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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헌이 빠졌다.
잘 보일 상대가 사라졌으니 나머지는 정녕 암컷 호랑이들의 기 싸움일까.
마주 본 세영과 달래 사이, 별은 열심히 초코라떼를 홀짝이며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봤다.
‘나도, 시바랑 시헌이랑 같이 장어 먹고 싶었는데….’
이길 자신이 없으니 진즉에 꼬리를 내린 별이다.
무서운 누님들이 팔짱을 낀 채 마주보고 있으니, 바짝 솟아있던 별의 금발이 축 처졌다.
발랄했던 별 모양 동공도 예의를 차렸는지 동그랗게 변했다.
-째릿.
서로를 의식하는 둘. 아직은 괜찮다.
육아에 대한 정보를 아주 진지하게 전달하는 도중이고, 그 아이의 어머니인 진달래도 여기서 자신의 고집을 내세우지는 않으니까.
누가 뭐래도 이시헌의 연인이다.
이시헌과 그의 딸에 관한 내용이니만큼 자신들의 사적인 감정보단 그를 우선해주고 있으니. 평화가 지켜진다.
“영양제 제품은 여기 있는 애들이 비교적 괜찮고. 수목환을 흡수한 아이라면 영양제 배합을 조금 더 신경 써야 하거든? 아마 주문 제작을 맡겨야 할 거야.”
“아하….”
“그런데 이런 급성장한 목인용 영양제들은 어떻게 회사랑 연락이 닿아도 래퍼가 오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고. 오히려 반려되는 경우도 꽤 있어. 필요한 약품 다수가 국가 제한에 걸리는 게 많아서 많이 다루지도 않고.”
“쉽게 구하는 방법은 없나요?”
진달래의 물음에 세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수목환이 그렇게 흔하지 않아. 어떻게 개발해볼까 하고 우리 가문 회사에서도 안건으론 나왔는데 여전히 홀딩 상태야.”
“…….”
“그래도 영양제는 꼭 써야 돼. 건강에 직결된 문제니까. 내가 말한 애들을 대충 써도 괜찮지만….”
“안돼요.”
진달래의 답변이 마음에 들었는지 세영이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연락해. 내가 아는 곳이랑 연결시켜줄 테니. 애랑 맞는 약을 만들어야지.”
“…알겠어요.”
“감사인사는?”
“감사합니다. 교수님.”
“교수님이라….”
그러나 그 안건이 끝났을 때.
화두가 ‘이시헌의 딸’에서, ‘이시헌’에게로 넘어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젠 정말 여자로서의 자존심 싸움.
별은 자세를 낮추고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그런데 달래야.”
부츠 신은 발을 들어 올려, 다리를 꼬는 이세영. 살이 약간 비치는 스타킹이 야릇하다.
그 눈웃음 하며 살짝 올린 미소는 그야말로 완벽한 알파녀.
달라진 분위기를 알아챈 진달래도 새하얀 원피스 끈을 단정하게 올리더니,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싱긋 웃었다.
끈이 올라가며 드러난 쇄골 옆 부위에는 키스마크와 손바닥 자국이 강렬하게 찍혀 있었다.
“하고싶은 말이 있는데.”
“동거인가요? 아카데미 교칙 상으로 문제 될 건 없지 않나요. 자택인데.”
“아니 그게 아니라. 시바 말이야 시바.”
“…….”
“법적으로 네가 모친이면, 부친은?”
“그야 당연히 시헌-”
시바의 아빠는 이시헌이다.
그리 말하려던 순간 이세영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방금은 정말로 신경에 거슬렸을 때 하는 얼굴이다. 이를 알아챈 별의 얼굴이 굳었다.
“세, 세영아.”
별이 다급하게 말리려 하나 가볍게 이를 무시한다.
도끼눈으로 한 번 째려보니 별이 금세 기가 죽어선 입을 꾹 다물었다.
이세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달래야. 우리가 지금 뭐, 기싸움하자고 온 건 아니잖아. 그렇지?”
“…네 뭐 그렇죠.”
두 사람의 시큰둥한 발언에 훌쩍인 별이 속으로 소리쳤다.
‘니들 지금 기싸움하러 온 거 맞잖아. 이 계집뇬들아!’
고양이가 아니라 호랑이가 싸운다. 긴장한 별의 안색을 흘겨본 세영이 혀를 찼다.
“우리가 뭐 지금은 시헌이보고 막, 장어나 먹고와라 이렇게 시키고는 있지만. 사실 이거… 시헌이가 마음만 먹으면 우리 아무것도 아니잖아. 걔 팔자에 여자가 몇인데. 안 그래?”
