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 가면남 (6)
눈앞을 맴도는 적색의 연필 한 자루가 떠올랐다.
주유소의 기름을 뽑아내듯 소모되어가는 마력.
공기와 빛이 수축하며 시야가 어그러진다.
-우웅!
텔레포트(teleport).
사라진 연필은 등 뒤, 침대 위에 나타나 떨어졌다.
“후우….”
참았던 숨을 뱉고 비처럼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그러며 등 뒤에 서 있는 황도를 바라봤다.
“성공이죠?”
“꺄아악! 동상 최고!”
황도가 오버하며 내게 달라붙었다. 볼과 볼이 맞닿으며 부드러운 감촉이 밀려왔다.
“아니 그냥 연필 하나 옮긴 걸로 왜 그래요?”
“그냥이 아니라 진짜 동상 재능 있다니까? 아 어떡해. 넘 신나! 이게 과외하는 기분이구나~!”
부비적부비적.
기분은 좋지만 스킨십이 너무 과하다.
황도의 어깨를 잡고 밀쳐내자 그마저도 좋다는 듯 싱글벙글 웃어왔다.
“이제 나머진 개선만 하면 되겠네요.”
좌표의 정확도를 조정하거나, 마력 소모량을 줄이거나. 연산 속도를 드높이거나.
거기까지 실력이 오른다면 시작지점과 도착지의 좌표를 안다고 가정했을 때 세상 어디든 마음대로 이동하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황도처럼 어디 제 집 드나들 듯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황도의 마력량은 이레귤러다.
‘애초에 공간마법을 점멸로 쓴다는 게 말이 안 되지.’
그 정도로 마력이 남아돌려면 태생부터가 남달라야 했다.
숨만 쉬어도 마력이 오른다던가.
마력을 석유로 비유하자면, 신체에 유전이라도 박아놓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게 가능한 게… 이 복숭아들이고.’
배우면 배울수록, 아는게 많아질수록 뼈가 사무치게 깨우치는 것은 내가 아직 새발의 피라는 점이었다.
당장 상태창을 깨부수고 마력 회로를 망가뜨릴 작정을 하더라도, 이 사람들의 발끝에라도 미치는 게 가능할까.
그리고 나를 노리는 게 천도조차 막는 게 벅찬 인물이라면…….
언제가 돼서야 이 개같은 형편에서 벗어나겠는가.
“동상?”
내 눈빛을 본 황도가 걱정스런 듯이 어깨를 두드렸다.
“무슨 고민 있어?”
“아뇨. 정리합시다. 이제 누님 없이도 시바를 유치원에 데려다줄 수 있겠네요.”
“응, 동상 재능이면 얼마 안 가 금방 나 따라잡겠어!”
“크크크, 딱 기다려요. 금방 이길테니까.”
시계를 보니 어느덧 새벽 한 시. 나는 눈짓했고 황도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제 몸을 바꾸었다.
다홍색의 머리칼이 바람이라도 뒤집어쓴 듯 흩날렸다.
“오늘 마법은 좀 빨리 끝났군.”
제 품보다 훨씬 큰 겉옷을 둘러 입은 천도가 몸을 풀며 말을 걸어왔다.
“네 뭐…. 재능있다고 하니까요.”
“재능이야 흘러넘치지. 그만큼 노력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천도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눈앞의 공간이 순식간에 훈련실로 바뀌었다.
그 압도적인 기술의 광경에 얼이 나가 피식 웃었다.
“근데 잘 모르겠네요.”
“무얼 말이느냐?”
“아… 그게.”
노력을 부정하는 재능을 손 쉽게 손에 넣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재능에 걸맞은 자리에 오르려면 그보다 더한 노력을 해야 했다.
거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릴는지.
최근 들어 그런 생각이 자주 들었다.
“앞이 막막하느냐?”
“그렇다면… 그렇죠?”
천도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역시 너무 바보같은 고민인가. 하며 씁쓸하게 입을 오므릴 즈음.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옷을 한번 벗어 봐라.”
……옷?
나는 양손을 가슴께에 가져다대며 의미심장한 눈으로 천도를 바라봤다.
“스승님 설마 황도한 테 옮은 거 아니죠…? 막 뭐 이상한 짓 한다거나….”
“무슨 소리를 하느냐? 벗으라면 벗어라.”
나는 반쯤 사색이 되어선 천천히 상의를 벗어 던졌다. 천도의 얼굴이 징그러운 놈을 보는 듯한 눈으로 변했다.
“그래서 왜 벗으라는 겁니까?”
“이걸 봐라.”
천도는 훈련실 구석에 걸린 거울을 빼내 내밀어왔다.
“잘 하고 있다는 증거는 몸에 새겨지는 법이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내 몸을 바라봤다.
최근 하는 강도 높은 훈련 때문인지 몸에는 알 수 없는 흉터들로 가득했다.
