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세계수를 따먹다-258화 (254/657)

< 258화 > 잎사귀의 선택 (2)

[인사.]

“안녕하십니까.”

[그게 다야?]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방 전체에 울려 퍼진다.

회나무, 메리가 심어진 곳은 사방이 새하얀 빛무리가 뿜어지는 공간이었는데. 이것들이 햇빛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으로 보였다.

바닥의 흙도 평범하지는 않았다.

안에 마력이 그득히 쌓여있어, 모종삽으로 이 흙을 퍼가면 요긴하게 쓸 곳이 많아 보인다.

[이래서 인간은 안된다니까? 인사를 하란다고 정말 인사만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가끔 어린 목소리를 잘 내는 여자들이 있는데, 지금 메리가 내는 목소리는 딱 그 짝과 비슷했다.

좋게 보면 귀여운 목소리고 나쁘게 보면 앵앵대는 목소리.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귀여운 목소리를 가진 게 마로니에라면, 그보다 조금 더 어린 목소리였다.

그러나 마로니에는 청아해서 듣기 좋은 반면, 얘는 이상하게 듣기 싫었다.

나무라서 그런가. 스물 여덟이라는 나잇값을 전혀 못하고 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열등종이라 이런 부분에서는 잘 모르는 게 많아서요. 메리님이 잘 알려주시면, 열심히 노력해보겠습니다.”

자존심을 구기는 것쯤이야 몇 번이고 할 수 있다. 그걸로 위기를 넘길 수만 있다면 뿌리라도 핥아주지.

하지만 알고 있다. 작정하고 사람이 까려고 하면, 진짜 어떤 것이든 잡아떼 갈굴 수 있다.

그걸 군대에서 배웠다.

관등성명 하나 가지고 한 시간을 갈굴 수 있어야만 참군인이다.

[내가 언제 메리라고 불러도 된다고 했어? 내 이름이 우스워?]

“아닙니다. 너무 예쁘신 이름 같습니다.”

[예뻐? 하, 네가 뭔데 나를 평가하려 들어?]

이것 봐라.

상당히 사람 좀 갈궈본 솜씨인데?

척 보니 남들 귀찮게 하면서 자라온 공주님같은 티가 났다.

온실 속의 화초는 아니고 살아 숨쉬는 암덩어리다 암덩어리.

[너는 시련을 받으러 온 생도야 생도. 국목도 아니고 목인도 아니고, 열등종 생도라고. 그런데 처음부터 이렇게 태도가 안 좋으면 어떻게 해? 미쳤어? 아니면 나를 물로 본 거야 뭐야.]

“죄송합니다.”

[아카데미 어디 나왔는데? 이름 뭐야.]

“엘 아카데미입니다.”

[하, 엘 아카데미도 많이 죽었네.]

메리는 속사포로 내 욕을 쏟아부었다.

이럴 때는 이겨 먹으려 들면 안 된다.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양 손을 모은 채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려야만 한다.

물론 그렇다고 정신을 놓고 있으면 안 된다. 내 말 듣고 있냐며 ‘내가 방금 뭐라고 했어’라고 역풍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니까 내가 인간을 싫어해, 기본 됨됨이가 없어. 너 이름 뭐야.]

“이시헌입니다.”

[이시헌? 이름도 거지같네. 범죄자같아.]

-쿡.

[연인은?]

“……없습니다.”

[그럴 거 같아. 너랑 사귀는 사람은 병신이지.]

인간, 나, 그리고 연인.

모든 방면에서 신랄하게 까내리는 메리를 보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두부 마렵네.’

정말 마렵다는 건 아니고, 내 욕이야 이해하는데 연인까지 건드려 버리니 빈정이 상하지 않을래야 않을수가 없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찌하든, 이 일도 넘어가리라.

최대한 이 여자? 의 취향을 내 힘으로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메리가 소리쳤다.

[됐어.]

“네?”

[가 봐.]

시련도 뭣도 못 받았는데. 그리 말하자 내가 벙쪄 되물었다.

그러자 메리는 극대노한 목소리로 내가 귀를 막아버릴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가 보라고! 오늘은 너한테 시련을 내려줄 기분이 아니야!]

“…알겠습니다. 내일 이 시간에 오겠습니다.”

나가기 직전. 나는 최대한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강녕하십시오.”

-달칵.

소리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문을 닫는다.

