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화 > 바오밥나무 (4)
“야.”
던전 게이트 앞에 죽치고 앉아 이시헌을 기다리길 3분.
슬슬 이향을 데리고 와야 할까. 아오리의 머릿속에 의문이 드는 참에 태양이 말해왔다.
“생각해보니까, 던전 안에는 카메라가 못 들어오잖아.”
“응.”
“이건 국목을 따먹으려는 형님의 개쩌는 계획이 아니었을까?”
그럴 듯한 말에 입을 벌리는 아오리.
“헉.”
그녀의 머릿속에 멋진 광경이 펼쳐졌다.
자긍심과 자존심으로 꽉꽉 들어찬 미녀를 강제로 제압하고 희롱하는 나쁜 왕.
권력과 돈과 힘으로 강제로 머리를 짓누르고 귓가에 속삭인다.
-핥아라.
-이, 이 비겁한 녀석! 수치도 모르는 것!
-핥아.
-크, 크읏. 제기랄!
처음에는 있는 욕 없는 욕, 온갖 어휘를 더해가며 욕을 할 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신음을 내지르는 암컷이 될 테지.
주먹으로 상대에게 예의를 알려준 뒤. 쾌락마저 가르쳐 서서히 자기 것으로 굴복시키는 그런 얇은 책에 나올 법한 이야기다.
마치 오크와 엘프.
여기사와 고블린.
아오리가 양 팔을 붙잡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거 좋아.”
“좋단다. 생각해보니까 그 여자도 예쁘잖아? 메이드복 입혀놓으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바니걸은?”
“그것도 나쁘지 않네. 도박판에서 바니걸에 망사 스타킹 입고 누워서 발을 내미는 거지.”
갑작스레 열린 취향 토론.
“…이제 거기에 아기씨 잔뜩 든 수액 뿌려놓고? 칩 던져줄 때마다 한 발씩?”
“뭘 아네.”
둘은 이야기를 나누며 크~ 소리를 질렀다.
야한 상상으로 인해 입 안에 침이 그득히 쌓였다.
바오밥나무, 이거 물건이다.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 바오는 망사 스타킹 위에 콘돔을 뿌려놓은 훌륭한 콘돔 거치대가 되어 있었다.
[지잉?]
카메라는 대화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 세계로 송출이 되고 있음에도 둘은 발언의 수위를 낮추지 않았다.
어차피 대화는 전달되지 않는다.
“바오라고 했나.”
싸움이 지속되고, 데미지가 중첩될수록 오히려 키와 덩치가 커지는 여자. 분노를 동력으로, 고통을 윤활유로 사용한다.
많은 국목 중 오직 바오밥나무만이 사용할 수 있는 권능이다.
그러나 두려워 떨 만한 능력조차 성욕에 절여진 둘에게는 다른 식으로 비쳐보였으니.
“커다란 엉덩이에 깔리면 어떤 기분일까?”
“우웩.”
태양의 순수한 물음에 아오리가 구역질을 했다.
마크로필리아. 큰 신체를 가진 이성에게 성욕을 느끼는 패티시.
기본으로 음란마귀의 기질을 타고난 태양과 아오리다.
“야 잘 생각해 봐. 나보다 커다란 이성한테 깔아뭉개진다니까?”
“난 누구를 만나든 다 나보다 큰데.”
“그건….”
아오리의 키는 여자 중에서도 작은 편이다.
남자의 옆에 있으면 조그만해서 뱁새를 보는 것 같다.
자신의 발을 슬그머니 들어올리는 아오리. 신발에 흙이 묻어 있다.
“넌 밟히는 거 좋아해?”
“그거는 아닌데. 솔직히 미남 미녀한테는 뭘 당해도 기분 좋을걸?”
취향이니 뭐니 그럴 게 아니라.
태양이 한 말은 의외로 정론이었고, 이를 들은 아오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어떤 플레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랴. 자신과 관계를 나누는 이들의 모습이 성적 매력으로 달갑게 다가오냐가 문제지.
무엇이든, 기분 좋으면 장땡이었다.
*****
이시헌의 몸에서 검은 마력이 피어나던 순간이었다.
-콰앙!
그의 신형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공중 위로 떠올라 바오의 머리를 세로로 내려찼다.
던전의 바닥이 함몰된다.
“…!”
그녀의 눈동자가 수축했다.
보이지 않은 움직임을따라, 멋대로 휘둘리는 몸.
검은색의 그림자가 던전 안에 돌아다니며 수십번씩 그녀의 몸을 강타했다.
-쾅! 쾅! 쾅!
어깨와 허리. 복부.
장기가 소리를 지르며 온 근육이 찢어질 듯 아팠다.
잠시나마 바오의 눈동자가 위로 올라가며 의식이 끊겼다.
재차 정신을 차리고 상대의 움직임을 따라가려 애를 써도, 뒤늦게 손을 뻗지만 다가오는 것은 더욱 빠른 상대의 움직임이었다.
손날을 피해 중심을 낮춰 다가오는 이시헌.
말 없이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자신이 때릴 곳을 응시한다.
그의 손에 흰색의 마력이 일렁였다.
