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3화 > 요람의 붕괴 (8)
“다시 말한다.”
쾅!
책상을 강하게 친 레몬이 주변을 싸늘하게 노려봤다.
“지금 당장이라도 요람에 방책을 더하고, S급 헌터들을 싹 불러 모으지 않으면 안된다.”
금빛 기사단장.
심장 부위에 달린 황금색 사자 장식이 그녀의 위치를 상징한다.
교황의 직속 일곱 기사단. 그 권력은 표면상으로 대주교에 준한다.
이단이라 판단된다면 즉결 처분도 가능하다.
“그럴 리가 없겠지요. 이곳이 어딘 줄 알고 플라워가 쳐들어온단 말입니까?”
“이미 어느정도 정황이 드러났을 텐데.”
“끽해야 스파이 한 둘입니다. 플라워의 기만일 가능성을 생각해야지요.”
교전이 심화 된 현재 평화로운 요람에 군사를 집중했다간, 여론의 뭇매를 견딜 수 없다.
“그리고. 위치상 상호 존대가 기본인 것으로 압니다만.”
“뭐?”
어디까지나 교황의 대리인.
레몬이 더 위의 인물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권력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금빛 기사단은 천마 토벌전을 계기로 급속한 쇠락을 겪어 버렸으니까.
단장인 레몬 역시 그때의 부상이 남았다.
-지끈.
심장을 두드리는 아픔. 레몬이 미간을 찌푸렸다.
“재차 말한다. 이는 교황님의 뜻이며, 마땅한 이유 없이 어겼다간 그 책임을 엄히 물을 것이다.”
대주교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으나, 이곳은 요람이다.
절대 침공받아서는 안되는 자리다.
지금껏 신성함을 부각시키고, 세계수가 신으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
거기에 플라워의 입김이 조금이라도 닿았다면 신경을 써야 한다.
‘빌어먹을 노친네가.’
레몬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요람이 아닌 수목의 성지는 전부 경계를 끌어올렸다.
다 이유가 있었고. 어겨서도 안된다.
말마따나 교전이 심화하고 있다면 더욱 필요하다.
옛날의 레몬과는 상당히 달랐다.
소천마 토벌전을 첫 출진으로 지금까지. 마력의 단전이 완전히 부수어져 전투력은 갈수록 낮아졌지만.
치기 어린 감정보단 이성을 되찾았고. 그때보다 훨씬 완숙해졌다.
“레몬 단장님은 가끔 인간을 경시하는 태도가 있지요.”
“무얼?”
“저와 아론 사제가 인간 출신이라, 저희의 의견을 너무 경시하는 것이 아닙니까?”
“말장난을.”
대화를 나눌수록 꽉 막힌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대체 이런 놈이 왜 대주교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건지 궁금증이 끓어올라 미칠 정도.
이유는 알고 있다.
레몬은 차분하게 시선을 내리 깔더니, 싸늘하게 경고했다.
“빈 마르크 대주교.”
“예?”
목소리가 달라진 것을 알아차렸는지 눈꺼풀이 살짝 트이는 마르크.
“빈 마르크 경의 성과는 교황님께서도 익히 들어 알고 계신다. 많은 플라워를 소탕했고. 주변 사제와 주교들에게 굉장한 신임을 얻는다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인지?”
“내 말의 의미를 아직도 모르겠나?”
성과 조작.
굉장히 흔히 있는 일이다.
“교단의 신앙이 빛을 보지 못해. 세계수님들도 통탄을 금치 못하지. 애새끼들 좆대가리만도 못한 뇌를 어디서 굴려 먹고 앉아있나?”
“무, 무슨 망발을!”
공기가 싸해진다.
한 발자국 레몬이 다가가자 이를 지켜보고 있던 호위 사제들이 어쩔줄 몰라한다.
-저벅.
레몬의 앞을 막아서는 한 남자.
아론이 무표정한 얼굴로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본다.
레몬은 어이없다는 듯 웃더니. 아론의 뒤에 있는 마르크 대주교를 응시했다.
