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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를 따먹다-312화 (312/657)

< 312화 > 강아지, 고양이 (7)

저질러 버리고 말았다.

내가. 아니 술을 마신 나새끼가.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반쯤 절규한다.

“이건 선 넘는 건데.”

어제 여자한테 고백 비스무리한 걸 듣고, 헤어지자마자 다른 여자랑 떡을 친다?

내가 아무리 좆을 좆대로 놀린다지만 이 새끼 완전 순 인간말종 아닌가.

심신미약이다.

내가 먼저 여자를 덮칠 일이 있나. 현자가 나를 유혹한 건 아닐까?

어제의 필름이 끊겨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상황엔 대개 여자의 증언이 유리하다.

피해자의 눈물이 증거입니다.

한 마디 나오면 눈 딱 감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심지어 그 대상이 현자이기까지 하니, 내 인생은 아주 단단히 꼬였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스읍. 잠만 잤던 거일 수도 있잖아.’

급기야 현실 부정까지 이르렀다.

-두근, 두근.

아주 미약한 힘으로 그녀가 깨지 않게 순백의 이불을 걷어올려 본다.

현자의 몸이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명치부터 귀여운 배꼽. 살짝 부푼 아랫배부터 그 밑단으로 향하면 보이는 현자의 둔부.

아래는 신기하게도 흰색 털이다.

인상이 깊어 머리에 오랫동안 남을 것 같다.

외간 남녀 둘이 홀딱 벗고 한 침대에 누워있는데 섹스를 안 했을 리가 있나.

고뇌가 깊어지는 그 순간 머리에서 좋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상태창!’

식목도감을 보면 알 수 있으리라.

나는 다급하게 불러보았으나, 상태창은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에덴 내부에서는 세계수와의 연결이 끊어지게 된다.

‘…현자가 하룻밤으로 사람을 조지진 않겠지?’

지금까진 우호적이었으나, 정절에 엄격하다면 어디 사는 원망의 세계수마냥 나를 노릴 수 있다.

저자세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일단 먼저 일어나자.’

거의 도망에 가까운 선택.

나는 그녀가 깨지 못하도록 침대에 살포시 손을 얹고 엉덩이를 바깥쪽으로 밀었다.

-번쩍.

자연스럽게 현자의 눈꺼풀이 올라간다.

맙소사.

내 높은 운은 왜 항상 이럴 때는 안 따라주는 걸까.

눈을 비빈 현자는 아직 내 모습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빌 수밖에 없었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사실 현자는 기억하고 있고, 그녀가 술에 취한 나를 유혹했으며 의도했다고.

그 아주 낮디낮은 확률을 손으로 빌 수밖에 없었다.

“….”

그녀의 아리따운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절대 닿을 일이 없다고만 느껴졌던 고귀한 존재.

안이 비쳐 보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흰 피부는 그 흔한 분칠조차 하지 않았다.

“으응, 시헌씨?”

졸린 목소리가 나긋나긋하게 퍼져나간다.

오래 사신 분이 목소리는 또 왜 그렇게 달콤한지.

현자는 팔로 베개를 짚고 몸을 기울였다.

속옷 하나 입지 않은 가슴이 아래로 축 내려간다. 내 눈이 자연히 그곳을 향했다.

“왜 제 방에, 으음. 계신 건가요?”

잠에 취해 하품까지 하며 나른하게 나를 본다.

거기까지 들었을 때. 나는 속으로 빌고 있던 마지막 확률마저 빗나갔다는 현실을 깨달아버렸다.

현자의 눈이 벗고 있는 내 상반신과 하반신을 천천히 바라본다.

“……어.”

현실을 당도한다.

똑똑한 그녀가 진실을 알아차리기까지는 나보다 빨리 걸렸다.

“어?”

내쪽 하반신에 시선을 고정했다가, 내 얼굴을 바라본다.

반사적으로 자신의 가슴을 먼저 짚은 현자가 깜짝 놀라 팔로 가슴을 가렸다.

꺄아아악.

같은 소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오른 현자가 이불을 끌어모아 자신의 몸을 돌돌 감쌌다.

“…….”

이불이 말려 올라가며 침대 위가 훤히 드러난다.

찢어진 흰 드레스, 후크가 고장 난 커다란 브레지어. 널브러진 코르셋.

이불이 감추고 있던 침대의 새빨간 선혈 자국까지 드러나고 말았을 때. 우리는 어젯밤을 더이상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저희, 어제 뭘 했죠?”

“기억, 안 나세요?”

