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 1위 VS 152위 (4)
폭발이 잦아든 경기장 안.
-삑! 삐이익!
다급한 호루라기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진다.
금이 가버린 방어막이 해제되고, 우르르 몰려간 의원이 생도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지금 당장 치료하면 큰 후유증은 남지 않을 것 같아. 그쪽은?”
“여기는 좀…아니 많이 심각한데요. 일단 치료 해봐야 알 것 같아요.”
상처 사이사이에 아낌없이 포션을 들이붓고 동공을 확인한다.
관중들은 의식을 잃은 두 사람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시합이 끝났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쿵쾅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는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관중들은 마치 자신이 본 광경을 의심이라도 하듯, 떨리는 손으로 셔츠의 목 부근을 어루만질 뿐이었다.
“……미친.”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탄사는 거짓을 고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 남자의 데뷔전을 지금 직접 두 눈으로 본 것이다.
승패의 판정 여부와는 무관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두 생도가 서로 자신을 불태워 제 기량을 뽐내었으니.
오직 그뿐이랴. 더 뭐가 있겠는가.
이 시합의 주인공은 정해져 있었다.
이시헌.
VIP석에 앉아있는 산수유는 멍하니 눈앞을 응시했다.
“시언….”
가슴을 쿡쿡 찌르는 감각. 응어리진, 왜인지 모르게 찾아가고 싶다.
트라우마로 점철되어 감정이 꽉 막혀버린 산수유는 조금 더 그에게 눈이 간다는 걸 의식할 뿐, 걱정이란 감정조차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산수유는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녀의 시야 끝에, 그녀의 아버지가 눈을 찌푸리고 있었다.
“산수유.”
“…아빠?”
“저 놈은 누구지?”
보통 산수유의 아버지인 산혁원은 그녀의 비서를 통해 뜻을 전하거나 이야기를 나눈다.
그녀가 사람의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하고 감정 표현이 서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남자가 이번에는 산수유에게 직접 말을 건네 보였다.
감정의 고조가 정리되지 않은 그 눈은, 흡사 뱀 같아서 보는 이를 하여금 떨게 만들었다.
“…….”
대답하지 않는 산수유. 여러 생각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교차했다.
단적으로 말해, 산혁원은 정시우를 노리고 있다.
세계수의 남편 후보이자 인재로서 훌륭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그를 예전부터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런 정시우가 한순간이나마 밀렸다.
그것도 20년 동안 이름 한 번 비춘 적이 없었던 남자에게서.
“이시헌입니다.”
보다 못한 지호가 산수유를 대신해 말했다.
산혁원은 미간을 딱 좁히며 슬쩍 등 뒤의 다른 비서에게 말했다.
“이시헌… 한 번 조사해 봐.”
“네.”
아마 모두가 그를 주목하고 있을 것이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누군가는 그의 숨통을 노릴지도 몰랐다.
*****
한 끗 차이였다.
그렇게 말하기엔 좀 뭐한가.
적어도 있는 힘껏 부딪힌 것만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기량으로는 내가 약간 부족하기도 했고.’
20년을 살아오며 닦아왔을 정시우의 실력을 고작 4개월 만에 여기까지 따라잡았다는 게 말이 안 되긴 했다.
뭐…갈고닦은 실력을 뽐내기엔 충분한 시합이었다. 스승님은 좀 화를 낼지 모르겠다.
백도는 보나 마나 엄청 낄낄대고 있을 거고. 내가 내기에 이겼다며 불타고 있을 게 안 봐도 눈에 훤했다.
남들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끝나고 보니 후련씁쓸했다.
‘질만 했어.’
져줄만 했어가 아니라.
질만 했다.
뼈와 마력 회로가 박살이 난 상태에서 이 악물고 악으로 깡으로 싸웠다.
보기에만 멀쩡하지 사실상 반 시체였던 정시우였다. 나도 그랬고.
모든 것을 쏟아부은 처절한 시합이었다.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멍하니 그 시합을 돌이켰다.
