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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래 많이 컸네.”
“선생님은 어련하실까요.”
미소 아닌 미소를 걸친 두 여자의 신경전에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나눠 가진다는 건 내 상식상 있을 수 없다.
자신 말고 다른 사람과 꽁냥대는데. 질투가 나지 않으면 오히려 그것은 자기가 가진 사랑에 의문을 가질 일이 아닌가.
더없이 과분한 사랑이고. 그걸 알면서도 교제를 허락한 이세영과 진달래다.
“……그래서. 그 아이는 누구야?”
내 품에 꼬옥 안겨 있는 시바를 가리킨 세영이 물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땀을 흘리며 긴장된 얼굴이 귀엽다.
“마, 맞아! 이 애는 누구야?”
아까부터 기가 죽어있던 별이도 이에 대해선 할 말이 있는지 손을 번쩍 들었다.
“삐?”
두 사람의 관심에 내 가슴을 꾹 잡고, 나를 바라보는 시바.
‘아빠 어떻게 해요?’하고 묻는 것 같아 번쩍 들어올려 볼을 부볐다.
“삐히히히”
말랑말랑한 볼따구에 즉시 만개하는 웃음. 긴장이 싹 달아난다.
“내 딸.”
“……딸?”
“어, 엥? 에엥? 시, 시헌이 애아빠였어!? 나 못 들었는데?”
세영의 얼굴이 벙찌고 별은 깜짝 놀라 책상을 내리쳤다.
-쾅!
이를 지켜보고 있는 진달래의 미소는 덤.
내 품에서 시바를 빼앗은 달래가 살살 시바의 머리를 문질러 주었다.
달래의 행동에 즉시 반응하는 시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달래가 내미는 케이크를 잘도 받아먹는다.
“엄마?”
-씨익.
두 사람을 보며 싱긋 웃는 진달래.
저 심리를 알고 있다.
다른 사람보다 애정 표현이 깊고 질투가 심하니 이해하지만, 말릴 때가 됐다.
싸하게 굳은 이세영의 얼굴에 다급하게 해명했다.
“세영이는 알 텐데. 나 키우던 화분 있잖아.”
“…아. 그러니까. 그게 애라고? 아니 잠깐만…. 그 새싹이 얘면 넌 대체 언제 애를 만든 거야?”
“이야기가 좀 길어지는데.”
내가 세계수의 남편후보인 건 모두가 안다.
나는 조금 아쉬워하는 진달래를 무시하곤 차분하게 설명했다.
이상하게 교류를 이어간 나무가 나에게 자신의 씨앗을 넘겨주었다는 것.
키우고 보니 어린아이가 되었고. 진달래가 시바를 많이 돌봐주며 얘가 달래를 엄마로 안다는 사실까지.
“법적으로 제 아이에요. 그리고 저희 동거중이구요.”
“이건?”
세영이 나를 노려본다. 외통수다.
“이건, 진짜긴 해.”
“……하아.”
깊은 한숨이 푹 내쉬어진다. 진달래의 의기양양한 표정이 얄미워 나는 손으로 툭 그녀의 이마를 때렸다.
-따악!
“후후후.”
웃는 거 봐라. 약올라 죽겠지? 하는 얼굴이다.
달래는 우리 가족의 관계를 증명하듯, 손으로 사랑스럽게 시바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보던 이세영이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야. 진달래.”
차갑게 가라앉은 분위기. 커피 위에 띄어진 얼음이 녹아 무너지면서 달그락- 소리를 내었다.
깜짝 놀란 별이 두 손으로 세영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도 이세영이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라 당황했다.
“세, 세영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스무살 애기랑 기싸움은….”
소심하게 세영을 말리는 별이. 삐질 땀을 흘리다가 나랑 진달래와 이세영을 번갈아 바라본다.
속으로 비명을 지르기 직전. 세영이 시바를 바라보았다.
진지한 얼굴로 세영이 입을 열었다.
“애한테 탄저병 예방 주사는 놨어?”
“…네?”
말싸움할 각오로 목 뒤의 키스마크까지 드러낸 진달래가 당황해 눈을 깜빡인다.
“맞췄어 안 맞췄어.”
“아, 아직…”
“뭐? 이시헌 니는 왜 아무것도 안했냐?”
목인의 생태까지는 잘 알지 못했다.
이세영은 나와 진달래의 반응을 번갈아 확인하더니 쯧쯧 혀를 차며 턱을 괴었다.
“죄, 죄송합니다.”
잘못을 인지한 진달래가 즉시 머리를 숙였다.
가만 있던 세영은 여전히 심통치 않은 듯 나를 노려보았다.
“이제 성인 된 애들이 애엄마 애아빠 노릇 제대로 하겠냐만…. 기본은 지켜야지 뭐하는 짓이야. 특히 시헌이 너 이 새낀 틈만나면 자리 비우지?”
“….”
“유치원은.”
“가정 교사가 한 명.”
“그래, 그건 다행이네.”