서로 말을 떠듬떠듬 더듬었다.

현자는 고개를 힘차게 두 세 번 끄덕였다.

“취, 취한 바람에 아무런 기억도 안 나는데…. 아, 아무 일 없던 거죠?”

평소보다 상기된 목소리로 내게 따지듯이 현자가 물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헀다.

하필 아침을 맞아 일어난 하반신의 그것이 껄떡대기 시작했다.

“왜, 왜 거긴….”

어쩔 수 없다.

이미 저질러 버린 거 어떻게 돌이키겠느냐.

먼저 이성을 찾은 나는 나직히 현실을 말했다.

“저희, 물고 빤 거 같은데요.”

“그,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상스럽게!”

내 말에 현자가 소스라치게 반응한다.

부정해도 어쩔 수 없다. 저 피가 대신 증거물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백 년 이상은 사신 양반이 처녀인 건 놀랍지만, 눈앞의 피는 있을 수 없는 현실을 설명하고 있었다.

“…팬티.”

“네?”

“팬티 줘요!”

떽, 소리치는 현자에게 나는 반사적으로 손에 쥐고 있던 곰돌이 팬티를 넘겼다.

현자의 손에 꽉 쥐어 넘어간 팬티의 곰돌이가 왜인지 울고 있는 듯 했다.

이불 안에 들어간 현자가 이불째로 몇 차례 흔들리더니, 사이에서 손이 불쑥 튀어나와 침대 위의 브레지어까지 가져갔다.

“아, 그거 고장난 건데.”

-번쩍!

마력이 느껴진다.

긴급하게 마법으로 보수했나.

‘처음 만날 때는, 뭐 같이 자니 뭐니. 남녀고 자시고 통달한 사람 같았는데.’

마로니에와 방을 같이 쓴다고 정했을 때의 이야기다.

나랑 할 얘기도 많으니. 그냥 같이 잔다고.

하지만 탈의실이 없어서 보일 수는 있는데. 그건 알아서 감안 하라고.

화장실 소리도 들릴 수 있다. 그래도 오는 게 좋을 것 같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현자가 남녀 관계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내숭인가? 아니 무슨 이런 내숭이 다 있어?’

언제나 세상에 초탈한 인물로 보여야 한다는 자존심이 있어서일까.

“빨리 옷 입어요!”

“아, 예.”

나는 바닥에 널부러진 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이불에서 튀어나온 현자는 속옷차림이었다.

허벅지를 안쪽으로 모으고 팔로 가슴을 가린 자세. 부담스런 눈빛으로 이쪽을 흘기고 있었다.

속옷이 푹 젖은 탓에 안이 비쳐보이는 건 어쩔 수 없을까.

내 시선이 하부를 향하자 현자가 노려봐 온다.

나는 시선을 피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코르셋, 드레스. 상의까지 전부 입은 현자.

작정하고 코르셋까지 착용할 줄은 몰랐다.

“…무슨 일이에요.”

“아뇨. 갑자기 아침에 본 말랑한 뱃살이 생각나서.”

“시헌씨는 추행하는 게 취미에요?”

옷을 다 입은 현자가 성큼성큼 다가와 내 팔뚝을 꼬집었다.

-지끈!

힘이 강하다. 악 소리가 나올 뻔했다.

눈물이 쏙 빠지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숙취가 빠지고, 현자는 여전히 붉힌 얼굴을 아래로 내리고 있었다.

살을 최대한 가리기 위함인지 레이스 장갑까지 착용한 현자는 정숙하게 서서, 발목조차 보이지 않도록 했다.

“저희, 아무 일도 없던 거 맞죠?”

“아니 근데 피가.”

“……생리혈이에요.”

“무슨 미친. 현자님이 잘 아실 거 아닙니까. 아니 그 전에 나무도 생리를 합니까?”

“아. 여하튼 그래요. 그렇다고요!”

생리면 더 문제지.

와중에 그걸 생리로 덮으려는 현자의 필사적인 발악에 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래선 안되는데 약간 귀여운 것도 같고.

나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진정시키며 현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상황이 너무 어처구니 없던 탓이다.

“현자님이 잘 아시지 않습니까. 똑똑하신 양반이 왜 그런데.”

“……이 방에, 기록하는 마도구가 있기는 해요.”

마지막의 마지막 수단을 살피는 현자.

그녀의 눈이 방 구석에 있던 불투명한 구슬을 향했다.

마치 타조알같은 크기의 수정구였는데, 현자는 뚜벅뚜벅 걸어가 그 수정구를 담쑥 집어 침대에 앉았다.

