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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를 따먹다-384화 (384/657)

384

“…시언?”

의도적으로 비트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지독하게 틀린 이름 부르기다.

초췌한 산수유의 안면에 미약한 생기가 돌았다.

건강하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고, 여전히 중환자임은 분명했으나 이건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

잠이 깬 이시헌의 얼굴에 활력이 돋았다.

아무리 치유의 권능이 신격에 가까운 힘이라고 해도, 뇌 일부가 기능을 정지했던 그녀였다.

무슨 말을 건네주어야 할까.

가문에 관한 일? 그녀의 비서?

홀로 수없이 고민했던 질문이었다.

혹시 기억을 잃었다면? 아니면 패닉 상태에 빠진다면?

정치적인 폭력의 대상이 된 수유가 진정할 수 있을까?

굳어 있던 이시헌의 얼굴이 자조적으로 변해갔다. 희미한 미소를 띠운 그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괜찮아?”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

그 한 마디를 뱉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몸은 좀 어때?”

얼마나 긴장했는지. 말꼬리가 흐리고, 눈동자는 떨렸다.

샛노란 눈동자에 비친 애써 웃는 얼굴.

어딘가 일그러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최대한 진실된 표정으로 그는 그녀를 맞이하려 했다.

짧게 느껴지지만 긴 시간이 흘렀고. 그만큼 오랜 교감을 나누었다.

단 한마디도 없이, 이시헌을 바라보는 산수유의 눈동자에 조금씩 동요가 찾아왔다.

“…왜.”

산수유의 머릿속에 스친 것은 당혹감이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고 모든 게 끝났다.

그렇게 끝인 줄 알았는데 자신이 한 번 버린 사람에게 구해졌다.

아무런 말도 없이 연락도 끊어버린 친구에게 말이다.

‘나랑 같이 있으면 안 되는데.’

이단 판정을 받은 산수유는 그녀를 구한 사람에게까지 민폐를 끼칠 수 있다.

그래선 안된다. 그렇기에 끊었던 인연이다.

이시헌은 절대,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해선 안되는 사람이다.

그만큼 소중했던 친구.

산수유의 얼굴에 당황과 걱정이 서렸다.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산수유는 금세 깨달았다.

-지끈!

자신의 몸이 생각보다 더 망가져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전과는 달리, 더 생생한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

언제나 약을 챙겨 먹으며 거의 매일을 마취된 상태에서 보낸 산수유의 눈이 충혈되었다.

“으… 아-”

새된 신음이 입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온 몸이 구부려지는 듯한 아픔과 무력감.

의식에서 돌아오면서, 외면하던 극심한 고통의 해저에서 산수유는 헤엄치기 시작했다.

“으읏!!!!”

발버둥쳐도 나아지지 않는 격통.

불로 지지는듯한 고통이 피부 온 표면에 느껴지고, 창자를 밖에 매달아 놓은 것 같은 선명한 아픔에 몸부림쳤다.

형언할 수 없는 통각에 대한 공포심에 산수유가 겁 먹은 얼굴을 했다.

그 감정 없는 얼굴에 드러난, 지극히 부정적인 얼굴.

발버둥치는 산수유의 손에 이시헌이 부딪혔다.

-와락!

자그마한 포옹과, 주입되는 치유의 권능.

“아…읏, 으….”

차라리 죽었으면 좋았겠다는 고통에서 겨우 벗어난다.

그 공포심에 산수유의 피부가 덜덜 떨고 있었다.

죽음이 가까워지는 감각.

자신이 얼마나 극심한 혼수 상태에 빠져있었는지.

미치도록 차가운 눈물이 산수유의 눈꼬리에서 타고 내려갔다.

덜덜 떠는 손은 이시헌의 어깨를 쥐어 짰고, 절대 놓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왜 나를 구했지?

그런 의문이 갈라져 사라졌다.

-아픔에서 벗어나게 해준 사람이다.

어린 아이처럼 매달린 산수유가 이시헌을 꽉 붙잡고 침대에 넘어뜨렸다.

-콰당!

“윽!”

넘어진 이시헌을 산수유가 짓눌렀다.