나무와의 연결이 의외로 오래 지속되어, 문 안에서 메리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아~ 속 시원해.]

‘…저 새낀 미친년이다.’

그것도 세상에서 제일가는.

인간 혐오자.

저 미토콘드리아도 시원찮을 녀석을 어찌하면 좋을까. 진지하게 재고할 필요를 느낀다.

메리의 성격은 지나치게 거칠다. 성격이 너무 불 같다. 나한테만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저놈은 엽록체도 시뻘건 색일 듯했다.

‘인간을 싫어하니… 목인인 임종현 그 놈한테는 제대로 된 시련을 내려줬겠지.’

나에 대한 호감도가 바닥을 치는 것이 분명하다.

“스읍”

마른 침을 삼키며 나는 고민에 빠졌다. 저 여자를 설득하려면 필요한 게 뭐가 있을까.

괜히 거칠게 나갔다가는 탈락할 가능성이 있었다.

예상컨대, 지금 메리는 나를 최대한 골려먹다가 마지막의 마지막 날에 가서야 나를 탈락시킬 셈이다.

저런 놈들의 생각이야 눈에 안 봐도 훤하다. 쓰레기는 쓰레기의 생각을 알 수 있다.

-덜컥.

그 순간 열리는 다른 문. 512번 방에서 여자가 걸어나왔다.

흰색의 타이즈. 약간 어두운 색의 익숙한 파란 머리. 들고 있는 지팡이는 예전에 본 것과 같은 빛을 유지하고 있다.

마녀 모자같이 커다란 모자에는 큼지막한 단추가 달려 있다.

빤히 그 녀석을 보고 있으니, 이윽고 고개를 돌린 그녀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윽….”

마로니에. 프랑스의 국목. 그러나 어째서인지 나에게 소개할 때는 멘헤튼 아카데미의 생도라고 말했던 녀석.

첫 번째 시련에서 좋지 않은 던전에 들어가, 참담한 꼴을 당한 악연이라면 악연인 사이다.

“로니에?”

“……말 걸지 말라고 했잖아.”

나를 꺼려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그때 일을 떠올렸는지 살짝 볼을 붉히곤 눈을 질끈 감는 마로니에. 그녀는 즉시 뚜벅뚜벅 내 앞을 지나쳐갔다.

최대한 나를 무시 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만난 나무는 어때? 시련 내줬어?”

“그럼 안 내줘?”

“응 안내주더라. 인간이라고 쫓겨났어 방금.”

“…….”

새침하게 답한 마로니에가 내 말에 걸음을 멈췄다.

아무 말도 없는 것이, 내가 내뱉은 상황이 어이없는 모양이다.

“…운이 없네. 뭐 잘 해봐.”

그리 말하고 뚜벅뚜벅, 굽소리를 내며 떠나가는 마로니에.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지켜보았다.

하긴 오후에는 일대일 친목회가 있으니 쉬려면 지금밖에 타이밍이 없기는 했다.

-두 번째 시련, 잎사귀의 선택.

첫 번째 시련이 끝나고 생도들의 수가 확연히 줄어든 지금, 이제 서로의 친목 도모와 이어질 인연을 위해 재단 측에서 일종의 미팅을 마련해준다.

운이 좋으면 국목과도 만나 친해질 기회이니 생도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일이었다.

매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원한다면 연장도 가능하고, 일찍 끝내는 것도 가능하다.

예의적으로나마 2시간 동안은 이야기 하며 생도나 헌터 생활로서의 고단함이나 상처들을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플라워를 찾기 딱 좋은 타이밍이지.’

솔직히 기대하고 있었다.

유도심문을 심리학자만큼 잘하는 건 아니지만, 잘만 말하면 어찌 수상한 부분을 파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랬는데 이제는 걱정거리가 하나 더 늘어버렸다.

메리가 있는 방을 보며 씁쓸하게 혀를 찼다.

미팅은커녕 탈락당할 위기다.

너털웃음을 흘리며 벤치에 앉았다.

힘이 충분하니, 이제는 다른 쪽으로 문제가 생기는구나.

‘아직 포기하기에는 터무니 없이 일러.’

언제나 그렇듯. 방법을 찾아야 했다.

*****

매일 오후 2시.

랜덤으로 진행되는 미팅.

서로 대화를 나누며 친목을 도모하고, 나중에는 미래의 동료까지 될 수 있는 이들과 나누는 대화.

