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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를 따먹다-297화 (293/657)

< 297화 > 천마님 마법 쓰신다 (6)

참새같이 생긴 녀석이 성깔 하나는 더러웠다.

마법을 쓸 수 없을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분신이라도 최소한의 힘은 축적해둔 모양이라 사로잡는데 애를 먹었다.

뭐 듣기로는 어디 공주라더라.

고귀하고 아름답고 예쁘고 귀엽고 주저리주저리. 떠들기는 하는데 내 눈엔 그냥 포슬포슬한 털을 가진 새에 불과하다.

그래도 마법 실력 하나는 알짜배기.

과거에 다녀오기 이전이라면 상대하는데 애를 먹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제압하지 못했을 수도.

정령과 계약하는 방법은 대개 세 분류로 나뉜다.

첫 번째는 정령의 호의를 받아 무상으로 계약.

사랑이라던가, 우정이라던가. 어린 시절 정령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경우 발생하는 케이스다.

두 번째는 원만한 합의를 통한 공적인 관계.

대가를 충분히 지불하고 정령의 힘을 빌리는 경우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정령이 홀릴 정도로 압도하고 굴복시키는 것.

본래는 두 번째 방법을 택하려 했다.

그러나 이 공주님의 싸가지가 예상 외를 넘나드는 바. 현자가 내게 추천한 방법은 힘으로 굴복시키는 것이었다.

-콰앙!

초원 아래 샛노란 검이 볼을 스쳐 지나갔다.

등 뒤에서 한 차례 폭발음이 들렸다.

‘나무발바리도 충분히 강했는데… 얘는 그 이상이네.’

나무발바리가 재능은 충만하지만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힘이라면.

딱따구리는 재능은 부족해도 전장과 난전에 완숙한 군인이라는 느낌이다.

현자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텔레포트를 시켜준 덕에 소란이 일지는 않았다.

나는 날지도 않고 바닥에 서서, 푸드덕거리고 있는 딱따구리를 바라봤다.

십 수개의 노란 검끝이 온전히 나를 향하고 있다.

[공주님을 놓아라!!!!]

악을 지르는 여기사의 목소리.

전장에서 크게 울려 퍼지는 지휘관과 같다.

나는 손아귀에 있는 나무발바리를 바라봤다.

이미 마법도 쓰지 못하고 내 손에 축 늘어져 숨을 헥헥 쉬어대고 있는 나무발바리.

절대 배만큼은 보여주지 않겠다고 응전하던 참새 녀석이 이제는 새하얀 나신을 멍하니 드러내고 있었다.

[놓으라고 하였다!!!!!]

[……루시.]

[공주님, 아아… 엘레오노르 공주님. 제가. 꼭 공주님을….]

처절하고 간절한 두 여자의 전장 속 대화가 절절하게 펼쳐진다.

-짹, 째액! 짹!

-째액… 짹짹.

정령 감응으로 대화를 엿들을 수 있는 나였기에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이게 뭔 상황이냐고 되물을 거다.

나는 머쓱하게 뒷목을 긁었다.

“니들 뭐 소꿉 놀이 하니?”

새 두 마리가 짹짹거려봐야 웃길 뿐이다.

귀엽긴 한데, 그게 다야.

여하튼 저 마법이 성가신 건 사실이다.

정령에 왕국이 있는지는 몰랐지만, 거기서 굴러먹다 온 전사라면 밑천을 숨길 수도 있으니까.

“엘레오노르. 너 이름도 있었냐?”

[흐읍… 너한텐 알려지고 싶지 않았어.]

싸움이 지속되니 빠져나갈 구석이 있다고 판별한 걸까.

방금까지만 해도 좋다고 털을 부벼대던 녀석의 눈에 자만함이 돌아왔다.

이것 봐라.

손가락에 마력을 담아 날개 아래를 살살 자극해준다.

[…읏, 히잇. 흡! 아바마마….]

-째액 째액.

[네노오오오오오옴!!!!! 허튼 짓을!!!!]

극대노한 딱따구리가 경련하듯 소리쳤다.

누가 보면 내가 애한테 상처를 입힌 줄 알겠다.

정령을 굴복시키는데엔 양질의 마력을 감당치 못할 정도로 주입하는 게 효과적인 것은 당연한 이치.

저런 반응은 놀랍다.

‘이렇게 싫어하는데…. 굳이 내가 싸울 필요가 있을까?’

의문이 하나 머리를 스쳐 지나감과 동시에, 나는 녀석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검 거둬.”

[…뭣.]

“네 공주님이 내 마력에 자지러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거두라고.”