화상과 자상, 사이비나 엔트 등을 상대했을 때 새겨진 마력 회로 폭주의 흔적.
핏줄처럼 돋아난 마력 폭주의 흔적은 징그럽기 짝이 없었다.
‘언제 이렇게 많이 다쳤지?’
놀라운 일이었다.
연옥에서 있었던 일 이후 통증을 무시하는 버릇이 생겼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는데, 벌써 이렇게 되었나.
“너는 다른 사람보다 재생력이나 치유력이 타고난 편이다.”
세계수의 권능을 받은 덕분이다. 권능도 요긴하게 잘 쓰고 있다.
“그럼에도 그 꼴이 났지.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겠느냐?”
“네 뭐, 저는 뭐 충분히 노력하고 있다 이런 거 아닙니까?”
천도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 더 노력하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나대라, 마음껏 하고 싶은 걸 해라. 나대는 것 좋아하지 않느냐?”
하긴 그런가.
다시 생각해보니까 가볍게 넘기면 될 일이긴 해.
요즘 너무 바쁘게 살아서 현타가 온 거 같기도 하다.
나는 볼을 긁으며 넉살 좋게 웃었다.
“우리 스승님 실망시키면 안되죠.”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자세를 잡았다.
천도는 속을 알 수 없는 눈길로 나를 보다가, 곧 나뭇잎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검을 빼어들었다.
시험까지 3일남은 새벽이었다.
*****
거대한 공기압이 상대를 짓무른다.
“윽, 으극.”
이를 악문 생도는 전신을 두드리는 압력을 버티려 들다가, 곧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다급히 소리쳤다.
“져, 졌습니다!”
“시합 감사합니다.”
“네, 네.”
가면을 고쳐 쓰고 무대를 내려오자 주변에서 탄성이 울려 퍼졌다.
-쟤 몇 승째냐?
-시험 며칠 안 남았는데 무슨…….
몰려오는 시선과, 거기서 느껴지는 질투.
몇몇은 토너먼트를 앞두고 자신의 수를 내보인다며 비웃고 있었지만, 그것은 단단한 착각이었다.
‘카드가 몇 장 없는 건 니들이나 그런 거고.’
마법. 검. 주먹.
당장 내가 쓸 수 있는 공격 수단만 해도 가짓수가 셋이 넘는다.
나는 가면 안에서 쓱 생도들을 둘러 보았다. 몇몇 생도들이 내게서 시선을 떼었다.
-미친 재능충새끼.
이제 나도 그런 말을 들을 때가 왔나.
맞는 말이라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재능이 없었으면 진작 죽었을 몸이니까.
그래도 질투가 아니꼽긴 하다.
한 번 더 눈을 굴리니, 익숙한 얼굴의 누구와 눈이 맞았다.
‘임종현.’
언제나 정시우를 보며 호승심을 불태우던 귀족 남자.
그 정열어린 눈이, 어째선지 이번에는 나를 향하고 있었다.
‘쟤 왜 저러냐?’
짚이는 게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저번 술자리에서 정시우가 나와 임종현을 동일 선상에 올려두면서부터 시선이 바뀐 것은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으니까.
내가 미친놈마냥 오픈 대련을 하고 다니니 이제야 관심을 가지는 걸까.
뭐…. 내 알 바는 아니었다.
“고생했어요.”
계단식 좌석에 돌아와 앉으니 옆에 있던 진달래가 사근사근하게 말해왔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나는 등 받침대를 침대 삼아 눈을 감았다. 졸음이 솔솔 몰려왔다.
“또 밤샜어요?”
“응.”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 그러다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요?”
“쓰러지면 스승님이 포션 넣어주더라.”
진달래는 벙 찐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진짜 죽어가다가도 포션 몇 개 먹으니 강제로 눈이 떠지더라.
“무슨 고문…받는 건 아니죠?”
비슷하긴 해.
들어보니 거진 1년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했다.
얼마 안 지나 자기가 없으면, 나 혼자서라도 훈련을 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해오는데 내가 뭐라 하겠는가. 아이고 네 스승님 하면서 운명을 받아들여야지.
“몸이 뚝딱 만들어지는 것도 아닌데 별 수 있냐.”
“스승님이 많이 엄격하신가 봐요.”
진달래는 짧게 탄식을 짓더니 곧 자기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내 내밀었다.
“이거 드세요.”
자그마한 비닐 포장지에 쌓여진 사탕 하나. 침침한 눈으로 잘 살펴 보니 웬 꽃이 하나 그려져 있었다.
진달래꽃.
“다음, 진달래!”
“아 제 차례다. 다녀올게요.”
완드 하나를 챙긴 진달래가 시합장으로 달려나갔다.
나는 사탕을 까서 입에 넣어 굴렸다.
요즘은 사탕도 다 나무맛이다.
