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화 > 동거 (2)
“기합.”
“기, 기합!”
이세영의 말이 떨어지자, 별이 양 손을 벌벌 떨었다.
초등학교 교사들이 흔히 초등학생들을 벌 줄 때 쓰곤 하는 마법의 주문. 손들고 서 있어.
무릎을 꿇은 별은 영문을 모르는 상황에 울컥해 눈망울이 흐릿해졌다.
“왜 그랬어.”
“세영쟝 뭔가 오해가 있는데… 이거 진짜, 별 거 아니거든요. 정실이 이런 거 가지고 화내면 진짜 별로인 거 알-”
“손 내리지 마.”
“히익!”
세영의 윽박에 깜짝 놀라 두 손에 힘을 더 주는 별이.
아주 옛날에, 교실 구석에서 소설을 보던 장면을 선생님께 걸려 애들 앞에서 그 소설의 내용을 읽던 트라우마가 재발하는 것 같았다.
-쿠, 쿠콰카캉! 위드는 검을…
-앜핰핰 쿠콰카캉이래.
-풉, 푸흡 큭큭.
-…됐다 그만 읽어라.
사람이 거 판타지 소설 좀 볼 수 있지. 치사하게 그런 걸 가지고 놀리냐.
중학생 시절. 스타일도 좋지 못했고 수수한 처녀였던 별이었기에. 중학생 별이는 그런 난처한 상황에서 유머러스하게 넘기지도 못하고 얼굴만 붉힌 채 자리에 앉을 뿐이었다.
울컥울컥, 별이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세, 세영아.”
“왜.”
이세영은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별이를 노려봤다.
“…내가 잘못한 건 맞는데.”
“맞는데?”
“솔직히 나도 시헌이랑 좋은 시간 보내고 싶었어. 응? 알지?”
지금 상황에서 그게 처맞는 말이라는 걸 왜 모르는 걸까?
이세영은 한숨을 내쉬며 양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후우…야.”
“으, 응.”
“예민한 게 군건 미안해…. 솔직히 나 걔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도 알잖아.”
“응. 그치.”
마치 어딘가에 씌인 듯 좋아했었다.
갑자기 전화해선 뭣 좀 도와달라고. 무슨 사이비? 그런 습격이 의심된다고.
만약 아니라면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던 그런 세영의 모습이 별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너랑 시헌이랑… 뭐 잔다거나 그런 걸 뭐라하는 게 아니야.”
“……응.”
알만한 건 다 안다.
누구랑 박고 박히던. 아니 박히는 건 문제가 되겠지만 아무튼.
누구와 뒹굴던 그것은 이세영의 재량이 아니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이시헌의 생각과 행동에 맡기는 것이라고. 이번 수련회에서 이세영은 그걸 깨달았다.
“시헌이가… 플라워랑 걔네들한테 노려지는 건 잘 알지?”
“응.”
“……그리고 세계수님한테도 노려질 수 있어.”
“…그렇지.”
생각 외로 무거운 사안이다.
손을 번쩍 든 별은 주눅이 든 얼굴로 양 손을 아래로 내렸다.
세계수와 플라워 그 둘에게 노려진다는 건.
이 세계에서는 발 붙일 곳이 아무런 곳에도 없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 사람의 연인도… 비슷한 취급을 받으리라.
“알지. 정말 나중에 가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거. 그래서 세영이 네가 나랑 플라워 잡겠다고 한 거였잖아.”
그리고 그건 이시헌이 직전에 눈치를 챘다.
간곡한 그 남자의 연속되고 절절한 요청에, 이세영은 하는 수 없이 그 계획을 무르는 수밖에 없었다.
“……세영아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
“응?”
“네 성격이면… 시헌이 부탁 무시하고 진행시키지 않아?”
저돌적이고, 자신의 생각대로 일을 진행시킨다.
좋게 말하면 확장적이고 적극적인거고 나쁘게 말하면 싸가지가 없는 거다.
별과 이세영은 아카데미 시절부터 평범한 인간관계는 벌써 초월한 친우이자 전우.
그리고 훌륭한 사업적 파트너임과 동시에 같은 애인을 공유한 두 여성이다.
때문에 별은 처음 이세영에게 전화가 와서… 이시헌에게 쩔쩔매는 모습을 보여주었을 때 내심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뭐 정작 그땐… 내가 억울해서 떵떵 소리쳤지만.’
어쩔 수 없잖아.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데 갑자기 취소 시키라니.
아무튼 이세영은 절대 그럴 성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뭐 이세영 자체가 성격이 뒤틀려 있기는 하다.
그 성격 더러운 애가 강간을 당하고 사랑을 해서 순해졌다는 것 자체부터….
“너는 몰라.”
돌연히 세영이 말해왔다.
“응?”
별의 되물음, 이세영은 진심으로 깊게 한숨을 뱉었다.
“그때… 아니 진짜 모르겠어. 수련회에서 걔가 잠시… 세계수? 뭐 그것 때문에 사라진 일이 있었거든?”
“어어. 그거 들었어.”
