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3화 > 흑백의 꽃 (完)
먼 바람을 타고 복사꽃이 날아왔다.
비와 함께 내리는 화우(花雨).
여자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자신의 머리카락 위에 떨어진 꽃잎을 매만졌다.
고운 손 위로 놓인 검은 복사꽃이 바람을 타고 손 위를 구르다, 먼지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건.’
홍연은 잠시 그 꽃잎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무엇이 떠오를 것 같아, 잠시 전장에서 떨어져 그것이 무엇인지 고민해볼까 하는 충동도 들었으나, 그녀는 이윽고 꽃잎에서 시선을 떼내곤 다시 발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쓸 필요는 없겠지.’
요람의 함락이 얼마 남지 않았다.
*****
들것 위에 옮겨져 산 위를 오른다.
“어엌, 억.”
-터벅터벅.
산길이 험해서 그런가. 움직일 때마다 몸이 흔들린다.
살갗이 쇠봉이나 천에 스치면 신음이 튀어나왔다.
“에이 이 형님 엄살이 심하시네.”
“이 씹새끼….”
“야야 아오리. 형님 덮치려면 지금이 타이밍 같은데.”
“왕님, 수발 필요해요?”
“됐어. 금방 나아.”
들것을 앞뒤로 옮기고 있는 태양과 아오리가 킼긱대며 나를 바라보았다.
“손? 발? 말만 해요. 착정 병동. 간호사 아오리가 되어줄게요. 코스프레 할까요?”
“…아오리 넌 입만 안 벌리면 참 괜찮은데.”
“그게 저인걸요.”
“허리 아프니까 말 걸지 마라.”
“넹.”
힘에는 대가가 따른다.
전신의 마력을 마기로 치환하는 흑도는 연약한 인간의 신체와는 맞지 않는 힘이다.
인간보다 훨씬 더 단전이 튼튼하고 강인한 목인의 신체조차 받아들이기 힘든 힘.
그걸 인간의 몸으로 구사하려 했으니 부작용이 따를 수밖에 없다.
‘유지해봐야 몇 분 지나면 바로 반점이 올라와서.’
원래는 그렇지 않다.
조금 더 오래 유지하며 천천히 힘을 끌어올리는 게 정상인데. 이번에는 정신줄을 놓고야 말았다.
“형님.”
양 팔에 머리를 기대고 신음하고 있으니 태양이 물어왔다.
“앞으로 어쩌실 겁니까?”
“뭘 어째 이 새끼야.”
“그 천마의 힘이니 뭐니 하는 거 다 들킨 거 아닙니까. 적어도 옆에 있던 한국이랑 일본 국목은 알 텐데.”
매화가 죽고 구덩이 안에서 쓰러진 나를, 소란을 듣고 찾아온 태양이 수거해갔다.
처음부터 이럴 줄 알고 철저히 준비를 했다던가.
수연과 사쿠가 채 오기도 전에 나는 산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그 여자는 알겠지만… 뭐. 문제 있나.’
정작 천도와 무궁 사이에서도 전투가 일어나지 않는 형국이다.
천도가 협회를 돕는 지금, 구태여 수연이 나를 적대할 이유도 없고 오히려 그 여자의 성격상 나를 좋게 볼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그 두사람은 믿을만 해. 나 같은 놈 보다 백 배는 선한 놈들이라. 적어도 이번에 힘을 드러낸 건 후회하지 않아.”
“아무리 그래도 왕인데, 조심성이 너무 없는 거 아닙니까. 저희도 하마터면 들킬 뻔했습니다. 신하의 힘이 워낙 독특해서. 살인멸구 안 했으면 저희는 이제 죽을 일 밖에 안 남았을거에요.”
태양이 나를 문책해왔다.
하기야 나를 담을 세력도 아직은 없는 상황에서 너무 경솔한 행동이 아니었을까.
이해는 되지만 어차피 내가 목령왕인 거, 알 놈들은 안다. 후회란 것도 아쉬운 게 있을 때나 하는 소리다.
“아 씨. 백도 보고 싶네.”
“……잉? 드디어 고백하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 아니 됐다.”
-웅, 웅!
태양이 챙겨온 내 핸드폰은 아까 전부터 꾸준히 진동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소식을 접한 진달래나 세영이 보낸 거겠지.
이 사람들은 내가 공간 마법이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걱정 끈을 놓지 않는다.
“전화, 안 받습니까?”
“갑자기 장난기가 도네.”
“큭큭, 형님도 성질 존나 더럽네요.”
나는 핸드폰을 움직여 메시지를 몇 통 보냈다.
[나 : 별일 없어요. 시간이 좀 걸린 것 같은데. 민간인 주거 구역 쪽은 저랑 국목들이 해결했으니 크게 걱정하지 마세요.] - (단체 전송)
-웅! 우웅! 웅!!!!!!!!!
전송 버튼을 누르기 무섭게 여인들의 통화가 빗발쳤다.
나는 낄낄대며 핸드폰의 전원을 껐다.