-덜덜덜.

“아파… 아파. 시언아 나….”

완전히 겁 먹은 아이같은 모습.

세운 손톱에 긁혀 이시헌의 등에 자국이 새겨진다.

이시헌은 그런 산수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윽고 차분하게 대응했다.

“괜찮아.”

“…아파….”

“금방 나아. 심호흡 해보자. 천천히. 하나, 둘.”

놀랍게도 머리를 쓰다듬으니 점차 사라지는 아픔.

아직 긴장했지만 여전히 떨리는 산수유의 손.

손 힘이 점점 풀어진다.

매서웠던 손은 천천히, 이시헌의 등을 부드럽게 껴안았고.

산수유는 그제야 다시 약간의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아… 하아.”

차갑게 질린 산수유의 얼굴이 이시헌의 품에 파고들었다.

안정되는 향. 요람에 있을 때 함께 자면, 그 옆에서 나곤 했던 사람의 향기. 어머니와 같은 인간의 냄새다.

죽음의 옆에서 느낄만한 안락. 귓바퀴의 바깥쪽으로 뿜어대는 남자의 뜨거운 숨결.

그 숨결의 안에 있는 것이 자신이 쥐고, 품고,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이다.

땀이나 흙이 묻은 옷. 희미하게 풍겨지는 혈액의 향.

그것만으로도 이시헌이 지금 받는 취급을 알 수있게 했다.

붉게 띤 홍조의 위로, 겁먹은 산수유를 최선을 다해 안정하려는 이시헌의 지친 얼굴이 스쳤다.

“……미안.”

졸음이 쏟아지는 산수유의 한 마디에 돌아온 것은, 차분한 답변이었다.

“아프면, 오늘은 푹 자자. 설명은 내가 할 테니까.”

그녀는 이시헌과 연락을 끊었었다.

자신이 전할 말마저 비서에게 시키면서.

어린 시절부터 세뇌에 가깝게 때려박혀진 가문의 비원.

그것이 산수유가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시헌과의 연은 그것에 비하면 짧다고.

그녀의 본능이 판단해버린 것이다.

그것이 나쁜가?

선악을 구분할 내용은 아니다.

그러나 이는 이시헌이 실망하고, 돌아설 계기가 되기는 충분했다.

그럼에도 왜.

-꽈악.

산수유를 품은 이시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일말의 집착.

과거에서 한 번 비틀어져, 고통에 지친 그가 품은 생각이 무엇이었던가.

잿빛으로 칠해진 눈동자는 서서히 눈꺼풀에 가려져 가라앉았다.

천천히, 과거로 돌아가기 시작한 그의 얼굴은 마치-

딱딱하게 굳었다가 갈라지기 시작한 싸구려 고무찰흙 같았다.

* * * * * * * *

[백도… 방금 봤어? 막 몸이 동강동강….]

서리같이 싸늘한 백도의 시선에 태양의 얼굴이 얄궂게 굳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태양의 손 옆에, 아오리의 몸통이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아니 좀, 당황했다.

무슨 여자애가…. 사지가 저렇게 잔인하게.

‘정신 차리자.’

백도는 눈을 부릅뜨고 태양을 바라보았다.

이에 태양과 아오리의 안색이 싸하게 굳어 들었다.

가장 먼저 말을 뱉은 아오리 왈.

“가슴 크당.”

“…뭐?”

“얘 말은 흘려들어요 원래 저런 얘니까. 사지 날아간 거 보셨죠? 이상한 소리 하다가 팔 잘린 애입니다.”

태양이 다급하게 구르는 아오리의 신체를 감싸 들어 품에 안았다.

입을 삐죽 내민 아오리의 시선에 백도의 가슴이 고정되었다.

“한 번만 빨고 싶은 빨통- 켁!”

“너 목숨 두 개냐? 닥쳐 아오리.”

“힝….”

조금씩 심신이 흐트러지기 시작한 백도.

그녀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자 아오리와 태양이 입을 싹 닫았다.

“이시헌 어디있어.”

“어허이~ 그걸 왜 저희한테 물으실까.”

