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 1위 VS 152위 (3)
곁가지에 달라붙은 한 송이 꽃의 삶이란.
일 년을 거슬러 한 번 피어나.
지지 않고 오랜 시간 향기라는 자취를 흩뿌리는 것이다.
-스스스스.
“……말도 안 돼.”
넋을 잃은 한 사람이 그리 중얼거렸다.
경기장의 중앙. 그 일점에서.
남자가 피워낸 검은 복사꽃이 서로 뒤엉켜 하나의 물결을 이루어내고 있었다.
“저 사람 누구야…?”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앞선 꽃잎들이, 차례로 피어난 꽃들에 밀려나 일으킨 파도가.
코끝을 아릿하게 뒤흔드는 잔향의 착각이.
관중석에 앉아있던 모든 이들의 의식을 헤집어 놓았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에 저런 생도가 있었나?”
“저게 무슨….”
저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이 자리에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이시헌을 알고 있는 사람들조차 그가 가진 힘 전부를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느 누가 생각했겠는가?
152위의 생도가 다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정시우라는 괴물을 상대로 이 정도의 압박감을 선사할 수 있으리라고.
하지만 기어코 그는 해내 보였다.
입학과 시험 그 사이의 짧은 시간 동안.
그가 피워낸 꽃잎은 평소 그가 말하지 않는 감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검은 마력의 의미는 저항과 지배.
억눌린 삶을 살아오던 그가 가진 마력의 성격.
언제나 경박하게 웃던 남자가 얼굴에 웃음을 지우고, 망울을 터뜨려 개화를 시작했을 때.
비로소 그것은 진가를 발했다.
대기만성(大器晩成).
될성부른 떡잎은 서서히 자라나는 법이라.
이시헌이 피워낸 검은색 꽃잎은 과거와 죽음을 오가며 피워낸 노력의 산물이요, 현실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곳에 이름 모를 한 그루의 수목이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치 한 마리의 용같이.
흑칠된 꽃잎을, 제 비늘처럼 뒤척이면서.
……그 광경을 모두가 숨죽여 보고 있었다.
*****
달아오른 몸이 쿡쿡 쑤신다.
나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마력은 마치 하늘에 마구잡이로 뿌려 놓은 검은색 페인트 같다.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넓고 강인하다.
“…….”
오른팔의 농수를 벗어 집어던진다. 이윽고 등 뒤에서 고철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을 펴본다. 주먹을 꽉 쥐었다.
용솟음치는 마력이 손의 움직임에 따라 일렁였다. 마력은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이나 다름없었다.
힘이 흘러 넘친다.
나는 천천히 주먹을 앞으로 내밀고, 다른 한 손을 등 뒤로 넘기며, 한쪽 다리를 강단 있게 뻗었다.
‘와라.’
그 어둠 안에서 나는 앞을 응시했다.
그러며 상대를 가늠했다.
아직 죽지 않은 새하얀 광명이 나를 집어삼키기 직전까지.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꽃잎이 갈라진다.
뻗어온 일섬이 홍해를 가르듯 그대로 내 신체의 일부를 잘라버릴 듯이 솟구쳐 왔다.
단 한 번도 볼 일이 없었던 정시우의 전력.
지금껏 손속을 봐왔던 시우의 능력을 전신으로 받아낸다.
-콰지지직!
온몸이 한 번 휘청인다.
확 꺾인 고개에 상반신 근육이 틀어지고, 몸이 한 차례 밀려난다.
꽃잎과 마력으로 난잡했던 시합장이 단숨에 말끔해진다.
“아.”
탄성. 꺾인 고개를 돌려놓으며 나는 가면을 고쳐 썼다.
경기장의 분위기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얼핏, 시우의 일격이 내 모든 마력을 집어삼키고 내 역린을 찌른 듯해 보이나. 그렇지는 않았다.
가면 너머로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다. 남은 마력과 내 상태 또한 확인해보았다.
“…….”
“…….”
서로 웃음을 잃고 있었다.
-파악!
각자를 향해 달려간다. 흑과 백이 뒤섞이며 몇 번의 폭음이 울렸다.
-쾅!
검에 한 번,
-쾅!
주먹에 한 번.
심판이 말릴 새도 없이 한계에 다다른 속도로 상대를 압박했다.
일직선으로 내려온 검이 내 어깨를 후려친다. 무시하고 달려가 그 흉부에 주먹을 때려 박았다.
-빠지직!
놈의 뼈가 부러지고. 내 쇄골이 짓눌린다.
일격 일격에 살의마저 담긴 이 시합은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였다.
놀람에서, 싸늘함으로 바뀌었던 관객의 표정은 경악으로 물들었고.
우리는 그런 분위기의 변화도 확인할 새 없이 각자의 움직임만을 읽어내렸다.
정시우가 나를 향해 달려온다.
‘오른쪽.’
아니 왼쪽.
반대편으로 발을 뻗는다.
