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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를 따먹다-261화 (257/657)

< 261화 > 나무를 꼬셔라 (2)

“그래 뭐.”

옛날에 좆도 없을 시절에는 이런 고민 많이 했다.

어떻게 위기를 헤쳐나가야 하는가. 또 어떤 방식으로 힘을 키워나가야 하는가.

그러한 고민은 지금도 그치지 않지만, 지금은 머리를 다른 쪽으로 굴릴 필요가 있었다.

나무를 겁탈한다는 최후의 수단으로.

나에게 주어진 시간동안 나는 메리라 불리는 나무의 호감도를 어떻게든 끌어올려야만 했다.

인간 혐오의 극에 달한 녀석을 내 편으로 만든다.

미목(美木) 연애 시뮬레이션을 돌려야 했다.

[19,560p가 지급됩니다.]

자그마치 몇 개월을 모아둔 호감도다.

나를 향한 세계수나 여러 나무, 사람들의 호감도를 박박 긁어모아 포인트를 끌어들였으니 이만치 모일 법도 하다.

오랜만에 들어간 세계수 옥션은 나에게 포인트 다발을 안겨주었다.

【 세계수 옥션은, 세계수의 남편, 예비 남편만이 접근 가능한 상점으로, 당신을 향한 세계수와 목인들의 호감도를 화폐로서 사용합니다. 통용되는 화폐는 포인트(p)로 한정됩니다. 】

【 보유 포인트 : 21,560p 】

세계수는 1호감도당 100p.

목인은 10p로 알고 있다.

분홍색 아기자기하게 치장한 아이콘을 들어가면 펼쳐지는 설명문과 상점.

인터넷 쇼핑몰을 연상시킬 정도로 다양한 물품들이 늘려 있는데. 그중에서 나는 즉시 뽑기 칸으로 이동했다.

상점 안에는 유용한 아이템들이 많았지만, 가격 올려치기가 심했다.

[지금이 기회다! F급 아이템부터 EX급 고유 특성까지! 1회 100p!]

“후우….”

옛날 생각이 솔솔 나는 그것을 앞에 두고 심호흡을 했다.

여기서 고유 특성이니, 기질이니. 뭐든 얻어내려고 난리를 쳤을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괜찮다.

내가 뽑고자 하는 건 아주 흔해서, 얻기가 아주 쉬울 테니까.

뽑기 버튼을 누르자, 100p가 차감됨과 동시에 공중에서 무언가 튀어나왔다.

새빨간 기운이 도는 환약. 이것도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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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목환(B)

[분류 : 소비]

-자라나는 새싹들을 위한 진귀한 영약. 영험한 기운이 깃들어 어린 묘목의 능력 성장에 큰 도움이 된다. 단, 인간이 먹으면 큰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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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시바 챙겨줘야지.’

수목환이 나오자마자 바로 캐리어 안에 집어넣었다. 시바의 성장을 돕게 해줄 진귀한 약이다. 아니면 이세영을 줘도 좋고. 이 세계에선 중요한 자원 역할 취급을 받으니 어디든 쓸모가 있다.

바로 다음 뽑기로.

얼마 가지 않아 내가 바라는 것 중 하나가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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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랄 워터(F)

[분류: 소비품]

-유년기 묘목이 좋아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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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울어진 대수림에서, 오직 세계수의 남편 후보만을 위한 뽑기는 철저히 나무를 기준으로 마련되어 있다.

뽑기에서 나오는 물품들 역시 세계수의 입맛을 따른다.

처음에는 꽝이라 취급받던 이 미네랄 워터?

‘나무들한테는 가장 좋은 음식 중 하나.’

이걸 몇 개 더 뽑고, 다른 것도 뽑아낼 필요가 있다.

나는 방 안에 죽치고 앉아 계속해서 뽑기 버튼을 연타했다.

내 운은 나쁘지 않다. 처음 능력치를 올릴 때 운과 잠재력에 모든 걸 투자했었다.

다만 운이란 게 딱 티가 나게 발동되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는 그렇다 할 이득을 보지 못했다.

-후두둑.

공중에서 뭔가 우르르 쏟아졌다.

기계에서 이어진 기다란 호스와, 벨 모양의 속이 뻥 뚫린 무언가. 동시에 마련된 분유 병들.

바닥에서 그것을 들어 올리니 무엇인지 감이 잡혔다.

▶착유기(C)

[분류 : 기타]

-두 사람의 사랑의 결실. 세계수가 응원합니다!

-효과 1 : 뽑아낸 모유는 영구 보존됩니다.

-효과 2 : 변형시켜, 꿀과 수액을 뽑는 용도로도 사용이 가능합니다.

“……순결.”

【 ‘순결의 세계수’가 고개를 갸웃입니다. 】

“이거 너지.”

답변이 돌아오지 않는다. 순결이 한 짓이 맞는 것 같다.

