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세계수를 따먹다-360화 (360/657)

360

내 스승인 천도는 보고 있으면 이따금씩 귀여울 때가 많다.

오므라이스나 데리야끼.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잘 먹는 점 하며, 매일 밤 9~10시가 되면 잠이 오지 않아도 수면에 취하는 점도 그렇다.

[트리 레드!!!!!]

[괜찮아,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옛시대의 마법 소녀물을 손에 땀을 쥐며 보는 것도, 만화영화에 심취해서 날 돌아보지 않는 모습도 참 예쁘다.

절대 애같지 않은 평소 모습 때문에 그 갭이 더 부각되는 것 같았다.

막상 일을 할 때는 우리가 보는 곳보다 훨씬 먼 곳을 내다보고. 자그마한 변수도 허락하질 않으니.

강제로 취하게 된 휴식은 내 동생이었던 사람이자, 스승을 위해 쓰는게 낫다.

한 몸이 되어버려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세 쌍둥이들은 함께 지낼 수 없고.

결국 천도의 취향을 맞춰주는 일은 이 세상에 나밖에 없으니.

다른 사람들은 천도의 취향을 알지 못한다.

-꿀꺽.

옆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앳된 소녀들이 악당을 처치하고, 우정과 사랑을 쟁취하는 흔해빠진 스토리.

나는 모르는 이 영화의 깊이와 재미를 이 영화관 안의 사람들은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졸려.’

그래도 내 취향은 아니다.

꾸벅꾸벅 졸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얕은 잠에 빠졌던 건지 내 얼굴이 갸우뚱 넘어갔다.

양 주먹을 꼭 쥔 천도의 어깨에 내 머리가 떨어졌다.

“…음?”

그제야 영화에서 눈을 뗀 천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참. 먼저 보자고 한 사람이 자버리면 어떻게 하느냐?”

재미가 없는 걸 어떻게 합니까.

요즘 잠이 많아지는 걸 보니 아직 부상이 남아있긴 한가 보구나.

태양의 말이 어느정도는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천도의 어깨에서 머리를 떼어놓으려 했다.

“아 스승님…. 그냥 좀 피곤해서.”

“됐다. 그냥 자거라.”

머리에 부드러운 살의 감촉이 느껴지더니, 천도는 자신의 어깨 쪽으로 내 머리를 끌어 내렸다.

내 머릿결을 따라 움직이는 가느다란 손가락. 상냥한 손길이 당황스러웠으나 이윽고 쏟아지는 졸음에 나는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머리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기분 좋다.

“피곤했느냐.”

시끄러운 성우의 대사 속에서도 나긋나긋한 천도의 목소리가 울린다.

나는 졸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예 뭐.”

“선발전의 피로가 아직 풀리지 않은 모양이지…. 몸이 다쳐도 이상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큰 문제는 없었느냐?”

손이 이마를 쓰다듬는다.

“말씀드린 대로… 그냥. 어떻게든 해결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스승님은 왜 갑자기 여기 왔습니까? 할 일도 많으시면서.”

세상이 변하고 있는 와중이다.

도원향에도 당연히 일이 쏟아질 거다.

몸 성히 돌아왔다는 연락을 받았는데도, 왜 왔는지.

“내 제자가 다쳤을지도 모르는데. 그깟 일이 무슨 대수일까.”

내 눈앞으로 진홍색의 머리카락이 내려온다. 천도는 내 머리 위에 자신의 고개를 내렸다.

사복으로 갈아입은 천도의 흰 팔은 어느덧 내 목을 감싸 안았고.

“미안하구나. 숲지기 선발전에 내보낸 것은 나인데. 플라워가 그곳을 칠 줄은 몰랐구나.”

“그게 왜 스승님 잘못입니까.”

잘 풀렸기에 망정이지.

만약 내가 과거에 다녀오지 않아서, 내 몸이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심각한 중상을 입었더라면 어떠했을까.

천도는 이루어지지 않은 그런 현재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잘해주었다.”

볼이 맞닿은 정수리. 뜨거운 숨. 내 어깨를 토닥이던 천도는 내가 잠을 잘 수 있도록, 꾸준히 손을 움직였다.

“한동안은, 푹 쉬거라. 아무것도 하지 말고. 적어도 3개월간은 쭉.”

머리에 느껴지는 촉촉한 감촉.

느닷없이 머리에 닿아버린 입술의 감촉은 깊은 애정이 묻어나 있었다.

사랑이라 부를만한 것은 아니고, 그저 제자에게 느낄 수 있는 최대한의 애정.

부모가 할 법한 애정 표현에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천도에게 모성과 비슷한 것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이상하구나.”

잠이 오는 사이에 천도가 중얼 거렸다.

“…처음 제자를 가져서 그런 걸까.”

천도가 직접, 자신의 모든 걸 전수한 적은 처음이다.

나는 그 수제자였고. 그렇기에 더 애착을 느끼는 걸까.

말로 설명하기엔 힘든 그런 것이다.