‘……그대로 싸웠으면 한 명 죽었다.’
정시우는 생명까지 불태울 기세였다.
말 그대로, 시합 한 번에 목숨을 걸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정시우를 기절로 그치게 할 정도로 내가 강하지 못했다.
서로 실력이 지나치게 동등했기 때문이다.
찢어진 마력 회로, 폐를 찌른 뼛조각. 우리는 중상이었고 정신력만으로 싸움을 지속하던 도중이었다.
아무리 이 세상이 의료가 발달하고 포션이 있다지만. 한 번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수는 없는 법이니.
정시우가 죽는다는 건 단순한 사고로 그칠 이야기가 아니었다.
최고급 대우를 받던 인재의 죽음은, 내 위신의 변화와 함께 끝내는 미래의 일을 예상할 수 없게 될 테니.
그것이 내가 주춤하게 된 첫 번째 이유이다.
-덜컥.
병실의 문이 열린다.
“오셨-”
이윽고 들어온 천도는 어딘가 싸늘한 얼굴로 협탁에 가면을 내려놓았다.
“-어요?”
-타각.
가면을 내려놓는 손이 왜인지 힘이 들어가 있었다.
“……스승님?”
대답이 없었다.
천도는 나를 내려다보며, 아주 조금의 감정도 섞이지 않은 무서운 눈길을 보냈다.
내장을 쥐어뜯는 듯한 공포. 공기가 차가워진다.
“잘못한 건 없나.”
“…….”
약속을 어겼다.
정말 극한의 극한까지 몰고 간 상황에서 쓰러졌음에도 천도는 내 의중을 정확히 꿰뚫었다.
“할 말이 있느냐.”
“죄송합니다.”
“네가 할 말은 그게 아니다 이시헌.”
천도는 더욱 가까이 거리를 좁혀 왔다.
언제나 향긋하게 풍겨오던 복사꽃의 향기가 이제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시헌.”
나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제 스승에게 공포를 느낀 건 처음이었다.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겠지?”
떨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나는 겨우 말라 비틀어진 입술을 떼었다.
“일부러 진 것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그것만이 아니다.”
천도는 나직히, 그리고 중압감 있는 목소리로 하나하나 읊기 시작했다.
“나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 독단으로 판단해 쓸데없는 일을 벌였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같잖은 감정으로 상대를 농락했다.”
“…그건.”
“말 끊지 마라. 그래, 이유가 있었겠지. 그렇게 잘난 척을 해놓고, 제 친구 위한다고 져서 돌아오면 내가 좋아할 것 같았나?”
천도는 한 번 쓴숨을 뱉더니,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는 내 제자다.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설령 거짓이라 한들. 네가 지는 걸, 스승의 눈으로 봐야 하느냐?”
할 말은 없었다.
굳이 뭐라 변명할 생각도 없었고. 받을만한 훈계라고 느꼈다.
스승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다.
천도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무릎을 굽혀 얼굴을 내밀었다. 짙은 다홍색의 눈동자가 내 몸 이곳저곳을 관통해왔다.
“……그래.”
여전히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넌 대체 뭘 얻었지?”
천천히,
나는 숨을 진정시켰다. 치료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숨 쉴 때마다 폐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실리를 추구했습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정시우를 돕기 위해 진 것은 아니다.
“이대로 우승을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
나는 이 세상에 입지를 다져야하는 입장에 있다.
“패배를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
명예는 독한 술과도 같아서 취하기 쉽다.
그것은 내 입지를 다질 수 있는 좋은 도구이며, 지금에 나에게 있어서는 가장 쌓기 쉬운 것이었다.
“지금 제 상태는 길드를 제 편으로 끌어 들이고, 협회와 교회를 제 편으로 만드는 게 우선입니다.”
하지만 명예란, 남들의 시선을 지나치게 끈다는 단점이 있다.
