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 인식 변화 (2)
“그 말 진심인가요?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인데.”
“당연하죠.”
"이시헌 생도가 더 강하다고요?"
정시우의 확답에 이사벨라가 귀를 기울였다.
“제가 참 옛날부터 그쪽을 많이 봐 와서 말하는 건데-”
이사벨라는 테이블 위의 커피잔을 손톱으로 쓸어내리며 그에게 물었다.
날카로워진 교주의 열성적인 눈이 정시우의 속을 꿰뚫었다.
“-제가 볼 때 당신은 항상 당신의 재능을 과소평가하고 있어요. 그리고 남들의 재능은 항상 높게 평가하는 면이 있다는 것도 잘 알죠.”
“…네.”
“그래서 솔직히 그 말을 믿기는 힘들 것 같네요.”
정시우.
이사벨라가 그를 만난 것은 4년 전. 수녀로서 봉사 활동을 갔을 때의 날이었다.
사관 학교에서 세계수의 교리를 전파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그녀의 역할이었는데. 당시 정시우 때문에 상당히 애를 먹었던 것을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또 제 수업 안 들었죠.
-죄송합니다.
-대체 수업도 안 듣고 훈련실에 박혀서 뭐하는 거에요?
사관 학교의 학생이었던 정시우는…… 손이 많이 가는 문제아.
땡땡이를 치는데 찾아보면 항상 훈련실에 있던 그런 남자였다.
세계수님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 이사벨라의 역할이었고. 그 때문에 봉사하는 동안 정시우와 얽힐 수밖에 없었다.
많이 부딪혔기에 정시우에게 미운 정이 들었다. 그렇게 지내다보니 이상하게 친해지더라.
이사벨라는 그의 상담 역할도 많이 해주었다.
봉사 기간이 끝나고 간간이 연락만 하는 사이로 되돌아갔지만, 서로 친하다는 사실만큼은 인지하고 있던 그와 그녀였다.
지금의 정시우는 누가 뭐라해도 최고의 인재였지만. 사실 처음부터 그렇진 않았다.
“당신은 너무 겸손해요.”
세계수의 남편 후보가 되기 전의 정시우는 별 볼 일 없는 취급을 받는 남자에 불과했다.
귀족이 아니었고, 수목도 아니었으며, 그저 아득바득 노력하는 인간 남성이었다.
그때부터 봐왔던 이사벨라는 알고 있었다.
정시우의 노력은 보답받을만한 것이라고.
“에휴.”
……지금은 넝쿨째로 굴러온 호박을 걷어차는 미련 곰탱이로 밖에 보이지 않지만.
“알았어요. 이시헌… 기억해두죠.”
정시우라는 큰 그릇이 추천해준 인물이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말을 이사벨라는 애써 목구멍 뒤로 씹어 삼켰다.
*****
“상태창.”
이 얼마만에 켜보는 상태창인가.
내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찾아온 것은 반투명한 상태창이 아닌 격심한 고통이었다.
【 MainQuest 3. 더 높은 곳으로. 】
【 당신의 현재 순위 : 35위 】
.
.
.
【 퀘스트 실패. 페널티가 부가됩니다! 】
기우뚱!
철퍼덕-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며 심장이 타들어간다.
아프다.
다급하게 땅을 짚고 엎어진 자세 그대로, 온 정신을 집중하여 상태창을 깨뜨렸다.
【 일시적으로 세계수와의 연결이 취하됩니다. 】
사그라드는 고통. 터질 것같이 꽉 쥐어짜였던 심장이 아슬아슬하게 버텼다.
“…어우 씹.”
입 아래로 반투명한 실선이 떨어진다. 아무 전조도 없이 찾아온 고통이라 무시할 수 없었다.
온 몸에 넘칠 듯이 흐르는 마력은 있으나마나한 것이었고.
나는 엎드린 자세 그대로 땀을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앞쪽에 백도가 멍하니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지금 뭔짓 거릴 하느냐?”
“방금 뒤질 뻔했습니다. 상태창 키니까 딱 패널티가 오더라고요.”
“확 죽어버리지 그랬나.”
그건 말이 심한데.
내심 상처 입은 가슴을 어루만지며 일어나 침대에 누우니, 어깨가 뻐근하기 그지없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상태창이 돌아왔다.
“상태창.”
이번에는… 멀쩡하군.
눈앞에 나타난 창을 차례로 읽어내렸다.
============================
【 이름 】
이시헌 (세계수의 남편 후보)
【 능력치 】
-근력 7.5
-내구 6.6
-민첩 7.2
-체력 6.7
-마력 8.7
-매력 9
-지능 7
-잠재력 20
-행운 10
□고유 특성(2)
[식목도감(S)][전투형 신체(S)]
□보유 스킬(1)
[흑도(-)]
□기질(4)
[목령왕(-)][검의자질(B)][마법의자질(B)][음란마귀(F)]
==========
능력치가 1이었던 것에 비하면 확실히 많이 늘었다.
