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세계수를 따먹다-270화 (266/657)

< 270화 > 나무를 꼬셔라 (11)

[그럼, 가기전에 한 번만 안아주세요,]

치유의 세계수와의 만남 이후. 그녀는 자그마한 어리광으로 가지를 활짝 펼치며 나에게 안겼다.

그 정도는 어려울 게 없었다.

마로니에가 수줍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을 즈음. 나는 한 발자국 다가가 그녀를 향해 양팔을 벌렸다.

치유의 세계수의 나무 몸통이 그대로 내 팔에 안겼다.

두 팔 안에 전부 들어오는 몸이다.

[…여기 있을 때는 가끔 얼굴 보여주세요.]

“카메라 있어? 목소리 수신기라던가.”

[없어요.]

나무 몸통에서 가지로 나뉘는 머리 부분.

그것을 내 어깨에 올려둔 치유의 세계수는 풍만한 나뭇가지로 내 몸을 감싸듯이 안았다.

누가 보면 내가 이 나무에게 먹히는 것처럼 보이도록 꽉 끌어안는다.

-꾸욱.

안겨지는 몸체.

‘내가 나무랑 이러는 날도 오다니.’

우습다고, 세계수가 듣지 못하도록 코웃음을 쳤다.

나는 눈을 감았다.

-두근.

그 순간 들려오는 심장소리.

심장….

이상한 일이다.

나무에게 심장이란 있어서는 안되는 것일진데. 이렇게나 커다란 소리가 공명하고 있다.

돌연 든 의문에 나는 그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번쩍.

‘어?’

그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시야가 반전된다.

내가 있던 곳이 아니다.

새하얀 공간 위에 나룻배를 띄워놓은 것만 같은 세상이 시야에 펼쳐진다.

그곳은 어머니의 품속같이 훈훈했다. 희미하게 맡아지는 풀내음과, 그 중간 부드럽게 감싸이는 꽃내음.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기분 좋은 향이 곳곳에 만연했다.

‘뭐지 이거-’

온 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부드러운 피부. 그게 나를 껴안고 있었다.

나를 안은 사람의 신체가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녀는 가녀린 손길로 내 머리와 등을 쓸어내리면서. 한 아름의 비단같은 연초록색 머리카락으로 내 몸을 선물 상자처럼 감싼 뒤. 내 목에 아릿한 물기가 남는 진한 키스를 남겼다.

몸 구석구석에 들어온 가지들은 어디로 갔는지 느껴지지 않았다.

이 세상은 몽환적인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마치, 꿈 속 풍경을 눈 위에 대고 그린 것처럼 아리땁다.

[서방님.]

눈이 잘 보이지 않아, 볼 수 없었던 여자의 얼굴.

그녀가 내게 미소 지었다.

-툭.

그 순간 나는 세계에서 튕겨나가듯 의식이 멀어졌다.

다시 내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이질적인 분위기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내 시야에는 세계수를 위해 마련된 방의 조명만이 아련하게 흔들렸다.

[우리 서방님.]

치유의 세계수가 품에서 나를 떨어뜨렸다.

[기다릴게요.]

“어, 어어.”

꿈에서 막 깨어난 감촉.

떨어진 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받았던 목 부분을 문질러 손아귀를 바라보았다.

끈적한, 사람의 타액같은 물기가 손안에서 느껴졌다.

나는 몸을 돌려 마로니에의 앞으로 이동했다.

“…표정이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 일도 없었다.

뭔 일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차마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눈앞에는 이름 모를 처녀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냥 가자.

마지막에 치유의 세계수와 인사를 나누며 우리는 방 밖으로 나왔다.

-덜컥.

“에휴.”

나오자마자 마로니에가 울상을 지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진짜.”

아까의 일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피곤에 찌든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마로니에.

“그러게.”

나 역시 옆에 서서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러운 일이다.

마로니에를 돕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인 척하려고 했는데. 정작 찾아가니 그 상대가 치유의 세계수였고, 그녀가 광분한 덕에 본디 계획했던 일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처음 우리가 이곳에 걸어올 때 풍겼던, 풋풋하고도 청순한 분위기는 이미 사장된 지 오래였다.

나도 마로니에도 지친 얼굴로 발걸음만을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너 말야….”

“왜.”

“정말 그래도 되는 거였어?”

가는 길에 건네온 그녀의 물음.

아무리 기약 없는 기다림이라고는 하지만, 치유의 세계수를 받아들이는 것이 정말 맞는 선택이냐.

입을 다물고 날 흘기는 마로니에는 내게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나는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아무리 내가 당했다고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격렬한 감정 표시를 하는데.

“그래도 상관없지 않을까?”