“얼마 전부터 붙어 다니던 거 다 아니까 말해.”

태양이 흰개미에 속해있고, 수왕이긴 하나 얼굴만 봤을 때 알아차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전투적으로는 거의 행동하지 않기에 마력도 알려지지 않았고.

수왕의 신분으로 행동할 땐 얼굴을 바꾸고 행동하는 편이며. 지금도 주기적으로 성형을 거치니까.

무궁이나 세계수조차도 태양의 얼굴을 모른다.

아오리야 무궁과 워낙 많이 맞닥뜨렸으니 마력만 봐도 알긴 하다지만. 이 사람은 그걸 모른다.

그런 시점에서 자신을 어떻게 찾아왔을까.

태양은 즉시 판단했다.

‘…요람에서 같이 있던 거 보고. 추적했구나.’

이시헌의 친구. 혹은 후배나 동료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자신에게까지 왔다는 것은 백도도 어지간히 정보가 부족하다는 뜻.

아마 이시헌의 주변인물들을 전부 들쑤시고 다녔을 것이다.

그 막바지에 다다른 게 자신들이 아닐까.

그나마 최근에 이시헌과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 자신들이니 말이다.

“왜 그렇게 찾아요?”

“알 필요 없어.”

“그렇게 그 제자가 사랑스러우신-”

-콰지지직!

백도를 근방으로 한 바닥의 모든 콘크리트에 균열이 새겨졌다.

태양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시발. 폭력 반대.”

“어딨냐고.”

“아니… TV에 나올 땐 되게 점잖고 멋있는 말투였는데…. 이상하다.”

“이시헌! 이시헌 그 새끼 어디 있냐고.”

이거 맛이 갔다.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박차는 백도를 보며 태양이 생각했다.

이마에 서린 땀이 쏙 들어갔다.

어쨌든 말은 통할테니 천천히 이야기나 해보자.

“거 진정 하시고요.”

“…그깟 년 하나 살리겠다고 스승 말도 어기고, 그게 말이 돼?”

그깟년.

백도의 혼잣말에, 어떻게든 설득하려던 태양의 얼굴이 싸하게 굳었다.

‘이 사람. 형님 정신 상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나 본데?’

이시헌에게 전해 들은 백도는, 티격태격하면서도 좋아하지만 막상 그걸 내비치는 걸 쑥쓰러워하는 보기 힘든 타입의 스승이었다.

그 애절함이 전해져 태양과 아오리도 개인적으로 팬이었던 여자.

물론 현존하는 나무 중 완벽한 미모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었다.

황제와 황후. 딱 둘 세워놓으면 그림이 좋지 않겠냐.

종종 아오리와 농담 따먹기로 했던 말인데.

백도는 이시헌이라는 남자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게 그다지 많지 않았다.

‘아니… 당연한가. 자기 사람들한텐 워낙 티를 안냈으니까.’

태양은 서서히 목소리를 내었다.

“…형님이 어디있는진 아는데. 찾으면 뭐하시게요?”

“그걸 내가 왜 네놈한테 말해야 하지?”

“형님 신변에 위험하다면, 절대 말 안 할 생각이라.”

“뭐?”

“목숨으로 협박하는 건 안통합니다. 얘 보셨죠? 이 꼴 되고도 절대 말 안 하는 얘에요.”

이빨을 드러내는 백도에게 태양이 웃었다.

그 눈에 담긴 능글맞은 모사꾼의 모습에 백도의 미간이 사뿐히 찌푸려졌다.

옆에서 ‘나 입 엄청 무거워요!’ 입에 바람을 잔뜩 넣은 아오리는 무시했다.

“난 그 병신 놈과 사제 관계에 있다. 그것 말고도 이유가 필요하냐?”

살짝 고개를 주억이니 백도가 한숨을 내쉰다.

“…찾아서 보호할 생각이다.”

“형님은 그걸 바라지 않을 텐데.”

“그걸 네놈이 어떻게 아느냐.”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형님에 대해선 백도 당신보다 훨씬 잘 안다고 생각하는-”

-드득!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

정강이에서 들려오는 좋지않은 소리.