비틀린 검격이 아슬하게 목을 스쳤다.
마력의 파동이 전투복을 찢어발겨 그 속살을 베어내어 핏물을 튀겼다.
‘아래.’
상대의 복부를 후려친다.
근육을 파고들어 내장이 뒤틀리는 감촉이 짜릿하게 중지와 검지 사이를 타고 느껴졌다.
각자 타격을 허락한 부위는 시뻘겋게 물들어 살이 터져 있었고.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이 보지 못할 속도로 움직여 서로 공격을 교환했다.
고통에 한 번쯤 눈가를 비틀릴 법도 하건만.
우리는 어느 한순간도 격통에 냉정함을 잃지는 않았다.
나나 녀석이나 이미 이보다 더한 사경을 넘어온지 오래였다.
나는 사이비에 얽혀 전신에 검을 쑤셔박혔고.
언제는 전기톱으로 힘줄과 목 근육이 잘려나간 적도 있었다.
과거라는 굴레에 갇혀 고문과도 같은 시련을 견뎌낸 적도 있었다.
살을 저며내는 고통에 몸이 마비되는 감각은 익숙했다.
익숙함을 넘어 이제는 무감각해졌다.
아마 죽을 때조차 나는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겠지.
‘너도 그렇지.’
이 녀석도 그러했을 것이다.
고작 스물. 사회에 겨우 새싹을 틔운 녀석이다. 그런 놈이 제 동생 한 명 구하겠다고 온갖 육갑을 떨어댄 것이다.
그런 녀석이 신을 거스르는 것을 두려워 하겠는가.
그런 무모한 놈이 자기 몸을 불태우지 않을쏘냐.
“스읍-”
짧은 들숨 한 번, 새하얀 실선을 만들어내며 다가온 정시우의 쾌검이 내 어깨를 후려갈겼다.
-콰직!
부러진 목검이 하늘 위로 튀어 오른다.
“…후.”
이윽고 내뱉은 날숨. 주먹을 뒤로 빼 눈앞의 명치를 관통할 듯 찍어버린다. 정시우의 신체가 휘청이며 뒤로 넘어간다.
“흡, 큭!”
날아가듯 벽에 내다꽂힌 정시우.
거칠게 숨을 몰아쉰 나는 그 자리에서 비틀거렸다.
경지에 달한 검은 신체 너머 깊숙한 마력 회로까지 침범해 찢어발겨놓은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시합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절름대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으극…”
고통이 밀려 올라온다.
겨우 걸쳐진 가면이 떨어진다. 얼굴을 드러내며 시원한 바람이 피부 표면으로 느껴졌다.
얼굴에 물기가 느껴지는 건 왜일까.
……아 그래. 머리를 한 대 얻어맞았었다.
손을 올려 뜨거운 눈가를 한 번 훔쳤다. 새빨간 핏물이 흠뻑 묻어나왔다.
-후욱, 후욱.
숨소리가 마치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
어느새 일어난 정시우는 내 얼굴을 보더니 기어코 비틀대며 일어나 부러진 검을 다시 쥐어 보였다.
녀석의 잘생긴 얼굴이 피투성이다.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아마 나도 그렇겠지.
그럼에도 시합은 끝나지 않았다. 그걸 증명하듯, 정시우의 검신에 마력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웅웅!
새하얀 마력이 부러진 검 끝을 타고 이어진다.
나 역시 남은 마력을 꺼내 전신에 둘렀다.
흑색의 뱀이 몸을 기어오르는가 싶더니 곧 낙영(落英)이 되어 서서히 바닥에 가라앉았다.
먹먹힌 고막 안으로, 정시우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늘려왔다.
“……흑영(黑影)”
번쩍-
백색의 마력이 순식간에 검게 돌변한다.
바닥 아래로 내 발목이 가라앉는다. 경기장의 바닥 타일 전체가 마치 블랙홀처럼 검게 물들어 있었다.
늪에 빠진 것처럼 하체를 옥죄는 감각.
서슬퍼런 정시우의 눈에서 스멀스멀 안광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진(鎭).”
대기가 떨리고 있다.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오나 음색의 진동마저 희미해졌다.
이곳을 자욱히 감싼 마력이 제 빛을 내며 죽일 듯이 나를 억누르고 있었다.
나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곤 늪 속으로 발을 내밀었다.
어둠 속에 다른 어둠을 겹겹이 쌓아 발을 묶은 그림자를 잘라버렸다.
순식간에 벗어버린 포박. 정시우는 여전히 검을 쥔 채 내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영혼절도.”
그 손이, 위아래로 한 차례 움직였다.
맞으면 죽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날이 서있는 한 방의 일격.
오의라고 불리는 그것이 눈앞에 펼쳐진다.
-번쩍!
하늘과 땅을 가르는 수십 갈래로 나누어진 섬광.
세상이 갈라진 것이 아닐까 착각을 일으킨다.
마력이 난잡하게 휘몰아친다. 나는 혀를 질끈 깨물었다.
