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세계수를 따먹다-143화 (143/657)

< 143화 > 복숭아 세 알 (3)

-목심 1월 호. ~새해 시누이의 아랫목 두부 편~

-‘형부, 오늘은 한 모론 부족해요.’ 주위에는 말 못할 사정을 가진 수목들의 이야기. 튀어나오는 그녀들의 깊은 이야기를 들여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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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성애(Dendrophilia).

평생을 통틀어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할 정신병의 일종이, 이곳에서는 아주 정상적이며 비교적 건전한 취미로 여겨지고 있었다.

어찌나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느냐면. 중학생 정도의 여자애가 잡지를 들고 뛰어다녀도 별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이거 꼭 가지고 싶었어요!”

황도는 잡지를 한가득 가슴에 껴안고는 헤헤 웃었다.

잡지를 보는 반쯤 풀린 눈빛이 상당히 인상 깊었다.

‘이런 잡지가 미성년자에게도 판매가 되는 실정이라니.’

이 나라의 미래가 어둡기 그지없다.

이런 걸 찍어대는 잡지사는 어딜까. 주옥같은 대사 한 줄 한 줄을 읽고 있으면 뇌세척이 간절해진다.

-빨리 내 물관을 뚫어줘.

-두부장수의 똥구멍은 뭉실뭉실하다던데.

심연을 접하고 미쳐버린 이들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이제는 웃음도 안 나온다.

나는 표지만 봐도 정신이 나갈 것 같은데, 이 잡지 소비자의 대표주자인 우리 꼬마 황도께서는, 그 문장 하나하나가 취향에 맞으시는지 아직도 목심의 표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행목(木)해요….”

그래 너만 좋으면 됐다. 아무리 이상해도 취향이니까.

진심으로 좋아하는 황도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 활기를 조금이나마 나누어 받는 것 같았다.

“저 너무 좋아서 그런데,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겠죠? 신이 화를 낼지도 몰라요.”

“괜한 걱정 말고, 백도 선물이나 사다주자고.”

“아 맞다 그랬었지.”

황도는 아차 한 얼굴로 다시 내 옆에 딱 달라붙었다.

은근슬쩍 내 팔에 자신의 팔을 감아오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다.

“…그런데 오라버니랑 백도는 사이 안 좋은 거 아니었어요?”

“사이가 좋다고는 볼 수 없지. 내가 소천마가 되고나선, 계속 시비를 걸어올 정도니까.”

“오라버니는 백도를 싫어해요?”

“아니? 오히려 좋아하지.”

황도의 의문을 바로 부정했다.

내가 아무리 백도랑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던 사이라지만, 이곳은 과거였다.

백도는 어렸고, 게다가 여기서는 우리 둘이 싸울 이유도 마땅히 없었다.

“친해지고는 싶은데. 항상 뭐가 안 맞더라고.”

“끄으응….”

황도는 내 말에 입을 오물거리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오라버니는 아니어도, 백도는 오라버니를 싫어해요.”

“그렇지.”

“오라버니가 저희 아빠의 후계를 잇는 이상, 아마도 평생 싫어할 거에요. 백도는 천도가 아빠의 뒤를 잇기를 원하고 있으니까.”

“알고 있어. 저번에 말해주더라고.”

도원의 입장에서 나는 굴러들어온 돌일 뿐이다.

그것도 커다란 돌풍을 몰고 온 돌덩어리. 이 때문에 홍연은 나를 경계 했었다.

나 때문에 천도가 천마가 되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백도에게는 내가 천마가 될 생각이 없다고 확답을 내려주기까지 했었는데. 역시 그걸로는 부족했나 보다.

내가 천마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정치적인 문제점이 생겨나지만, 아마 백도는 그것보단 개인적인 감정이 앞섰을 것이다.

“오라버니는 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천도?”

황도는 자못 진지한 얼굴로 내게 물어보았다.

“흐으음. 천도 말이지.”

딱 잘라 말할 수 있다.

“정이 굉장히 많은데 막상 그걸 표출하지는 않는. 남몰래 주변 사람들에게 챙겨주고, 생각도 많은데 티를 내지는 않아서. 그래서 주변 사람들한테는 딱딱하다고 평가를 받는 사람.”

같이 엔트도 때려잡고, 던전에서 목숨도 걸고 별의별 짓을 함께 해왔던지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성격 때문에 손해를 많이 보는데,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거지. 드물지만 가끔 있잖아.”

내 말을 옆에서 전부 듣고 있던 황도는 제법 놀란 얼굴이었다.

“오라버니는 사람 보는 눈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럼 저는요?”

“변태.”

“……벼, 변태 아닌데요.”