“사랑받으시네요.”
“가끔 무섭다.”
“통화는 안하게요?”
멀쩡하게 대화하기엔 지금 내 목소리가 너무 지독했고. 지금 말을 해봤자 걱정이나 돋울 거다.
게다가 할 일이 아직 몇 가지 남아있으니까.
치유의 권능으로 몸을 천천히 치료해나가며 기다리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자가 있는 곳까지 도착했다.
웬 들것에 실려오는 나를 향해 시선이 몰리고, 어딘가에서 세차게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타박타박!
“@#$%!!”
약간의 침울음이 섞인 목소리.
그런데 의미가 잘 이해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번역기가 망가졌던가.’
목소리는 잘 알고 있다.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목소리를 가지는 사람이 세상에 둘씩이나 있을 리 없으니까.
태양이 묵묵히 나를 옮기고 있으니 달려온 마로니에가 내 볼을 부여잡았다.
당황한 얼굴이 내 눈 안에 들어왔다.
“!#시헌%?? 3$^!!”
“태양아 뭐라냐. 번역기 고장나서 안 들린다.”
“[email protected]%5?”
“남녀 사이라면 국적 불문 대화가 통해야죠. 알아서 하십쇼. 그리고 저도 번역기 고장난지 오래입니다.”
태양은 시큰둥하게 들고 있던 쇠봉을 패대기쳤다.
-쿵!
“억!”
꼴사납게 바닥에 드러눕자. 무릎을 꿇은 마로니에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의 입에서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괜, 찮아?”
또렷하지는 않지만 듣기 좋은 한국어다.
“다친데 없어?”
옷이 조금 찢어졌지만, 커다란 옷으로 몸을 가린 마로니에.
얼굴에 묻은 흙이 혼자 그 기다란 전선을 어떻게 감당했는지 알려준다.
“그걸 내가 말해야지 왜 네가 말하냐.”
아직 긴 문장까지는 이해하지 못하는 듯. 블랑쉬는 습기 어린 눈을 닦아내며 입꼬리를 떨었다.
손에 묻은 흙이 눈에 들어갔을까. 찡그린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누가 보면 나 뒤진 놈인줄 알겠네.’
착각할만 하다.
치료에 전념하기 위해서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는데.
어쩔 수 있나. 손으로 마로니에의 어깨를 두드리자 양 손으로 손을 감싼 블랑쉬가 내 손에 볼을 가져다대었다.
주변 사람들에겐 부디 우애의 모습으로 비쳐지기를 바란다.
“이시헌!! 괜찮아요?”
“시헌상!”
뒤늦게 쫓아온 사쿠와 수연이 바로 내 옆에 달려왔다.
“몸 어때요? 갑자기 사라져선…. 상처는 없는데. 괜찮은 거 맞죠? 단전은 어때요?”
주머니를 뒤져 알약을 내민 수연의 손을 슬며시 밀어내며 나는 대답했다.
몸을 살짝 들어 올리자, 이제 좀 움직일 수 있을 것 같다.
“어떻게 됐어요?”
“아, 그게…. 다른 국목들은 도망쳤어요. 배신한 생도들도 전부.”
“아하. 민간인 대피는?”
“극히 일부랑 국목을 제외하면 전부 보냈어요. 이제 저희 차례에요.”
국목만 대피하면 이번 사태는 끝이다.
국목들의 협력 덕분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괜찮게 끝났네요.”
“아, 네. 시헌씨가 없었으면 이렇게 일이 잘 풀리진 않았을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고개를 사뿐히 숙여 감사를 전하는 수연.
국목이라는 사람이 절대 오만하지 않고, 순수하게 감사를 전하는 모습은 상당히 낯설다.
그때 본 힘을 화두에 올려두지 않는 마음씨도 대충은 알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침울한 마로니에를 한 번 안아주자, 내 품에 안긴 고양이같은 녀석이 얼굴을 품에 비볐다.
“넌 왜 울고 그러냐. 잘 했잖아.”
“……몰라.”
“한국어도 잘하네.”
얼굴의 흙과 눈물을 대충 닦아주고.
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 현자가 있는 곳으로 다가섰다.
기진맥진한 얼굴의 현자는 나를 보자마자 씨익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왜인지 포옹이 마려워서 양 팔을 벌리며 다가가자. 놀랍게도 포옹을 받아들인 현자가 내 귀에 속삭였다.
“너무 무리한 것 아니에요?”
말캉한 가슴의 감촉에 정신을 팔기도 잠시.
내 몸을 떼어낸 현자는 내 얼굴을 보며 실실 웃었다.
“왜 그리 웃어요?”
“아니요. 후후후. 그냥. 보니까 반가워서요.”
“엄마 곰 같아서 귀엽네요.”
“……예?”
한겨울 서리처럼 차갑게 식어가는 목소리.
나는 딴청을 피웠고, 현자는 나를 째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이번 마법만 사용하면 모든 게 끝나네요. 어쩌실 거에요? 시헌씨도 한국으로? 아니면 엘 아카데미로 가실 건가요?”