[루시… 내 걱정 말고… 흐잉!]

“다물어 넌 좀.”

손가락으로 엉덩이를 두드렸다.

꼴사납게 온몸을 떠는 나무발바리. 그러나 이번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무려 열 손가락.

양손이다.

손끝에 각각 검은색 마력을 띄운 나는 나무발바리의 몸 구석구석을 쓰다듬었다.

서서히 다가오는 손길에 나무발바리가 경악했다.

[시, 싫어. 아직, 아직도 안 끝났어? 마력이 대체 얼마나… 많은……. 루시! 루시이이! 아바마마!!! 도와줘!]

[그만, 그만해라! 뭘, 무엇을 하면 되느냐!]

다급하게 빌기 시작하는 딱따구리.

이미 늦었다.

여린 새의 몸 안에 가득 차는 마력.

[…으, 읏. 마력, 마력이… 너무 많아아아!]

턱과 엉덩이, 등을 구석구석 매만진다.

말이 좀 그런데 그냥 최선을 다해 쓰다듬는거다.

앵무새나 카나리아를 키울 때 깃털이 부드러우면 쓰다듬게 되지 않는가.

가끔 새들이 강아지보다 애교도 많고 그렇다.

지능은 확실히 새들이 뛰어나니까.

[인간 주제에!!!!!!!!!]

“새가 하는 말이라 잘 안 들리는데.”

[혹, 오홋.]

짧은 간극을 두고 경련하는 새 한 마리와, 절망어린 음색으로 목이 찢어져라 소리치는 딱따구리.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다.

“마력 거둬.”

[엘레오노르님…. 저는.]

그제야 말이 통한다.

공중에 떠 있는 수십 갈래의 검들이 사라지자, 나는 그제야 나무발바리의 쓰다듬기를 멈추었다.

“그리고 이리로 와.”

[크읏.]

망설이더니, 내가 다시 나무발바리에 손을 뻗자 뜸을 들이며 날아오는 딱따구리.

녀석이 내 손아귀에 들어오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내 손바닥 위에 올라온 녀석이 감정이 가득한 눈으로 옆에 있는 나무발바리를 바라본다.

[루시 너라도 도망 가….]

[공주님 제가 어떻게… 공주님을 두고 도망치겠습니까.]

절절해서 눈물이 다 나온다.

내가 산 채로 기름에 튀겨 먹겠다 선언한 것도 아니고, 심지어 분신체인데 얘네들 왜 이러냐.

[이제 공주님을 풀어줘.]

나를 매섭게 째려보는 딱따구리.

나는 손을 꽉 쥐어 딱따구리를 붙잡았다.

“내가 언제 풀어준다고 말 한 적이 있냐?”

[…큭 네놈!]

살짝 마력을 섞어 엄지로 날개를 쓰다듬었다.

[으, 으으으….]

버틴다. 저 꼬마 아가씨는 첫발 만에 소리 지른 걸 생각하면 대단할 따름.

나는 다소 놀랍다는 얼굴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이 체념이 조금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놈이 바라는 건, 내가 당할 테니…. 공주님만은 풀어줘라.]

눈물겨운 희생이다.

하기야 계약하는 정령은 처음 계획대로였다면 한 마리면 충분했다.

격은 조금 떨어져도 마력 운용은 훨씬 잘하는 딱따구리를 내 정령으로 들이는 편이 이득이었다.

“뭐, 고민해볼게.”

그런데 둘 다 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아닌가?

내가 여기서 물러설 이유가 없다.

잘 싸우는 딱따구리는 이미 내게 결박당한 상태.

쪽도 못 쓰고 두 날개를 펼쳐 겨드랑이마저 내놓고 있다.

[…정말이냐?]

“단, 내 마력에 버틴다면.”

[루시, 그런 짓은….]

[괜찮습니다. 공주님.]

결연한 모습으로 나무발바리를 바라보는 딱따구리.

그 날카로운 눈길에는 제법 훌륭한 기상이 엿보인다.

나를 도와준다면 더없이 든든한 정령이 될 것 같다.

[저는 절대 이런 남자에게 굴복당하지 않습니다.]

[루시….]

새하얀 마력 실을 만들어 나무발바리를 구속하고, 땅에 내려놓았다.

반쯤 탈진했지만 이 녀석이 걱정되어서인지 즉시 일어나서 나를 꼬나보는 나무발바리.

나는 한 손에 마력을 가득 담아 딱따구리를 만지기 시작했다.

[절대 네놈 뜻대로 되게 하지는 않겠다!]

*****

[…흐아, 아앙! 읏, 흐기이익!]