헛기침을 몇 번한 황도는 볼을 새빨갛게 붉히며 다시 원 주제로 돌아갔다.

“크흠. 아무튼 비슷해요……그런데 오라버니가 말하는 것처럼 천도가 그렇게 강한 사람은 아니에요. 보기보다 엄청 여려요. 어~엄청.”

황도가 양팔을 펼쳐 원을 그렸다.

천도가 여린 사람이라.

어린 천도를 보곤 이 시절의 천도는 감정 표현이 꽤 많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던 적은 있었다.

황도는 남들에겐 말하지 말라며 검지를 입가에 가져대 대곤 쉬잇- 하는 소리를 내었다.

“사실 저희 중에 가장 울보는 천도에요.”

“울보?”

“일곱 살 때는 그랬어요. 낙엽만 떨어져도 우는 게 천도였으니까. 겨울이 돼서 얼어 죽은 토끼를 보면, 항상 눈시울이 새빨겠어요.”

“그렇구나.”

“저희 대신 희생하는 것도 많았죠. 먹을 것도 항상 양보하고…. 일이 있으면 항상 도맡아 했어요. 집안일 돕는 것도. 뭐든지요.”

여리지만 당찬 면이 있는 사람.

떡잎부터 선한 천성은 그대로였나 보다.

이야기를 이어가는 황도의 눈은 옛날 그 시절을 떠올렸는지 습기가 묻어 촉촉해져 있었다.

“사실 천도가 아버지의 뒤를 잇는 것도, 떠맡아지듯이 된 거였어요. 백도랑 저는 훈련을 싫어했어요. 훈련할 때의 아빠는 엄청 엄하고 무서웠으니까요…. 지금은 항상 무섭지만.”

천도가 천마가 된 것은, 그다지 큰 대의는 없었던 것 같았다.

그래도 성실한 천도였으니 고된 노력을 해왔을 것이다.

“훈련에 들어가고나서부터, 천도는 저희랑 따로 살게 됐어요. 이름도 사라졌고, 아무도 천도를 모르게 됐죠. 그리고 천도도, 성격이 많이 바뀌었어요.”

소천마가 되고 나서 울지 않게 되었고. 감정 표현은 거의 줄어들었다.

자기랑 백도한테도 딱딱하게 군다며, 황도는 시무룩하게 말했다.

“훈련이 엄청 힘들었던 거겠죠?”

확실히 견디기 힘든 훈련이지.

내가 받은 것을 천도도 똑같이 받았다고 생각하면, 어린애가 받기에는 굉장히 끔찍한 훈련임이 틀림없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황도는 더 침울해진 얼굴로 한숨을 푸욱 쉬었다.

“……그래서 백도도 그걸 마음에 두고 있나 봐요. 천도가 우리 대신 고생을 많이 한다는 게. 사실이니까.”

“그러니 내가 좋게 보이지 않는 거고?”

“맞아요.”

마음고생을 하던 와중 그런 천도에게 노력의 결실마저 빼앗아가려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눈이 돌아갈 법도 하다.

‘당사자인 천도는 어떻게 생각할까.’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했었는데.

황도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쓴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래서 사실 저도, 조금 그렇긴 해요.”

“……그래?”

“네.”

솔직한 반응을 내게 해준다는 것 자체로 고마웠다.

“너도 내가 천마가 되는 게 싫어?”

“싫어요. 싫은데…좋아요.”

“응?”

“오라버니가 천마가 되면 천도는 그 감옥같은 생활을 더 이상 안 해도 되잖아요. 그건 좋은데…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건 싫어요. 이상하죠?”

황도는 내적 갈등을 겪고 있는 모양이었다.

축 처진 모습이 마치 강아지같아 제법 귀여워 보였다.

“이것 때문에… 백도랑 얼마나 말싸움을 했는지 몰라요. 그래도 이거 하나는 확신할 수 있어요.”

“뭔데?”

내가 물음이 끝나자마자.

황도는 선물 봉투를 잠시 내려두고는, 짧은 팔을 뻗어 내 팔을 감싸 안더니.

그 팔에 볼을 부비적대다 나를 올려다보며 맑은 미소를 지어왔다.

“오라버니는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요.”

햇살같은 얼굴. 오늘 날이 조금 추워서 그런지 옆구리에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저는 천도를 많이 볼 수 없지만. 오라버니는 자주 볼 수 있지 않아요?”

“그렇지.”

“그럼 잘 대해주세요. 바보라서 자기는 못 챙기는 언니니까.”

그거야 뭐, 당연한 소리다.

천마를 잇지는 않을 생각이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까.

솔직하게 얘기를 해준 황도가 고마워 톡톡 머리를 두들겨주었다.