“일단 여기 남게요. 두고 온 게 좀 있어서.”
“그런가요.”
고개를 끄덕인 현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북적거렸던 이곳에는 이제 몇 사람이 남지 않았고. 살아남은 국목들 역시 상처투성이였다.
재단 쪽에 지원을 간다거나. 그럴 힘도 남지 않았기에 귀환 조치가 알맞다.
이정도로 잘 막은 게 기적인 셈이니까.
“어려운 일임에도 훌륭히 대처해주신 여러분께 현자의 이름을 걸고, 감사드립니다.”
현자는 고개를 깊이 숙여 감사를 전하며 하나 둘씩 국목을 전송시키기 시작했다.
세 번째 차례로 찾아온 메이플이 날보며 웃었다.
“몸 괜찮아요? 아까…. 좀 큰 소란이 있던데.”
“그냥 좀 큰 소란치곤 제가 험하게 당하긴 했죠.”
“후후후. 상처 하나 안 보이는데요? 아~ 저도 남고는 싶은데 몸이 엉망진창이라. 어쩔 수 없네요. 우선 가문에 돌아가서, 다시 처음부터 차근차근 조사할 수밖에요.”
플라워에 들어간 단풍을 찾던 메이플도 본국으로 돌아갔다.
“앗, 오랜만이에요. 헤헤.”
“향이?”
바둑이 같은 강아지 타입의 이향.
첫 번째 시련에서의 인연도 끊어지지 않고 잘 살아남았다.
생각해 보니 이번 숲지기 선발전에서 참 많은 인연을 찾았던 것 같다.
“헉 손 안씻어야지.”
“크흐흐.”
내 손을 부여잡곤 신나게 돌아가는 향이. 번호는 받았으니 언제든지 연락할 수 있다.
-툭툭.
다음은 블랑쉬.
프랑스의 국목인 그녀이니만큼, 그녀 또한 이제는 돌아가야 했다.
그녀가 싫어하던 일상으로 복귀해야만 하는 것이다.
블랑쉬는 눈시울이 조금 붉어진 채. 내 옷깃을 잡더니, 내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내 말에 입을 앙 다물더니. 꽃발을 들어 내 귀를 잡아 내렸다.
“아, 아아!”
아프지는 않지만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아래로 내리니. 블랑쉬가 내 귀에 한 마디를 속삭이고는, 도망가듯이 사라졌다.
“…전화 하면. 꼭 받아줘.”
그런 식으로.
사쿠도, 수연도 모두 갔다.
“형님. 그래서 저희 어떻게 만나게요? 엘 아카데미에 편입 각이라도 봐야 하나?”
“그건 나중에 통화해서 맞춰보지 뭐.”
“아항.”
태양과 아오리도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떠났다.
“…이제 요람은 형님 무대네요?”
“그런 셈이지.”
“최대한 열심히 흔들기를 바라겠습니다.”
나랑 태양밖에 모르는 사실도 주고받고 떠나니, 마지막으로 남은 건 나와 현자밖에 없었다.
현자는 마력이 거의 소진되었는지 처음으로 물약을 입에 머금었다.
“저도 오늘은 그만 자야겠네요. 마력은 충분한가요?”
“예. 할 일만 딱 마저 끝내고. 엘 아카데미로 돌아가겠습니다.”
현자는 내 말에 도끼 눈을 뜨며 작게 중얼 거렸다.
내 속셈을 알기라도 하는지.
“변태.”
한 마디만을 쏙 남기곤 혀를 내밀고 도망쳤다.
귀부인 같은 모습 치곤 유치찬란한 모습에, 뜨끔하기 보단 웃음이 나왔던 걸로 안다.
“아 그런데 보상은 안 줍니까?”
“원래 사람은 헤어지기 직전에, 그 다음에 만날 이유를 만들어두는 거랍니다.”
“아하.”
“어련히 찾아 갈테니. 너무 기다리진 말아주세요.”
-번쩍!
현자의 말을 끝으로 산 중턱에 남아있는 사람은 이제 나밖에 없었다.
나는 산 위에서 주변을 한참이나 둘러보았다. 하늘 위에 있는 달을 보며 잠시 뜸을 들이기도 했고.
그렇게 잠시의 여유를 만끽한 다음, 나는 나무 옆에 세워둔 짐짝에 손을 뻗었다.
인피면구와, 검은색의 분장할 수 있는 옷.
‘플라워가 습격한 요람이라.’
요람은 어린 세계수들이 자라나는 곳.
그 안에 위치한 세계수와 수목은 한 두 그루가 아니다.
그러나 허튼짓을 하기에는 아티펙트로 인한 경비가 삼엄하며, 들키는 순간 목이 떨어질 정도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랬는데.’
-퍼엉!
들려오는 폭발음.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지금은 아니잖아.’
무슨 짓을 저질러도. 플라워의 탓으로 몰아가기 딱 좋은 지금.
위험이 사라진 요람은 나에게 있어 경험치 사냥터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