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 연옥 (6)
둘째 날.
아직은 쾌적한 하얀 방, 일찍 잠이 깬 나는 천도가 가져온 짐에서 연장을 챙기기 시작했다.
-달그락.
자잘한 아티펙트부터 포션까지, 수월한 공략을 위해 챙길 수 있는 것은 모두 챙길 생각이었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최대한 빨리 이 던전을 클리어할 생각이었으니까.
‘포션 다섯 개, 근력 버프 아티펙트 둘. 공간 이동 반지 하나에…….’
-부스럭
너무 어수선했던 걸까. 포션병이 부딪히는 소리에 잠이 깬 황도가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에 자라난 겨우살이는 하루아침 만에 상당히 크기가 자라있었다. 이전만 해도 새싹 크기였는데 지금은 작은 묘목 정도다.
하지만 그럼에도 황도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잠자리에서 기어와 내 품에 안겼다.
“아침에 일어나니 동상이 있네~ 헤헤.”
부비적부비적. 황도는 볼을 비비다가 졸린 듯 하품을 했다.
생명력을 빼앗긴 탓에 찾아오는 탈진, 그것이 겨우살이의 부작용임을 천도에게 들어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물으며 황도의 볼을 잡아당겼다.
“누님 졸려요?”
“조금 졸린 것 같아 히히… 동상 보고 싶은데.”
“푹 자요. 제가 빨리 끝낼 테니까.”
황도는 미적지근하게 웃었다. 그녀는 아직 졸린 기운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나를 다독였다.
“……동상.”
“네?”
“힘들면 그냥 포기해도 괜찮아. 동상이 힘들면 누나도 슬퍼.”
그러면 황도가 죽는다.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참 웃기는 사람이다.
하긴 이렇게까지 걱정과 위로를 해주는데 누가 이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표정을 가리기 위해 가면을 쓴다. 졸던 황도의 머리카락이 점차 새하얗게 물들어간다.
“……제자.”
“예.”
“내 몸에서 떨어져라.”
흔쾌히 밀어주었다. 백도는 졸린 듯 미간을 짚으며 이맛살을 찌푸렸고, 곧 나를 눈으로 흘기며 당당하게 말해왔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그것도 너를 위해서 죽으라니 절대 그러고 싶지 않구나.”
참으로 백도스러운 답변이다. 너무 그녀다웠던지라 나도 모르게 실소가 튀어나올 뻔했다.
“그러니 성공해라.”
죽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잔뜩 담겨 있는 진지한 목소리에 나는 몇 번이고 고개를 주억였다. 그 모습에 백도는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 검지 하나를 들어 올리고 농담을 던졌다.
“꿀물이 마시고 싶다. 꿀물을 다오.”
“참 재미없는 농담만 골라서 하십니다. 찐따들이 이해 못하는 농담 던지고 막 그런다던데.”
“뭐, 뭣? 이 놈이 정말…!”
“그래도 고맙습니다. 졸린데 주무세요.”
고마웠던 것은 사실이었기에 나는 푹 백도를 끌어안았다.
황도가 알려준 몸의 성질, 내가 꼭 껴안아 주면 잠이 솔솔 잘 온다고 한다.
“…어휴 진짜.”
쓴소리를 뱉은 백도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천도는… 어제 무리를 해서 그런지 잠을 자고 있나.
주변에서 베개를 가져와 잠을 자는 복숭아 자매들의 머리 아래에 끼워둔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스읍-”
이제 다시 시련을 공략할 때이다.
“하아….”
폐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숨은 각오의 날숨인지 아니면 슬픈 한탄인지. 잘 감은 잡히지 않았지만 나아갈 용기만큼은 확보했다.
싸워 이긴다. 지금 가진 모든 것을 전부 불태워서 시련을 이겨내야만 했다.
-웅웅!
나는 게이트에 손을 올려놓았다.
*****
연장을 챙겨 들고 도달한 게이트의 바깥에는, 바위에 앉은 한 엔트만이 처절하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새하얀 수목의 기사.
온 몸에 멍이 가득한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내려 무감정한 두 눈에 나를 담았다.