“거기서 돌아와서 만났을 때… 걔 표정이 어땠는지 알아? 눈앞에서 사라지면 정말…. 그거 알잖아. 무너지기 직전의 사람이 어떤지.”
잘 알고 있다.
이세영도 알고 있고. 그녀들의 과거는 순탄치 못하다.
죽음과 비슷한 경험도 몇 번이나 해봤다.
“그 날… 설득당하는 척 하고. 원래는 계획 그대로 가려고 했는데.”
“했는데?”
“……편집증이라도 걸린 것처럼. 계속 묻는 거야.”
“어떻게?”
“뭐긴 뭐야 사랑고백이지.”
“……뭐여 시방. 염장질?”
“그게 아니라. 목소리 톤이 달랐어…. 금방이라도 뒤질 듯해선, 끈적하게. 어후. 진짜.”
이시헌이 그랬다고?
“아 근데 유독 그날 밤만 그랬고… 다음 날부터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지.”
“그래?”
“그날 특히 뭔가 돈 거 같아….”
별이 아는 이시헌은 그렇지 않았다.
사랑의 크기에 차이가 있냐. 뭐 그런 말로 단정 짓기는 너무 넘겨짚기였지만. 시헌은… 좀 장난끼 넘치는 그런 모습이었다.
물론 최근에는 진중한 모습도 많이 엿보이고 있다.
그렇다고 심하냐? 그건 아니고. 딱 별이 기준으로 여자가 좋아할만한 수준이었다.
이세영은 반 쯤 눈물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그런 말을 듣고 어떻게 원래 계획을 진행시켜.”
나름대로 마음 고생이 많은 모습이다.
“그랬구나.”
“응.”
침울한 이세영을 보며 별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이세영의 사랑은 알다 가도 모른다.
그야 물론, 사랑이란 게 그렇긴 하다.
언제든지 이어질 수 있고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다.
서로 목숨을 거는 연애도 얼마든지 있었다.
지금까지 역사를 봐도 숱하게 많았다.
고작 여자 한 명 때문에 나라를 말아 먹은 사례.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두 남성이 결투를 하다 죽은 사례.
그리고 그런 수많은 집단 중에서, 이세영같이 갑작스레 인연을 찾아 확신을 하곤. 맹목적으로 변하는 사랑도 어딘가엔 존재하지 싶었다.
‘그건 내가 이세영이 아니니까. 공감을 못하는 부분이긴 해.’
어떤 방식으로든 사랑을 느꼈겠지.
그건 아무도 공감하지 못할 테다.
이 사람만 가지는 사랑이라, 그건 좀 특수해서 멋있긴 하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시헌은 좋은 사람이다.
강간을 당했음에도 그 사람의 성품을 꿰뚫어 봤으니. 그 점은 대단하다 할만하다.
“그래서.”
이세영은 다시 이야기를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꼬아 놓은 다리를 풀고 고개를 숙이자, 커다란 가슴이 눈 안에 들어왔다.
정말 지나치게 크지도 않고 모양이 잘 잡힌 가슴이다.
“……젖소.”
“뭐 이 년아?”
스타일 좋아서 부럽다.
별은 속으로 고양이같은 혀를 삐죽 내밀었다.
그런 별의 얼굴을 보지도 않은 채 이세영은 아랫입술을 짓이기며, 열을 토해냈다.
“아무튼. 그렇게 사정사정하길래 겨우 들어줬더니. 이 녀석이 이제는 나랑 똑같은 짓을 하고 있잖아. 그것도 나 몰래!”
그건 그렇네.
이시헌은 이세영에게 나서지 말라고 하고 자신이 직접 나서는 꼴이었다.
“나보다 약한데… 플라워랑 싸울 수 있겠냐고!”
“시헌이가 너보다 약한…가?”
“그러면?”
아직 이시헌의 무예에 대해선 별이도 이세영도 잘 파악되지 못한 상태다.
물론 토너먼트에서 보여준 그의 기백은 대단했다.
그러나 아카데미. 상대도 끽 해야 생도. 강해봐야 얼마나 강하겠어. 게다가 실전 경험도 적다.
요컨대 이시헌의 파악된 실력은 A급 중에서도 약한 편이었다.
“어디 보자… 예전에 플라워 테러 일어났을 때… 백도님이랑 같이 엔트 잡았으니까. 최소 B급 상위. 거기서 토너먼트에서 고점을 찍었으니…. 많이 쳐줘도 A급 하위. 확실히 플라워랑 싸우긴 애매하네?”
“봐. 그렇잖아.”
별의 말에 이세영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근데 세영아.”
하지만 별은 이세영의 말을 끊어내곤, 진중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팔짱을 끼고 숨을 잠시 끊어 집중을 유도 시킨 뒤. 나직히, 그리고 상냥하게 말했다.
“뭔가 단단히 착각하는 게 있는데. 시헌이는 플라워랑 싸우는 게 당연하지 않아? 시헌이는 플라워를 적대하고 있고. 마찬가지로 플라워도 시헌일 노리고 있잖아.”
실력이 어떻니 저쩌니.