내 목숨을 노리는 집단이 있는 이상, 필요 이상으로 인지도를 늘리면 제 죽음을 독촉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우승까지 간다면 제 편을 만들긴 훨씬 쉽겠죠. 수석을 이기고 우승한 152등. 길드 이곳저곳 들쑤시면서 적당히 계약 맺고, 친해져서, 백도랑 황도누님 인맥 어필하면 금방 늘어나겠습니다.”
천도는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럼 뭐해요. 무릇 그런 식으로 취한 명예는 거품인데.”
“아직 준비도 채 되지 않은 마당에 이름값만 늘어나면……절 노리는 사람들이 가만둘까요.”
눈엣가시를 제거하기 위해 더 빠르게 움직일지 모른다.
천도라고 항상 내 곁에 붙어있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거품이 꺼지면, 남은 건 약점뿐입니다.”
“그래서 졌다?”
“…….”
이상적인 힘을 가진 종교 집단과 길드 협회.
그리고 전세계적 문제로 대두되는 테러리스트.
더 많은 게 눈에 보인다.
너른 시야 속에 체스판을 담으면, 아직 모르는 게 많을지라도 길을 어림잡을 수 있게 된다.
물론 내 마음또한 이유가 되었다.
“…솔직히 돕고 싶은 마음도 있었죠. 그것 때문에 갑작스레 진로를 바꾼 거기도 하고.”
봐주지 말라는 정시우의 엄포는 내 알 바 아니고.
상태창을 제거할 수 있는 시점에서 나는 패널티로 죽을 일이 없었다.
퀘스트를 클리어 하면 얻을 수 있는 최상급 포션 세 개. 그것도 상관없다.
이러한 선택을 고려하게 된 계기랄 것은 단순했다.
“만약… 나중에 그 녀석이 동생을 발견했을 때, 혹여 오늘 일 때문에 시간이 늦어 일이 잘못된다면.”
꿈자리가 많이 사나울 것 같아서.
이번 시합에 많은 걸 걸기는 했지만. 만회할 방법은 언제든지 있었으니까.
그다지 나에게는 손해란 없다. 그래서 했다.
……그것이 스승에게는 좋게 보일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정시우라는 고려 대상을 포함하지 않았을 때 제게 가장 이득이 되는 건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시우의 사정을 들었을 때, 제게 가장 이득이 되는 방향은 지는 것이었고요.”
인맥과 명예, 앞으로의 방향성, 그리고 내 만족감. 그 모든 걸 통틀어 생각했을 때 나온 결과였다.
그 뿐인 이야기다.
나는 입을 닫았다. 오랜 침묵이 지나갔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천도의 입이 떨어진 것은 그때였다.
“……예전에 엔트 사건을 해결했을 때 일이었지.”
천도는 과거를 회상하듯 몸을 일으킨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때도 어린 애 한 명 때문에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황도에게 부탁해서, 아비를 잃은 어린 애를 지원했을 적.
연쇄 폭주 사건때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너는 천성이 너무 착해. 그래서 걱정이 된다.”
걱정. 서서히 자신의 감정을 진솔하게 꺼내는 천도의 분위기는 상당히 누그러져 있었다.
멈췄던 복숭아 향이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누구 한 명 때문에 계획을 변경하고. 목숨 하나가 걸리면 갑자기 신중해지고… 그 성격 때문에 화를 입을 때가 언젠가는 올 거다.”
스승이 제자에게.
“네 선한 천성을 배신하는 사람도 분명히 존재하겠지.”
천도는 차가운 현실을 내밀었다.
“그때가 되었을 때. 네가 너무 이 세상에 실망할까 두렵구나.”
“스승님이 왜….”
“무섭다. 그때가 되면 네 곁에는 내가 없을 수도 있을 테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고 반문하려 했으나 목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미래였다.
“화를 내서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너는 잘못한 게 맞다. 그걸로 되었다.”
천도는 양팔을 뻗어 내 머리를 끌어안았다. 깨진 머리에서 느껴진 고통은 곧 사라져 버렸다.
“좀 더 모질어 져라.”
그게 스승이 할 말인지.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슴이 요동친 탓도 있었다.
그저 나는, 포근한 품에 안겨 한참을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