전신에 돋아난 잔가시에, 부수어져 있음에도 완벽하게 흉부를 감싼 백색의 갑주.
깊게 뚫린 눈자위는 검게 물들어 주위의 빛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S급 헌터 세렌]
그 가슴에 자수로 새겨진 그녀의 이름. 언젠가 시련을 클리어하지 못한 헌터의 이름을 떠올린다.
나는 여전히 미동도 없는 엔트를 보며 서서히 양손에 마력을 담았다.
그녀의 입에서 말이 튀어나온 것은 그때였다.
“……이곳은 왕의 터전이다.”
여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남자의 목소리가 여성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언젠가 한 번은 들었던 목소리. 내 귀에 울려대는 목소리에 사뿐히 미간을 좁혔다.
그것은 첫째 날에 나를 겁박하던 괴이한 목소리와 매우 흡사했다.
“하찮은 고목의 뿌리들은 이곳을 시련의 터로 알고 있지. 그러나 다르다-”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놈의 말을 단숨에 끊어버리고 나는 의문을 꺼내 놓았다.
“너는 누구냐?”
내 말에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다가, 이내 판단을 마친 듯 천천히 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왕의 신하.”
“언젠가, 썩은 고목을 몰아낼 왕을 기다리고 있다.”
알 수 없는 내용이었으나 굳이 더 묻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놈은 내 얼굴을 한 번 눈으로 쓱 훑더니 속내를 읽은 듯 입꼬리를 내렸다.
“다시 경고하마. 이곳을 떠나라. 이곳에서는 세계수의 힘이 통하지 않는다.”
세계수의 힘. 녀석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아마 내가 이세계에 오면서 상태창으로 얻어낸 힘이리라.
그제야 나는 대충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왕의 신하, 신인 세계수에 대항하는 왕. 그렇다면 이 던전은 그 왕에 의해 지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헌데 그러면 어째서 이 던전은 시련의 장소라고 여김을 받고 있는가.
만약 시련의 장소라는 감투를 쓰고 욍의 터전임을 감춘 거라면, 어째서 나는 지금 왕의 터전에 도달해 있는가.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놈은 경고하듯 목소리를 살벌하게 내리깔았다.
“그 이상은 생각하지 마라. 왕의 혜은을 받은 네놈이기에 살려두는 것임을 명심하도록.”
“왕의 혜은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제약은 풀 수 있나?”
“불가하다.”
그럼 뭐 싸워야지.
나는 주머니에 감춰두고 있던 마법 도구를 꺼내 놈의 머리에 쏘았다.
-타앙!
쭉 뻗어나간 불꽃의 탄알이 그 머리에 내다 꽂힌다.
-퍼엉. 그러나 호기롭게 쏘아 올린 탄환은 놈의 신체에 아무런 충격도 가하지 못했다.
그 위협에 내 의도를 알아챈 눈앞의 엔트는 분노에 몸을 떨며 거친 기계음을 연발했다.
[ 분명 경고를 하였을진데. ]
[ 너는 고목의 뿌리에서 벗어나지 못할 천한 인간이로구나. ]
[ 왕의 혜은이 아깝도다. ]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평을 내리고 제멋대로 판단하는 녀석. 나는 고목의 뿌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놈의 말이 정말 신경에 거슬렸다.
마치 내가 세계수의 끝발이라는 양 여기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긱, 기기기긱.
움직이기 시작하는 엔트. 그 마력의 움직임에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다.
S급 헌터. 그녀의 몸에 기생하여 생겨난 전투형 엔트. 그 힘은 결코 무시할 게 못 되었다.
새하얀 기사의 잘린 창대의 끝이 나를 향해왔다.
-스으으.
온몸을 짓누르는 압력. 실력자를 눈앞에 두엇을 때의 압박감.
전신의 신경이 도망치라고 소리친다.
붉게 타오르는 핏줄이 몸에 쭉쭉 뻗어 나가고,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각오를 다졌다.
‘목각권법… 아니.’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무술은 지금 필요치 않았다.
능력치나 기량, 상대에 비해 모든 게 부족한 지금 상황에서 내 기량을 앞세운다고 한들 어떻게 상대를 이기겠는가.
