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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를 따먹다-268화 (264/657)

< 268화 > 나무를 꼬셔라 (9)

“너 말야.”

두 손이 맞닿기 전의 2cm.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한다.

가까워진 거리만큼 서로의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내려야 했다.

“저번에 말한 거 있잖아. 두 번째 시련 노쇼한다는 게 결국 무슨 소리였어?”

느릿느릿한 걷는 속도.

수줍은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마로니에가 내게 물어왔다.

“말해줘도 모를 걸.”

“말해줘.”

“별 건 아니야. 날 담당하는 나무가 지독한 인간 혐오에 걸려서. 도저히 나를 통과시켜줄 것 같지가 않더라고.”

“뭐? 그게 가능해?”

가능하더라.

형평성에 관한 문제는 이 두 번째 시련에 한해서는 쥐뿔만큼도 없다.

편파적인 판정은 물론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나처럼 아예 시련을 내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것 참. 웃으면서 들을 수는 없는 말이네.”

믿기지 않는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마로니에가 어색하게 웃었다.

마로니에는 나와는 달리 한없이 가벼운 시련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데려와라. 무엇을 바라고 그런 요청을 해오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에 비하면 선녀다.

“그럼. 기권하는 거야?”

“글쎄.”

그건 봐보면 알겠지.

나를 담당하는 나무인 메리는 상대를 깎아내리는 것으로 하여금 자신의 우월감을 채우는 인물이다.

나무이긴 하지만 인간과 다를 바 없다. 그런 놈들은 대개 자신의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다.

자신은 우월하다는 식의 말은 하나의 방어기제인 셈이다.

“그걸 어떻게 확신해?”

“다 방법이 있지.”

대화는 인물의 족적.

말에서 묻어나오는 성격, 전문가는 아니라지만 아버지에게 배워 알고 있다.

메리는 정도 이상으로 나와 대화할 때 즐거움을 느꼈다.

말로 험한 욕을 하면서 은근히 나를 기다린다. 새벽까지 나를 불러낼 정도로. 그리고 대접받는데에 기쁨을 느꼈다.

귀족이지만 꼬맹이.

버릇 없는 아가씨라는 이미지가 나온 건 괜한 게 아니다.

상류층들이 가지는 자신을 숨기려는 버릇이 그 녀석에게선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에 더없이 솔직했고, 누군가 자신을 소중히 대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듯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그녀는 푸대접을 받고 있다는 소리가 된다.

“아마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거나. 모종의 이유로 자립하지 못한 거지. 그런 부류들은 흔히 볼 수 있거든.”

배움은 있었지만, 고난은 몰랐다.

오냐오냐 받들어진 생활에 익숙해져 무시하는 것밖에 할 수 없다.

처지가 뒤바뀌어도 똑같다.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채. 각방 안에 틀어박혀 뿌리째 썩어 문드러지는 거지.

“정신이 몰려 있을수록 짧은 만남에도 정을 느끼게 되지.”

만약 메리의 성격이 달랐다면 나 역시 접근법을 달리했을 것이다.

지금의 메리에게는 이게 딱 알맞았다.

“너… 무섭다.”

마로니에는 아연실색했다.

“에이비를 보는 느낌이야.”

“에이비?”

“응, 독일 국목. 걔도… 능글맞기로는 장난이 아니니까. 꾀가 많아. 그만큼 위험하고.”

독일 국목. 들어본 이름이다.

벨과 마로니에와 같은 팀이라고 했었나. 혹시 나중에 만날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이름을 머릿속에 되새겼다.

대화를 하면서 이동하니 금방이었다.

“도착했어. 여기야.”

마로니에는 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곤 가슴에 손을 올려놓고, 나를 슬쩍 흘겼다.

-꿀꺽.

“연기 잘할 수 있어?”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사랑하는 사람 연기?”

나를 올려다 보며 고개를 끄덕.

“왜, 서로 껴안고 갈까?”

“시, 싫어! 터무니 없는 소리를…. 손도 잡지 마.”

농담삼아 말한 건데 격렬한 반응이 돌아왔다.

새빨간 귀를 양 손으로 잡은 마로니에는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홍조를 가라앉힐 생각인지 격렬하게 뿜어대는 숨 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지나 진정한 마로니에가 문고리를 잡았다.

“나, 나 먼저 들어갈 테니까! 내가 나중에 오라고 하면 들어와.”

“알았어.”

대답과 동시에 문고리를 비틀어 문을 여는 마로니에.

나는 열린 문 옆, 벽에 기대어 마로니에의 대화를 엿듣기로 했다.

[블랑쉬!]

귓가에 아른거리는 농염한 여자의 목소리. 뒤이어 귀여운 마로니에의 투정이 들려왔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자나요.”

