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6화 > 너 플라워잖아? (1)
[99% 걔 플라워 맞아.]
헌터 협회 부협회장의 정보력은 상상 이상이다.
믿음직한 별의 목소리에 나는 남몰래 입꼬리를 올렸다.
“확실해요?”
[나쁜 새끼라는 건 확실해. 아닐 확률이 없는 건 아닌데…. 이시헌 네 신분이랑 비슷한 경우야.]
“제 신분이요?”
[갑자기 만들어졌고, 그 소재가 불분명하며, 연관된 다른 기관이 없다는 거.]
내 신분은 십수년 전, 도원에서 만들어낸 법에 어긋나는 신분이다.
구슬의 신분도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모양.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아직 설명이 불가능한 부분이 많다. 없던 신분이 뚝 떨어지는 경우는 무수하니까. 별의 논리에 의하면 나 역시 플라워라는 소리가 된다.
그 점을 짚어주니 별은 여전히 굳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일에 임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의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다.
[플라워가 군사, 민간, 정부 등에 끄나풀을 만들 때. 신분을 만드는 대략적인 루트가 있거든. 하나하나 대조해보는 건 어렵지만 인력을 갈면 못할 건 없고, 과정은 복잡해서 말 못하는데. 특히 네가 말한 여자는 너무 알아내기 힘들게 꼬여 있어.]
“일부러 소재지를 알 수 없게 꼬아놨다고 이해해도 되나요?”
[어. 평범하지가 않아. 원래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구슬이 플라워라는 정확한 증거를 뽑아내지는 못했지만 확신할 수 있다.
별이 말하는 바는 이러했다.
그녀의 신분을 만드는데 도움을 준 기관이나 회사들이 플라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는 점.
그리고 한창 플라워의 신분들이 다량으로 만들어질 시기와 겹친다는 점.
마지막으로 불분명한 실력임에도 불구, 숲지기 선발전에서 많은 참가자들을 탈락시킨다는 불합리한 행위를 고집한다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플라워라 추정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더 깊게 조사해서 확신을 가진 후 행동하는 게 좋겠지만, 그 무대가 숲지기 선발전인 걸 따져봤을 때. 빠르게 용의자로 점 찍고 행동을 막는 게 옳다고.
[이미 헌터 협회 측에서 말해 놨어. 혹시나 문제가 되거나 의심되는 행동을 하게 되면 즉시 체포하라고. 국목은… 아직 우리가 건들 수는 없지만.]
“그거면 충분하네요.”
구슬이 플라워, 혹은 그에 준하는 집단의 인물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수상한 점이 한 둘이 아니어야지. 일부러 그러한 티를 내고 다닌다고 봐도 무방했다.
엘 아카데미 입학 직후, 기숙사에서부터 이어진 만남.
상태창에 나타나지 않는 호감도는 나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다는거나 다름없었다.
[시헌아.]
내가 잠시 말이 없으니 별이 물어왔다.
“네?”
[이제 어쩌려고?]
“어쩌긴요.”
눈앞에 플라워가 있는데. 덮고 넘어갈 수는 없다.
당장이라도 밀착 관리에 들어가야 한다.
방법은 이미 생각한 지 오래다. 나나 구슬은 어차피 표면적으로는 친한 친구니까. 그 점을 이용하려 한다.
“끈질기게 달라붙어야지.”
첫만남부터 친한 척, 둘도 없는 친구인 척. 복도를 지나가다가 눈이라도 한 번 마주치면 신이 나게 손을 방실방실 흔들어대는 구슬이다.
친구 놀이를 하고 싶다면 들어주는 게 인지상정이다.
[……좀 걱정되는데.]
“괜찮아요.”
어차피 내가 해야할 일이다.
각종 주의사항을 말해주는 별의 말을 넘기며, 나는 마지막 인사를 한 뒤 전화를 끊었다.
*****
두 번째 시련이 끝난 지금. 호텔 내부는 상당히 한산했다.
세 번째 시련이 시작할 때까지 얼마 남지 않은 호텔에는 짐을 싸고 나오는 생도들이 몇 명 정도 보였고, 북적거렸던 복도에도 사람이 제법 줄어 어느 시설을 이용해도 자리가 남을 정도였다.
“어우.”
침대에서 일어나 양 손으로 얼굴을 비비적 거린다.
머리가 띵하다.
요즘 아침때마다 겪는 증상인데. 왜 자꾸 산수유의 방에서 밤을 보내면 배가 부른지 모르겠다.
산수유 테라피의 과다 복용탓인가.
건장한 남자라면 항상 겪곤 하는, 성기의 피쏠림 증상도 매번 일어난다.
심지어 꿈자리도 사납다. 우유 마시는 꿈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옆으로 5cm만 몸을 기울여도 배가 출렁거려서 움직이질 못하겠다.
“오늘 아침은 못 먹겠다.”
