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세계수를 따먹다-144화 (144/657)

< 144화 > 복숭아 세 알 (4)

“……이걸 너한테 사다준 게 소천마님이라고?”

진사향은 귀를 의심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무수한 성인 잡지들.

그 성실하고도 멋스럽게 생긴 남자가 정말 황도에게 이 잡지를 전해줬다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들은 하나 같이 변태적인 취미가 없다면 살 수 없는, 마이너한 취향이 그득히 담긴 잡지이기 때문.

“진짜?”

혹시 몰라 되물으니 황도는 이상한 사람을 본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깐?”

“그 남자가, 너한테 SM이랑… 화간이랑… 이런 잡지들을 선물했다고?”

“응.”

추잡하기 그지없는 성욕.

그것을 다름 아닌 이런 어린애한테 선물을 하다니.

사향은 충격을 받았다.

평소 공명정대하다고 소문난 소천마. 그 남자의 어두운 뒷면을 얼핏 보고야 말았으니까.

‘설마 갑작스레 천마의 제자가 된 이유도, 도원에서 주지육림을 실현하기 위해서인가?’

오싹, 사향은 소름이 돋은 팔을 쓰다듬었다.

“사저. 오라버니가 그냥 나한테 준 게 아니라. 내가 오라버니한테 사달라고 하니까 사준 거야.”

“야한 잡지를 사달라고 했는데 아무 거리낌 없이 사줬다고? 그게 더 이상해!”

뒤늦게 황도가 소천마를 두둔했지만 이미 늦었다.

도원에서 황도의 인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항상 방긋 웃고, 부탁도 잘 들어주는 천마의 자식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꼬마 선녀.

얼굴로 먹고 산다고 해도 백이면 백 고개를 끄덕일 아이.

생긴 것도 순진하게 생겨 먹어서, 주변 객잔 일을 도와줘도 손님이 먹는 것보다 더 많이 얻어먹는 것이 황도였다.

바깥 드라마의 아역 배우? 황도만 못하다.

바깥의 문화에 미쳐 사는 사향인 만큼 자신할 수 있었다.

‘이런 애가 야한 잡지 사달랬다고 옳다구나 하고 사주는 남자가 정상일 리 없지.’

물론 황도는 심각한 변태가 맞다.

천성적으로 성에 관심이 많은 것도 사실.

그런 음란한 정보를 황도에게 떠넘긴 자기도 정상은 아니지만, 사저된 노릇으로 책임이란 게 있었다.

‘어쩌지? 그래도 그 사람한테 내가 뭐라 할 입장은 아닌데. 그럴 힘도 없고.’

이러는 와중에도.

황도는 잡지에 얼굴을 들이박듯 하며, 대사 한 줄 한 줄을 말 그대로 음미하고 있었다.

그런 황도를 보다보니 사향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끼리끼리 잘 만난 건가?”

변태가 변태끼리.

“사저? 뭐라고 했어?”

“아니, 아니야.”

황도는 특유의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등 불에 비친 뽀얀 얼굴이 사향의 눈에 확 들어왔다.

기다란 속눈썹에 노을빛 눈동자.

가까이 다가가면 복숭아 특유의 향기가 살내음으로 풍겨져 나온다.

“진짜 짜증날 정도로 귀엽네.”

“피, 사저는 맨날 그 소리야. 사저도 예쁘면서.”

내가 예쁘면 너는 지금쯤 미스트리 콘테스트에 나갔겠지.

무분별한 겸손이 사람의 심장을 찌른다.

사향은 눈에 맺힌 눈물을 말리며, 될 대로 되란 듯이 잡지에 집중했다.

“그래… 너같은 애랑 살려면 그 남자도 정상은 아니어야 맞겠다.”

소천마가 황도를 넘보는 건지, 아님 그냥 여동생 보는 기분으로 어울린 건지는 모른다.

그래도 소천마도 잘생겼다 하니 둘 다 변태긴 하지만 나름 선남선녀가 아니겠는가.

나이차는 도원에선 별 것 아니었다.

40대와 10대가 혼약을 맺는 관습이 이곳은 물론, 바깥에도 어련하게 남아 있었으니까.

“기왕 그렇게 된 거 잘해 봐.”

“뭘?”

“그 오라버니란 사람 좋아하는 거 아니야? 남편감? 뭐 그런 걸로 볼 수 있지 않아?”

황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킥킥 웃었다.

“사저! 결혼 상대는 신중하게 골라야지!”

“…….”

“몸만 대충 맞대보고, 바로 반하는 건 요즘 바깥 만화에도 잘 없어. 몇 년은 만나봐야 알지~!”

장담한다는 듯 말해오는 황도.

사향은 멍하니 이 꼬마 변태를 바라보다, 목구멍 바깥으로 나오려는 말을 비소로 틀어막았다.

꼬마 선녀니 뭐니 해도 전부 황도의 겉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내린 호칭.

그 음침한 속내를 사향은 전부 알고 있었다.

“니가 결혼 상대를 신중히 고른다고?”