“우리가 재판을 치르지 않는 것은. 아직 네놈이라도 쓸 구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
“그냥, 조용히, 넘어가자는 걸. 아직도 모르겠어?”
높아지는 언성.
숨이 턱 막힌다.
“세계수님이 진정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아니면 우리가 언제까지 치매 걸린 네놈들을 사원에서 가르쳐야 하지?”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는 하나. 기사 단장.
이런 곳에서 무능함을 보일 인물이 아니다.
“아론 경.”
“예.”
“따르는 것은 좋으나, 지나침은 화를 부르는 법이다.”
“죄송합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대주교가 말을 더듬다가 다급히 조잘댔다.
“아, 아무런 근거 없는 헛소리를. 책임질 수 있는 발언을 하시오!”
“당당하다면. 왜 말을 더듬지?”
레몬은 등을 돌렸다.
“작금의 사태에는 네놈같은 놈들이 초래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 점을 알고 행해라. 부디.”
인간에 대한 차별.
적폐와 방산비리.
종교에서도 인간에 대한 차별은 엄연히 남아있다.
하루 이틀만에 없앤다고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사 단장인 레몬 역시 그 점을 뼈저리게 안다.
‘바라지도 않는 사람을 죽이면서 지키고자 했던 건 이런 놈들이 아닌데.’
사명과 의무.
뼈저리게 알고 있지만 분노가 끓어오른다.
“당장 남아있는 사제들을 무장시키고, 경계해라. 단 몇 초의 공백도 허가하지 않는다.”
“…….”
“자네는 대답도 하지 못하는가? 처세만큼은 없는 언변도 구사하던데.”
대주교는 입을 다물고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밖으로 향한 레몬은 문을 소리가 들리도록 강하게 닫았다.
-쾅.
창 밖에는 훈련을 하는 생도와 국목들이 보인다.
몇 년간은 노력, 일로 너무 바빴던 탓에 종교적인 일을 제외한 모든 이슈는 접하지 못했다.
천마 토벌전 이후의 재활로 꽤나 많은 시간을 소모한 탓도 있었다.
마력을 담는 단전과 마력이 통하는 혈류 전부가 작살이 났으니까.
‘부디. 아무 문제 없이 넘어가기를.’
교황의 호위로 몇 명의 기사들을 남겨두곤 다시 돌아가야 하는 처지였지만 기도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
*****
현자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대신한다.
국목이란 자리와 의무도 과했던 마로니에에게는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세뇌 때문에 한동안 정신이 팔린 적도 있지만. 옛날 이야기다.
일상을 찾은 마로니에는 어떻게 현자님의 기대를 만족시켜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했고. 몹시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가, 예상되는 플라워 침입 경로야.”
시스템이 개편된지 수십 년.
그러나 그 전의 시간까지 더한다면 기원전에서부터 비롯된 세계수의 요람.
고대의 마법과 아티펙트는 고스란히 녹아 있으며.
반대로 억제하고 있는 큰 위험물도 존재한다.
오랜 시간 동안 준비해왔을 플라워의 경로를 예측하는 건, 이 자리에는 마로니에밖에 없었다.
“교단 내에서도 배신자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어디에도 발설하면 안 돼.”
요람의 시스템을 관측했다.
현자의 도움이 필연적이었고. 에덴에서의 공부가 도움이 되었다.
지금 이순간 마로니에의 지식 상한은 압도적.
준비에 불과한 지금. 마로니에는 실상 굉장한 업무를 떠맡고 있었다.
중간중간 현자가 직접 방문하며 조언까지 한 결과.
“…이게 일단 내 계획이야.”
나름대로 봐줄만한 작전이 탄생한다.
“괜찮네.”
“이 정도면… 도망치는 게 아니라 완전히 막을 수도 있겠는데?”
요람에 잔존한 많은 인력을 고려한 결과다.
과신은 금물이다.
마로니에라고 해도 경험은 아직까지 없다.
그녀가 생각한 변수만 수 천가지.
마로니에가 워낙 조리있게 설명한 덕에 분위기는 화기애애하다.
‘말은 해야하는데.’
