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화 > 이도원
[흐음. 그래서… 저번에 네가 말한 거기를 조사해 보겠다고?]
핸드폰을 타고 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시바가 잠든 새벽.
아카데미가 끝난 뒤, 나름의 계획을 짰다.
침대에 기댄 나는 시바가 깨지 않게 조심히 별에게 말했다.
“네. 거기에 아는 사람도 있고, 걱정되기도 하니까요.”
[…시헌이 네가 그렇다면 말리지는 않겠는데. 세영이는 너무 위험하다고 반대할걸?]
이세영에게는 따로 언질없이 행동을 할 생각이었다.
지금 내가 가진 힘을 설명하기도 복잡할뿐더러 무엇보다 그 사람은 내가 아무리 강해도 걱정할 사람이니까.
[……진심이야?]
“네.”
[아고…… 커플이 아주 똑닮았네.]
사실대로 전하니 머리가 아픈 듯 곡소리를 내는 별이.
그래도 내 선택을 방해할 생각은 없는지 이내 수긍해왔다.
[그래서… 어떻게 숨기려고? 네가 대놓고 행동하면 정보가 새가는 건 멈출 수 없어. 세영이 걔도 여우같아서 금방 알아챌 걸?]
“어느정도 대책은 있어요.”
나는 협탁에 손을 뻗어 그 위에 한동안 쓰지 않았던 가면을 들어올렸다.
새벽의 희미한 전등 불에 비치니 눈에서 안광이 비치는 듯 하다.
“헌터 자격…. 하나 만들 수 있죠? 아예 변장을 해서 다녀버리게. 아카데미 신분도 숨기고요.”
[……응? 아예 위조 신분을 만들어버리려고? 어렵진 않은데 일이 좀 복잡해지는데 그럼.]
“아 좀 어려워요?”
내 물음에 별은 킥킥 웃으며 애교있게 속삭였다.
[아니이~ 좀 어려운게 아니라 많~이 어려울 것 같은데. 이거이거, 뽀뽀 한 번으로는 만족 못해. 어이 이씨! 값이 좀 비쌀 거야.]
“…하하하. 해달라는 건 다 해줄게요.”
[정말이지?! 나 이거 녹음했따? 진짜다?]
꺅꺅~! 소리를 지르는 별.
샛노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빙 꼬아대며 잠옷 차림으로 웃고 있을 그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호재요~’ 하고 한참을 소리치던 별이 이내 다시 용건을 물었다.
[…그래서. 이름이나 나이, 세부사항은 내 마음대로 하면 돼?]
“아 나이는 관계 없고 세부사항도… 대충 해주세요. 원래 이런 일 은근 많을 거 아닙니까.”
[그치. 협회에선 이미 하나의 상품이나 다름없는 걸.]
방금 신분을 만드는 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과장하던 걸 벌써 잊어버렸는지.
별은 간단하다며 말했다.
[그럼, 그냥 하나 만들어 준다? 그래도 최대는 C급이야.]
“네. 아 맞다.”
[응?]
앞으로 몇 번이나 쓰게 될 신분일지 모른다.
C급이긴 하지만 헌터도 헌터마다 달라서. 내가 받게 될 신분은 용병과 비슷한 역할을 가진다.
협회에도 속하지 않고 말 그대로 자유.
신분을 얻기도 쉽기에 범죄를 숨긴 이들이나 과거의 인물이 새로이 이름을 세탁하고 이 길을 걷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이 신분을 받아 행동한다는 건.’
양지와 음지 사이에 각각 발을 하나씩 걸친 그림자가 된다는 것.
플라워라는 존재는 어둠 속에 있어 잡으려면 직접 그 안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다행인건, 내가 이 세상이 굴러가는 판을 잘 알고 있다는 것.
‘마약 유통…. 살인. 밀매.’
곁눈질로 배워온 것 만이 아닌 직접 눈으로 보고 뼈저리게 느껴왔다.
과거의 환멸감을 경험으로 살릴 때가 온 것이다.
개흙같은 미래.
거무스름하고 미끈미끈해, 질척하고 기분 나쁜 음지.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사회의 편린으로 어려있어, 내가 모르는 새에 나를 향해 날을 들이밀지도 몰랐다.
‘선생님과 스승님은 나를 막으려 들겠지만.’