아침은 좀만 더 쉬자. 어차피 구슬이 그 녀석도 아침밥은 먹지 않는 모양이니까.
메리의 어리광에서 벗어난 지금만이 내게는 휴식을 취할 타이밍이었다.
침대 옆자리를 보니 산수유가 여전히 누워 있었다.
양 손으로 이불을 꼭 부여잡고. 고개만 빼꼼 내민 채 눈을 동그랗게 떠선 나를 보고 있다.
“수유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너 나한테 뭔 짓 안했지?”
입안에 가득한 우유향. 배때지 안에서 자꾸만 출렁거리는 특이한 액체.
생각나는 게 없지는 않은데. 설마 내가 아는 그녀가 이런 짓을 저질렀다곤 생각지 않는다.
산수유는 순수함의 대명사다.
발정해도 포옹밖에 할 줄 모르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아껴야 할 타입의 여자다.
-끄덕, 끄덕.
설마 산수유가 거짓말을 하겠냐.
“…그래? 하긴. 오늘은 조금 더 누워있다 가야겠다.”
몸을 이불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 누워 눈을 감았다.
코안에 아른거리는 여자와 꽃내음에 몸이 편안해진다.
그렇게 몸을 뒤척이다 보니, 손 끝에 무언가 걸렸다.
부드러우면서도 살짝 딱딱한 무언가.
‘뭐지?’
이불 안에서 그것을 확 꺼내 보니 새하얀 속옷이 딸려 나왔다.
I.
흔히 볼 수 없는 말도 안되는 사이즈의 브레지어. 이게 왜 이불에서 나오냐.
즉시 고개를 돌리니 산수유는 눈이 아까보다 더 동그래져선 입을 앙 다물었다.
저번에 첫 번째 시련에서 함께 자보긴 했는데. 그렇게 잠꼬대가 심한 타입은 아닌데.
그것보다 면티 안에 있는 브레지어가 어떻게 바깥 여행을 나오냐. 얘가 갑갑하다고 뛰쳐나온 것도 아니고.
날카로운 눈초리로 산수유를 바라본다.
“….”
무슨 말을 하는지 지켜보자. 그런 마음으로 산수유의 대답을 기다리니 얼마 가지 않아 쥐구멍에 들어가는 듯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나 졸려.”
“아니. 이봐요.”
답변 회피. 들고 있는 브레지어는 물로 젖어 축축했다.
이러면 나도 오해할 수밖에 없다.
매일 아침에 느끼던 영문 모를 포만감. 입을 다실 때마다 느껴지는 달달한 우유향.
“너 잠깐만 이불 벗어봐.”
“…자, 잠시만.”
“든다? 하나 둘 셋-”
나는 이불을 잡아챘다. 깜짝 놀란 산수유가 이불을 꽉 꼬나쥐었지만 이미 이불은 저 바깥으로 날아간지 오래였다.
-화악!
펄럭이며 침대 곁을 떠나간 이불. 누워 있던 산수유의 몸이 그대로 드러난다.
수면용 반바지, 그 위로 드러난 새하얀 나신.
아침 공기를 받아 바짝 솟아오른 산수유의 중요 부위를 기점으로, 새벽 내내 빨아댄 듯 가슴의 중심부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
“…….”
기나긴 침묵.
커다란 잘못을 들킨 아이같은 얼굴을 한 산수유가 입을 우물거렸다.
나는 눈앞에 펼쳐진 두 계곡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안 가서 산수유가 변명을 말해왔다.
“……변태.”
아니, 변명이 아니었다.
상당히 억울했다.
남녀 사이에 친구 없다는 태양의 말이 정말인가?
산수유 애가 나한테 정분을 느낄 이유는 또 어디에 있을까.
내가 산수유의 병을 고치려고 이런저런 욕구 참아가면서 모유를 짤 때. 어쩐지 숨이 간드러진다고는 생각했었다.
“수유야. 그게 변명이니.”
“…너무해.”
뭐가 너무해.
나는 들고 있던 속옷을 내밀었다. 양손으로 풍만한 가슴을 끌어모아 가린 산수유가 최대한 내 시선을 피하려고 했다.
“이거 뭐야?”
“…답답해서.”
“왜 답답해. 남들 다 차고 다니는데.”
산수유가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이런 말을 하는 것까지는 약간 부끄러운지, 소심한 목소리로 그리 중얼거렸다.
“…더 커졌어.”
“그건-”
나는 순간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럴 수도 있겠네.”
눈에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고, 생각한 건 기분 탓이 아니리라.
“옷은 왜 벗었는데.”
“답답해서.”
“같은 말 하지 말고.”
“…아파서.”
아파서.
이해는 되는 말이다. 젖몸살이 얼마나 심한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그 산수유가 비명을 지를 정도면 평범한 고통은 아니리라.
다른 여자들이 겪는 젖몸살보다 더 심할 수 있겠지.
“새벽에 무슨 짓 안했다면서?”
