머리에 맞대고, 나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을까?
-스르륵. 스륵.
근처에서 뒤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에 빠진 산수유는 수면제라도 맞은 듯 미동이 없었다. 소리의 방향으로 미루어보면 아마 천도가 일어난 게 아닐까.
“깼어요?”
슬쩍 그리 물었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스르륵, 스륵.
이불 끄는 소리.
벌떡 일어난 여성이 오두막 밖으로 나가 버렸다.
뭘 하려고 저러는 걸까?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피며 하품을 했다.
정신이 살짝 몽롱한 게 이대로 눈을 감으면 분명 잠에들 것이다.
아직. 생각을 정리할 게 많이 남았다.
-뒤척.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밤의 기운을 머금은 산 공기는 차가웠고. 또 상쾌했다.
나에게는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공기이기도 했다.
고향의 마지막 밤, 그때 맡았던 공기의 맛이 이러했을까.
씁쓸한 생각을 하며 나는 발이 가는 대로 산중을 거닐었다.
-자르르르.
그때 물 흐르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이 근방에 시냇물이 있던가.
졸림이 극에 달한 지금 내 상태는 무지성의 고블린이나 다른 바가 없었다.
-자르르르르.
자연의 소리를 찾아 발을 계속해서 움직인다.
그러며 중얼거렸다.
“공기 한 번 상쾌하네.”
“-히윽!”
독백 사이에 들려온 여린 처녀의 소리.
나는 깜짝 놀라 발을 그 장소로 옮겼다.
“자, 잠깐. 멈춰라!”
“예? 그게 무슨…… 어.”
“!!!!.”
고개를 돌린 그곳에 알몸의 천도가, 쭈그려 앉아있었다.
일자로 앙 다문 비부에는 수증기가 피어나고 있었고.
달이 밝아 훤히 보이는 새하얀 엉덩이의 옆에는 잘 개어진 라텍스의 옷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천도의 위세가, 바닥을 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