절대 이대로 진행될 리가 없다는 거.
그렇다고 분위기에 초를 치자니 차마 그러지는 못하겠고.
어느정도 공기가 가라앉으면 말해야겠다.
그리 생각한 순간 이시헌이 입을 열었다.
“아직 끝난 거 아니고, 몇 가지 정도 더 설명할게.”
형언할 수 없는 이유로 계획이 무너졌을 때.
각 국목의 특수성을 생각하고 할 일을 정한다.
누구는 인명 구조를 우선하고.
누구는 마법을 보조한다.
현자의 공간 마법은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마법보단 견고하지만, 부숴지는 게 쉬우니까.
그녀의 곁에서 접근하는 마법사들을 견제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이 그룹에는 생도들도 합류했다.
도망칠 방향을 알리는 인원. 당연히 필요했다.
이 집단의 목적은 ‘인명 구조’.
플라워를 완전히 틀어막는 것이 아니다.
“여기까지는 다들 기억하고. 오늘부터 잘생각은 하지 마. 각자 위치로 돌아간 뒤에, 특이점 있으면 바로 연락 주고.”
설명과 분담을 마치고 그녀를 바라보는 이시헌.
마로니에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
유능하긴 하다.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까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나서지 못할 때 항상 먼저 입을 열어준다.
무리수거나 힘든 방안을 꺼내놓을 때도, 빈축을 사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좋은 사람.’
그렇지만.
불과 며칠 전을 떠올리면 어색해지는 것은 똑같다.
해산한 뒤, 계획 점검.
이번에도 철야를 하는 마로니에의 머리 위로 차가운 얼음병이 놓여진다.
“착하고 똑똑한 사람은, 많이 호구라고 부르는데.”
“…그게 뭐야.”
“너 고생 많이 한다고.”
계획에 대해 서로 주고받는 게 많다 보니 이제는 일상적인 대화까지는 가능하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도 너같은 사람이 있긴 했었는데. 지금 잘 지낼려나 모르겠다.”
“…나같은?”
“어.”
물을 마신 시헌이 낄낄 웃었다.
“끔찍하게 착해빠져서, 온갖 일을 죄다 맡는 사람이 한 명 있더라고. 주변 사람을 되게 좋아했는데.”
“친구? 애인?”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로니에의 말에 시헌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잘 모르겠네. 만난 기간은 짧았거든. 친구…? 동료 쯤인가.”
이 이야기는 중요치 않다.
대충 넘긴 시헌이 어깨를 풀곤 다시 자기 일에 집중했다.
진지하게 서류를 읽어내리는 눈.
가끔 보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는 새에 푹 빠져들게 된다.
그만한 매력이 있다.
‘자기도 일만 하면서.’
마로니에는 졸린 눈을 껌뻑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휴식이 필요하다.
벌써 3일 내내 쪽잠을 제외하면 한숨도 자지 않은 마로니에다.
“푹 자. 일 있으면 바로 알릴 테니까.”
아직 계획에는 수정할 부분도 많고. 보완할 구석도 몇 군데 눈에 보였지만.
마로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이상 머리가 굴러가질 않는다.
그리고… 이 사람 곁에 있으면 가끔 머리가 뜨겁다.
차라리 방에서 혼자 집중하는 편이 낫다.
-끼익. 쿵!
문을 열고 닫은 뒤, 비척거리며 움직이는 마로니에.
방에 거의 다다르니 한 남자가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어이. 땅딸보.”
“벨?”
“최근 좀 바쁜 것 같던데. 시련은 통과 했나?”
영국의 국목. 벨이 킥킥대며 마로니에의 어깨를 툭 쳤다.
그녀의 몸이 기우뚱 넘어간다.
넘어지려다가 겨우 중심을 되찾았다.
“…뭐야.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당황해서 그녀에게 묻는 벨.
마로니에는 눈살을 찌푸리며 벨을 바라보았다.
영국과 프랑스 독일. 이 세 국가는 국교를 맺고 국목 간에도 상당히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본래였다면 이번 계획에도 그 둘을 포함시킬 생각이었지만.
