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9화 > 강아지, 고양이 (4)
곤혹스러운 말이다. 듣자마자 귀를 의심했을 정도로 뜬금없었다.
“치료. 이제 안해도 돼.”
산수유에게는 코르너스 가문의 피가 흐른다.
‘영원불멸.’ 그 가문의 염원은 그녀의 목숨보다 무겁다.
심지어 산수유 본인조차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왜? 갑자기?”
눈앞 그녀의 황금색 눈동자가 희미하게 진동했다.
산수유는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오래 전부터 생각한 듯. 그녀는 천천히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시언이가 부담이 되는 것 같아서. 우리 가문의 일인데… 너무 깊숙하게 관여하면 안 돼.”
“설마 저번에 말한 것 때문에 그래?”
얼마 전에 침실에서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왜 그렇게 나를 돕는 거냐고. 솔직하게 답했었다. 나는 산수유에게 빚도 있고, 호의도 있다.
고민이 깊어 보이더니 그때 내가 한 말이 도화선이 된 걸까?
산수유는 즉시 이에 대해 부정했다.
“아니야. 예전부터 생각한 거야.”
그럼 왜 그러는데.
팍 터져 나오려던 한 마디를 진정시켰다. 성질을 죽일 필요가 있다.
우선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강압적인 태도는 옳지 않았다.
“네 몸상태를 몰라서 말하는 건… 아닌 것 같네. 이야기를 좀 들을 수 있을까?”
우리 둘뿐인 서고가 경각에 냉랭하게 식어 들었다,
“시언이는, 나를 좋아한다고 했잖아.”
산수유는 조심스럽게 내게 되물었다. 그때 말한 내 답변이 진실인지 묻는 모양새였기에 바로 고개를 주억여주었다.
그녀의 눈이 다른 한 서적을 향한다. 내 쪽에서 그 책의 제목은 글자가 희미해 잘 보이지 않았다.
“처음 듣는 말이라. 의미를 잘 몰랐는데, 대충은 알 것 같아. 아마 나도 시언이를,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자기표현을 잘하지 않는 산수유가 이렇게까지 자신의 의견을 전달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애정? 사랑…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는 가장.”
횡설수설하기는 하지만 의미는 전달이 된다.
감정을 잃은 그녀는 누군가에 대한 호감조차 잘 느끼기 어렵다.
그녀가 여기까지 말로 표현할 정도로 나를 감사하게 생각한다면 그보다 감격스러운 일은 없었다.
“그러니까. 조금 더 깊숙하게 관여하면. 내가 시언이를… 그게. 많이, 상처입히게 될 것 같아.”
“뭐?”
왜 그게 그렇게 되냐고. 순수한 되물음이었다.
그러나 말투가 투박해서인지, 내 반응을 곱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녀는 말문이 막혔다.
주눅이 든 산수유가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시언이한테만 하는 말이지만…우리 가문은, 남들의 시선에선 썩 좋은 가문이 아니야. 어쩌면, 세계수님을 배반할지도 몰라.”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녀다.
멋진 비원 속 코르너스 가문의 추악한 일면. 내가 그녀에게 말하지 않고 혼자 머리를 싸매고 있던 사실이다.
내가 그녀를 너무 바보 취급해왔던 걸까?
“내가 잘못되면, 시언이도….”
나는 입을 닫고 산수유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할 말도 잘 고르지 못해 버벅거렸다. 한참을 말을 더듬은 탓에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 되기도 했다.
마지막의 마지막, 그러고선 나한테 한다는 말이.
“시언이는 앞으로 살날이 많으니까.”
마치 이별을 염두에 둔 듯한 말이라니.
치유를 받지 않겠다. 내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도움을 거부한다는 말이다.
달리 해석하면 더이상 내 도움을 받고싶지 않다는 의미가 되었다.
나는 언제든지 산수유를 도울 용의가 있지만. 그녀를 마음대로 휘두를 수는 없다.
당장 산수유가 코르너스 가문을 위해 죽겠다고 소리치면 나는 그녀를 막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내게 말했다.
이제 자신이 알아서 해 보겠다고.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인 셈이다.
솔직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난 민폐야.”
“내가 언제 그걸 생각해달라고 했어?”
산수유가 숨을 삼켰다. 그녀의 눈동자가 좁아졌다.
“괜, 괜찮아.”