사회 초년생. 이세영도 젊은 편이지만 갓 스무살이 된 진달래에 비하면 훨씬 사회경험이 많다.
더군다나 이세영은 초등학생 때부터 모진 일을 전부 겪어왔으니.
뭐가 중요하고 뭘 챙겨야 하는지 아는 걸까.
가슴을 쓸어내린 별이 한숨을 내쉬었다.
“별이 너는 뭘 잘했다고 한숨을 쉬어?”
“난 몰랐징.”
“너는 절대 애 키우지 마라… 넌 애낳아도 집에서 게임만 할 것 같아.”
“아닌데? 나 완전 참한 색시 될 수 있는데? 그리고 뭐 우리 나이대 애들이 다 애엄마 노릇 잘할 줄 아나! 지가 아줌마처럼 이것저것 챙기고 다니면서.”
“뭐?”
“……히익!”
잔뜩 쫄은 별이 의자를 옮기며 내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내가 살살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금세 얼굴이 풀어진다.
“이시헌 너도 잘한 거 없어.”
“넵.”
“이렇게 큰 거 보니까 수목환 쓴 거 맞지? 척 봐도 과다 성장인데, 주기적으로 화분에 식물화시켜서 물이랑 비료랑 번갈아 가면서 줘. 그게 기본이니까.”
기본이다.
“혹시… 그런 거 관련해서 일해본 적 있어요?”
가만 듣고 있던 진달래가 처음으로 적개심을 내려놓고 이세영에게 물었다.
한 번 잘못을 지적당하니 고치겠다는 마음이 엿보였다.
“많이 했지. 세계수 유목이나 어린 목인 관리….”
처음 만날 때의 이세영이 떠오른다.
-너 좋은 거 갖고 있구나?
갑자기 대뜸 나에게 찾아와서 수목환을 요구한 것.
그녀는 그쪽 시장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때 수목환을 찾던 게….”
“뭐, 그렇지.”
시큰둥하게 대답한 세영이 이번에는 시바에게 손을 뻗었다.
진달래는 무어라 말도 못하고 시바를 건네주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육아의 신은 이세영이다.
“시바야. 나 기억나?”
“삐? 기억나요!”
새싹 시절 자주 챙겨줬던 이세영을 기억하는 시바가 손을 활짝 펼쳤다.
이세영은 눈으로 시바의 이곳 저곳을 들여다 보았다.
약간의 마력이 그녀의 몸에서 일어났다.
“어디 보자. 크게 모난 곳은 없네. 그래도 너무 빨리 자라는데. 성장 질환 같은 거 조심해야겠다.”
“어떤, 건가요?”
“수목환을 과다로 사용하면 몸이 성장을 견디지 못해서 열이 나서 죽는 아이들이 많거든.”
“죽는다니-”
“시바는 그 정돈 아니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예방접종은 해야지.”
시바가 고개를 갸웃였다.
“주사?”
“응 주사. 살짝 따끔한데. 견디면 좋은 일이 나는 거야.”
“주사!”
이야기를 듣는 진달래는 진지하게 이세영의 말을 받아적고 있었다.
수첩까지 꺼내놓고 펜을 놀린다.
이를 가만 보던 이세영이 피식 웃으며 시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헌이 이 새끼 걱정해서 왔더니. 이게 뭐야 진짜. 야. 여자들은 이게 전부냐?”
“전부라뇨?”
“니랑 사귀는 애들은 이게 다냐고.”
“……한 명 더 있긴 합니다.”
아직은 그렇다.
이세영은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섹스한 년은 얼마나 많은데?”
“……”
“대답.”
“그게, 훨씬 많은 거 같기도 하고.”
“이리와봐, 내가 빵 줄게.”
“죽빵이요? 그 고릿적시대 농담을….”
“잘 아네.”
“억!”
호되게 한 방 얻어맞았다. 이에 세영의 허벅지에 앉아있던 시바가 경악해 비명을 질렀다.
“삐!? 아빠 때리지 마!”
“방금은 아빠가 맞을만 해서 맞은 거야. 야 애엄마. 어떻게 생각해.”
“맞을만 했어 시바야.”
“삐? 삐???”
어쩔 줄 몰라하는 시바가 폴짝 뛰어내려서 나에게 다가왔다.
낑낑 무릎을 타고 위로 오르더니 내 이마를 부여잡고 호호 불기 시작했다.
“빠아….”
“진짜…너밖에 없다.”
세상에 천사가 있다면 그게 시바가 아닐까.
대체 우리 아이 이름을 시바로 지은 새끼가 누구야?
애 이름을 천사로 해도 될 정도로 어여쁘다.
우리 시바의 귀여움을 증명하듯. 옆 자리에 앉아있던 별이도 아까부터 손가락이 근질거리는지 우리 시바를 빤히 보고 있었다.
“야. 이시헌.”
세영이 말했다.