“미안하구나.”

자고 있는 사이에 천도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하게 울려 퍼졌다.

* * * * * * *

“동상… 저기, 그게 미안해.”

저녁을 먹기 전, 황도가 나를 찾아왔다.

오늘 저녁 몸의 주인은 황도라는 건 둘째다.

그녀는 나를 보기 무섭게, 스펙타클하게 두 무릎을 땅에 박고 두 손을 모아 즉시 큰절을 올렸다.

머리카락이 목 앞으로 넘어가고, 그 탓에 보이는 뒤태.

새하얀 티셔츠가 가슴 언저리까지 넘어가서 엉덩이 골이 엿보인다.

움찔움찔 떨리는 걸 보니 이 상황마저도 느끼고 있구만.

“누님…. 아무리 그래도 기절은 좀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빈정대는 목소리로 의자에 앉아 황도에게 말했다.

“히잉.”

너무 기분이 좋아서 기절했다나 뭐라나.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동상 때문이야….”

“예?”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거랑, 엉덩이랑 동시에 하니까아….”

“아니 잠깐, 잠깐요. 굳이 말로 하진 말고.”

천도나 백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러냐.

내가 진땀을 빼자 황도는 복종의 자세에서 고개만을 올리며 내게 말했다.

“…둘이 지금 자.”

“아니 이 시간에요?”

“천도는 밤에 할 일이 있다고 하구… 백도는 오늘따라 피곤하다면서. 아침부터 쭉 잤어.”

백도가 자는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새벽 내내 그렇게 잡아당기고, 개발했으니 피곤할만도 하다.

아침에 물을 왕창 마시던 백도를 보니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그래서 누구랑 바뀌었어?”

조심스레 물어오는 황도의 목소리에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비밀이에요.”

“으에엥.”

“제가 뒤처리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십니까.”

“누나가 미안해.”

“누나요?”

“오라버니….”

이젠 오라버니라 부르는 것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지금에서야 황도가 나이가 많지 과거를 생각하면 내가 오빠가 맞지 않을까?

도원결의의 큰 오빠는 내가 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됐어요, 일어나요. 보기 좀 그렇다.”

말이 큰절이지, 황도같이 피지컬이 너무 뛰어난 사람이 해버리면 무슨 짓을 해도 남자들을 흥분시키는 기계다.

지금 이 광경만 봐도…… 하.

말려 올라간 티셔츠 안으로 거대한 가슴이 검은색 그릇 위의 찐빵처럼 뭉개져 있는데. 보고 있으면 또 성욕이 돌 것 같았다.

“…아무 짓도 안해? 다 자는데.”

황도의 밝히는 말에 나는 손으로 미간을 짚었다.

“뭐 어떻게 해줬으면 하는데요.”

“오라버니한테…밟혔으면 해서….”

대단한 성욕이다.

어제 중간에 끊겨버렸으니 아쉽기라도 한가.

성욕이 남아도는 변태가 아닐 수 없다.

“스승님 언제 깰지 모르는데, 하자고?”

“…새벽 1시에 깨워달랬어. 백도는 9시.”

적어도 몇 시간은 하자는 걸까.

나는 입을 꾹 닫고 있다가, 앞으로 턱짓을 했다.

“응?”

“밟아달라며, 앞으로 누워요.”

“…앗.”

황도는 얼굴을 사뿐히 붉히더니 강아지처럼 앞으로 드러누웠다.

벌려진 허벅지에 선명한 도끼 자국이 보인다.

속옷은 입지 않은 건가.

검은 옷감이 젖으면 야릇하게 더 진해지는데. 특히 음부 부분이 그랬다.

나는 발로 황도의 허벅지 사이를 밟았다.

“꺄읏….”

강하지는 않게 살짝만.

남자들 사이에선 불문율로 금기시된다는 행동이, 뭐가 그리 꼴리는지 돌핀팬츠의 색이 진한 부분이 더 넓어진다.

황도는 오금에 자신의 두 팔을 넣고, 가슴 쪽으로 다리를 끌어당겼다.

나는 허벅지 사이로 발을 집어넣고 조금 더 강하게 밟았다.

“…오라버니….”

“더 강하게?”

-꾸욱, 꾸욱.

“…끗.”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황도 너는 진짜.”

“미안해여….”

“뭐가 미안한데.”

“황도가 변태라…. 오라버니한테 걱정만 끼쳐서….”

변태만 아니면 상냥하고, 아이한테도 잘해주고, 비록 요리를 잘하는 건 아니지만 뭐든지 챙겨주려 하는 이상적인 누나인 황도다.

그 변태라는 점 하나가 이미지를 이렇게 망쳐버린다.

처음 만날 때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냥 좀 순수하구나. 귀여운 누나구나.

요망하게 몸의 한 부분을 부각시키려한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의도일 줄은 몰랐다.

이젠 제자이자 동생한테, 바닥 타일에 드러누워서 밟히는 걸 즐기다니.