[우리 귀여운 블랑쉬. 잘 있었어요?]

친근한 대화다.

몇 마디의 안부 인사 이후, 나무쪽에서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데려 왔나요?]

“…데려오긴 했는데. 정말, 정말 봐야해요?”

[당연하죠! 마로니에처럼 예쁜 이름을 가진 분이었으면 좋겠어요.]

조심스레 마로니에가 시련에 대한 재확인을 했다.

상대 나무는 무슨 의도인지는 몰라도 목소리가 아주 해맑았다.

‘…예쁜 이름.’

그런데 저 톤.

이상하게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이시헌.

-예쁜 이름이네요!

목소리가 익숙하다.

기분 탓일까. 요즘 들어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나서 피곤한 걸지도 모른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들어와.”

마침 들려온 마로니에의 말에 나는 의식에서 깨어났다.

문 뒤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조금 더 뜸을 들인 뒤 문 안으로 들어갔다.

마로니에는 문 바로 앞에 있었다. 나무는 저 멀리 중앙에 곧게 솟아 있었고.

푸르스름한 신비한 기운을 띈 수목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겉껍질 없이 맨들맨들한.

익숙한 형태의-

‘…….’

앞서나가는 발걸음이 떡 멈췄다.

“두 번째 시련을 내주신 수목님이야. 인사해.”

차마 손을 잡지는 못하고, 내 팔 부분의 옷을 잡아당기며 수줍게 볼을 붉히는 마로니에.

상대의 수목은 아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치유의 세계수. 얘가 왜 여기 있는 건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한 건가?

그거라면 다행이었다.

[…….]

나는 슬며시 뒷걸음질을 했다.

“왜 그래?”

마로니에가 무슨 일이냐며 순진한 두 눈을 깜빡거린다.

순간 내 머릿속에 십수가지의 고뇌가 스쳐지나갔다.

“이시헌?”

그녀가 내 이름을 속삭였을 때.

상대 세계수의 가지가 움찔 거렸다.

덩달아 내 등에는 오한이 끼치며 닭살이 오소소 솟아올랐다.

즉시 좆됐음을 감지했고, 등을 돌려 방을 뛰쳐나왔다.

-콰당!

“어, 너, 너 왜그래?”

문이 거칠게 열리며 벽에 부딪혔다.

마로니에의 당황한 얼굴이 스쳐지나갔으나 그것은 중요치 않았다.

문턱을 넘어, 복도로.

지하실에서 나무와 만남을 가지고 복귀중이던 생도들의 시선이 나에게 몰려온다.

-턱.

발에 무언가 걸렸다.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고개를 내려 아래를 보니, 방에서부터 이어진 잔뿌리가 내 발목을 움켜잡고 있었다.

등 뒤에는 조금 황당한 얼굴의 마로니에가 있다.

“…이런.”

[서, 서….]

“씹-”

시야가 급반전했다.

바닥이 천장으로 뒤집어 지고, 내 몸이 뻥 차인 축구공마냥 공중에서 회전했다.

놀이공원의 하늘열차를 타는것처럼.

-쿵!

바닥에 넘어져서 질질질.

생도들의 경악해 나를 보았지만 도울 수 없었다.

상대는 이세계 권력의 끝판왕인 세계수다.

방 안에 들어와서. 방 밖으로 손을 애타게 뻗어보나.

능숙하게 뻗어진 가지가 마로니에가 들어오자마자 문을 닫아버렸다.

-쿵!

허무하게 닫혀버리는 문짝.

동시에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정강이와 무릎을 돌돌 감싸며, 끈적하게 문지르는 차가운 잔뿌리의 감촉.

[서방니이이임!]

“히익!”

본능적으로 손을 마로니에에게 뻗었다.

급작스러운 상황에 멍 때리고 있던 그녀가 내 손을 잡아챘고.

-으드득!

내 온몸에서 뼛소리가 울렸다. 입 바깥으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픔보단 서러움. 정신에 뿌리박힌 기억이 되살아나며 본능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억, 어어억!”

격렬한 내 반응에 놀란 마로니에가 있는 힘껏 나를 잡아당겼다.

그리곤 절박한 목소리로 세계수에게 소리쳤다.

“…가, 갑자기 왜 이러세요 나무님!”

[블랑쉬, 잠시만요. 당신… 당신 맞죠? 아잇. 손 좀 놔 봐요!]

“사, 사랑하는 사람 데려 왔는데 왜-”

이미 이성을 놓은 치유의 세계수는 가지와 뿌리까지 동원해 내 몸을 옭아맸다.

은근슬쩍 고간쪽으로 뻗어오는 그 손길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서늘한 감촉은 절대 잊히지 않았다.

