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세계수를 따먹다-386화 (386/657)

386

떨떠름한 공기에 쓰디쓴 침묵.

간지러운 혀의 자극에 질려 입문을 열면, 바싹 마른 목청에 쓴입도 다시지 못했다.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없는 남자.

새벽 어스름을 꿰뚫는 동공이 백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칠등… 제자?”

분위기와 달리 집안의 상태는 정돈되고 깔끔해 보였다.

늘어지지 않은 설거지. 깨끗하게 청소된 바닥과 침대.

누워있는 여인을 위해 곰팡이 하나 슬지 않은 이불과 매트.

깨끗한 방 안에 더러움이라 부를만한 것은, 사물이나 공간같은 게 아닌. 지쳐 잠든 그녀의 제자뿐이었다.

-쿵!

단칸방의 작은 공간이 전자 회로의 개폐기를 내린 것처럼 차갑게 돌변했다.

주변 가정집들 사이에서 공간이 분단되었다.

현관을 닫지 않았는데도 바깥 세상이 보이지 않았다.

“…….”

-저벅.

자신을 감추기 위해 숨어들기라도 한 양. 피로에 지쳐 눈 뜬 채 잠이 든 남자.

백도는 정신없는 걸음으로 이시헌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뜨거운 손이 찬 볼에 맞닿는다.

그 찬 기운에 백도의 얼굴은 더더욱 싸늘하게 굳어갔다.

인기척에 트이기 시작한 눈동자의 이채.

“…백도 스승님?”

눈 뜬 이시헌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 너… 몸이 왜 그래?”

말을 더듬으며, 할 말을 찾지 못하다가. 차마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부끄러웠던 백도는 이시헌의 목을 끌어안았다.

힘없이 움직인 이시헌의 머리가 백도의 가슴에 안겼다.

뒷통수를 끌어안은 손이 떨린다.

찢어진 귓바퀴에 흘러내린 핏물이 머리카락과 끔찍하게 엉켜 있었다.

“이렇게 될 때까지 어디서 뭘 한 거야. 말은 왜 안 했고…?”

몸이 차갑다.

당황한 백도가 이리저리 손을 움직였다.

어떻게 담요라도 찾아보려고 침대에 뻗은 손을 시헌이 가볍게 잡았다.

맥없이 축 기울어진 이시헌의 꺾인 고개. 돌아간 눈이 백도의 얼굴을 쓸었다.

“…할 말.”

“…….”

갈라져 피딱지 진 입술 바깥으로 터져 나오는 감정.

“나… 아픕니다.”

조용하면서도 나직히 쏟아내지만, 격렬한 울림에남자의 목이 매어왔다.

고개 숙인 남자의 고개와 습해지는 바닥지.

백도의 마음이 술렁였다.

“열심히 했는데, 다 망가지는 것 같아.”

그러면 내 말을 듣지.

왜 억지를 부려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드냐.

이렇게 되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이시헌이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쯤은 그녀들도 안다.

그러나 머리로만 알 뿐, 그런 일방적인 감정을 스승인 그녀들이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의 연인보단 제자의 목숨이 더 중요했다.

연인을 위해 목숨을 내건다면, 스승인 그녀들은 응당 그를 막아서야할 이유가 있었다.

천마의 계승자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미련한 짓만 골라 하니까 이렇게 되는 것 아니냐.”

그런 상투적인 개념이 아니다.

조금 더 간질간질하고…. 형언하기 힘든, 올곧지 못해 구불구불하지만 차마 입안에 담을 수 없는 그런 감정 때문이었다.

누군가 깨닫게 하지 않는 이상, 절대 알아채지 못할 감정.

품 안에 무너진 이시헌의 몰골은 백도의 가슴을 크게 옥죄여왔다.

그래서 더 목소리가 커졌다.

“뭐 때문인데…. 어? 내 말만 들었으면 처음부터 이런 일은 없었잖아. 이딴 짓만 골라 하니까….”

답답한 감정에 소리쳐본다.

자신조차 놀랄 정도로 목이 막히는 말투. 백도는 지금 자신이 소리를 치는 이유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몸이, 망가지지. 않냐고.”

그냥, 답답해서 그랬다.

그렇게 표현하기엔 너무도 거칠어진 목소리.

의식을 잃은 것만같은 이시헌의 동공은 백도의 얼굴을 향해 있었다.

