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 純潔
-두두두두두!
기절한 자매를 태운 헬기가 요란한 프로펠러 소리를 내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탈이 많기는 했지만… 결국 나는 그 자매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녀들이 나를 죽이려 했던 이유.
나무를 통해 통화를 훔쳐 들었을 때, 강간은 그녀들이 생각한 것이 아니라 윗선에서 시킨 것이라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두두두두!
아침 햇살에 눈을 찌푸리며 나는 멀찍이 떨어져 헬기를 지켜보았다.
던전 밖, 다시 도착한 아카데미.
치료나 정황 수사, 이런저런 것을 명목으로 한참 동안 아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 걸까.
이렇게 운반되다시피 아카데미에 도착하고 나니 살벌한 눈빛이 느껴졌다.
-꾸욱.
누군가 등을 찔렀다.
“저한테 할 말 없어요?”
고개를 돌리니 고양이처럼 눈매를 날카롭게 기울인 진달래가 그곳에 서 있었다.
“……잘 지냈니?”
“어이없어.”
흥 코웃음을 치는 그녀.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 보였던 진달래는 이제 조금 나아진 모양이었다.
“별일은 없었죠? 제발, 제발 그렇게 혼자 좀 사라지지 마세요. 간 떨어질 것 같으니까.”
“간은 내가 떨어져야지 왜 네가 떨어지니.”
“……은혜만 입히고 죽지 말란 소리예요. 그리고 친군데 그 정도도 안 돼요?”
언제나 그놈의 친구를 강조해오는 진달래.
세영에게 들은바 진달래가 좌표 추적에 힘을 엄청 써주었다고 한다.
그렇게나 나를 싫어했던 여자가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는지.
가면 아래로 나는 미소를 아끼지 않았다.
“고맙다. 진심으로.”
누군가가 나를 위해 움직인다는 건 제법 기분 좋은 일이다.
진달래 외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돕기 위해 두 팔 벗고 나섰다.
대외적으로는 그저 인간의 신분을 한 떨거지 A일 뿐인데도.
만약 내가 진다고 한들 결국에는 구해질 운명이었다는 소리다.
…나 같이 떳떳하지 못한 놈이 말이다.
입매가 씁쓸하게 올라갔다.
“그래도 그때 너랑 친구 하겠답시고 개지랄한 게 틀린 선택은 아니었…너 얼굴이 왜 그러냐?”
유일하게 잘했다고 생각하는 과거를 되새기며 말을 잇자 진달래의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달래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하다가. 입을 앙다물곤 그대로 시선 처리를 몇 번 했다.
그리곤 자신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냥 감사 인사를 들어 본 건 처음이구나 싶어서….”
인간관계에 서툰 여자답다.
아니 나 한정으로 서툰 건가.
슬슬 말을 놓아줬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툭툭.
“시언.”
그리고 인간관계에 서툰 여자는 한 명 더 있었다.
나는 내 옷자락을 잡아당긴 산수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언이 아니라 시헌.”
“……시헌.”
“왜?”
산수유는 뾰로통하게 내 어깨를 툭 쳤다.
“그 날 이후로 훈련 안 왔어.”
……아.
이 상황에?
“미안하다…. 납치당해서 훈련을 못 도와줬구나.”
“알면 됐어. 그리고 도와 준 대가 줘.”
“대가?”
“미호가 친구끼리는 돕는 게 당연하댔어.”
산수유는 방금 그것으로 속이 풀린 듯 다시 저번의 무감정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도우면 대가는 톡톡히 받으라고도 했어.”
“크크크, 그래? 뭐 해 줄까?”
“맵쫀맛 로제 떡볶이. 신작 나왔대.”
“차 왔다. 나중에 사 줄테니까 들어가라. 진달래 너도.”
내 말을 들은 진달래가 아직까지도 빨간 얼굴을 부채질하며 앞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차에 타기 직전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그녀가 말해왔다.
“아. 맞아. 그 아이 말이에요….”
시바.
안 그래도 속앓이를 하고 있던 도중 들려온 말이라 내 등골이 오싹해졌다.
“시바? 어, 어어. 시바가 왜. 무슨 일 있-”
“지, 진정해요. 제 방에 있어요. 밥도 먹고 있구요.”
탁.
긴장의 끈이 풀린다.
다행이다. 막힌 숨이 돌아온다.
어찌나 놀랐는지 그 짧은 틈에 땀까지 났다.
내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리자 차 쪽에서 진달래가 멍하니 나를 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바라는 듯한 눈치다.
“그…. 잘했죠?”
“어어 잘했어. 고마워.”
잘했어의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에 히죽 웃은 진달래가 차에 탔고. 산수유 역시 그리했다.
이제 나만 가면 된다.
마음 같아서는 진달래를 따라 바로 시바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은데. 아쉽게도 이동수단은 사실상 강제되어 있었다.