‘이제는 굳이 상태창을 볼 필요도 없겠네.’
다른 능력을 또 뽑으면 모를까.
그러고 보니 한동안 뽑기도 하지 않았었다.
어떻게 끌어 올린 행운인데…….
‘생각해보면 이 사람들이랑 만난 것도 다 행운 아닌가?’
약간의 강제력이 있었다지만 그 또한 행운이라면 행운으로 볼 수 있겠지.
협탁 근처 의자에 앉아 잡지를 읽던 백도가 나를 보더니, 손에 쥐고 있던 잡지를 던져왔다.
“뭘 봐.”
-착!
잡지를 피하자 등 뒤에서 종이자락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까칠해진 거 아닙니까?”
“…….”
“만날 일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계속 이러실 거에요?”
백도는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말할 생각이 없다는 의사 표시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홀로 작게 뇌까렸다.
“…허접.”
-퍼억!
잡지가 날아와 얼굴을 덮었다.
“누, 누, 누가 허접이냐! 다 들으니 닥쳐라!”
“……자기가 한 말이면서.”
백도가 날아와 얼굴을 후렸다.
손바닥으로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안면이 얼얼했다.
나는 찰싹 달라붙은 잡지를 떨어뜨리며 쓰라린 콧잔등을 살살 문질렀다.
“제가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사과 좀 받아주세요.”
“허접 아니다.”
“아니 알았으니까….”
“허접 아니라고 말했다.”
“그럼 증명해 보시던가요.”
-까드득.
“또 그런 식으로. 정녕 오늘 내 손에 죽고 싶은 것이냐?”
그런 식이 뭔데.
그냥 하고 싶은 말은 그거 하나다.
“얼마 안 가서 헤어질 텐데 그 전에 좀 친해져서 감동 있게 헤어집시다. 언제까지 싸울 건데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백도도 이성이 있으니 아마 내 말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나는 마지막 장난기 섞인 사과를 건넸다.
“맞죠? 싸우지 말고 섹… 아니 화해합시다.”
“맞는 말이구나.”
백도의 손에서 이불이 날아왔다. 어찌나 빠르게 내 몸을 덮친 이불이었는지.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이불에 감싸진 채로, 한참을 밟혔다.
“처맞는 말.”
멍석말이를 당하는 기분. 아니 정말 당하고 있다.
“억, 억!”
30분 쯤이 지나 백도는 헉헉대며 내 말에 동의했다.
“네 말이 맞다.”
……돌겠네.
“사, 사람 한 명 뒤지게 패놓고 할 말이 그겁니까?”
“넌 맞을만 했다.”
인정한다.
방금 죽을 뻔한 사람에게 하는 처사치곤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맞을만 했다고.”
인정한다.
“예 됐습니다. 한 방 맞은거면 싸죠. 그래서 오늘은 뭐 드실래요.”
내 물음에 백도는 입을 다물더니. 조심스레 말해왔다.
“……부대찌개.”
“옙.”
이제 황도와의 오해만 풀면 된다.
나는 시린 무릎을 부여잡고 주방에서 냉장고 안을 한 번 쓱 둘러보았다.
원래였다면 기숙사 1층에 배치된 샐러드 바를 이용하는 것이 정상적이고 훨씬 편했지만. 복숭아 자매들과 살다 보니 만들어 먹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시바도 귀신같이 내가 만든 걸 더 좋아한다. 이 집구석에서 가장 요리를 잘하는 게 나인지라 당연한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천도가 나보다 더 잘하나? 먹어본 적이 있어야 알지 원.
‘밥하고… 시바 유치원에서 데려오고…. 짐 싸고 자고 일어나서 아카데미 가면 딱이네.’
일정을 암산으로 짜낸 다음. 쌀을 씻어 밥을 해두고 사골 육수에 재료와 소스를 만들어 넣었다.
자취생에 그쳤던 요리 실력도 요즘에는 선수가 다 됐다.
-달그락, 달그락.
밥솥의 압력 추 돌아가는 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재료를 다듬으니, 아까의 뽑기가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호감도도 체크 한지 꽤 됐지…’
호감도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보니, 소홀하게 체크 했었다.
예전에야 친구를 사귀지 못했으면 죽었으니 호감도에 목매었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호감도를 안다는 게 약간 꺼림칙하기도 했다.
‘참 좋은 능력이긴 한데.’
호감도라는 건, 단순 연애에나 사용할만한 능력이 아니었다.
호감도는 그 사람이 나를 위해 자신의 일부를 희생할 수 있는지 아닌지 나 스스로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
가령 돈을 빌린다거나.
아니면 정말 목숨을 희생시킨다거나.
호감도를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건. 그 호감을 마음만 먹으면 이용할 수 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이 사람이면 내 말을 들어주겠지. 나를 위해 주겠지.