내 목적은 오직 승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떤 수를 쓰더라도 이겨야만 한다.
“기이이이익!”
거대한 창을 내세우며 엔트가 무서운 기세로 내게 돌진해왔다.
조금이라도 시선을 거두면 놓칠 것만 같은 속도. 나는 끼고 있는 반지를 한 번 두드렸다.
신체 강화. 온갖 버프가 담긴 최상의 아티펙트들.
그럼에도 부족한 것은 매한가지였기에 나는 한 가지 꾀를 짜내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던 모든 상점 포인트들.
그것을 활용하여 무기와 재능을 있는 대로 뽑아 무기는 아티펙트에 가둔 뒤, 공간 마법이 담긴 아티펙트로 이곳에 불러들인다.
-우우우웅!
공중 위에서 솟아난 검은색의 마검.
흑색의 줄기가 핏줄처럼 돋아난 그것을 쥐며 나는 따끔한 고통에 얼굴을 찌푸렸다.
-까앙!
엔트가 휘둘러온 창과 마검이 격돌한다. 짜릿한 통증이 팔에 얼얼하게 일었다.
부닥친 곳에서 철이 튀고, 그 날붙이에 볼이 베여 핏물이 흘렀다. 금방이라도 힘이 부쳐 밀릴 것 같았고, 실제로 오른팔에 감각이 무뎌졌다.
밀린다. 이대로 힘겨루기를 이어가면 분명 어느 한 곳은 부러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뼈가 부러지더라도 멈출 생각은 없었다.
-우웅!
곧바로 공중에 나타난 새하얀 검신의 단검을 역수로 쥐어 놈의 어깨를 내려찍었다.
-콰직!
“키이이익!”
기이한 소리를 지르는 괴물.
놈이 두 손을 뻗는다.
-쨍그랑!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지 단숨에 마검과 단검이 박살이 났다. 깨진 칼날이 공중에서 비처럼 쏟아진다.
[ 세계수의 힘은 통하지 않는다. ]
“키이이익!”
다시 덤비는 놈. 나는 공중에서 다시 한번 무기를 꺼내 들었다.
불이 붙은 칼날 채찍.
검으로 일합을 나누고서야 깨달았다.
확실히… 한 분야만을 따지라면 분명 나는 저놈을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충분히 많은 무기가 있고.
난해한 무기를 적재적소로 쓸 수 있을 정도의 광폭한 재능이 있다면 아직 약해빠진 나라도 상대할 수 있다.
운과 잠재력을 극한까지 활용한다.
각종 페널티가 붙은 아티펙트에 내 눈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콰지지직!
나무줄기가 채찍의 칼날에 갈려 들어간다. 아랑곳하지 않고 발을 내딛는 놈의 다리에 다시 한번 아까의 파공음이 일며 채찍이 박살이 났다.
이번에 뽑아 드는 것은 두 번째 마검.
“카하하아악!”
이번에는 창을 받아내며 아예 검 손잡이를 놔버렸다. 충분히 비틀어낸 창의 궤도는 나를 맞추지 않고 허공을 꿰뚫었다.
그대로 품 안에 파고들어 손을 뻗는다.
마공학 폭탄.
-콰아아앙!
그것을 심어둔 채 놈의 가슴을 발로 뻥 차 거리를 벌렸다.
지근거리에서 폭발이 인다. 얼굴을 가린 나는 바람을 타고 뒤로 밀려났다.
폭탄 파편이 내 온몸 사이사이 갑옷과 옷을 뚫고 근육에 박혔다.
-후우웅!
“기이이익”
그럼에도 놈은 아직 죽지 않았다.
끊어진 힘줄을 포션과 권능으로 복구해가며 나는 천천히 놈의 갑피를 깎아내렸다.
여섯 번째 무기.
“키이이익!”
-쿵!
아홉 번째 무기.
부러진 검과 무기의 잔해가 바닥을 뒹굴고, 내가 흘린 피는 흙 바닥에 새빨간 무늬를 만들었다.
덫과 쇠뇌, 궁과 극(戟).
하지만 상황은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다.