“야 안 오냐?”
이세영. 제 차의 보닛을 팡팡 두드린 그녀의 옆에는 주홍색의 머리를 한 여성이 여유로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어김없이 색기를 풍기는 천도.
옷마저 타이즈같은 재질로 바뀌어서 오늘따라 더욱 그래 보였다.
-덜컥.
익숙한 조수석에 앉자 두 명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시동이 걸리지도 않은 차 안.
감도는 침묵은 곧 이세영이 띄운 운에 끊겼다.
“말한 건 그게 다야?”
내가 납치를 당하게 된 경위.
아무런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납치를 당했고. 나를 노리개로 삼으려 했다는 것부터 그곳을 지배하기까지의 과정을 몇 시간 전에 설명했었다.
“그게 답니다.”
“…그래. 그러니까 내가 답답하지. 누군지도 모르는 새끼들이 내 생도를 건드는데.”
트르르륵.
시동음이 걸려왔다.
이세영은 등받이에 쭉 몸을 기댄 채 기지개를 폈다. 그 탓에 겨드랑이가 시원하게 노출되었다.
다분히 고의적인 연출. 세영이 도발적으로 웃었다.
“아직 변태끼 남아있는 것 보니 정신 건강은 멀쩡하네.”
“시발 그렇게 체크하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이거 효과가 직빵이야. 엄청 힘들 땐 좆도 안 선다던데.”
“스승님 앞에서 말 좀 가리십쇼 제발.”
“아 맞다. 오랜만에 둘이라서 그만.”
이세영은 입을 가린 채 슬쩍 등 뒤를 바라봤다.
천도는 못마땅한 얼굴로 한숨을 한 번 쉬었다.
“……그 교관에 그 생도로군.”
“그리고 그 스승에 그 제자죠. 옷은 제일 야하신 양반이.”
“닥쳐라.”
천도는 내게 일갈하며 반 쯤 벗은 곤룡포로 전신을 감쌌다.
제 모습이 야한 건 자각하는 모양이다.
그런 천도를 보며 내가 피식 웃었다.
“야.”
그러자 천도와 나를 번갈아 본 이세영이 얼굴을 기울인 채 내 귓가에 속삭여 왔다.
“너 설마 저분도 건드렸냐?”
“제가 미쳤다고 스승님을 건드립니까.”
두 손으로 X자를 만들어 보인다.
이세영은 이해했다는 듯 안심한 숨을 뱉었다.
“설마 했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넌데.”
“제가 뭔데요.”
“처음 보는 사람 화간하는 놈.”
맞는 말이라 반박을 못 했다.
그 와중에 화간이라고 기어코 말하는 걸 보면 귀엽기도 하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넘어가고.”
이세영은 헛기침을 몇 번 한 후 다시 이야기를 진행 시켰다.
그녀는 등 뒤의 천도를 바라보며 신호를 주었고. 천도는 그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족은 떼고. 우선 이시헌 너는 지금 노려지고 있다.”
진중해진 분위기에 나 또한 정중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거기까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 문제는 너를 노리고 있는 조직이 한 둘이 아니란 거지.”
천도는 검지와 엄지로 미간을 한 번 집었다.
“그 처자에게 이야기는 들었다. 세계수의 남편 후보라고? 왜 나한테는 그 이야길 하지 않았지?”
“남편이 되기 싫어서요.”
“그러냐. 다음부터는 나에겐 숨기는 일이 없도록 해라.”
“예.”
천도는 그 상태로 다리를 꼬았다. 신체의 라인이 드러나는 타이즈의 세밀한 구멍 사이로 백옥같은 피부가 비쳐 보이는 듯했다.
“플라워에 대해서는 알고 있나?”
천도는 또랑또랑하게 옥음을 내어 대화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대충은 압니다만. 잘못 아는 것이 있을 수도 있으니 설명해 주십쇼.”
“그래. 플라워는…… 세계수가 지배하는 현 사회를 증오하는 족속들이라 생각하면 편하다.”
씁쓸한 목소리.
“세계수의 말 한마디에 생이 좌우되는 세상에서 인간들을 구해낸다. 그조차도 대의라면 대의이겠지.”
“나름 동의하시는 모양입니다?”
그녀의 말이 그다지 부정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기에 물었고. 천도는 눈을 감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방식이 더러운 걸 제외한다면야, 그 뜻 자체는 틀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습니까.”
“아무튼 플라워는 일곱 개의 조직이 연합된 상태이다. 그리고 예언의 잎새들을 모으고 있지.”
처음 듣는 단어들의 행렬에 나는 침을 삼키며 집중했다.
천도는 입이 떫은 듯 입맛을 다시며 천천히 나를 직시해왔다.
“그 잎새 중 하나가 너다. 이시헌.”
“…….”