혹시 또 모르지 않는가. 여기서 지속된 만남이 나중에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소중한 인연이 될지도.

그러한 취지에 알맞게, 그리고 플라워를 찾아야한다는 별의 부탁을 위해 나 역시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그래서.”

나는 운을 띄었다.

눈앞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는 마로니에한테.

“말 걸지 말라면서요? 마로니에님.”

원형의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아 좁은 방에서 차나 다과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가지고 있는 종이를 그녀에게 자랑하듯 살랑 흔들어 보였다.

-마로니에 블랑쉬.

오늘 미팅할 사람의 이름이 그 종이에 적혀 있다.

마로니에는 자신의 이름을 로니에라 말한 만큼, 자신이 국목임을 숨기고 있었다.

구태여 자신의 출신을 멘헤튼 아카데미라고 말하면서까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반인으로 보이고 싶었던 모양이다.

던전 안에서 둘이 껴안고 말 못할 짓을 할 때는 서로 이름으로 부른 것 같기는 한데. 그때는 내가 광분한 상태여서,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마로니에도 그렇게 알고 있고.

그녀에게는 오늘이 비밀이 까발려진 날일 것이다.

“할 말 없어? 아니, 없어요?”

“…하아. 이으, 아우! 진짜.”

테이블에 엎드리며 자신의 이마를 감싼 블랑쉬.

“……엄청 운 없다 나.”

초탈해선, 혼자 중얼 거린다.

팔에 얼굴을 묻은 마로니에가 슬쩍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봤다. 마치 책상 위의 고양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야.”

“응.”

“어차피 까발려진 김에 말할게. 국목으로서 명령이야. 나 아는 체 하지 마.”

“그럼 두 시간동안 여기 가만히 있어?”

“…….”

“아니지, 우리 처음 만난 거 아니었나.”

그때 일은 서로 덮고 없애자고 했으니. 엄밀히 따지면 지하실에서 처음 만난 셈이다.

명분상 그렇다는 거고, 솔직히 나한테는 지금 마로니에의 힘이 필요했다.

“처음 만난 거… 그러긴 하네.”

납득하는 마로니에. 아직 빨간 얼굴을 들어 올리며 슬며시 고양이 손을 내밀었다.

“그럼 인사부터 다시 하던가.”

“이시헌.”

“…마로니에 블랑쉬. 몰랐겠지만, 국목이야.”

그렇게 맞닿은 손. 손아귀의 부드러운 감촉에, 살짝 힘주어 악수를 했다.

관계를 재정립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마로니에가 그럴 마음이 있다면야.

물론 지금 당장 뺨을 치고 나가도 나로서는 할 말이 없다.

‘그때 대체 얼마나 한 거지?’

마법을 얻어맞은 뒤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떠듬떠듬 마로니에가 나한테 뭐라고 한 것까지는 알겠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때 기억이 잘려나갔다.

어차피 선택은 마로니에가 한다. 그런 마음에 마로니에를 보니, 그녀는 왜인지 나와 맞잡은 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마로니에?”

“…….”

손이 맞닿자. 멍한 눈으로 내 손을 바라보는 소녀같은 눈동자.

내가 악수를 풀자, 자신의 손을 가져온 마로니에가 빤히 제 손을 바라보았다.

골몰히 어딘가 깊은 생각에 빠진 듯했다.

“아?”

-스스스.

“응? 으응?”

달아오르는 볼. 귀까지 빨개진 마로니에.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의자에서 일어났다.

“…왜그래?”

“잠까망. 말 걸지 마….”

애가 갑자기 왜 이러지.

반응이 너무 격렬해서 나도 당황했다. 슬그머니 의자에 일어나 마로니에를 바라보았다.

“아파?”

“…어? 어. 어어! 아파. 나 왜 이러는 거지 갑자기.”

허둥지둥 손을 흔들며 횡설수설하는 마로니에의 앞으로, 나는 치유의 권능을 일으켰다.

손을 대려하자 소스라치게 놀라는 마로니에. 억지로 손을 잡아 권능을 주입하니, 중간에 뭐가 턱 걸리는 게 느껴졌다.

‘건강한데?’

권능이 아무런 효능을 보지 못하고 있다.

새하얗고 작은 마로니에의 손목. 그것을 쥔 나는 고개를 갸웃이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애가 꾀병을 부리거나 그런 말을 할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하고 보니 마로니에의 얼굴이 게임 속 터지기 직전의 폭탄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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