“고작, 아니. 수유야. 진짜 고작 내 능력 하나야. 치료하는 거. 그것뿐이고, 그것만으로 네가 조금 더 살 수 있어. 그거 하나로 내가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친구가 제 친구 하나 도와주는 게 뭐가 문제냐.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
까짓 코르너스 가문. 앞으로 내가 상대할 새끼들은 5대 세계수에 플라워 전체다.
충분히 따지고 들 수 있었다.
산수유의 말은 생각이 정리된 듯 하였으나, 그것을 말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를 더 밀어붙이지 못했다.
적어도 무슨 생각으로 내게 이런 말을 한 지는 알 것 같았으니까.
아마 성지호도 그걸 알고 있었으리라. 그냥 친구로서 잘 해달라. 그가 남긴 진심어린 부탁이었다.
“난… 시언이가 그렇게까지 날 돕는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어. 뭘, 원하기라도 해?”
“산수유.”
“…미안해.”
내가 산수유에게 바라는 것.
심장에 손을 얹고 단언컨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정말 내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싶을 뿐이었다.
너는 그것에 대해 의문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지.
이해하지 못했으니, 나에게 괴리감을 느껴도 어쩔 수 없다.
그걸 이해해주라 호소할 생각은 없다. 이건 무어라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다.
나는 이 세계에 아무것도 모르고 발을 내딛었다.
누군가의 이유 없는 비난을 맛보기도 했고. 때아닌 선택에 괴롭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내 정체성에 대한 고민까지 했다.
나무를 정복한다는 목령왕의 직분과 그 형질. 그러나 그게 정말 나에게 축복인가?
누군가는 나에게서 얻어가는 쾌락을 사랑했을 수도 있다.
내게서 떨어지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아니면 날 이용하기 위해 접근하는 사람도 많아질 거다.
앞으로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난 이제 앞으로 다가올 인연을 순수하다고 포장할 수 없다.
그 안에 담긴 게 폭탄일지 모른다며, 오히려 밀어낼 수도 있다.
아니면 그놈의 추악한 능력을 이용해서 강제로 내 편으로 만들 수도 있겠지.
믿을 수도 없고. 옳은지도 모르겠다.
병적으로 현자를 의심하는 것만 봐도 그래. 아직도 태양과 아오리의 말을 어느 한쪽으로는 의심하고 있다.
과거에 다녀온 뒤로부터 그 증세는 심각해졌다.
그러다 보니 더 집착하게 되더라.
“산수유.”
그러니까…. 그게.
“…….”
도통 뭐라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네.
다른 사람 앞에선 기만을 일삼아도, 적어도 이들한테는 솔직하게 대하고 싶다.
그만큼 깨지고 싶지 않은 관계였으니까.
나는 충분히 말을 미뤘다고 생각했다. 굳어서 잘 열리지 않는 입술을 가까스로 떼어냈다.
“살아야지 않겠냐.”
나는 고개를 올려 산수유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산수유의 얼굴이 고통으로 물든다.
나는 모르는 내 표정을 보더니, 와락. 표정이 구겨졌다.
진심으로 그녀의 얼굴에 감정이 드러난 적은 처음이다.
목소리나 표정의 미묘한 변화만으로 감정을 예측했던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그것은 분명한 산수유의 감정이었다.
“…미, 미안…. 미안해. 하지만… 정말 나는…. 널 생각해서.”
왜 또 사과를 하냐.
“적어도 선발전 동안은 치유를 받는 게 어때?”
그나마의 차선책을 꺼내놓는다. 내가 늘릴 수 있는 산수유의 수명. 그 며칠. 몇 시간. 몇 분 사이에 그녀에게 기적이 일어날지 모른다.
정말 몇 초 차이로 그녀가 실험에 성공해 살아날 수도 있었다.
그 가능성을 놓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
마지막 대답이 돌아온다.
“수유야.”
“응.”
“내가 예전에 말했던 거 기억나지?”
산수유의 얼굴에 의문이 비친다. 내 얼굴을 안쓰러운 듯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도저히 적응이 되질 않았다.
내가 했던 말.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평생 변치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는 말이 있다.
네 편이다.
“…아니다.”
그러나 왜인지 지금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낯간지러운 소리이기도 했고, 지금 분위기엔 너무 뜬구름 잡는 말이기도 했으니까.
산수유는 소심하고 말이 적다. 몇몇 의사 표현을 하기는 하지만, 감정을 느끼지 않다보니 그녀의 생각을 알기 힘들 때가 많다.
그동안 많이 어울리면서 충분히 알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산수유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건 나도 그랬고. 그녀의 비서인 성지호도 그랬다. 그녀의 아버지는 더욱이 아니었다.