이건 아집이다.
내 고혈을 빨아먹을 준비가 된 사특한 모기 새끼들을 가만 두고 볼 수 있을까.
지금 내겐 마음껏 떠벌릴 이름이 필요했다.
그리고 내게는 마침.
딱 좋은 이름이 하나 있었다.
“도원.”
이도원.
새로이 받은 헌터의 이름.
연분홍빛 복사꽃이 이름 한 자 한 자에 서려 있는, 언젠가 그녀가 붙여준 소중한 이름이다.
지금은 천도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지만.
언젠가 그녀가 알았을 때, 혹여 내 눈앞에서 사라졌을 때 그 이름을 듣고 찾아올 수 있도록.
“도원으로 할게요.”
느즈막한 새벽.
나는 얼굴에 단출한 가면을 덧씌웠다.
그대로 바로 옆에 있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지지직.
협탁의 전등불이 반사되어 눈 안에 들어온다.
짙은 흑색의 눈동자.
홍채에 띤 갈색빛의 이채가, 가면의 안에서 서서히 발하고 있었다.
*****
“숲지기 선발전에 뽑힌 너희들을 다시금 환영한다.”
엘 아카데미, 본관 12층.
세계적인 행사인 숲지기 선발전에 참여된 바. 우리는 반을 옮겨 한국지부가 아닌 다른 곳에서 수업을 듣게 됐다.
“…엘 아카데미의 훌륭한 인재. 목(木). 이번 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너희들 중에 숲지기의 역할을 맡는 사람이 있다면 좋겠구나.”
한국지부에는 뛰어난 성적을 가진 생도만을 골라 정진반을 운영한다.
집중 교육을 하는 편이 훨씬 생도의 수준에 맞게 키워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은 정진반보다 격이 높다.
엘리트 중에서도 최고의 재능을 가진 사람만이 이곳에 속하니까.
15명. 여기 자리에 있는 모두가 선발전에 나가는 인물들.
일본, 중국, 미국 등등 각국에서 찾아온 엘 아카데미의 생도들이 어깨에 힘을 주고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교과 공부는 한동안 하지 않는다. 순수하게 실력을 기르기 위해, 커리큘럼을 정비하고 특훈을 거쳐나갈 것이다.”
지금 나에게 이게 필요할까.
저 교관에게서 배울 점은 분명히 있겠으나 딱히 가져갈 메리트는 느끼지 못했다.
눈으로 흘기면 배울 수 있는 상대의 기술.
처음 내가 아카데미에 왔을 때, 그러니까 가장 잠재력이 높을 적엔 마법이나 검술을 직접 보기만 해도 따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일정 수준에 한해서지만. 모두가 놀랄만한 재능임은 변치 않는다.
‘…어딘가 쓸데가 있겠지만.’
아카데미에서 배울 수 있는 건, 단적으로 말해 없다.
그나마 내가 모르는 마법에 대한 지식을 가져가는 정도.
숲지기 선발전에서는 굳이 실력을 드러낼 필요 없이 마법만을 사용할 예정이었다.
“…….”
나는 생각을 정리하며 슬쩍 옆자리로 눈을 흘겼다.
얼굴보다 먼저 시야 안에 들어오는 거대한 가슴.
압박브라를 차도 그 위용을 뽐내는 그녀의 미모는 여기서도 빛을 발한다.
산수유.
지금까지 은근히 나를 피해온 녀석.
“…야.”
“…….”
산수유는 내 말에 슬쩍 시선을 주더니, 감정 없는 얼굴로 볼에 공기를 넣었다.
“왜 그렇게 화났어?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니?”
최대한 조곤조곤 말했다.
산수유는 앙다문 입을 동그랗게 말아 내밀었고. 이윽고 자그마한 손을 들어 올려 내 어깨를 쳤다.
-툭.
미약하게 느껴지는 고통.
산수유치곤 강하게 때린 편이다.
“…말도 안하고 갔어.”
원망하는 듯한 눈초리, 삐죽 내민 입술이 들어가질 않았다.
“시언이 미워. 친구 만들어준다고 해놓고.”
“그래도 친구 많이 만들었잖아. 저번에 보니까 친하던데?”