-일(一)의 형(形). 백도(白桃).
‘직격은 위험하다.’
그런 생각을 품었음에도, 자신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눈으로 따라가는 속도에 반해 바오의 움직임이 훨씬 느렸다. 결국 주먹을 허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에 그녀의 복부에 피어나는 흰색의 꽃.
기다란 한 줄기의 마력이 던전의 복도를 따라 실선을 그었다.
-퍼억!
귀청을 찌르는듯한 소리.
바오의 신체가 그대로 4~5m가량을 밀려났다.
밀려나다, 도중에 멈춘다.
바오는 선채로 공격을 버티곤 두 눈을 부릅뜨며 이시헌을 바라봤다.
몇 초가 되지 않는 시간동안 얻어맞은 신체는 희끗한 수증기마저 일고 있었다.
“…크흡, 카학.”
참지 못해 입 밖으로 내보낸 신음 소리. 입가에서 침이 줄줄 늘어진다.
돌연히 일전에 보았던 그 여자가 내뱉은 말이 생각이 났다.
-대체 왜 그렇게 이시헌을 찾으려드는 건데?
-개인 사정이라고 말했을 텐데.
-……걔를 이길 순 있고?
꼴사납게 도망다니면서 활을 쏴재끼던 그 여자의 말.
검은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자신을 비웃던 그 눈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걔랑 싸워서 이기는 것도 힘들텐데.
-그래봐야 마법사다.
-마법사? 뭐래, 걔 주특기는 그거 아닌데.
이런 힘을 숨겨놓고는 왜 마법사 행세를 하는 건지.
바오는 턱의 침을 닦으며 파르르 떨리는 눈을 고쳐떴다.
상상 이상의 강함이다. 지금의 자신으로는 턱없이 상대가 불가능할 정도다.
‘후우…….’
정신을 고치며 고개를 들었다. 양 주먹에 땀을 쥐었다.
기분이 좋았다.
“재밌네.”
그녀의 입가에는 번지는 사나운 웃음. 노란색 눈동자에 비친 검은 마력이 흉흉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상대가 다가온다. 정직한 움직임이다.
잡기술이 담기지 않는 정권. 그 공격이 마음에 든다.
바오는 거대한 주먹을 뻗었다.
그 짧은 새에 더욱 강해진 신체다.
-콰앙!
주먹과 손, 두 마력이 충돌하자 던전이 떨렸다.
천장에서 먼지가 내려오며 금이 간 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재밌어…!”
광기에 벅찬 웃음. 이시헌의 눈가가 비틀린다.
“……안 되겠어. 오빠고 자시고… 일단 한 판 붙고 보자고.”
그녀의 근육이 팽창했다. 흥분해 뿜어지는 숨에 그득한 열기가 튀어나왔다.
몸의 대화. 누가 더 강한지를 가르는 싸움.
도망치고 쫓는 그런 지루한 연장전이 아닌, 직접 맞부딪혀 어느 쪽이 약한지를 결정한다.
아라비드(arabid).
바오가 속한 부족에서는 개인 간의 대립이 있을 때면 각자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다.
죽음을 불사한다. 몸이 꺾이더래도 사나운 정신만은 고스란히 남는다. 신성한 싸움에 죽은 이들은 영혼이 되어 자신들을 지켜주리라.
메마르고 황폐한 땅에 이 전사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오직 힘을 숭배하는 것뿐이었다.
바오밥 · 많은 씨의 아버지.
그녀의 신체는 더욱 커져. 이젠 복도에 서 있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지금 이 순간만은 싸움을 즐기겠다.
오빠를 쫓는 것도 잠시 멈추고.
그 빌어먹을 양반따윈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눈앞의 상대를 물어뜯겠다는 생각만을 품는다.
그런 맹호의 의지가 눈매에 드러났다.
던전의 바닥에 웅크려 네 발로, 자신의 어금니를 내 보이면서.
가히 먹잇감을 향해 달려드는 암사자와 흡사하다.
주먹은 상대를 짓이길 듯 단단했으며, 지금 이 순간 여성의 매력 따위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녀의 신체에는 이미 맹렬한 붉은 마력이 타오르고 있었으니.
한 마디로, 꼭지가 돌아버렸다.
*****
바오밥나무의 성장은 쉽지 않다.
첫 싹을 틔울 때. 그리고 그것을 발아하는 과정에서 우선 적으로 들불이 먼저 일어나야 한다.
거친 땡볕 아래 활활 타오르는 불구덩이 속에서, 바오밥나무의 씨앗은 두꺼운 껍질을 벗고 잿더미가 가득한 땅 위에서 싹을 틔운다.
그러한 성장 배경은 실제 목인들에게도 적용된다.
아프리카는 게이트로 황폐화된 곳이나 다름없어서. 마물의 파도로 인해 피난을 반복하며, 7살 적부터 검을 드는 법을 배운다.
죽어가는 어린 목인들은 매달 수 천 그루.
그리고 그런 목인들을 지키려다 마물에게 당하는 목인도 어린 녀석들에 못지 않다.