이러다 무슨 옹이 맛이라도 나오는 거 아닌가 했지만,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해버린 내가 미워졌다.
-툭, 툭.
잠시 잠에 빠져 있으니,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눈을 들어 올리자 진달래가 없는 틈에 다가온 산수유와 눈이 맞았다.
“앗.”
강아지처럼 신나게 좌석을 타고 기어오다 몸이 팍 굳은 산수유.
눈치게임이라도 걸린 것마냥 딱딱하게 몸이 굳어버렸다.
“뭐하냐 너.”
“실장검법… 기어가기?”
아직도 그런 말을 쓰고 있다는 현실에 몸이 깜짝 놀랐다.
“…제발 농담 같은 농담을 해라. 아직도 이상한 사이트 해?”
“응?”
당연히 아니라고 생각하며 한 말이었다.
하지만 산수유는 오히려 자신이 자랑스럽다는 듯 웅크린 자세에서 상체를 들어 올린 후, 가슴을 피며 말해왔다.
커다란 가슴이 넥타이와 함께 한 번 출렁였다.
“나 이번에 관리자 됐어.”
오 시발 주여.
각종 혐오를 일으키는 사진들이 아찔하게 내 눈앞을 지나쳤다.
어지간하면 취향을 존중하고 싶지만, 이 세계는 좀 미친 세계가 아니었다.
평범한 사진도 아니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역겨운 사진이 돌아다닌다는 말이다.
---
제목 : 짤녀 꼴리면 자러감
글쓴이 : 수목원MVP
(오래된 고목의 옹이 사진)
잘 자~
-자연성애범 ㄷㄷ
-시발 이젠 대놓고 지랄이네, 하다못해 유목을 데려 오던지
└ ?
└ 신고 좀
└ ?
└ 페도새끼 개 역겹네
-미친 새끼.. 개또라이 새끼.
└ ㄹㅇ 옹이보단 예수님 대못구멍에..
└ 차라리 물봉 딸딸을 해라.
└ 바닥딸은 어떰?
└ 나무박이나 물봉이나 예수나 정상인 애들이 없어 ㅅㅂ 진짜 다 따먹을 기세네.
---
처음 사이트를 들어갔을 때 본 인기글에 대한 내 평가는 다음과 같았다.
‘……아포칼립스.’
그곳은 사람이 살아서는 안 되는 광기의 공간이다.
산수유는 사태의 심각성을 아직도 모르는 듯, 고개를 갸웃였다. 속 터지겠다.
“그런 곳을 아직도 하고 있다고?”
“다 착해.”
“착하다고? 어딘데 대체.”
“검술갤러리.”
……검술갤러리 기억해두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순진하고 아무것도 모르던 산수유가 때를 타는 건 두고 볼 수 없었다.
속으로 헛숨을 삼키니, 산수유는 자기는 아무런 문제도 저지른 적 없다는 얼굴로 물어왔다.
“시원.”
“시헌.”
피- 산수유가 혀를 내밀었다.
“……시헌.”
“앞으로 그 사이트 하지마.”
“하지만 심심한데.”
“다른 거 많잖아. 만화던 영화던, 미튜브 검술 영상이던, 근데 왜 하필 거긴데?”
“스승님이 있어. 그리고 친구들도.”
친구가 거긴 또 왜 있는데.
어이가 없어 그녀를 보니 산수유는 핸드폰을 꺼내 댓글 하나를 보여주었다.
-[관리자]우리 이런 말 쓰지마요.
-우리? 우리가 누구?
-[관리자]....친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납븐말 하지 마ㅡㅡ
“누가 봐도 비웃는 거잖아.”
“비웃어… 누가?”
아무래도 산수유는 대표 놀림감이 되어가는 분위기인 듯해 보였다.
마음에 상처 하나 없어 보이는 점이 산수유답긴 하다만…….
그래도 인터넷을 끊게 하는 건 필요할 성 싶었다.
“그래도 하지 마.”
“…시언이 이젠 훈련도 같이 안 해주는 걸.”
내가 단언하자 산수유는 입을 비쭉였다. 자기가 이렇게 된 것이 내 탓이라고 하는 느낌이었다.
현실이 심심해서 인터넷으로 가겠다 뭐 이런 건가.
애초에 친구라 부를 사람이 나 하나 밖에 없는게 문제였다.
“다른 친구들도 좀 사귀어 봐.”
“누구? 아 맞아. 시헌… 비서가 너 데려오래.”
“나? 갑자기 나는 왜.”
산수유는 자연스럽게 주제를 돌리더니, 곧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며 고민하다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말해왔다.
“친목도모를 하려고?”
“……비서가 나랑 친목을 도모하고 싶다고?”
갑자기 그게 뭔 소리인지.
뜬 구름 잡는 소리에 나는 멍을 때렸다.
무언가 큰 오해가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