청산유수같이 말을 쏘아대던 태양의 입꼬리에 미소가 지어졌다.

“-크흐. 다리가 쥐포가 됐네. 얼마 안 가서 얘 따라 지옥 가겠네.”

“태양도 사지 절단 되는 거야?”

“닥쳐 이년아.”

아파라.

그래도 말할 생각은 없다.

“아니 근데. 아무 것도 모르는 거 맞잖아.”

“정말 죽고 싶나 보군.”

백도의 음색이 낮게 깔린다. 다가오는 살의에 태양이 두 손 두 발을 들었다.

“형님을 잘 알면, 그깟년이라고 표현 못 할 텐데. 아니, 애초에 한 번이라도 가르친 적이 있는 여자애한테 그깟년은 너무한 거 아닌가.”

“…….”

“산수유 말하는 거 맞아. 지금 너무 흥분했어.”

살의가 짙어진다.

바스라진 정강이의 고통을 이겨내며 태양이 가까스로 목소리를 짜내었다.

“당신네 셋 전부한테 하는 말이야.”

그 순간, 주먹을 올리려던 백도의 동작이 멈추었다.

“세상엔 정신병이 있다는 걸 아시나? 제때 치료 못 하면, 망가지는 마음의 병 말인데. 이성적인 선택도 못하고, 자신의 가치를 다른데에서 찾기도 하는 뭐 그런 거.”

조금씩 태양이 다리를 절며 뒤로 물러섰다.

턱에 맺힌 땀이 뚝뚝 떨어졌다.

“장애라면 장애인데. 그쪽은 처음 듣는 거겠지.”

거의 동시에 싸늘하게 굳는 얼굴. 아오리조차도 이건 처음 들었다는 얼굴이었다.

그걸 모른다는 건 큰 문제가 된다.

“스승이라는 사람이. 이건 알고 있어야지.”

물론 그 선은 이시헌이 과거에 간 것이 기점이었기에. 백도가 알아차리기엔 무리가 있었다.

태양은 이시헌에게 과거에 대한 일을 직접적으로 전해들은 바가 없었다.

의도적으로 그때의 일을 말할 땐 회피하려는 듯한 모습이 보였으니까.

그래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가끔 있다.

잠을 자거나, 곁에 있을 때.

정신이 망가진 인형처럼 몸을 들썩이던 남자를 말이다.

아직까지도 과거에 있던 모종의 훈련에 대해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것.

잠을 잘 때 정신적으로 자아가 분열되는 모습은 본 사람만이 안다.

사람의 감정선이란 실로 복잡하고, 트라우마는 뼛속 깊이 박혀 절대 빠져나오지 않으며, 경험에 따라 모든게 뒤바뀌니까.

“…….”

백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실제로 이시헌에게 변화가 찾아온 시점이 있었으므로.

무슨 이유인지는 몰랐다. 그 변화를 스승으로서 다가갈 생각조차하지 못했다.

보통이었다면 그 역할은 천도나 황도가 맡았어야 했지만, 이시헌이 밀어내면서 자연스레 소외된 현재.

이시헌의 정신력은 강하다.

그래서 더 보기 힘들다.

그 사람이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

“뭐. 형님 버리실 거면 저도 별 상관 안하는데. 당신이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고. 지키기 위해 형님한테 찾아갈 거라면,”

아마 지금은 자기 자신의 시점조차 잘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자신의 일상을 스스로가 겪는 게 아니라.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고 있지는 않을까.

“적어도 형님에 대해서 잘 알려고 시도나 해주십쇼. 그것만 약속하면 알려줄게요.”

태양은 백도를 바라보았다.

가장 감정적이며 극과 극의 사이에 있던 둘.

“형님은 초인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한 번 보고 와라.

생각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았다.

깜냥 있는 태양의 입가에 지독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는 백도를 비웃듯이 낄낄대며, 고개를 숙였다.

무안한 듯 입술을 깨문 백도. 태양은 자신의 정강이를 바라보며 눈물을 훔쳤다.

‘…이거 고칠 수 있겠지?’

다리가 너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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