그나마 신체 능력이 뛰어난 목인이라서 살 수 있는 거지, 아프리카에는 이미 인간이란 종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그렇기에 발육은 뛰어나고 신체는 월등하다.
전투를 잘 하지 않는 목인들은 전부 떨어져 나가고 도태되었으며.
그 끝에는 유전적으로 월등한 인물이 완성이 된다.
이제야 스무살이 되어 성인이 된 바오가, S급 헌터와 동등한 취급을 받는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바오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목을 풀었다.
으드득. 들려오는 소리가 인상깊다.
“안오고 뭐해.”
방금 주먹을 나눠보고 알았다.
지금부터는 아까처럼 압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일부러 백도까지 써가면서 한 건데.’
반격할 틈을 주지 않았다.
헌데 그걸 버티곤 오히려 자신의 양분으로 삼더라.
크기는 더 커져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흑도는 아니고.’
그건 너무 강하며 반동도 터무니 없다.
과거를 다녀오며 위력이 수 배는 강해진 흑도다.
눈앞의 상대로 꺼낼 힘도 아니거니와, 무엇보다 생사결을 대비한 마지막 발악과도 같은 힘이다.
원래였다면 과거에서도 개선된 흑도를 사용할 마음은 없었다. 정호문 그 인간을 만나서 어쩔 수 없이 사용했을 뿐이지.
‘많이 귀찮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자세를 잡자, 바오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후웅!
그녀가 움직이자 바람이 일었다. 가속을 담아 나를 향해 내리친 일격을 주먹으로 맞받아친다.
-쿵!
주먹이 부딪히자. 손가락의 마디부터 시작해, 연결된 손등과 팔뼈가 비명을 질러댔다.
쾅. 이어지는 이격(二擊).
막는 걸 포기하고 뒤로 물러서자 상대는 그보다 앞서 세 발자국 걸어왔다.
내 얼굴과 녀석의 얼굴이 닿을 듯 가까워진다.
코와 코가 닿을 거리에서 바오는 사나운 눈을 나에게 가져다 댔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뿜어대는 부엉이같이 노란 눈이었다.
“…좋은 눈을 하고있네 너. 그곳 사람들은 전부 그러냐?”
“뭐. 도원향?”
“왜 우리 오빠가 거기로 도망갔는지 알 것-”
올려치는 무릎.
“-같네!”
가까스로 고개를 비틀어 피했다. 마력의 일렁임에 시야가 한순간에 어그러졌다.
내 시야를 가리고 쏟아지는 주먹. 앞을 보기를 포기하고 기감에 맡겨 받아친다.
계속해서 빨라지는 속도. 점차 강해지는 힘.
그 자세나 움직임에 기술이랄 것은 없었다.
짐승같은 몸놀림으로 오직 힘과 속도에만 집중한다.
-꽈악!
뻗은 팔을 바오가 잡아 비틀 듯 쥐었다.
더이상 내가 도망갈 수 없도록 강하게. 뼈가 부러질 듯이 쥐어온다.
“잡았다.”
바오의 입가에서 회심의 미소가 걸치던 때. 나는 팔꿈치 관절의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으드드득!
“…무슨-”
관절이 뒤틀리며 기형적으로 튀어나온 팔.
아무렇지 않게 몸을 돌려 바오의 주먹을 피하고 그녀의 얼굴을 강타했다.
내 팔을 놓은 바오가 얼굴을 부여잡으며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드득, 드득!
팔이 돌아가며 뼈가 다시 맞춰진다.
“……너 사람이냐?”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언제까지 커질 거냐?”
“킥. 이길 때까지.”
싸움 도중에도 경악을 숨기지 않는 얼굴.
나는 손을 가볍게 쥐었다 피며 멀쩡해진 팔의 감촉을 느꼈다.
“여기 와서 적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어.”
“그러냐.”
“이시헌이라고 했냐?”
고개를 끄덕이자 바오가 중얼거렸다.
“기억할게. 좀 치는 새끼라고.”
의역이나 의미는 확실하게 전달된다. 번역기로 들려오는 바오의 말에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대로면 끝이 없다.’
전투의 흥분이 지속될 수록 저 여자는 강해지기만 한다.
대기만성은 내 특성이 아니라 저 여자의 기질이었어야만 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 나는 방법을 강구했다.
‘흥분을 잠재울만한 그런 게 있을까.’
날뛰는 정신에, 얼음장같이 찬물을 뿌릴 수있는 방법.
‘……색공?’
순간 머리를 탁 치고 지나가는 한 가지의 방안.
나는 즉시 마력을 펼쳐 두 손가락에 둘렀다.
푸른색의 마력, 그러나 약간 보라색 빛이 감도는 듯도 하다.
다른 사람한테라면 먹히지 않겠지만, 분노와 전투의 흥분을 원동력으로 하는 바오에 한해서라면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전투에 이걸 쓴다니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데.
잘 하면 될 수도 있다.
‘다만…. 이거 성감대를 찾아야 하는데.’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을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을 굽혔다.
‘모르겠다.’
혈을 찌르듯이.
그냥 있는 곳 다 찔러보면 하나는 걸리겠지.
-웅웅!
거칠게 진동하는 마력을 온 신체에 두르며 나는 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