“응~ 당연하지!”

하.

말도 안돼는 소리였다.

*****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그날 뒤로 잠만 자면 악몽을 꿔서, 한 달이 넘도록 잠을 자지 않았는데. 머리가 아파서 한숨 잠이 들었다.

당연히 또 익숙한 악몽을 꾸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시발.”

한 차례 거사를 치른 듯 축축해진 몸.

하반신의 불쾌감에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새, 생리현상입니다. 목령왕의 후계이시니, 그만한 정력을 가지신 것도 당연하죠.]

다급히 설명하는 시간의 세계수는 어딘가 당황한 목소리였다.

그렇다. 기승전 목령왕이다.

나랑 아무 관계도 없는 그 왕의 기질이, 항상 내 기분을 잡치게 한다.

‘그것도 있고. 음란마귀가 문제겠지 뭐.’

[음란마귀… 아. 기질 말이군요.]

땀으로 젖은 손으로 얼굴을 비벼댔다.

한 달이 넘게 지속된 긴장이 맥없이 탁 풀리는 느낌이다.

-쿵쿵.

때가 맞지 않게 찾아온 노크 소리.

-도원, 일 때문에 찾아왔다.

홍연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오늘 일은 끝났을 텐데?”

-잘 풀리지 않은 게 있어서…. 민폐가 되지 않도록 내가 처리하려고 했는데, 네가 아니면 모르는 부분이 있어서 말이지.

“그걸 이 새벽에?”

-너는 어차피 잠을 자지 않지 않나?

일, 하기는 해야지.

나는 근처에서 옷을 챙겨 문을 벌컥 열었다.

홍연은 방금까지도 서류를 보고 있던 듯 일을 할 때의 차림 그대로였다.

“기다려, 씻고 오게.”

“지금? 얼마 안 걸리는, 데?”

방 안에 가득 찬 냄새를 눈치챘는지, 말을 이어가던 홍연의 말꼬리가 늘어졌다.

“……무슨.”

“뭘 볼을 붉히고 있어? 비켜, 씻게.”

“네, 네놈은 민망하지도 않느냐.”

그러게, 불쾌감만 빼면 아무렇지도 않았다.

지금은 어떻게든 씻고싶다는 생각 뿐이다.

“항상 일하던데에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다녀올 테니.”

“아, 알겠다.”

말을 더듬는 홍연의 뒤로 바로 탕욕실에 들어왔다.

-드르륵.

탈의실에서 옷을 벗고. 몸을 씻은 후 욕탕에 몸을 담갔다.

처음에는 직접 데우지 않으면 욕탕을 쓸 수 없었지만, 바깥에서 들여온 마법 물품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로 한 뒤로 이렇게 저녁에도 욕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찰팍.

손을 올리자 팔에서 이어진 물방울이 수면 위로 떨어졌다.

마치 공용 욕탕을 전세 낸 기분.

예전이었다면 주체하지 못하고 노래라도 한 곡 뽑았을텐데, 왜인지 흥이 돋지는 않았다.

나는 달을 보며 손을 들어 올렸다.

‘아직도 그러네.’

저릿하게 떨리는 손.

천도나 황도, 백도의 옆에서는 떨림이 멈추는데, 애들한테서 떨이지기만 하면 다시 손이 떨린다.

크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라서 내버려두고는 있지만, 나중에 병원이라도 한 번 가보는게 맞을까.

일단은 신경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나는 손을 마저 탕에 담그며 세계수에게 물었다.

‘세계수.’

[네.]

‘아까 음란마귀에 대해서 아는 눈치던데. 남편 후보에 대해서 좀 아는 게 있어?’

[남편 후보요…? 세계수의 남편이라면 알고는 있습니다.]

기질에 대해서도 아는 눈치였고, 무엇보다 이 녀석도 세계수이니 모를 리 없었다.

나는 뜨거운 물로 세수를 했다. 피로감이 서서히 풀린다.

[궁금하신가요?]

‘아는 거 전부 말해 봐. 나도 일단은 세계수의 남편 후보니까.’

[세계수의 남편은……. 명목적으로는 남편이라는 것이 맞습니다. 부부가 그러하듯, 평생 서로를 보좌하게 되어 있지요.]

언제까지나 명목상이란 소리겠지.

실제로 나같이 약혼자의 죽음을 바라는 세계수도 있었다.

[이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상태창, 그리고 그곳의 시스템입니다. 세계수의 남편을, 세계수와 비슷한 격으로 만들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죠. 물론, 이 또한 말만 그렇습니다.]

‘숨기고 있는 건?’

[그건……. 네. 말씀해드려야겠죠. 세계수의 남편은, 엄밀히 말하면 세계수의 예비 목숨입니다.]

예비 목숨?

[전자 기기의 배터리같은 역할이라고 말하면 이해가 편할까요.]

그 말에 정확히 이해가 갔다.

지금 세계가 세계수의 남편 후보를 만들고, 그 남편의 능력을 성장시키는 이유는 전부 세계수의 수명을 늘리기 위함이다.