싫은 건 아니다.

그러나 같이 있다 보면 나도 정말 옮아버릴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조금 더 지나고, 이런 행위에 익숙해지면 이제 여자를 짐승 보듯 보게 되지 않을까.

나는 발을 떼어내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누워있는 황도의 어깨를 두드리곤 그녀를 일으켰다.

“오라버니?”

어리둥절하는 황도의 몸을 끌어안았다.

“누님.”

“응?”

“그냥 편안하게 사랑합시다. 매일 만날 때마다 성욕만 풀어 재끼니까, 이게 좀 뭔가 아닌 것 같아.”

툭툭. 등을 두들기면서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어제 백도한테 모든 걸 쏟아버려서 이러는 건 아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음란마귀가 없는 지금의 나만이 말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나중에 가면 황도의 변태 끼에 휩쓸릴 것이 뻔하니까.

“우리 나가서 뭐라도 먹을까요. 여름인데 수족관은 어때요?”

“……동사앙.”

내 말에 감명이 깊은 모양인지, 황도가 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황도와는 정말 만나면 반갑다고 박아대기만 했다.

가끔은 둘 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히이잉. 변태라 미아내.”

“울지 말고.”

“사랑해앵.”

내 몸을 사랑스럽게 끌어안는 황도.

그렇게 훈훈한 결말을 맞이하나 싶더니.

“동상.”

“응.”

“나 더 꼴려서 미칠 것 같애.”

-쾅!

거대한 힘이 나를 짓눌렀다.

반응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나를 눕힌 황도는 아까보다 더 애착이 깊은 눈으로 나에게 입을 맞추었다.

“츱…츄릅.”

순식간에 입안에 있는 수분이 전부 빨려나간다.

기다란 혀가 이빨 사이를 뚫고 들어와, 구강 안을 한 번 깊게 빨아들인다.

경험이 없는 게 아닌데도 순결을 빼앗긴 감정이 들었다.

“푸하.”

떨어지는 입술.

“뎃.”

나는 쥐죽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하니 황도를 바라보았다.

황도는 윗 입꼬리를 핥으며 한껏 달아오른 눈빛으로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오라버니~♬”

또… 이거지?

티셔츠를 훌러덩 벗어재끼는 황도의 박력넘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침을 삼킬 뿐이었다.

* * * * * * * * * *

영혼까지 빨려버렸다.

“끄어어….”

한 숨 자고 일어났는대도 허리가 뻐근하다.

지금이 몇시더라.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가장먼저 핸드폰을 확인했다.

“태양, 태양이 새끼.”

산수유에 관한 정보. 태양이 일임하기로 했었다.

메신져를 들어가니 아직 읽지 않은 메시지들이 산더미만큼 도착해 있었다.

이세영이나 진달래, 별의 메시지.

중요하긴 하나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다.

목태양.

스크롤을 아무리 내려도 신규 메시지 중에는 그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맥이 축 빠진다.

“에휴.”

시간은 새벽 2시.

하기야 세계수도 알아내지 못한 정보를 그리 빠르게 알 리가 있나.

조금 더 경과를 두고 지켜봐야 하나.

나는 핸드폰 메시지들을 정리하며 이를 갈았다.

[성지호]

그런 내 눈에 스친 하나의 메시지.

“어?”

-타박, 타박.

깜짝 놀란 나는 그 메시지를 누르려다, 등 뒤에서 들려온 발소리에 핸드폰을 꺼버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문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방금 막 씻었는지, 머리카락이 젖은 천도가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아, 드디어 깼구나.”

항상 저녁에 잠이 들던 천도가 새벽에 일어나 있다.

황도에게 들어 알고 있었지만, 왜인지 색달랐다.

“스승님?”

어두운 방 안에서 젖은 머리를 땋아 한쪽으로 올리며, 여전히 내 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는 천도.

“부상은 괜찮느냐?”

“에이 뭐, 아까도 말했듯이 멀쩡합니다.”

“…바보같은 놈. 스승의 눈을 못 믿느냐? 그 부상은 척 보기에도 플라워에게 당한 흔적이거늘.”

단숨에 들켜버렸다.

“앗. 들켰습니까?”

“시스투스의 마력은 견딜 사람이 거의 없으니 말이다.”

대신 그만큼 맞기가 힘들다.

시스투스의 움직임은 읽기도 쉽고 작정만 한다면 피하기 쉬우니까.

나처럼 누구를 감싸지 않는다면야 시스투스에게 당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 이제도 괜찮다 말할 것이냐?”

“아직 싸울만 합니다.”

“……뭐, 그것은 인정하마. 너는 내 예상을 벗어날 정도로 훌륭히 강해지고 있다.”

한 발자국씩, 다가온 천도가 내 옆에 앉았다.

“네가 내 제자인게 자랑스럽구나.”

“왜 그런 말을 하십니까?”

여전히 웃고 있는 그 사람의 얼굴.

천도는 나직히 제 말을 밝혔다.

“해야할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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