나는 비틀어진 가면을 고쳐쓰며 웃었다.

“책임질 사람이 많은데, 여기서 한 그루 추가된다고 뭐가 달라지기야 할까.”

“책임질 사람…?”

의구심이 가득한 얼굴로 날 올려다보는 마로니에.

턱에 손을 짚고, 내 말에 무슨 뜻을 담고 있는지 알아내려 한참을 고민하더니, 이윽고 뜻을 깨닫고선 얼굴을 확 붉혔다.

“…대, 대체 몇 명이야!?”

아무리 일부다처, 일처다부가 합법이라 하더라도 끽해야 두 세명이다.

내 경우는 슬슬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없는 단위까지 다다르고 있다.

이렇게 떵떵 소리치다가. 나중에 가서 피가 말리면 안 될 텐데.

부끄럼 많은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마로니에를 바라본다.

‘…그런데, 잠깐만.’

갑작스럽게 든 의문.

나랑 마로니에는 어쩌다가 갑자기 이렇게 가까워졌을까.

바오야 워낙 성격 자체가 드세고 털털해서, 서로 막말을 하기도 하고 몸도 나누며 친해졌다지만.

마로니에는 재밌는 얘기랍시고 내 옛날 일상이나 풀어준 게 다이다.

태양에게 가장 먼저 예속화의 힘을 설명들었을 때. 떠올린 게 마로니에이기도 했고.

원래 성격도 겁도 많고 소심한 애인데. 이상하다.

“왜. 그렇게 빤히 봐?”

손을 뻗어 정수리에 얹었다.

고양이를 쓰다듬듯이 좌우로 살살.

그러면 마치 귀가 쫑긋 튀어나오듯, 마로니에의 머리카락이 솟아올랐다.

“…! 으.”

정수리가 화끈화끈하다.

“무슨 짓을….”

소리를 빽, 지르려다가. 입을 앙 다문 채 계단에 서서 나를 노려보는 마로니에.

이번에는 손을 아래로 내려 턱을 간질였다.

고개를 살짝 올린 블랑쉬는 몸이 굳어서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슬그머니 턱을 앞으로 내미는데, 얼굴이 새빨갛다.

“으으으….”

버티기 힘들어 하면서도 꾸역꾸역 손길을 받아내는 모습.

중간에 계단 위에서 생도가 내려와 멈췄지만, 양 손으로 뺨을 감싼 채 바닥을 내려 붉은 얼굴을 감추는 마로니에의 모습은 뭐라 설명하기 힘들었다.

‘역시.’

이상했다.

*****

“이시헌님.”

“네?”

“두 번째 시련 담당자. 메리님의 전언입니다.”

문 앞에 서서 내 방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옆에 기다리고 있던 정장을 입은 남자가 고개를 숙여 인사해왔다.

메리에게 출근 도장을 찍은지도 4일이 지났다.

매일 이렇게 반응이 실시간으로 갱신되니, 나로서는 알기가 쉽다.

“시련을 내 드릴테니 오시라는 말씀입니다.”

“저번 아침이랑 같은 내용인가요?”

“옙.”

“…죄송해요. 매일 귀찮게 해드려서.”

고민 좀 해보겠다.

그렇게 말하고 담당자를 돌려보냈다.

메리를 만나는 건 조금 더 뜸을 들일 예정이었다.

생각대로 하게 두었다가는 언제 또 버릇이 나빠질지 모르니까.

그렇다고 너무 시간을 오래 끌어서도 안 됐다.

메리 입장에서 나는 흘러 지나가는 시간 중에 잠깐 만난 천한 것일 뿐.

지금까지는 내가 필사적으로 달라붙어서 정이 깊어진 거지. 원래대로였다면 지금쯤, 하찮은 인간이 삐져서 방에 박혔다고 낄낄대고 있을 것이었다.

-덜컥.

마음 먹으며 문을 열었을 때였다.

“형님 오셨습니까.”

소파에 누워 비스킷을 씹고 있는 태양이 나를 보자마자 손을 흔들었다.

아오리는 없다.

호출한 건 목태양 이놈뿐이다.

“메세지 잘 봤습니다.”

특유의 껄렁껄렁한 목소리로, 킥킥 웃은 태양이 이어폰을 꽂아둔 핸드폰을 탁자에 내려두며 몸을 일으켰다.

“예속을 사용하신 것 같다고요.”

“엉.”

태양의 다리를 톡 치자, 몸을 비켜 자리를 만들어준다.

그 옆에 앉아 비스킷을 하나 뜯어 입에 넣었다.

“누구요?”

“국목.”

“오… 그 아프리카?”

“걔는 절대 아니야.”

-파삭.