산수유의 소원은 다소 방향은 잘못됐으나 이루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말한 것인데 산수유는 더욱 더 불만스런 듯 볼에 바람을 더 부풀렸다.
빵빵해서 마치 시바같은 얼굴이다.
“……수련회 같이 못 즐겼어.”
말을 하고 다시 볼을 부풀린다.
산수유같이 예쁜 사람이 얼굴에 변화를 일으키는 건, 은근히 시선을 끌어모으게 된다.
몇몇 외국인 생도들이 산수유를 슬쩍슬쩍 쳐다보았다.
“…야스도 해준다고 했는데.”
그 말은 좀….
이 상황에선 할 말이 아니지 않을까?
산수유의 투정 섞인 말은 다행이도 크진 않아서 주변 생도들의 귀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나는 헛숨을 삼키며 산수유의 뒷목을 잡았다.
“그 말은 쓰지 말자 여기서… 오해 살라.”
대체 어디서 그 말을 배워왔다냐.
트리인사이드 그 악독한 사이트가 분명하다.
나는 진정하라는 듯이 살살 산수유의 뒷목을 쓰다듬었고, 그녀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 하지마.”
볼의 바람이 빠져나가고 다시 1단계 삐짐 상태로 돌입했다.
입을 앙다물고 은근히 째려보기만 할 뿐인 1단계.
대놓고 노려보면서 볼을 양껏 부풀린 2단계.
3단계는 어찌될까 궁금하지만 일단 이 녀석의 화를 푸는게 급선무였다.
“아, 이번에 새로나온 떡볶이 먹으러 갈래?”
“떡볶이?”
조용히 귀에 속삭이듯 말하자 산수유의 얼굴이 사르르 풀린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 이름. 맵쫀맛 떡볶이.
산수유는 정말 진중하게 고민을 하는 표정을 짓더니, 핫! 하고 다시 나를 쳐다봐왔다.
“……먹을 걸로 땡 치려고.”
안 통하네.
확실히 예전 산수유와 많이 다른 감이 있었다.
그전에는 정말 떡볶이 사준다고 하면 낯선 아저씨도 쫄랑쫄랑 따라갈 모양새였는데.
지금은 어느정도의 자제심을 가진 것이 보였다.
‘너무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져서 그런가.’
맛있는 걸 먹다 보니 이제 떡볶이로는 만족할 수 없나?
치킨이니 맥주니 하며 친구들과 맛난 걸 먹으러 돌아다니는 산수유를 떠올린다.
그렇게나 먹었으면 떡볶이로는 눈에 안 찰 수 있다.
내 원죄가 깊었다.
“음… 그럼 뭐 해주면 화가 풀릴까.”
나는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거렸다.
가슴 아래에 팔짱을 낀 채 눈을 흘긴 산수유는, 내 혼잣말을 듣곤 입이 간지러운지 슬쩍슬쩍 신호를 보내왔다.
모른 척 딴청을 피우자 결국 먼저 말을 해왔다.
“…술.”
“응?”
술?
“칵테일 마시고 싶어.”
“칵테일? 그건 갑자기 왜.”
“…애들은 나 술 마시지 말라고 하는 걸.”
산수유가 끝장을 볼 때까지 술을 마신 걸 본 적은 없었다.
딱 기분 좋게 생맥주 한 잔 하고 헤어지는 정도.
애가 주정이 심하면 얼마나 심하다고 마시지 말라고까지 하는 걸까.
어렵지 않은 부탁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화 푸는 거다?”
산수유는 개의치 않은 듯 눈을 굴리더니,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의 눈에는 감정 없는 소녀가 볼에 바람을 집어넣다가 뺄 뿐인, 은근히 무서운 광경이었으나. 내 눈에는 그녀의 감정이 읽혔다.
나는 다시 앞의 교관을 보기 전에 산수유에게 물었다.
“아 맞다.”
“응?”
“너 뭐 힘든 일은 없지?”
“무슨 소리야?”
일단 던져봤으나 시큰둥한 반응.
산수유 이 녀석도 갑자기 사라지는 통에, 내가 지속적으로 눈에 두어야 할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래 별 일 없으면 다행이지.”
연쇄 다발적으로 사건이 터져서 손 쓸 틈도 없이 번지지 않기를 빈다.
나는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번잡해진 숨을 옅게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