능력이 없다면 부탁이 되지만 능력이 있는 순간, 나는 사람을 대하는 마음가짐부터 달라지게 될 것이다.
권력만이 사람을 망치는 게 아니다. 능력도 그렇다.
내가 재능에 취해 자만에 빠진 것과 같다.
호감도라는 시스템이 가지는 가치는 어마어마했고. 그렇기에 호감도라는 시스템을 사용하는 것이 꺼려졌다.
마음만 먹으면 악용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걸 아니까.
-더 모질어 져라.
갑작스레 천도의 말이 귓가에 들려왔다. 그녀의 말은 마치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능력이 있다면 제발 좀 써라 이 미련한 제자야.
‘……그건 그래.’
무섭다고 안 쓰면 그것대로 바보지.
눈짓만으로 그동안 쓰지 않던 호감도 시스템을 다시금 불러왔다.
불투명한 파편들이 눈앞에 서서히 모여 하나의 창을 이루어냈다.
----
【 세계수 옥션 】 - 【 호감도 메뉴 】
[세계수(2)]
▶순결의 세계수 : ♥♥♥♥♥(100/100)
▶치유의 세계수 : ♥♥♥♡♡(71/100)
[목인/인간(9)]
▶이세영 : ♥♥♥♥♡(95/100)
▶황도 : ♥♥♥♥♡(93/100)
▶진달래 : ♥♥♥♥♡(93/100)
▶별 : ♥♥♥♡♡(65/100)
▶정시우 : ■■■□□(65/100)
▶백도 : ♥♥♥♡♡(61/100)
▶천도 : ♥♥♥♡♡(58/100)
▶산수유 : ♥♥♥♡♡(57/100)
-더보기
-----
길게 이어진 창.
그것을 쭉 읽어 내리던 나는 문득 한 곳에 시선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런 상승세를 보인 정시우.
예상하는 내용이라 솔직히 이변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진짜 눈을 크게 뜨고 봐야할 정도로, 내 눈을 의심케했던 내용은.
---
▶황도 : ♥♥♥♥♡(93/100)
▶진달래 : ♥♥♥♥♡(93/100)
---
‘누님이랑 얘가 갑자기 왜 올랐지…?’
요즘엔 대화도 통 못했던 황도와, 시험 이후 선물을 받은 걸 제외하면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했던 진달래.
나는 무심코 그 둘의 정보를 확인했다.
----
이름/성별 : 황도(女)
나이/키 : 26/167cm
섹스 판타지 : 누나와 동생 노예 플레이
연애 판타지 : 무더운 여름 기나긴 포옹.
현재 상태(추가) : 질투, 일시적 호감도 증폭 상태.
----
----
이름/성별 : 진달래(女)
나이/키 : 20/165cm
섹스 판타지 : 스팽킹.
연애 판타지 : 좋아하는 남자와 함께 동물원.
현재 상태(추가) : 집착, 일시적 호감도 증폭 상태.
----
“……이게 뭐지.”
질투. 그 단어가 담긴 의미.
집착. 갑작스러운 감정 변화.
그녀들의 현재 상태는 딱 보면 알 수 있는 단어로 설명되어 있었고.
나는 영문을 몰라 허우적댈 뿐이었다.
내 주위 여자들의 나를 향한 인식이 내가 다르게 움직이고 있다.
황도는 그렇다 치고, 내가 진달래한테 추파를 던진 적이 있었나…?
예전부터 시도 때도 없이 문자를 보내온다거나 그러기는 했었다.
힘들어 보였을 땐 술자리에 찾아가, 정신 차리도록 뺨 한 번 때려준 적도 있었다.
시바랑 같이 동물원도 갔었고. 아카데미에서는 친한 친구처럼 붙어 다니기도 했었다. 과제가 있으면 거의 함께 했고.
‘아.’
진달래는 지금껏 친구라는 자리에 집착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를 일찍이 여의고 제대로 감정을 나눌 사람을 찾지 못해서. 뒤늦게나마 내가 친구로서 그 역할을 해야겠다. 생각한 것도 사실이니까.
그랬는데 설마….
-웅, 우우웅!
그때 왼쪽 주머니에서 울려대는 진동.
두근두근. 심장이 떨린다.
나는 침을 삼켰다. 먼저 가스 불을 끄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핸드폰 화면 메신저에 세 자리의 이름이 눈을 스친다.
그때였다.
“동상.”
등 뒤에서 먹먹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누님 오랜만이네요.”
삐걱삐걱- 부자연스럽게 돌아가는 목. 나는 황도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백도 스승님이랑 같이 식사하실 생각인데… 같이 드실래요?”
“백도는 잠깐 잠들었어.”
“그럴 리가….”
백도와 지새웠던 날의 밤 이후,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황도는 많은 생각이 담긴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동상.”
그녀가 웃었다.
“천도도 자.”
피부의 겉면으로 희미한 마력의 흔적이 느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