“…….”
이시헌은 그렇지만, 여자들의 입장에서는 그렇다.
지금도 남다르게 발을 넓혀가는 모습을 보면 무슨 카사노바인줄 알겠다.
가만 듣고 있던 별조차도 절로 고개를 끄덕일 논리.
“우린, 서로 사랑하는데요.”
“어 맞지. 사랑하지. 나도 개 사랑하고. 걔도 나 사랑하지. 시헌이가 우리한테 져주는 이유가 뭐겠어. 우리 둘 다 사랑하니까 개인적으로 있을 때는 최대한 아껴주려고 전부 져주는 거 아니야.”
그걸 배려라 부른다면 충분히 배려라 부를 수 있고.
이시헌 나름의 애정 표시 방법이다.
일부다처를 허락한 많은 가정이 있다. 그중 평화가 지켜지는 가정들은 어느 패턴이 존재한다.
여자들 사이에 완전한 서열이 존재하거나.
혹은 그 서열이 무의미할 정도로 서로가 서로를 아끼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남자 쪽에서 할 수 있는 행위 중 매우 강압적이고 강제적인 수단을 이용해야 한다.
이시헌은 그렇지 않았다. 고로 남은 방안은 두 개.
후자는 너무 이상적이며 전자는 어느 누가 나쁜 마음을 품을지 모른다.
평생 한 사람을 사랑해도 모자란 것이 사랑인데. 그걸 나누려 하니 당연히 갈등은 생겨나기 마련이다.
독점하고 싶고, 평생 내 것으로 삼고 싶다.
“내 말 틀렸어?”
“시헌이가 주는 사랑을 배신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이 말인가요? 그런데 시바 이야기는 왜….”
“왜기는.”
세영은 크게 숨을 몰아쉬더니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헌이가 뭘 걱정하는데. 나랑 너잖아. 딸인 시바는 더할 것도 없고. 그런데, 그렇게 관계를 맺어버리면. 세계수 남편 후보인 이시헌이 어떻게 될지는 생각 안해봤니?“
맹점이다.
진달래는 움찔 몸을 떨었다.
“그건-”
“……알잖아. 지금 세상 흉흉한 거. 영국 본가에서 국목이 배신한 탓에 지금 우리 가문도 지금 박살나기 직전이거든? 언제 시헌이를 노릴 사람이 나타날지도 몰라. 아니 이미 많지.”
그런데 이시헌에게 소중한 사람이 호적으로 명시되어 있다면.
많은 악의들이 어디를 향해갈까.
그리고 그걸 감당하는 이시헌이 또 어떤 문제를 겪게 되겠는가.
“지금 서류로 니들 관계에 구속력을 만드는 게. 옳은 선택일까. 너무 섣부르진 않아?”
세영은 차근차근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별은 생각했다. 한순간 보았던 화가 난 얼굴은 이곳에서 온 것이었구나.
자기 성질을 잘 죽이고 말했다.
그 정도로 이세영은 이시헌의 미래와 현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아.”
진달래에게도 생각이 없던 것은 아니다.
시바에게 진씨 가문으로서의 힘을 불어 넣어주는 건 절대 나쁘지는 않다.
시바가 살아가면서 겪을 혜택도 어마무시하다.
하지만 그건 이시헌의 적이 근처 목인 가문에 한정되어있을 때의 말이지. 그의 적이 세계수나 플라워가 되어버리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진다.
“좋아하잖아. 남자 생각도 해줘야지.”
질투가 아닌 호소력.
“…….”
진달래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시헌이도 내심 알 거야. 그냥 자기 혼자 감당할 생각이겠지. 어휴 이렇게 생각하니 짜증나네. 그새낀 아직도 애 같아. 자기가 만화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인 줄 알아요. 그것도 병이야 병.”
그게 멋있는 건데.
별은 혼자 생각해 넘겼다.
“…전 어떻게 하죠?”
“뭘 어떻게 해 이미 저질렀는데. 지금이라도 바꿔야지. 입양 형식으로 부친 이름만 쏙 빼면 괜찮을 거야. 문서 조작……. 쯧. 이건 우리 둘이 어떻게 해보고.”
어떤 방향으로든 도움을 주려 한다.
자신만만하게 들어왔던 진달래도 어느 순간부터 이세영의 말을 진지하게 들을 수밖에 없었다.
말에 가시가 있다지만, 생산적이었고.
무엇보다 그 사람을 생각하고 있다는 게 이렇게나 전해지는 건 처음이었으니.