애초부터 그런 걸 따지는 게 이상하다.
이시헌은 이세영이 이 싸움에 난입하지 않기를 원했다.
아마도 그 이유는 만에 하나, 이세영이 무슨 해코지를 당할까 봐.
“알지… 그런 건 이미 알아.”
별의 말에 세영은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이세영이 이렇게 고민하고 걱정하는 이유. 이시헌의 실력을 따져가며, 그가 플라워와 싸우는 걸 반대했던 진짜 이유.
그리고 그것은 이시헌이 별이에게만 정보를 공유하며, 이세영에게는 알리지 말라고 했던 이유와 동일했다.
그냥.
서로 걱정해서.
진짜 뭣도 아닌 이유로 이 남녀는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아오……너희들 진짜 똑같다.”
어쩜 이렇게 서로 생각이랑 행동이 맞아 떨어지는지.
별은 기가 차다 못해 응어리진 답답함에 화를 내고야 말았다.
“아니… 세영아. 내가 내 남친의 다른 여친한데 이렇게 박탈감을 느껴야 해?”
“…뭐, 뭐? 갑자기 무슨 개소리야.”
“아 그래 너 첫여친… 첫여친 맞지. 네네. 잘 통해서 좋겠네요 아주 그냥. 서로 죽지 말라고 보듬어주는 게…… 보기 참 좋아. 그치?”
속사포로 쏟아내는 별의 화가 섞인 문장들.
이세영은 별의 말을 들으며 눈을 동그랗게 키웠다.
“야. 제발. 잘 들어. 그냥… 서로 좀, 너무 아끼는 거 같아 내가 보기엔. 시헌이나 너나 둘이 같이 믿어주면 안 돼?”
“…….”
“세영이 너 원래 안 그랬어. 이상하게 시헌이만 연관되면 이성을 잃어.”
“그런가?”
“거봐 시바! 지금 여기서도 ‘뭐래 병신이.’ 이 말 나왔어야 했거든?”
“뭐래 병신이.”
“그래 인마!”
반억지로 애써 유쾌하게 웃는 별이.
세영이는 머리카락을 꼬아 대며, 창문 바깥의 일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너무 좀, 그런 걸까.”
요즘 그렇긴 해.
항상 생리도 아니고 애가 무슨… 이렇게 예민해서.
절대 아까 초등학생 마냥 손들라고 해서 원한이 서린 게 아니다.
별은 속으로 자기 합리화를 한 후, 나름대로 이세영에게 알맞은 조언을 해주었다.
“세영아.”
“응?”
“…그냥 예전처럼. 둘이 잠깐만 시간을 가져 봐.”
잠시 떨어져 살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거리가 멀면 각자의 생각을 하게 되고. 각자의 입장에 마음대로 상대를 판단하게 된다.
이세영의 기행은 어떻게 보면 애정결핍의 일종일지도 모른다고. 자칭 정신과 의사 별은 그렇게 판단을 내리기로 했다.
“둘이?”
“너네 맨 처음, 단 둘이 썸탔을 때 어떻게 살았어?”
“그냥…. 심심하면 불러서 술 마시고. 서로 화나는 거 있으면 말 들어주고 그런 거?”
“그래 씌잉! 그걸 하라고 그걸!”
왜 혼자 끙끙 앓고 있는거야 도대체?
안 그래도 계획이 취소된 마당에. 이세영은 약간 시간이 남아있다.
별이 잔뜩 화난 제스쳐를 표하자 세영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볼까?”
“후우. 그래.”
“그래도 친구라고, 잘 말해주네.”
별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이세영. 별은 가슴이 따스해지는 걸 느끼면서도 고개를 휙 내저었다.
“아 몰라. 나 아까 손 들고 있어서… 되게 기분 나빠졌거든?”
“에이 야.”
“확 그냥 남친 다른 사람한테 뺏겨버려라!”
“그건 선 넘는 거고.”
“앗…그런가? 죄송”
오랜만에 같이 술이나 한 잔 할까.
뒤이은 세영의 제안에 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자.”
부협회장실을 나와, 호프집으로 향하는 길.
신이 난 별을 보며 이세영이 무언가 생각난 듯. 별에게 말했다.
“야 근데 그거 아냐?”
“응?”
“우리 이러고 있는 동안…… 열심히 시헌이 꼬시는 여우가 있어.”
여우? 불여시!?
별이 얼굴을 싸악 굳히자, 이세영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한 번 보더니. 킥 웃었다.
“어디 보자. 지금쯤 하고 있겠네.”
*****
“이거 맞냐.”
아무리…. 동거 첫날이라도 그렇지.
침대를 같이 쓰는 거야 뭐 그럴 수 있다 치자.
정말 혼수로 장만해올 만한 침대 크기였지만 나쁠 건 없지 않냐.
“근데… 첫 날부터 이러기야?”
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진달래의 끈적한 눈동자가, 내 하복부를 응시하고 있었다.
“……당신.”
대학생. 동거.
자취방…. 알몸이 된 여친.
누가 봐도 뻔한 전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