“그리고 아군으로 포섭하지 못하면 죽여야만 한다는 예언이 돌고 있더군.”
“예?”
벙찐 얼굴로 되묻자. 이세영이 말을 보충해왔다.
“저번에 너 이성한이랑 만났을 때 있잖아.”
“아 그때요…. 근데 그건 플라워랑 상관없는 사이비 종교 아닙니까?”
“원래 말단 조직들은 윗선들 의도도 모른 채 행동하는 거야. 맹목적으로 따르는 사이비는 괜찮은 도구고.”
대충 이해했다.
“그런데 문제는 널 노리는 게 플라워 뿐만이 아니란 거지. 시발 어이가 없다니까?”
이세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천도는 곤룡포의 안에서 기다란 담뱃대를 꺼냈다. 그 안에 연초가 담겨 있었다.
-픽.
그녀는 담배를 피우며 차창을 열었다.
어차피 여기 안에 있는 모두가 흡연자기에 꺼릴 것도 없었다.
“원망의 세계수.”
“그건 누굽니까?”
“나도 모른다. 이 세계에 있던 세계수이긴 하다만, 밝혀지지 않은 걸 보면 치유의 세계수와 비슷한 경우이겠지.”
푹. 천도가 창밖으로 불투명한 연기를 뿜었다.
“세계수는 존재 자체로서 남편 후보의 시스템에 개입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네 지령의 페널티를 생각하면, 그것을 악용하는 건 그 녀석이라 예상되는구나.”
“대체 그 새끼가 왜 절 노린답니까?”
“……걸리는 게 없나?”
걸리는 게 있을 리가 없다. 업보가 하나 있긴 하지만 원망의 세계수와는 연관이 없었다.
애초에 내 남편 후보의 대상은…….
‘잠깐.’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내 남편 후보의 대상은 누구지?
아내 될 나무는 순결의 세계수인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야 지금까지 내 말에 반응을 해준 건 순결의 세계수였으니까.
첫날 바지를 까며 물었을 때도.
세상을 비관하며 말을 할 때도.
언제나 시스템으로 말을 걸어준 것은 순결의 세계수였다.
그래서 당연히 그 녀석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시스템은 아무런 고지도 해주지 않았었다.
그저 첫 번째 남편 후보라는 의미심장한 말 한 번. 그리고 그에 걸맞은 사람이 되라는 말 한 번.
만약 여러 세계수가 남편 후보의 지령을 통제할 수 있는 거라면?
순결의 세계수가 내 아내 될 나무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다.
그럼 뭐냐.
내가 이 세계에 오기 전 강간한 나무는 누구고.
제 엄마를 책임지라던 그 여자는 누구이며, 순결의 세계수는 무엇인가?
애초에 내 딸은 누구의 딸인가?
“……잠깐만요.”
“짚이는 게 있나 보군.”
“그게 아니라….”
머리에 열이 찼다. 나는 숨을 고르며 장고의 시간을 걸쳤다.
이세영과 천도는 그런 나를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내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다.
순결의 세계수.
‘정체가 뭐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평생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랐다.
내가 이세계에 처음 올 때 상식을 주입 당한 것처럼.
앞으로는 대화 같은 걸 나눌 수 없으리라는 그런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자신이 존재했다는 흔적 만큼은 남기려는 건지.
-시바는 우리 딸이다.
머릿속에는 그러한 상식이 들어와 있었다.
우리.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내가 지금까지 이 세계를 살면서 받은 부당한 처우에 관한 것.
순전히 나를 엿 먹일 작정이었다면 퀘스트의 보상은 정해두지 않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물론. 포인트를 소모해 상태창을 조작하게 내버려두었던 것도 이치에 맞지 않다.
결국. 그런 거다.
어떤 세계수가 나를 죽이려 했을 때.
그녀만이 나를 위했다.
아무런 불평 없이 맹목적으로.
“생각이 정리 됐나?”
내 생각이 맞다면 이 원망의 세계수라는 녀석의 정체도 자연스레 정해지게 될 것이었다.
나는 낮게 말했다.
“예.”
나를 이세계로 끌고 와서 죽음으로 이끌 게 만드는 세계수가 누군지.
그 자매 덕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걱정 되나?”
천도의 말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에 무언가를 착각하기라도 한 걸까. 천도는 나지막이 말해왔다.
“걱정 말 거라. 제자는 스승이 지키는 것이니. 너는 마음 놓고 실력을 정진해라.”
고마운 말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걱정을 한 적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명쾌했다.
앞이 안 보이던 가시 덤불 속을 무력하게 헤쳐오기만 하다가, 처음으로 덤불 밖의 하늘을 눈에 담은 기분이었다.
굳게 싸인 풀숲에 고개를 들어 올려. 세상을 직시한다.
답답했던 그곳을 헤쳐나갈 수 있겠다는 자신이 든다.
“감사합니다.”
……목표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