‘…에이비.’
독일 가문비나무.
그 남자의 행태가 수상하다.
어릴 적부터 훈련도 함께 했던 그 녀석이 배신할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적인 감정이 들어갈 수도 있으니 벨과 에이비는 되도록 끌어들이지 않았다.
“너 괜찮냐? 눈이 막 파르르 떨리는데?”
“닥쳐 벨. 피곤하니까 그냥 들어가. 답지 않게 웬 걱정이야?”
“말투 봐라. 프랑스인 아니랄까봐 화가 많네.”
평소같은 벨의 말장난도 지금은 지겹다.
마로니에는 한숨을 내쉬며 벨을 지나쳐가려고 했다.
“나 간다.”
나직히 내뱉는 한 마디 뒤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
-저벅.
등 뒤의 복도에서 울린 소리에 벨이 반응한다.
“에이비?”
그 남자.
이시헌이 조금은 경계하던 사람이자, 마로니에의 친구.
본래였다면 별 생각없이 지나쳤을 상황이지만 마로니에의 머릿속에는 이미 한 가지 의문이 피어났다.
새벽 1시 30분.
세 국목이 이 자리에서 모였다.
그것도 자신의 방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알 수 없는 현상을 우연으로 치부할 마로니에가 아니다.
오싹한 느낌에 졸음이 달아났다.
마로니에가 앞과 뒤를 한 번씩 둘러보았다.
“마로니에.”
한 발자국씩 다가오는 에이비. 벨은 여전히 실실댄다.
불과 두 달 전의 그들과 똑같은 모습이었고. 보통이었다면 의심도 들지 않았을 상황.
신경이 너무 예민한 까닭일까.
흉흉한 분위기에, 마로니에의 눈이 새파랗게 물들었다.
‘…….’
-우웅!
생각을 읽었다.
깊게 퍼져나간 의식의 한구석, 벨의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움찔!
바짓춤에 꽂힌 완드를 빼내려던 마로니에의 손이 벨에 의해 간단히 저지되었다.
“조용히 한 숨 자고 있어.”
-쿵!
폐에 느껴진 고통에 온몸의 산소가 빠져나간다.
눈을 질끈 감은 마로니에의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는, 이전과 달리 굉장히 어두웠고.
뚝 떨어진 침 한 방울을 더럽다는 듯이 닦아낸 벨이 마로니에를 어깨에 들쳐맸다.
“내가 말했잖아. 운동 좀 하라고.”
“…미친, 새끼.”
침전하는 의식 속 한 마디가 들려왔다.
“넌 체력이 너무 약해.”
*****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짐작하고 있었다.
우리 중 누군가가 습격받는다.
그러나 호텔 내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예상치 못했다.
‘예상하지 못한 거지, 대비책이 아예 없던 건 아니지만.’
<짹!>
마로니에에게 정령 한 마리를 붙여두었다.
그것도 전투력이 가장 뛰어난 루시.
목숨에 문제가 가는 일이라면 즉시 힘을 쓰라고 명령해두었지만, 마로니에를 죽일 생각은 아닌 모양이다.
마로니에의 힘은 플라워측에서든 세계수측에서든 쓸모가 많다.
쉽게 죽일 리가 있나.
지금 빠른 속도로 요람을 벗어나는 움직임을 읽고 있다.
본의 아니게 마로니에를 미끼로 쓴 셈이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은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뻐억!
“크흡, 카학.”
습격을 당한다.
마로니에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니다.
얼굴이 반쯤 함몰된 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누워있는 한 여성.
“야.”
“…쿨럭, 쿨럭.”
“대답.”
-뻐억!
살점이 짓물러지며 핏물이 주먹에 끈적하게 배어든다.
“그만, 그만해….”
고통이 지겨운지 이젠 울기까지 한다.
시간이 많았다면 세뇌를 하는 여지는 있겠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나는 말 없이 다시 주먹을 움직였다.
-꽈앙!
바닥에 핏물이 예쁘게 퍼진다.
플라워라는 이름 답게, 꽃잎의 형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