내 물음에 시간의 세계수는 말없이 수긍했다.

[마력을 대지에서 뿌리를 통해 흡수하는 것보단, 경지에 이른 누군가를 흡수하는 것이 효율적입니다. 물론, 이 역할과는 무관히 정말 진실된 사랑을 하는 세계수 또한 존재했습니다.]

‘뒷말 자르고 보면, 순 개새끼들이네.’

[아니요. 세계수와 인간의, 공생을 위한 시스템이죠.]

‘세계수의 생명을 위해 희생당한다는 걸 남편들한테 알리지도 않고?’

[알리는 것이 원칙일 터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은가 보죠?]

알리지 않았다.

나만 그런 경우일 수도 있겠지만.

‘세계수의 남편은 그렇다 치자, 그럼 남편 후보는?’

[후보에 대해서는 저도 모릅니다. 제가 없는 사이에 제도의 변화가 있을 수도 있겠군요.]

‘……그래?’

세계수의 남편에 대해서는 알고, 상태창과 시스템에 대해서도 아는데. 남편 후보에 대해서는 모른다라.

워낙 늙다리 나무라 이해한다.

나를 예비 목숨으로 취급한다는 것도, 뭐 반감이 워낙 심한지라 이제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죽이려는 놈들도 있는데 예비 목숨이라고 크게 달라질 건 없었으니까.

‘그럼, 상태창은 세계수가 만들었다 이거지?’

[네. 자신의 기량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힘을 하사 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죠.]

‘힘을 하사한다라… 상태창이 끊어지면?’

[당연히 그 힘도 잃습니다.]

그건 많이 이상한데.

내가 상태창을 끊어냈을 때는 잃기는커녕 오히려 더 자유롭게 힘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설마 이것도 그 공백의 시간 동안 제도가 바뀐 걸까?

[아뇨, 당신의 경우에는…. 체질의 문제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체질?’

[어떠한 일을 계기로 상태창의 힘이 온전히 당신의 것으로 흡수되었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시간의 세계수는 내 생각을 꿰뚫어 보곤 바로 이를 부정해왔다.

몸의 경험으로 알고 있던 바이나, 확답을 해 올 줄은 몰랐다.

그 계기가 되는 일은 아마 연옥에서의 일. 그것 때문이겠지.

아무것도 모르던 놈이 참 많이도 알아챘다.

“고맙네.”

[……감사합니다.]

나는 욕탕에서 일어나 몸을 말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역시 아직 부족한 것 같아.’

아무리 목령왕의 그릇을 가졌다곤 하나, 내 원천은 세계수가 내린 재능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리고 그 기반을 마련한 게 세계수라면, 실제로 세계수가 가진 힘은 이보다 거대할 것이 틀림없었다.

모든 세계수가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어느 하나는 세상에서 신이라 받들여질만한 능력을 가진 것이리라.

이런 내가 조금 더 강해지려면 어떤 행동을 해야할까.

당연히, 왕의 힘으로 정해져 있었다.

*****

“일이 갈수록 많아져.”

홍연은 인사발령에 관한 서류를 뒤져 보며, 빗을 꽂은 붉은 머리를 매만졌다.

볼까지 내려온 다크서클.

시간이 갈수록 점점 쌓여만 가는 서류.

소천마의 권력을 필두로 이루어진 개혁 덕분에, 도원의 생활 방식은 점차 현대적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당장 최상층에서 가용되는 마법 도구들만 봐도 그 변화의 체감이 가능했다.

물론 그 급진적인 변화 때문에, 홍연이 해야할 일이 늘어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아주 환영이었다.

도원을 위해서라면 몸 하나 불사르는 건 일도 아니었으니까.

“이것도 어느정도 끝.”

서류를 정리하고 다른 서류를 눈에 담는다.

-드르륵.

그때 열리는 문. 깜짝 놀란 홍연이 서류를 떨어뜨렸다.

팔랑이는 종이 하나가 힘없이 책상 위에 떨어졌다.

“……다 씻었나?”

밤에 있었던 일은 그녀에게도 다소 충격적인 일이었다.

성격이 거지 같지만 하는 일은 완전했던 소천마 도원이었기에 더 충격이 컸던 것 같기도 했다.

소천마는 아직 덜 마른 머리를 긁적이다가 홍연을 보곤 시큰둥하게 답했다.

“어.”

빌어먹게도 성격 더러운 놈.

홍연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이곳까지 찾아온 남자에게 내심 고마움을 느꼈다.

정말 성격이 파탄난 놈이라면 새벽에 불렀을 때. 응답은커녕 그 자리에서 주먹을 올렸을 테니까.

“일단 이 서류에서 궁금한 점이 있다. 네가 맡은 부분 아니냐?”

홍연은 남자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이번 달에 새로 들어온 근로자들을 정리해둔 표.

그 표의 가장 밑 부분. 새로 들어온 근로자의 이름에, ‘천도’라 쓰인, 홍연이 모르는 낯선 이름이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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