3분 컷 났다.

결심도 오래가지 못하는 레토르트 허접 딱따구리.

내 마력. 의외로 만능이 아닐까.

희소한 마력이라느니, 태어나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마력이라느니.

검은색 마력이 비교적 수가 적기는 해도 찾아보면 나름대로 있다.

개개인마다 형질이 다르다고 하니 약간 다른 걸 알아본 걸까.

마력에 있어서는 그 어떤 종족보다도 민감한 존재다.

[…아아. 루시…. 어째서.]

절망한 표정의 나무발바리가 입을 벌리고 그 처절한 장면을 바라본다.

몸을 비틀면서 내 손길에 저항했던 것도 아주 잠시. 이제는 내 손에 몸을 비비기까지 한다.

[…싫은데… 싫은데에 하아앙!!]

“이제야 좀 새같은 목소리로 지저귀는구나.”

방금까지는 악을 지르는 탓에 새소리가 예쁘지 않았다.

풍류를 즐기는 한국인.

‘운다’라는 말보다 ‘지저귐’이라는 아름다운 표현이 있다.

뜻만 통하지 않았다면.

애가 예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구나 착각했을 것이다.

‘근데 이 새끼들은 왜 발정이라도 한 것마냥 이러냐.’

필요에 의해서 저지르긴 했는데, 신음하는 게 딱 그 짝이다.

쓰다듬는 게 다인데 이래 버리면, 졸지에 능욕하는 오크라도 되어버린 것 같잖냐.

“계약할래?”

[…누가, 너같은 놈한테에에!]

“평생 이 마력을 공급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 봐.”

[…평, 생.]

눈알이 흐릿해지며 나를 바라보는 딱따구리.

습기가 어린 그 눈동자가 큰 고민에 휩싸인다.

어때.

해봄직 하잖아?

내가 뭐 악덕 사장도 아니고 틈만 나면 부르고 내 마음대로 부릴 생각은 아니다.

마법을 쓸 때. 필요하면 잠깐 부르는 대신에 마력 좀 얹어주겠다는데.

마다할 필요가 있겠어?

질척이는 내 목소리가 딱따구리의 귀를 간질였다.

[평생. 네놈, 한테….]

-두근, 두근.

새에게도 심장은 존재한다는 걸 증명하듯 빠르게 뛰는 맥박.

동시에 고양이 엉덩이 두드리듯 복슬복슬한 엉덩이를 토닥토닥 한다.

그러자 솔직한 답변이 물고를 튼 듯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끄히이이잇! 계약, 할…래. 하게 해주세요!]

[루시….]

[공주님… 미안해요, 하지만, 하지만….]

-쭈우욱.

이건 재해다.

[…저는 이 사람한테….]

돌이킬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불가피한 재해.

[……공주님만을 모시겠다고… 말 했는데.]

[루시!]

두 발을 쫙 펴며 탈진한다.

온 몸의 깃털에 윤기가 가득. 마력을 과공급 받은 바람에 새의 형태가 굉장히 예뻐졌다.

몸을 이루는 대부분이 마력이니.

이만큼 공급 받으면 그냥 내 것으로 가득찼다고 봐도 무방하다.

[으헤…….]

[아아 루시. 얼마나…얼마나.]

목소리가 떨린다.

딱따구리가 내게 굴복한 바, 녀석의 목에 검은색 마력 실선이 뿜어져 나왔다.

본래였다면 노랑이어야 했으나 내 마력을 공급받은 탓에 녀석의 몸에서 뿜어지는 마력도 검정이다.

그 실선이 내 안에 연결된다. 계약의 증표다.

대가나 그러한 것은 거의 전무. 다만 마력은 심심찮게 챙겨줄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마력을 넣어 배를 쑤시듯 쿡쿡 눌렀다.

“계약 됐어. 이제 반항하는 의미는 없어졌다는 소리지. 알지?”

[으히이이잇! 죄송해요…!]

“자, 그 다음은.”

시선을 나무발바리에게 돌린다.

발걸음을 주춤거리지도 못하고, 멍한 눈으로 루시에게서 눈을 고정한 나무발바리.

나는 손을 서서히 뻗었다.

[루시…….]

[공…주님.]

내 손이 다가오자마자, 적대하듯이 부리로 내 손을 쪼아댔다.

전혀 아프지 않은 반항이다.

손아귀에 쏙 들어오는 나무발바리. 어째선지 눈 안에 흥미와 기대가 섞인 듯도 하다.

[아, 아아아아…. 나도, 저렇게.]

될 것이다.

내 마력이 나무발바리를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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