‘대체 뽑기에서 대체 왜 이런게….’

나쁜 일은 아니다. 오히려 좋다. 산수유가 굳이 남에게 만져질 일 없이 자신의 모유를 처리할 수 있다는 말과 같으니까.

그런데 이걸 뽑기에서 얻을 수 있을지는 몰랐다.

‘수액이랑 꿀은 어떻게 채취하는 거야?’

하며 버튼을 막 누르다 보니, 호스의 모형이 바뀌며 그럴듯한 모양이 되었다.

가끔 가는 길에 볼 수 있는 고로쇠 나무에 꽂힌 호스를 떠올리게 된다.

“이건 나중에 주자.”

주섬주섬 다른 곳에 보관하고 마저 뽑기를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원하는 물품들을 얻을 수 있었다.

묘목 비료.

도저히 쓸 일이 없어서 근처 농가에 직접 제공하기까지 했던, 뽑기에서 나오는 물품 중 가장 쓸모가 없는 것. 하지만 지금 내게는 어떤 것 보다 필요했다.

예상 외의 소득도 몇 개 정도 얻었다.

영양제라거나, 대부분 나무를 위한 아이템들. 평소였다면 시원하게 욕 한 바가지 박고, 순결을 욕했겠지만 지금 내 형편에는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

다음 날. 같은 시각.

비료를 등에 이고 걸어가니 벌써부터 주변에서 시선이 쏟아졌다.

대체 저런 걸 어디서 가져왔지? 하는 눈치가 여기저기서 쏟아진다.

몸에 있는 주머니란 주머니는 물병으로 가득했다.

-쿵!

벤치에 비료 포대를 내려두고 자리에 앉았다. 살펴보니 역시나 사용 중.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임종현이 나왔다.

-끼이익.

문이 열리자마자 눈이 맞았다. 약간 찢어진 그놈의 눈은 내 몸을 잠시 훑었다가, 옆에 있는 비료 포대를 보곤 피식 웃었다.

“많이 힘든가 봐?”

평소라면 시선에서 그쳤을 텐데. 무슨 바람이 분 건지 건방진 어투로 그가 말해왔다.

문이 닫히고 시야 저 멀리 메리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즈음 나는 목소리를 내었다.

“더럽게 힘들지. 저 나무 어떻게 해야하냐? 나는 도저히 답이 안 보인다 야.”

나는 얼마 안 남았는데. 너는 갈 길이 한참 머네.

뭐 그런 생각이 그의 눈을 통해 읽혔다. 내가 그런 것도 못알아 볼 거라고 생각했었나.

아니면 대놓고 도발하는 걸 수도 있었다.

“하.”

한 번의 비웃음. 그것만으로 종현의 생각은 훤히 보였다.

운 좋게 정시우랑 싸우고…. 설렁설렁 싸우는 국목이랑 붙었다고 오만해진 인간 놈.

너나 메리나 다를 바는 하나도 없구나.

자기가 나무라고 자만심과 거만함으로 들어찬 메리나, 선조가 좀 잘났다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지만 오만하기만 한 임종현이나. 그게 그거지.

인간은 목인의 아래에 있어야만 한다. 감히 무릎을 꿇지 않아? 비굴한 게 딱이야. 사고 방식이 그렇다.

저 둘을 보면 태양과 아오리의 인생이 비틀어진 이유를 알 법도 했다.

그 쓰레기같은 플라워가 적대하는 것도 이런 놈들이겠지.

“안 가고 뭐해?”

종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내 앞을 지나쳐갔다.

나 역시 그를 무시한 채 문고리를 휘어잡았다.

-벌컥!

[오늘도 늦었네? 열등종.]

나를 신이 나게 반겨주는 나무 한 그루를 바라본다.

“안녕하십니까. 열등종, 이시헌입니다.”

즉시 목소리를 얼빵하게 깔았다.

“오늘은 옷이 붉은색이네요. 위치도 아랫 가지가 아니라 윗 가지에 달려 있고,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뭐?]

폭풍처럼 쏟아내는 말에 당황하는 메리.

대답할 틈새도 없이 나는 그 사이를 치고 나갔다.

“물론 미천한, 열등종의 눈 구멍으로는 아름다움을 미처 표현할 수 없겠지요. 그럼에도 몸둘 바를 모르겠으니…. 이렇게나마 표현해 본 것입니다.”

[뭐, 뭐어. 그래? 하…. 어제와는 달리 패기가 넘치네?]

“아닙니다. 원래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당연한 거 아니야? 그래~ 어제는 너무 싸가지가 없었어. 고작 인간이 머리를 굴려?]

“맞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나무님들의 잎사귀와는 달리, 인간은 도중에 성장이 멈추곤 늙어갈 뿐이죠, 나무님들의 그러한 점을 조금이라도 닮고 싶습니다.”

[…지금 나 바보취급하는 거야?]