“너 애랑 나가서 잠시 장어같은 거라도 먹고 와. 오늘 새벽은 뒤질 준비 하고. 나랑 별이랑 시기 맞춰서 피임약 먹어놨으니까.”
“네? 넹? 아니 시발 예?”
“우리 달래랑 할 얘기 있으니까.”
“나갔다와요 당신.”
몹시 강압적인 태도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이 두터운 공기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아직 전화를 돌릴 사람은 굉장히 많으니까.
나는 시바를 번쩍 안아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팔자가 두렵다. 결혼하고 나면 뭔 일이 벌어지는 걸까.
“아 그런데.”
그래도 할 말은 있어서. 나는 가기 전에 세영과 달래, 별에게 한 마디를 남겼다.
“혹시 싸우진 마.”
아직까지는 개인적인 연인 관계에 그쳤다.
그런 관계들이 하나둘씩 내 옆에 오면서 엮이게 되는 건, 언젠가는 무조건 올 일이었다.
진지하게 묻자 유일하게 그 말의 속뜻을 알아들은 세영이 싱긋 웃었다.
“응.”
* * * * * * * *
-지글지글.
‘대체 아카데미에 장어집이 왜 있냐.’
이세영이 권고한대로 어쩔 수 없이 장어집에 들어갔다.
율무같은 정력 감퇴하는 음식은 절대 먹지 말라며 신신당부하던 이세영.
몸 때문에 나를 만난 건 아니지만, 나에게 올 애정이 줄어드는 순간 내 좆이 어찌 될지 모른다며 아우성치던 그녀의 표정이 떠오르니 공포심에 하반신이 오싹오싹하다.
“여자가 참 무서워 시바야….”
“삐이?”
된장국을 수저로 한입 떠먹은 시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딸. 꼭 착하고 천사같은 여자가 되어라.”
“시바 착한 어린이! 상도 받았어.”
“아이구 정말? 이따가 집에 들어가면 한 번 볼까?”
그런고로 단 둘만의 시간이다.
한동안 시바와 못 놀았으니 앞으로의 휴일은 대부분 시바랑 보내지 않을까.
밥 먹는 시바만 봐도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일도 끝났고. 산수유랑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전화를 받질 않는다.
메시지도 읽음표시가 전혀 뜨지 않고. 요람에서 있던 일 이후 갑자기 말수가 적어진 것도 걱정스럽다.
혹시나 해서 무슨 일이 있는지 성지호에게 물어보았지만, 아직까지 답장은 오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조사를 좀 해봐야 하려나.’
산수유가 연관되어 있다면 일은 중대사다.
‘됐다. 애 밥먹는데 일 생각하는 것도 문제고.’
세영이한테 들어서 느낀 바가 있다.
아이는 생각 이상으로 섬세하고, 예민하며, 부모된 우리가 쉴 틈도 없이 가르치고 지켜줘야만 애들이 바르게 자라날 수 있다고.
나같은 경우는 시바와 함께 있는 시간이 적어서 더욱 그렇다.
나는 옆에 앉은 시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바야.”
“삐?”
“아빠가 사랑하는 거 알지?”
“…….”
숟가락을 내려놓고 나를 쳐다본다.
고양이같이 연두색의 똘망똘망한 눈동자. 연해서 빛을 받으면 반짝거리는 머리카락과 여름에 맞춰 갈아입은 귀여운 동물 모양 반팔.
앞으로도 나랑 시바의 거리는 언제든지 멀어질 수 있다.
떨어져 있으면 알고 있는 애정도 의심하게 되고. 또 그 사실에 혼자 울적해 질때가 많다.
사랑이 식어서 그런 게 아니라.
사람들의 머리가 그렇다.
먼 감정은 좋은 기억만 쏙쏙 담아 아름다운 추억이 되는데.
좋은 기억만 눌러 담은 추억이 약간 쓴맛이 어려있는 가까운 기억보다 더 좋게 부각될 때가 있으니까.
옛날에는 행복한 것 같았는데.
지금은 왜 이럴까. 어딘가 달라진 게 아닐까. 착각하고 마는 것이다.
“시바도 아빠 사랑해여!”
해맑게 웃는 시바는 여전히 애정이 넘친다.
어떻게 된 게 새싹 시절부터, 그 감정하나만은 변하지 않고 있다.
그만큼 신경을 못 써주는 게 참 아쉬울 따름이지만.
아쉬움과 고민 보단 적극적인 행동이 도움이 된다.
-피식.
“자아 시바야. 이 생선 이름이 뭐게?”
아빠는 처음이라. 우리 딸이 뭘 좋아할지 모르겠네.
나는 나이도 어리고, 아직 세상을 잘 모르고, 우리 아버지도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니었으니.
“장어!”
“오. 우리 딸 똑똑한데?”
“히히히. 시바 똑똑해요.”
좋은 아빠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노력하는 아빠가 되었으면 한다.
타지 않고 잘 익은 장어를 골라 시바의 앞접시에 놓아주며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내 딸이 이렇게나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