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화 > 별따먹자 (1)
-벼 리 는 춤 추 고 : ……천잰데?
별에게서 온 칭찬 메시지.
웃으며 답장을 전했다.
-나 : 괜찮았어요?
-벼 리 는 춤 추 고 : ㄹㅇㅋㅋ
-벼 리 는 춤 추 고 : 세영이 지금 임신 테스트기 어떻게 써야 하냐고 나한테 묻는 중. 근데 그런 걸 나한테 왜 물어…… 나도 안 써 봤는데.
-나 : ㅋㅋㅋㅋㅋㅋㅋ
별과는 다음 주에 만날 예정이다.
동창회인데 기를 좀 살려 달라는 것이 그녀의 요청.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일단 최대한 남자친구 역할을 해야 했다.
“할 일 참 많네.”
숲지기 선발전에 들어가면… 위험한 인물들을 미리 별에게 알려야 했다.
개인적으로도 플라워를 조사해 그 내부를 박살 낼 생각이었다.
거기서부턴 이제 이시헌이 아니라 이도원의 신분으로 움직여야겠지만.
나는 탕 안에 잠겨 점점 얼굴을 물 속으로 집어넣었다.
꼬르르륵- 코 바깥으로 공기 거품이 튀어나온다.
‘스승님, 잘 지내려나.’
천도. 항상 내 앞에서는 웃어주던 그 아이이자, 내가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인도해준 스승님.
……무슨 일이 없기를 바란다.
자기 앞가림을 못할 사람은 아니니까.
-까똑!
그때 울려온 핸드폰 알림음.
나는 물속에서 머리를 올려,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옆에 있는 핸드폰으로 화면을 터치에 확인했다.
-산수유 : 잠시 시간 되십니까?
산수유의 이름을 하곤 있지만, 말투로 미루어 보아 절대 그녀가 자판을 치지는 않은 메시지.
나는 즉시 화면을 두드려 답장을 보냈다.
-나 : 누구시죠?
-산수유 : 산수유님 전속 비서. 성지호라고 합니다. 저번에 뵈셨지요?
-나 : 아. 알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산수유 : 톡 내용은 바로 지워주시기 바랍니다. 아가씨께서 아시면 문제가 될 부분인지라. 혹시 지금 시간 되십니까?
-나 : 네.
나는 곧장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꾹꾹 눌러 하나하나 삭제했다.
-산수유 : 10분후에 전화 걸겠습니다.
상대편도 그 메시지만을 하나 남긴 뒤에, 모든 대화 기록을 전부 삭제했다.
우리 둘이 나눈 대화를 찾고자 하면 못 찾을 건 아니지만. 산수유는 별 일이 아니라고 여길 것이다.
나는 욕실에서 나와 옷을 입고 바로 나왔다.
진달래가 또 어딜 가냐며 궁금해 했지만 개인적인 사정이 있다고 말했다.
여자가 아니라 비즈니스. 돈에 관한 일이라 하니 납득했다.
[이시헌씨 맞으십니까?]
전화 속에서 울려오는 성지호의 젊은 목소리.
“네.”
[긴밤에 죄송합니다.]
무슨 일로 전화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이후 산수유에게 커다란 사고와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걸 알고 있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실종인지 사망 상태인지조차 모르며, 하물며 만난 지도 몇 개월이 채 되지 않은 친구 관계에 불과하지만.
내버려두기는 힘들다.
“산수유한테 무슨 일 있나요?”
[……아가씨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시고. 시헌씨가… 아무래도 산수유 아가씨와…… 떨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떨어져라?
성지호의 목소리는 혼란에 젖어 있었다.
자기가 말하는 게 옳은지아닌지 긴가민가하는 듯한 어조.
“…예?”
[죄송합니다. 저도 지금 아직 파악이 전부 안되어서. 이번 달 후순 30일에 잠시 시간 되십니까?]
숲지기 선발전의 하루 전 날.
2주하고도 조금 더 시간이 지났을 적이다.
“시간을 내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만, 무슨 문제죠?”
[사실관계가 복잡해서요.]
코르너스 가문이 워낙 크기가 크고 방대해서. 문제가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
내가 아무리 천마의 제자이자 숲지기 선발전에 참여하는 장래 유망한 생도라한들, 대외적으로는 그저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다.
코르너스 가문에게 나라는 존재는 파리일 뿐이다.
“……산수유한텐 문제 없는 겁니까?”
무슨 일인진 모른다.
이제 와 귀족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행위이니 인간과 만나지 마라. 그런 소리를 하는 건 아닐 테고.
미래를 아는 입장에서 어떠한 속 사정이 있으리라고는 예상한다.
중요한 건 산수유의 신변과 안전이다.
2주 뒤. 이야기를 듣는 건 어렵지 않으나 그 기다림 속에 적기를 놓칠 수도 있었다.