내심 한 켠 불안했던 나도 그 구슬을 보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다가오지 마요.”

“…네?”

“저만 볼게요.”

무슨 그런 억지가 있는가.

쫄리는 부분이 없지는 않다.

혹시 내가 강제로 저질렀다면, 지금 현자의 반응이 심상치 않은 것으로 보아 내 인생이 대쪽날 수도 있다.

구슬이 웅웅대며 아티펙트가 작동한다.

현자의 눈이 번뜩 뜨였다.

서서히 방의 기록을 찾는 현자. 나는 멀찍이 서서 그것을 바라보았다.

어젯밤을 찾기라도 했을까?

현자의 숨이 멈췄다.

입을 살짝 벌리고, 양 손에 잡은 수정구슬을 놓칠 것 같이 부들댄다.

“저, 현자님?”

“…….”

답변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만큼이나 집중하고 있는 걸까.

나는 발을 움직여 침대의 뒤편으로 돌아가 현자의 뒤에서 수정구슬을 바라보았다.

살짝 마력을 보내 수정 구슬을 확인하니. 즉시 내 눈에 장면이 펼쳐졌다.

소리까지는 아니지만 한 폭의 장면.

새벽 4시의 현자의 방 안. 세피로트는 들어오지 않고 우리 둘이 몸을 겹치고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끝났네.’

현자가 바라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상당히 움직임이 거칠었다.

나체가 된 현자가 침대에 등을 기댄 내 기둥을 입으로 삼킨다.

정확히 말하면, 삼켜지게 되었다.

술에 취한 내 거동이 굉장히 야만적이었다.

머리카락을 감싼 채 이 사람의 입을 자기 멋대로 희롱한다.

몇 번이나, 몇십 번. 수백? 아니 천 번?

중요한 건 몇 시간이 지나는 동안 현자의 머리가 내 힘에 이끌렸다는 소리다.

흰색의 액체가 입안에서 뿜어진다. 뿜어짐에도 그대로 허리를 왕복한다.

그렇게 몇 십분을 반복하다가, 침대 위에 누운 현자를 내가 덮치듯이 찍어눌렀다.

나는 거기서 장면을 그만 볼 수밖에 없었다.

‘….’

너무 자극적이기도 했고.

계속 같이 보다간 슬슬 들킬 것 같았으니까.

서로 껴안은 자세로 박아대는 걸 마지막으로 나는 수정구에서 눈을 떼어냈다.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니 현자는 여전히 몸이 굳어 있었다.

‘…이거 어쩌냐.’

증거까지 남아버렸는데.

하필 첫장면을 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소리가 들리지 않은 탓에, 누가 누굴 유혹했고 어쩌다 그런 상황에 이르렀는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지금 보는 장면만 친다면.

나는 내 죄를 피할 수 없다.

어쩐지 오늘 아침에 현자 타임이 평소보다 10배는 더 심하게 오더라.

술에 취한 나는 성욕에 미친 놈이나 다름없었다.

-꿀꺽.

침이 넘어간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겸손한 자세로 현자의 어젯밤 칙칙폭폭을 기다릴 뿐이었다.

오늘 아침에 본 곰돌이가 자꾸 눈앞을 스쳐지나간다.

-툭.

마침내 수정구가 꺼졌다.

현자의 손아귀에 힘이 풀린다.

쿵- 데구르르.

바닥에 떨어진 수정구가 맥아리 없이 벽면을 향해 굴러나가고. 현자는 멍한 눈을 아래로 내렸다.

처음부터 피부가 붉었던 건지,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목덜미랑 귀, 심지어는 팔도 빨갛다.

“현자님?”

“……그게, 아니. 그러니까요….”

“어제 무슨 일이 있었죠?”

슬쩍 보기는 했지만, 구태여 입 바깥으로 이야기를 꺼내진 않았다.

나는 못 본 것처럼.

반응을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 나는 그 장면을 보지 못했다는 걸 알리고 싶을 뿐이다.

현자는 손으로 연신 부채질을 했다.

“…그, 그게.”

현자는 착잡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가, 이런 일은 처음이라… 잠깐. 정신이 나간 것 같은데요….”

“네, 네. 진정하세요.”

힘을 내려는 듯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현자.

도중에 숨이 끊겨 하- 하고 숨이 뿜어져 나온다.

“…오늘은 사고로, 생각해 주세요.”

그녀의 입에서 부탁이 떨어졌다.

나는 그 부탁을 받아주는 것 말고는 아무런 선택지도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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