세영의 말 중에서, 이시헌의 특징에 대한 걸 집어줄 때에는 자신이 생각한 것과 들어맞아 감탄할 때도 있었다.
같은 남자를 생각하며 하는 대화가 이상하게 즐겁기도 했다.
오래전, 이세영을 비난한 적이 있던 진달래였기에 이런 감정은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가 죽어도 옆에 다른 여자가 있으면 뭐, 더 낫겠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고백은 거절했는데, 나중에 받아준다고 대충 둘러대고. 만남은 지속하면서 여지는 계속 남겨주고.
-그래 놓고 다른 여자를 만나라고 계속 부추기는데.
-그렇게 좋아하면 그냥 고백 받아주고 평생 붙어있지. 애초에 좋아하는 건 맞아요?
방식의 다름은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공감하지 못했다. 그때의 진달래는 뭐라고 해야할까. 처음 겪어보는 사랑에 미쳐있었으니까.
다만 시간을 두고 계속 지켜보니.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더라.
“고마워요. 솔직히 한 판 붙을 생각도 하고 왔는데.”
“어, 붙게? 그럼 붙던가. 나 너한테 절대 질 자신 없으니까.”
“…….”
실실 웃는 이세영이 손을 풀며 자신의 약혼 반지를 슬며시 드러냈다.
“좀 더, 진지하게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전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건 맞아 보이니까.”
“이제 좀 친해질 수 있냐?”
“……어떻게 불러드려요?”
“언니.”
“세영 언니?”
이제 좀 친해질 수 있냐니.
마치 예전에 이시헌에게 들었던 말과 흡사해서 괜히 웃음이 튀어나왔다.
여자 이시헌. 자꾸 뭘 배려해주려는 것도 그렇고 딱 그렇게 부르는 게 맞지 않을까.
다른 점이 있다면 한 사람만 바라보는 이시헌. 그건 아마 세상에서 완벽한 사람이 아닐까.
그 순간이었다.
“잠깐.”
가만히 있던 별이 손을 들었다. 어딘가 심술이 가득한 표정으로.
이번에는 베타녀인 그녀조차 따질 수밖에 없는 말이다.
“그쪽 둘 다 사랑하는 건 알겠는데. 왜 나만 쏙 빼고 이야기하는 거 같죠? 세영이년아?”
“……어 미안.”
“뭐, 우리 둘 다 사랑하잖아? 나도 있는데? 나도 시헌이 사랑하고 걔도 나 사랑하거든? 어!?”
차라리 잘 됐다.
찐특. 오해하고 갑자기 급발진함.
별의 입에서 봇물터진 듯 불만이 튀어나왔다.
“아까부터 둘이서 이야기 하는데. 시헌이가 둘 다 좋아한다느니. 이 자리에 세 명있는데 자꾸, 둘만 이야기 하니까 어? 나는 안 좋아하는 거 같다 이뇬들아?”
“…어, 아 그게. 별 부협회장님?”
“어허잇 핑챙 닥쳐!”
당장 트리위키에 별/논란이 새겨질 정도의 발언을 몇 번이나 소리친다.
“핑…챙?”
“쟤 가끔 그래. 무시해.”
“세영이 너 그리고 나 설득 시킬 땐 매로 가르치더니 이 얘는 아주 어르고 달랜다? 나도 시헌이 독점하고픈데?”
세영이 시큰둥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그래 미안해 우리 별이가~ 서운했구나.”
“아아아아악! 이 개간년!”
“…푸흡.”
“넌 뭘 좋다고 쪼개!”
씌익, 씌익.
“미안해요… 별 언니.”
“…언니?”
언니. 언니. 언니….
“음.”
이윽고 들린 달콤하면서도 띄워주는 호칭에 별의 화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저렇게 곱게 생긴 일진 처자가 언니라 불러주다니.
‘나도 꽤 많이컸구나.’
하긴 서열로 따져보면 자신은 둘째 부인이 아니던가.
음. 아닌가?
아무튼 별은 자부심이 있었다.
적어도 이시헌에게 게임과 만화라는 주제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밖에 없으니까.
사랑의 지분에 있어 유일한 독과점이란 말이다.
“힝힝. 우히힝.”
“입꼬리 귀에 걸린 것 봐라.”
“닥쳐라 이 무매몽지한 것. 오늘부터 정실은 진달래다.”
“…별이 언니? 크흐흐.”
슬쩍 의자를 옮긴 별이 진달래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갑작스런 친밀감 표현에 당황하지만, 이윽고 분위기를 받아들이고 스며드는 진달래.
이세영은 턱을 괸 채. 지루한 눈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니들 알아서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