무력으로 코르너스 가문에 들어갈 생각도 있었다.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그것만 말해주십쇼. 그냥 저만 떨어져 나가는 거면 됩니까?”
[아직은 아무 일 없습니다.]
아직은.
세계적인 가문에서 가주를 이어받을 후계자의 비서씩이나 되는 사람이 말에 여지를 흘리고 있다.
이 사람이 내게 이런 말을 하는 의도가 무엇일까.
도움 요청?
[저도 파악 도중입니다. 산수유 아가씨는… 본가로 귀향 조치를 받으셨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묵묵히 수업을 받던 산수유다.
“개인적으로 문제를 조사해도 됩니까?”
[……그러시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이번에는 진심이 담긴 경고.
내 무력과는 관계없이 귀찮은 일이 많이 벌어질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어쩌나.
아는 사람과 연관되면 움직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
나는 아무런 대답 없이 핸드폰을 끊으려 했다.
-삐이이이이!
【 ‘순결의 세계수’가 경고합니다. 】
【 이번, 한 번, 기다릴 것. 】
그 순간 머릿속을 강하게 내리치듯 울려오는 경고음.
나는 눈가를 찌푸리며 상태창이 떠 있는 눈앞을 응시했다.
‘…얘는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순결의 세계수.
무슨 일이 일어나도 꼼짝 않던 녀석이 갑작스레 내 앞길을 막아섰다.
상태창이 새빨갛게 변하며 깜빡깜빡.
순결의 세계수가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쓰고있다는 것이 척 보기에도 보였다.
2주. 2주 뒤.
이 녀석의 말을 들어 나쁠 건 없다만. 행여 산수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땐 순결을 평범한 시선으로 볼 순 없을 것 같다.
“네 알겠습니다. 그때 연락 다시 주시죠.”
나는 건성으로 마지막 인사를 건넨 후 핸드폰을 닫았다.
-뚝.
한숨이 나온다.
“그래서, 뭘 물어봐도 끝까지 대답 안 하던 네가 무슨 바람이 들었냐?”
【 ‘순결의 세계수’가 당신에게 하트를 보냅니다. 】
뭐래.
아깐 말 잘하던데. 다시 말이나 한 번 해봤으면.
이번 한 번 기다리라고. 상태창으로 열렬히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냐.
그래놓고선 이제와서 다시 지문으로 되돌아간다.
나는 핸드폰을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은 뒤 목 스트레칭을 하며 자취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때 경고음으로 울렸던 난데없는 삐- 소리.
돌이켜 보니. 은근히 시바의 목소리와 닮아있었다.
*****
‘본가로 갔다고 하더니 정말인가.’
혹시나 했는데 연락받은대로.
아카데미에 들어가, 숲지기 선발전을 준비하는 반을 찾으니 본디 산수유가 앉아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영 편하진 않는데.’
속에 있는 생각을 숨기며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뭐… 오늘은 오늘의 일정이 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어젯밤에 나누었던 별과의 톡을 확인했다.
-내 마음 속 별이 : 야야야야야
-나 : 네?
-내 마음 속 별이 : 기대된당!
-나 : ……지금 새벽 3시인데? 톡 닉네임은 왜 그래요
-내 마음 속 별이 : 오늘을 기원해서 마음을 다잡아 봤어
-내 마음 속 별이 : 나 잠이 안왕!
-내 마음 속 별이 : 자…?
-내 마음 속 별이 : 자니?
-내 마음 속 별이 : (우는 이모티콘)
-피식.
톡으로 이루어진 대화를 쭉 읽어내려가는 것뿐인데 별의 활기참을 받아가는 것 같았다.
그녀의 문자들을 보기만 해도 신이 난다.
내 주변의 누구를 찾아봐도 별만큼 파이팅이 넘치는 인물이 없었다.
“오늘도 좋은 아침이다.”
마침 번역기를 타고 울려오는 기계적인 목소리.
교관이 반에 도착함에 따라, 생도들 모두가 앞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내 마음대로 아카데미 수업에 빠졌기에 의도치 않게 보충을 받아야만 했다.
숲지기 선발전에서 자주 나타나는 던전에 대한 정보. 꼭 배워야만 하는 마법 등등.
밀착 수업을 받으며 머리 안에 지식을 주입 당했다.
물론 그 순간에도 나는 이것저것 다른 생각을 했지만.
‘차는 스승님이 준 걸 탄다 치고.’
옷도 제대로 된 명품으로 구매를 했다.
패션센스는… 솔직히 말해 좋다고는 못하지만. 애써 올려놓은 매력이 있으니 허우대가 나쁘지 않으면 욕을 먹을 일은 없지 않을까.