“고맙네. 모르는 이야기 해줘서.”

“히히. 오라버니한테는 제 보물인 목심 초판도 보여줄 수 있어요.”

“아니 그런 건 대체 왜 가지고 있어?”

“사저가 생일 선물로… 아. 사저에 대해서는 말 안 했던가요? 목심 초판이라는 게~ 천 구백 오십년에 처음 나와서~”

자랑스레 목심의 역사에 대해 읊기 시작한 황도의 장단을 적당히 맞춰주면서, 나는 백도를 위한 선물을 몇 개 사서 황도의 손에 들려주었다.

중간중간에 가고 싶다던 비디오방 같은 곳도 몇 번 데려다주니, 시간은 훌쩍 지나가 어느새 돌아갈 시간이 되어 있었다.

“가기 싫은데 힝.”

황도가 사는 집 앞까지 데려다주자, 황도는 끝까지 내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아침에 일을 나가는데 계속 따라나오는 강아지를 보는 기분이다.

“나중에 또 같이 가자.”

“정말요?”

내 말에 곧바로 화색. 얼굴에 꽃이 피어난다.

“그럼, 약속해요.”

그때 불쑥 황도가 새끼 손가락을 뻗어왔다.

나는 그것에 의문을 가지다가, 문득 예전 일을 기억해내곤 그 손가락에 손을 걸었다.

그때 한 번 불러보았던 노래는 기억에 남아 있어 수월하게 부를 수 있었다.

“꼭, 꼭 약속해요.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에요?”

“그래 알았어. 어서 들어가 봐.”

“와아! 오라버니 좋은 저녁 되세요!”

만세를 외친 황도가 신이 난 채 집에 들어갔다.

돌아가면서도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려선 나에게 격렬하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 반가운 손짓을 그대로 흉내내며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쿵!

미닫이 문이 닫히며 황도의 모습이 사라졌다.

-드르륵.

그리고 바로 문이 열려 얼굴이 빼꼼 튀어나왔다.

“감사해요!”

다시 문이 닫힌다.

그러기를 한 다섯 번쯤 반복하고 나니 황도는 더 이상 문밖에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알던 황도보다 더 밝고 발랄한 모습에, 역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혼자가 되면서 다시 떨리기 시작한 양 손을 주머니에 집어놓곤, 나는 한참을 황도 집앞에 서 있다가. 되돌아가는 길을 밟았다.

*****

“사저어어어!”

방 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황도의 목소리에, 잠이 깬 진사향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왜, 왜. 무슨 일이야?”

“나 이거 받아 왔어!”

황도가 신이 난 얼굴로 제 품 가득 가져온 잡지들을 늘여놓자. 사향의 눈이 놀라움으로 가득찼다.

“아니 바깥에도 못 나가면서, 이런 건 다 어디서 구해왔어?”

“오라버니가 사주셨어.”

“오라버니?”

“그런 사람이 있어!”

아니 무슨 어떤 미친 남자가 이렇게 예쁜 애한테 목심을 사다 주는가. 잘 보이고 싶어서 금반지를 사다줘도 모자랄 판에.

사향의 머리는 황도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니까, 너한테 이런 걸 선물했다고? 어……그거 그냥 완전 개변태 새끼 아니야?”

“왜?”

“왜라니? 딱 봐도 이상한데.”

황도는 검지로 입술을 두드리며 곰곰이 생각하는 척을 하더니 해맑게 고개를 저었다.

“오라버닌 나쁜 사람 아니야.”

“어이구 그러세요?”

“나쁜 사람은 언니가 핸드폰으로 만나는….”

“그 입 닥치라.”

펙트는 사람을 후드려 팬다.

사향은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남자는 잘 생각해서 만나. 언니처럼…음, 알지? 잘못 만나면 큰 일나는 거야.”

“그 오라버니도 똑같은 소리 하던데.”

“그래. 그 오라버니 같은 사람이 제일 위험해.”

“…그렇게는 안 보였어.”

계속해서 부정하는 황도.

사향은 그런 황도를 바라보며 눈썹을 기울였다.

얘가 누구한테 이렇게 정신이 박혔는지는 몰라도, 한 마디 정도는 해주는 게 도리가 아닐까.

사향은 그녀에게 진심어린 충언을 해주었다.

“그 남자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면, 내 손목을 분지른다.”

이에 눈을 동그랗게 뜬 황도가 바로 그 사람에 대해 말을 꺼냈다.

“……소천마님인데?”

“어?“

잘생겼고 일 잘한다고 명성이 자자한 소문의 그 남자.

사향은 즉시 입을 닫아버렸다.

잘못 말했다간 불경죄로 발가벗겨져서 매타작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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