“전혀요.”

나는 차례차례 비료 포대와 물을 가져와 흙 위에 얹었다.

당황하는 메리의 목소리. 이런 상황이 연출될 줄은 자기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겠지. 녀석이 바란 건, 어제 몹쓸 취급을 당해서 기분이 상해 얼굴을 찌푸린 한낱 미천한 열등종일 테니까.

인간답게 자존심을 떨치지 못하고, 일주일간 기싸움을 하다가. 결국 꺾여 비위를 맞추려고 안달을 쓰는 나를 지켜보며 혼자 깔깔댈 생각이었을 것이다.

[…뭐야 이건? 누가 마음대로 이런 거 가져와도 된다고 했어!]

“아닙니다.”

[하, 나를 뭘로 보는 거야? 이딴 걸 가져오면 내가 좋아할 거라고 착각한 거야? 당장 가져다 버려.]

“……정말입니까?”

[당연하지.]

나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20년을 넘게 산 장모 치와와처럼 얼굴을 구겼다.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입니다.”

[그러니까, 필요 없다고 했잖아.]

비료 포대의 입구 부분을 뜯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거뭇거뭇한 윤기 나는 비료. 나에게는 끔찍하지만, 나무에게는 매력적인 그것이 모습과 향을 흩뿌려대자 메리가 몸을 굳혔다.

[당장…….]

동공 지진. 동공 대신 잎사귀가 떨리고 있다.

비처럼 흐르는 땀 대신 잎사귀를 타고 물방울이 떨어졌다.

[다, 당장-]

고뇌에 빠진 나뭇가지다.

“성의를 봐서라도 한 번쯤 드셔주는 것이 어떨지.”

[…….]

“부탁합니다.”

기나긴 침묵이 이어진다. 새하얀 조명 아래서 살짝 무릎을 꿇은 채. 내 개인적인 생각은 전부 치우고 전달하는 비료.

이놈들에게 비료란 한 상 거하게 차린 한정식과도 같은 것인지라, 얼마 가지 않아 나는 그녀의 답을 들을 수 있었다.

[……가져와 봐.]

“네.”

조심스럽게 비료 포대를 끌고, 주변을 빙빙 돌면서 살살 뿌려주었다.

옷에 튀었다가는 욕을 얻어먹을 수 있었기에 조심히 뿌렸다.

내가 알던 비료와는 달리, 한 포대를 다 부어도 괜찮은 모양이다. 넉넉히 비료를 받은 메리의 몸체가 약간 빛이 나는 듯했다.

화악- 밝아진다. 잎사귀가 강아지 꼬리처럼 팔랑팔랑거렸다.

▶걸어다니는 페로몬 (F)

쓸 수 있는 수는 모두 다 쓴다.

처음 그 능력을 사용하자, 나도 맡아질 정도로 희미한 달콤한 향이 내 몸에서 새어 나왔다.

-살랑, 살랑.

흔들리는 나뭇잎.

[…뭐, 머, 먹을만 하네. 열등종 치고는 나쁘지 않아.]

“물도 어떠십니까?”

[뿌려.]

바로 뚜껑을 딴 뒤, 흙 위에 뿌렸다. 이정도면 나무 입장에서는 진수성찬이다.

이걸로 호감도가 좀 올랐으면 좋겠다.

메리는 한참을 빛을 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식사 중에는 이 희미한 녹색 휘광을 뿜어대는 것으로 보인다.

위에 뿌려든 비료들이 바닥에 녹듯 사라졌다.

[……]

아무 말 없이 먹는데 집중하는 메리. 얼마 지나지 않아 약간 부끄러워하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후우, 뭐, 열등종치고는… 제법 센스가 있네.]

이제 시련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슬쩍 꺼내 보려 했으나 나는 즉시 충동을 가라앉혔다.

지금은 기다릴 때다.

아직 시간은 많았다.

‘여기서 괜히 시련 이야기를 꺼냈다간…. 겨우 모은 호감도 비호감으로 떨어질 수 있다.’

잘 보이려던 게 시련 받으려고 그런 거였어?

상대의 생각이 그렇게 이어지면 안된다.

나는 언제까지나 너에게 나무우월주의로, 대접하고 있다.

시련과는 무관하게 당연한 행위를 했을 뿐이다.

그런 생각을 상대에게 심어주어야만 한다는 소리였다.

지금은 그것뿐이면 충분하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뭐, 뭐 벌써 가?]

내 행동에 물음표를 띄우는 메리. 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인간에 옆에 있으면 소화에 방해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내일 같은 시간에 오겠습니다.”

[어, 어어.]

떨떠름하게 그리 대답해온다.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뒤를 돌아보며 인사를 한 번 더 해주는 센스도 잊지 않았다.

저 입맛 까다로운 나무에게는 신중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없을 시간에 허전함을 느낄 수 있도록.

천천히 만져둘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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