한 벌에 돈이 수백씩 깨져나가는데. 카드를 긁을 때마다 영혼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자취하면서 싸구려 공장 옷을 입던 걸 생각하면 많이도 컸지.’
여튼. 이번 데이트만 끝나면 나는 다시 본업으로 돌아가야 한다.
휴일 속 마지막 휴일.
그리 생각하니… 제대로 즐겨야할 것도 같았다.
즐기지 않으면 또 별이 엄청 불만을 품을 게 뻔하니까.
*****
-띠리리리리.
-쿵!
알람 소리가 울리자 마자 기계적으로 별이 움직였다.
“…….”
오후 4시. 준비할 시간이다.
별은 졸린 눈을 깜빡이며 하품을 했다.
“흐아아암….”
고양이처럼 몸을 뒤집어서 스트레칭.
침대에 걸터앉아, 눈곱 정리를 하다 보니 자신이 무엇을 저지른 건지 이제야 실감이 났다.
“망했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알람을 맞춰두긴 했지만, 정말 이 시간에 일어나고야 말다니.
약속 당일에 오후 4시까지 잠을 자는 건 미친 나밖에 없을 거다.
‘애도 아니고… 기대된다고 아침까지 못 자다가……. 미쳤어 정말.’
그래도 늦을 정도까지는 아니니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준비하기로 했다.
집에서 일어나 옷장을 뒤진다.
“속옷. 뭐 입지.”
섹시? 귀여움?
별이는 오늘을 위해 준비한 두 속옷을 보란 듯이 바닥에 펼쳐놓고 고민을 했다.
노란색…. 이건 너무 애 같은 생각인가?
그렇다고 섹시한 걸 입기엔 이세영이 눈에 걸린다.
절대 그 년을 상대론 피지컬에서 이길 수 없다.
속옷뿐만이 아니라 옷도 정해야했다.
헉 소리가 나올 정도로 비싼 양복. 무슨 동창회에 그런 걸 입냐.
이세영에게 단칼에 거부당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값이 나가는 것들로다가, 최대한 자신에게 맞게 입기로 했다.
과시한다.
나 요즘 잘나가는 년이야~!
그런 느낌이 들 정도로 차려입는다.
함께 백화점을 돌아다니면서 옷을 골라준 하나뿐인 친구에게 감사를 전한다.
-넌 왜 맨날 옷 고를 때 나 부르냐?
-세영쟝이 최고.
-미친년.
“후.”
사실 하루 전에 옷을 고르고 잠에 드는 게 맞았지만.
원래 그런 계획은 세우지 않는 것이 바로 그녀의 방식.
밤중에 라면이 고프면 일단 먹고 보자는 게 별이다.
재빠르게 옷을 고르고, 옷을 홀라당 벗어던졌다.
그대로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시작했다.
-솨아아아!
“흐흥, 흥.”
뜨거운 물이 몸에 닿자,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스타후르츠의 향이 나는 바디워시를 듬뿍.
씻고 나선 로션도 아끼지 않고 발라준다.
-끼익.
수건도 두르지 않고 밖으로 나와 알몸 차림으로 몸을 닦아내며 머리를 말렸다.
마법을 좀 섞어주면 머리를 말리기 편하다.
여자들이 마법사들을 부러워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머리 말리기 편하다는 부분이다.
-탁탁.
옷을 차려 입고 바로 화장을 하니 시간은 훌쩍 지나 5시가 넘었다.
동창회.
말이 동창회지 사실상 귀족의 사교회를 좀 넓힌 경우다.
영업직이 눈에 불을 키고 찾아온다거나… 그런 경우는 많이 없었다.
그렇다고 정말 순수하게 과거를 돌이키며 즐기러 오는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고.
자기 자랑과 소개팅 목적이 조금 더 강한 동창회라 할까.
“좋아.”
거울속에 나타난 완벽 메이크업 별이를 보며, 미소를 짓는다.
나머지는 하늘에, 아니 이시헌에 맡긴다.
별은 핸드백을 챙겨 들고 지하철에 올라탔다.
약속 장소.
‘…오늘은 또 뭔 일로 놀림을 당할지.’
별은 쓰게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면… 자신도 상당한 대쉬를 받았지 않았나.
예전에 만났던 다른 동창들을 떠올리니. 은근슬쩍 자신과 잘 해보려던 남자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내가 병신이었지.’
몰랐다.
남자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는데…. 동창이라고 생각하니 무섭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자신의 중학생 찐따 시절을 알고 있다고 하니 되게 꺼려지는 게 있어서.
그러다 보니 몸이 자연스레 철벽을 치게 되더라.
그래도 그 덕에 지금 이시헌이랑 만난 걸 생각하면… 신의 한 수가 아닐까?
“킥킥.”
수줍게 웃은 별이는 마침 도착해 문이 열린 역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