아직까지도 산수유의 인상에 남아있던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녀는 산수유의 생각을 알 수 있었을까.
나는 이게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언젠가 터질 일인 모양이었다.
아마도, 산수유와의 사이가 돌아오기까진 꽤 시간이 걸릴 듯해 보였다.
*****
“오랜만에 전부 모인 것 같지 않나요?”
현자의 말에 원탁에 앉은 우리들이 각자 현자를 바라보았다.
어색한 분위기가 길게 이어지자 현자가 당황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이랑 좀 뭔가 다른 것 같네요. 혹시 다툼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그에 나랑 산수유가 잠시 뜨끔해 침을 삼켰다.
그 날 이후로 마로니에도 어딘가 조금 냉담해졌다. 기다리고 있었던 예속이 드디어 풀린 걸까.
하필 지금, 그런 생각을 품는 건 너무 이기적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 머릿속은 그렇게 외쳤다.
하필 지금!
“마로니에?”
“어 아, 그게… 헤헤.”
마로니에는 현자의 물음에 우리 둘 사이를 바라보며 가슴에 손을 얹고 말을 아꼈다.
마로니에는 우리가 밥을 먹을 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걸 안다.
평소의 산수유는 우정 표현이 많다 못해 달라붙는다. 그에 반해 오늘 점심때는 당연히 우리 둘의 사이가 멀어진 걸 블랑쉬는 알아챘으리라.
“오늘은, 세 번째 시련의 마지막 임무를 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조금 늦춰질 것 같네요. 그래도 전달은 해야겠죠.”
현자는 무릎에 앉은 세피로트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마 얼마 후에 요람에 습격이 있을 예정이에요.”
수목의 요람. 숲지기 선발전이 개최되는 곳.
그곳에 살아 숨쉬는 진정한 귀족 나무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중세로 치면 왕부터 대공, 모든 백작들이 모인 무도회에 습격이 이어진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나와 산수유, 마로니에는 그에 침묵을 지켰다.
이미 어느정도 개인적으로 현자에게 들어서 알고 있던 탓이었다.
“습격이 있는 이상, 사실 시련은 있어봐야 아무 의미가 없는 거겠죠. 이건 개인적인 부탁이라도 보아도 무방해요.”
“현자님의 개인적인 부탁이요?”
현자의 말에 마로니에가 되물었다. 그녀는 상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들어만 주신다면 현자의 이름하에 적절한 보상을 주도록 하죠.”
현자가 직접 보상안을 생각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라는 소리.
나는 침묵을 깨고 말했다.
“습격을 막으라는 건가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힘들 텐데. 플라워가 얼마나 쳐들어올지 알고 계시나요?”
“…글쎄요.”
현자는 희미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간부들 전체가 나서진 않을 거에요. 이건 어디까지나 보여주기 위함이니까.”
선전 포고. 그것을 목적으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작정하고 쳐들어온다면 요람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겠지만, 너무나 큰 도박수죠.”
양 측의 전력과 손익을 전부 꿰뚫고 있는 현자만이 내놓을 수 있는 답안.
“아마도, 플라워 측에서 심어 놓은 배신한 헌터나. 국목. 그리고 몇 안 되는 플라워 부간부들. 그들이 주도적으로 행동할 것 같네요.”
청산유수처럼 말이 이어나간다. 확신을 가지고 말을 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현자만 아니었다면 자만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태파악을 하지 않은 한 순간이라면, 일손이 많이 부족할 거에요. 제가 천천히 해야할 일을 알려드리죠.”
“…교단이나 헌터 협회에 이를 알릴 생각은 없어요?”
“그러면 저는 계약상 선을 넘게 되니까요.”
이게 한계인가.
나는 그것으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이미 알았다.
현자는 자신의 품 안에서 커다란 와인병 하나를 꺼내 내려놓았다.
“지금 셋의 사이가… 좀 멀어진 것 같으니. 오늘은 특별히 제가 술을 몇 병 드리도록 할게요. 거사 직전인데, 술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싱긋.
나에게 지어보이는 미소의 의미는 무엇인가.
마로니에는 흘끔 나를 바라보았다. 산수유도 조금 걱정스런 얼굴로 나와 마로니에를 바라본다.
나는 와인병을 받아들었다.
“저희 셋이서요?”
“어머, 저는 술이 약해서. 한 잔만으로 민폐를 끼칠지 몰라요.”
그건 좀 보고 싶긴 한데. 알았다.
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선 뭐라도 할 성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