옷을 입어서, 목소리를 오랜만에 들어서 잘 몰랐다.

하다못해 진정해서 지난 날을 돌이키며 대화나 나누면 모를까.

이런식의 거친 손길은 그 날을 돌이키게 된다.

“…으, 으으으!”

내 손을 양 손으로 꼭 붙잡은 마로니에는, 힘이 딸려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블랑쉬! 놔요!]

“못 놔요! 오늘은, 오늘은 내껀데!”

[…서방님 그게 무슨 소리에요! 지금, 저를 놔두고!]

“시발 내가 왜 니 서방이야!”

두 손으로 잡아당기는 걸로는 도저히 버티지 못하겠다고 예상했을까.

낑낑대던 마로니에가 몸을 던지듯이 내 팔을 끌어안고, 잡아당겼다.

“너, 너는 왜 갑자기…. 나무님이랑 대체 무슨!”

“그런 일이 있었-”

-쏙.

마로니에의 가슴 속에서 빠지는 내 팔.

그 순간 내 몸이 치유의 세계수의 품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드드득.

흙에서 일어난 나무가 그대로 내 몸을 억누른다.

치유의 세계수.

새하얀 순백의 옷을 입은, 성녀와도 같은 옷차림.

이딴 옷을 나무에게 입혀놓았다는 것 자체만으로 놀랍다.

레이스가 달린 새하얀 팬티에 내가 고개를 빙빙 내저었다.

[…당신!]

잎사귀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온 몸으로 나를 끌어안는다.

[하아, 하아. 좋아. 안 본 사이에 더 멋있어지셨네요.]

나뭇가지가 내 어깨를 잡는다.

바닥에 눕혀놓고 땅에 꽂히는 그녀의 팔뚝 비스무리한 것.

세계수의 뿌리가 내 허리를 동동 감았다.

마치 나와 일체가 되고 싶다는 듯. 옹이가 가까워진다.

아니야.

시발 아니야.

이걸 바란 건 아니었어.

내 코에 그녀의 푸짐한 나뭇가지가 꾹 짓눌렸다.

[이번에 우리 헤어지지 말아요.]

“아악!”

*****

정신을 차렸을 때는 흙투성이였다.

패닉에 빠진 마로니에가 관리인을 부르고, 그 관리인이 말리러 오고 나서야 치유의 세계수는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내 옷은 절반쯤 찢긴 상태.

마로니에는 내 어깨의 흙을 털어내며 뾰루퉁한 얼굴을 했다.

“…….”

“왜 그래.”

“…몰라.”

지금이 네가 삐질 타이밍이니?

나는 정조도 아닌데 정조의 위협을 느낄 뻔 했단 말이다.

레이스 팬티에 감싸인 옹이 본 적 있어? 돌아버릴 지경이다.

마로니에는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나를 탓하듯이 내 몸을 두드리는 손길이 점차 거세진다.

[…미안해요. 블랑쉬. 너무 반가운 마음에 그만.]

“세계수님도 몰라요 이제.”

[하지만. 블랑쉬. 이해해주길 바래요. 저랑 서방님은-]

“뭘 자꾸 이해하란 소리에요! 둘이 뭐 그렇고 그런 일이 있다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하지만 지금 얜 내가 데려온 사람이라구요!”

[……힝]

말 잘한다.

“너도, 그런 게 있으면 미리 말했어야지!”

아무 말 없이 앉아만 있었더니 이쪽에도 불똥이 튀었다.

하지만 나는 억울하다.

마로니에를 도와줄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었을 뿐이다. 설마 얘를 담당하는 나무가 치유의 세계수일지 누가 알겠냐고.

“바보.”

아무리 내가 억울함의 표시를 해도, 마로니에에겐 들리지 않았나 보다.

“다친데는?”

“없어.”

할퀴어진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이미 다 재생되었다.

마로니에는 한숨을 내쉬더니 치유의 세계수를 강하게 노려보았다.

“얘한테 상처 생겼으면 저 진짜 화낼 거였어요. 제가 부탁해서 데려온 건데.”

[미안해요….]

“저한테 사과할 일이에요?”

[서방님도 미안해요.]

치유의 세계수는 마로니에의 기에 억눌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 술 더 떠서 나는 치유의 세계수에게 고지했다.

“나 니 서방 아닌데.”

[그런!]

강간당한거야 어쩔 수 없다 치자.

나에게도 도움이 많이 되었기도 하고. 무엇보다 업보가 많은 내가 할 말은 아니다.

그런데 사랑은 아니지.

[…그, 그치만 저번에 나누었던 저희의 사랑은.]

“내가 언제.”

두 번 만날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된이상 한 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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