“…몰라.”
“뭐가 몰라.”
순수선이 아니라 순수악이었나.
순수함에도 종류가 있기는 하다.
일단 등을 돌려서 옷을 입으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수유는 속옷만 빼고 티를 상반신에 걸쳤다.
그 탓에 도드라진 두 돌기가 보였다.
“말해 봐.”
가부좌를 틀고 산수유와 마주한다. 무릎을 꿇은 산수유는 허벅지를 비비며, 나를 슬쩍슬쩍 바라봤다.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아는 모양이다.
“아픈데… 시언이가 안 일어나서.”
“저번에 내가 준 거 있잖아?”
나는 협탁에 있는 착유기를 가리켰다.
아니, 사용법까지 알려줬는데 왜 애꿎은 내 입을 사용하냐.
“어쩐지 꿈자리가 사납더라.”
산수유 테라피가 아니라 산수유 서큐버스였다.
내가 탓하며 몰아붙이니 그녀는 기가 죽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며 허벅지를 조금 더 비비더니.
“……혼자 못 쓰겠어.”
다시 한번 약한 소리를 해왔다.
“못 쓰겠다고?”
“응.”
저번에 설명을 해줬는데도 못 쓰겠다니.
다시 말을 꺼내려던 나는, 산수유의 표정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팔자로 기울인 눈썹에 안절부절 못하는 눈동자.
그런 산수유를 보고 있으니 괜히 마음이 약해졌다.
‘애가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것도 아닌데 내가 너무 했나.’
외모가 깡패라더니. 가슴 크고 이쁘면 뭔 말을 해도 용서가 된다는데 그게 정말이다.
수유의 얼굴을 보면 어느새 가슴이 사르르 녹아선, 내가 잘못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 못 쓴다고?”
“응.”
“저번에 알려줬잖아. 안 그래?”
목소리가 점점 누그러졌다. 이제는 다그치는 게 아니라 어르고 달래는 식이다.
산수유는 내 변화를 눈치챘는지, 슬쩍 고개를 올려 내 얼굴을 바라봤다.
약간의 희망이라도 생겼다고 생각했을까.
“항상 시언이가 해줬으니까.”
“그래서.”
“…해줬으면 해서.”
내가?
네 가슴을?
“야 그건 원래-”
나는 말문이 막혀서 아무 말도 못했다. 수치심에 양손으로 얼굴도 가려버렸다.
“아니. 후우….”
눈앞에 움직임을 따라 두 가슴이 출렁거린다.
자기 옷을 잡고, 들어 올릴까 말까. 내 눈치를 보는 산수유를 보고 있자니 절망감이 몰려왔다.
내 잘못이다.
산수유는 아무 잘못 없다.
“내가 미안해.”
내가 내 친구를 잘못 키웠다.
*****
아침의 소동은 결국 내가 산수유와 함께 지내지 않는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태양과 아오리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보나마나 목령왕의 의무를 어기는 것이라며 크게 소리칠 것임이 분명하니까.
다 큰 남녀가 같은 방에서 지낸다는 게. 할 짓거리는 못되구나.
산수유가 딱히 연애 감정은 없어 보여서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잉.
따로 잔다고 했더니 바로 풀이 죽더라.
연애 감정은 없지만 성욕은 충만했던 그녀다.
건강과 성욕을 동시에 회복했으니 좋은 일이라면 좋은 일이지만….
“에휴.”
점심밥을 꾸역꾸역 먹으면서 한숨을 내쉰다.
“아침에 나쁜 일이라도 있었나 봐?”
“말도 마.”
산수유의 행동은 어쩔 수 없다. 해야할 일은 해야한다.
나는 열심히 턱을 움직이며 눈앞의 여성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웬 일이야? 시헌이 네가 밥을 먹자고 하고.”
구슬.
검은 중단발에 귀여운 미소를 걸친 여자.
그리고 어제 플라워임이 밝혀진 녀석.
그녀가 내 앞에 있었다.
“별 건 아니고, 너랑 알고 지낸지도 꽤 됐는데. 너무 떨어져서 지냈다 싶어서.”
“프히히히. 뭔 소리야 그게? 작업하는 거야?”
평소같이 웃으며 대답하는 구슬이다.
발 넓기로 소문난, 엘 아카데미 한국 생도들 사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친화력이 좋은 녀석이니까.
지금까지는 내 쪽이 꺼림칙해서 거리를 벌려왔지만 지금은 달랐다.
“어.”
눈을 동그랗게 뜨는 구슬.
작업 좀 쳐보자.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 감정 쓰레기통에 고민 상담소가 되어라.
나는 웃으며 티켓을 들어올렸다.
선발전 측에서 주선하는 오늘의 미팅 상대. 운이 좋은 편이라. 바라기만 하면 우주에서 들어줄 때가 가끔 있다.
[구슬]
“오늘 너랑 나랑 미팅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