지독한 혈향이 비강 안을 가득 메우니 곧 정신이 들었다.
‘이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입술을 떼니, 핏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심판이던 이사장이던 와서 끝내주겠지.’
상대의 기량을 지나치게 넘어서는 기술은 사용 금지. 처음에 나와 정시우가 공격을 나누었을 때 시합이 일시적으로 정지된 이유이다.
생도의 죽음은 가벼운 일이 아니니 아마 벌써 행동을 시작했을지도 몰랐다.
……뭐 이미 생도 간의 경기치곤 선을 넘은 지 오래였지만.
-꽈악.
나는 오른 주먹을 무겁게 쥐었다.
‘그래도.’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지.
팔꿈치를 기점으로 회오리처럼 감긴 검은 꽃잎이 서서히 새하얗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어쩌다가 역전된 색깔. 나는 자세를 잡고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이를 꽉 깨물었다.
만개하라.
“백색 꽃이 피어오르는 것은-”
주먹 끝에 맺힌 복사꽃이 어둠이 침식한 공간을 젖혀 나간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다.
“……일(一)”
희지만 무르지 않은 선명한 화엽이 분분이 휘날린다.
“백도(白桃)”
뻗어온 검은 섬광을 이윽고 받아쳤다.
이어나간 권격이 검격과 맞물린다.
-콰가가가가가!
각자의 기술이 엎치락뒤치락 뒤엉켰다.
실 같은 마력이 사방에 튀고, 꽃잎은 무너졌으며, 바닥 타일이 깨져나갔다.
경기장 전체에 퍼진 섬광에 가동되지 않았던 방어막이 발동했다.
-지끈.
방어막에 금이 감과 동시에.
한 차례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
-스승님
S급 헌터를 위해 마련된 VIP석.
경기장의 가장 꼭대기에서, 전투의 광경을 바라보던 천도는 턱을 괸 채 자신의 제자를 비웃었다.
-만일, 만일에 말입니다. 그냥 흘러가는 소리라 들어주시고 대답해주시면 됩니다.
놀랍다 못해, 거의 처절하기까지 한 두 남자의 싸움.
정시우니 이시헌이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 자리에 앉아있는 모든 관객들은 이미 그들에게 압도당한 상태였으니.
-만약 1회전에서 지더라도, 그만한 힘을 보여줬다면 숲지기로 선발될 수도 있는 겁니까?
이시헌이 정시우와 대화를 하며 어떤 고민을 가졌는지 천도는 알지 못한다.
시우라는 아해가 세계수의 남편 후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고 관심은 없었으니까.
-이제 와 약한 소리냐? 너답지 않군.
-아뇨 약한 소리가 아니라… 그냥 묻는 말에 대답해 주십쇼.
가능하다.
그만한 파급력을 가질 시합을 보여준다면 뭔들 못하겠는가.
아무리 사파라도 정점을 찍으면 그 순간 그 존재는 위인이 된다.
한 명의 생도가 생도로서, 천부적으로 타고났다는 것을 증명만 한다면. 숲지기 선발전의 관리들은 그 생도를 주목할 것이었다.
-그렇습니까?
그런 걸 왜 갑자기 묻는지.
천도는 반 송장이 되어 서 있는 시헌을 보며 픽 웃었다.
눈빛은 죽지 않았고, 여력도 충분히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러느냐?
-아뇨…… 뭐.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이라고.
서 있는 이시헌의 신체가 서서히 뒤로 넘어간다.
-별 일은 아닙니다.
누가 봐도 탈진한 모습이었으나 천도에 눈에는 그것이 그렇게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천마인 그녀의 눈에는 이시헌보단 정시우의 신체가 엉망으로 보였다.
‘그건 중요치 않나.’
누가 누구의 심경을 자극했는지는 몰라도.
지금 자리에 서 있는건 수석인 정시우였으니.
‘백도를 정통으로 맞았으니 고생 좀 꽤나 하겠어.’
박살이 나버린 정시우의 마력 회로를 보며 천도는 혀를 찼다.
쓰러진 두 생도를 향해 의원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관객석이 뜨거워지며, VIP실이 진동할 정도로 소음이 커져나간다.
[천도, 시합 어떻게 된 거야?]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나.”
[근데 잘 모르겠어… 판정해야할 것 같은데.]
“보통은 먼저 넘어진 놈이 진 걸로 판정되겠지.”
[힝……. 우리 동상 엄청 노력했는데….]
황도의 울먹임에 천도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돌리고 손가락을 튕기자. 경기장에 버려져 있던 가면이 손가락 사이로 들어왔다.
-후.
바람을 한 번 불어 깨끗해진 가면을 허리춤에 넣은 천도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 제자를 맞이하러 가볼까.’
스승의 말을 어겼으니, 조금의 질책은 해도 상관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무슨 벌을 주어야 하나.’
그럼에도 그런 그가 밉지는 않았다.
오히려 꽉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