순탄하게 주도권을 쥐어 충분한 공격을 가했음에도, 결국 모든 무기가 전부 파괴되었다.
내장과 피부가 짓이겨진 몸은 이미 찢어진 걸레만도 못한 상태.
전투를 시작한 지 한 시간이나 되었을까.
아티펙트의 부작용인지 눈앞이 살살 흐려지기 시작했다.
“키이익”
아직 여유가 있어 보이는 엔트. S급 헌터의 강함이 새삼 실감이 났다.
그 누구도 승산을 장담할 수 없는 지금.
당연하게도 아직 일개 생도에 불과한 내 몸은 이미 한계에 달해 있었다.
‘아.’
다리가 후들 거리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주먹을 쥐지 못하는 손바닥을 본 나는 애써 정신을 차리기 위해 발로 땅을 딛고 피를 뱉었다.
“…아악!”
이제는 악 지르는 것에 가까운 기합을 내지르며 두 손에 마력을 모은다.
-쿠구구구!
땅이 진동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마 놈이 오고 있는 소리이리라.
이번 한 번만,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막아야 한다.
아귀 힘이 없는 손을 들어 올리며 나는 흐린 눈을 올렸다.
그렇게까지 안간힘을 쓰다 보니 체력이 한계에 다한 걸까,
탈력감에 의식이 잠시 툭 끊어졌다.
‘아.’
탈진한 몸이 넘어간다. 무수한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찔하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귀가 먹먹해지는 틈 사이로 나는 수십 번을 되뇌었다.
움직여라.
다가오기 시작하는 놈의 모습에 마음만이 급해져 갔다.
아주 잠깐이면 충분하다. 몸이 움직이기라도 하면…….
-틱.
그때 닫히지 않았던 턱에 아주 약간이나마 힘이 들어갔다.
‘아.’
짧은 탄식조차 내뱉을 수 없던 그 시간의 간극.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혀를 씹었다.
-콰직!
혀를 씹는 소리가 강하게 뇌를 울렸다.
정신을 깨우는 고통과 함께 느리게 흐르던 시간이 가속하고, 나는 단숨에 눈을 움직여 세계수의 힘을 조작했다.
-우웅!
공중 위로 나타난 생수 한 병.
그것이 무력하게 창에 꿰뚫린다.
더 빠르게, 놈의 검은 눈동자에 귀기서린 내 눈이 비쳐 보인다.
부러질 듯 고개를 한계까지 꺾어 아슬아슬하게 창을 피했다.
-퍼억!
허공에 있던 생수의 플라스틱이 갈라지고 그 안에 있던 물이 쏟아진다.
입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핏물을 전혀 신경 쓰지도 않은 채, 다시 한번 세계수의 힘을 사용한다.
-우우우웅!
공중에서 튀어나온 단검 한 자루.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단검이었으나, 그것이면 충분했다.
단검을 쥔 손아귀에 힘을 꽉 준다. 선명하게 돋아난 핏줄이 거듭 꼬아진 것처럼 아파 왔다.
일렁이는 한 줌의 검은 마력. 그 단검으로 눈앞에 보이는 놈의 뒷목을 찌른다.
단 한 방이었다.
-콰직!
튀기는 갑피. 떨어지는 잔가지와 저무는 겨우살이의 꽃.
무릎을 꿇은 백색의 기사는 속이 텅 빈 모습이 되었다.
“카학, 콜록.”
-댕그렁!
승리를 확신하자마자 단검을 떨어뜨린다. 나는 비틀거리다가 주변 바닥에 넘어졌다. 아직까지도 입에서 피가 물처럼 새었다.
……이겼다.
앞도 안 보이고 소리도 안 들리지만 처음으로 제대로 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무릎 위로 두 팔을 모은 나는 그대로 팔에 고개를 묻었다. 치유의 권능을 사용하여 부상을 치료했다.
-쿠구구구!
회복된 청각으로 들은 등 뒤의 성문 열리는 소리.
그래… 아직 끝이 아니었다.
왕의 신하. 그 지랄 맞은 새끼를 만나야만 했다.
이 던전을 클리어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