반으로 갈라지는 비스킷. 적당히 목이 막히는 감촉은 나쁘지 않다.

“무의식중에 써버린 것 같기도 해. 쓰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으니까.”

예속이라는 능력의 사용 방법은 알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깨닫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이때다 싶은 타이밍이 느껴진다.

다만 확신할 수는 없는 것이, 마로니에와 관계를 가졌을 때는 나조차 의식을 잃은 상태라는 것이다.

그때 느낌도 기억나지 않고.

중간중간 나누던 대화밖에 머리에 남지 않았다.

이것저것 다 종합해서 보아도 지금 마로니에가 슬쩍 보이는 호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게 내 생각.

천천히 태양에게 설명해주자,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예속일 가능성이 크긴 하겠네요. 이야, 근데 대단하네. 예속을 한 번에 거는 건 거의 불가능한데. 그래서요?”

“이거 못 푸냐?”

내 말에 태양이 코웃음을 쳤다.

“풀 수는 있는데요. 풀게요?”

“경과는 솔직히 충분히 지켜본 것 같기는 해.”

최악의 상황에는 이용가치가 없는 것도 아니라서, 남겨둬서 나에게 손해 볼 부분은 없지만.

“안 좋은데.”

태양이 그리 말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풀 수는 있긴 한데, 최소한 일주일은 더 기다려야해요. 형님이 말한대로라면.”

나는 혀를 찼다.

“그래서, 뭐가 안 좋은데?”

“예속이란 게 좋기는 한데요. 세계수 중에서도 몇몇 세계수는 목령왕의 연결선을 알아차릴 놈들이 있어요.”

“…그건 처음 들어보는 소리같은데.”

“그야 형님이 예속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니까 말 안했죠. 예속 걸린 애들 잘못 부리다가, 목령왕이 선을 넘었다 싶으면 형님 죽이러 올 걸요?”

그렇다면 국목에게 예속을 심어두는 건 절대 해서는 안될 일 아니냐.

“근데 시발 너, 메리한테 예속걸라고 하지 않았냐? 다른 놈들한테도.”

이에 당황한 태양.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하는 표정이다.

그는 즉시 주먹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때렸다.

“어맛, 실수.”

미친 새끼.

그러고보니 이전부터 꾸준히 예속을 권장해왔는데, 하마터면 좆될 뻔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건 형님이 예속을 하도 안 쓰려고 하니까 그런 거죠. 한 두명은 상관없어요. 나무 한 그루도 뭐. 그 정도는 세계수들도 못 알아차릴 걸요. 너무 희미해서.”

“그러다가 들키면?”

“바로 경찰과 도둑 찍는 거죠. 뭘.”

태양은 한 가지를 첨언했다.

“위험하지만 다가오는 이득은 있어요. 예속을 하면 할수록 목령왕의 힘은 강해질 거라는 거. 도감을 채워서 목령왕의 힘을 얻는 것처럼. 예속도 똑같단 말이죠.”

“예속이란 거 꼭 유지해야 경험치가 오르냐?”

“그건 아닙니다. 한 번 예속 걸면 그것만으로 경험 하나 비축이에요. 게임 생각하면 편합니다.”

“그럼 걸고 내빼는 게 가장 효율적이란 거네.”

대신 예속을 풀려면 적어도 2~3주 이상은 지나야 한다.

상대의 정신력이 돌아오면서, 목령왕의 힘과 본신의 정신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때가 있는데.

거기서 풀지 안 풀지를 결정이 가능하다고.

“상대 정신력이 강하면 자력으로 예속을 풀 수도 있고요.”

“그 경우는, 평생 예속을 못 거냐?”

“한 번 풀리면 면역이 생깁니다. 정신 마법과 비슷해요. 그 이후로 자기 껄로 만들고 싶으면……. 작정하고 조교 해야죠.”

대충 알겠다.

일주일 정도 기한이 있고, 마로니에의 예속이 풀리면 다시는 예속을 걸 수 없다.

반대로 내가 다시 겁간을 하든 해서 정신력을 떨어뜨리면 갱신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걸 두 세 번 정도 반복하면 평생 예속이 가능하다고.

“…은근히 복잡한 힘이었네. 너 시발 이거 설명 안 하고 뭐 했냐?”

“형님이 좀 독한 마음 먹으면 그 이후에 설명해도 나쁘진 않겠다 싶어서.”

-뻐엉!

태양의 머리가 뒤로 날아갔다.

언제 한 번 날 잡고 털어야겠다.

황금 고블린같은 놈. 때리지 않으면 목령왕에 대한 정보가 튀어나오질 않는다.

또 얼마나 많은 정보를 숨기고 있을지 몰라.

입 밖으로 허탈한 숨이 빠져나왔다.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