“제가 안 하면. 얘는… 누가 살립니까?”

양보하지 않기에 도돌이표로 맺어지는 대화다.

“여자 한 명은 버려. 그, 그래…. 너 딸도 있잖아. 어? 얘가 그렇게 좋은 거야? 황도보다?”

분개한 백도가 횡설수설하며 소리쳤지만, 돌아오는 것은 투명한 눈물방울이었다.

“스승님.”

막막하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겁니까? 아무도 안 죽었으면 하는 게?”

“…….”

“누구 한 명 포기하려고, 팔이 잘리고 핏덩이가 되고……. 몇 번을 죽었다 살아났어요?”

“…이시헌.”

아무도 잃지 않으려고 굳게 먹었던 마음이었다.

과거. 도원.

훈련을 빙자한 뼈를 깎는 행위는, 절치부심이라는 표현조차 그 각오를 못 담아낼 정도로 처절한 싸움이었다.

아무도 이해 못할 감정이다.

턱이 산산조각이 나고, 눈알이 떨어져 바닥을 구르고.

심장 근육이 갈라지거나, 불에 타서 피부가 옷에 달라붙은 것을 쩍쩍 찢어내기도 하였다.

마취하나 없던 생생한 아픔 속에, 고통을 잊어버리게 될 때까지 떠올린 사람이 누구였는지.

이시헌의 그릇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힘은 평범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의 연인조차 이해하지 못할 집착.

말할 수조차 없는 경험. 누가 연인에게 자신의 아픈 경험을 공유하고 싶을까.

이시헌은 자신과 정을 나눈 모든 이들을 과거의 그 기점에서, 몇 번이고 되새겼다.

정시우의 인상이 강해졌다. 그것은 존경으로 다다르고. 이세영에 대한 애착이 심해졌다.

한 번 밀어냈던 진달래를 받아주고, 함께 살기까지 했고.

산수유에 이르러선 얼마 안되는 친분만으로도 애착이 생겨 달라붙었다.

그가 받았던 은혜는 애정의 이유요, 엇나간 방향으로 이어졌으니.

척애(隻愛).

이해못할 감정에 얽매여 어떻게든 고쳐보려고 했다.

그렇기에 병.

태양은 이를 알았다.

그리고 그것을 들쑤신 결과는…….

-덜덜덜.

남자의 손이 떨렸다. 핏기가 가신 얼굴에 핏줄이 드리우고, 광분한 듯 팔과 다리가 발버둥을 쳤다.

백도는 그 발버둥을 잠재우듯 이시헌을 크게 끌어안았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근육이 아프게.

“…제가 그리 잘못, 했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다.”

공포에 질린 두 눈동자가 백도를 너머 이곳저곳을 휩쓴다.

동공에 비친 그림자가 마치 검을 빼닮은 듯했다.

자신의 살을 천천히 도려내던, 마치 횟감을 다루듯 고통을 이끌던 검짓.

통각이 열리는 약품까지 써가며 견뎌온 나날.

이시헌은 훈련의 과정을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이 토막째로 잘려나간 느낌.

살아난 감정이 부르짖었다.

“……저도 아픈 게, 싫습니다.”

마치 인격이 뒤바뀌기라도 하듯. 처절하게 떨리는 손.

바뀐 어투를 의아하게 여긴 백도가 떨리는 손으로 이시헌의 얼굴을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떨어뜨렸다.

“나, 난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었는데.”

“시헌…?”

“누구 죽는 것도 그만 보고 싶고… 아픈 것도 싫고….”

동공이 수축된다. 길게 찢어진 입꼬리가 벌려지며, 타액이 기어나왔다.

“…왜, 나랑 엮인 사람은 다 불행해져.”

최악에 다다라, 막다른 길에 몰린 사람이 어떻게 될지.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

이시헌의 손 떨림이 멎었다.

백도의 눈이 커졌다.

“…어.”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동자. 자신을 껴안은 여인의 등을 쓰다듬는다.

직후 이어진 이시헌의 충격적인 말에, 백도는 말하지 못할 큰 자극을 받았다.

“……스승님, 언제 오셨어요?”

불쑥.

쏘아 올린 감정의 도화선에 재차 불이 붙었다.

백도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직전, 그 감정을 표현하는 것조차 버거웠는지. 그녀의 몸이 뒤바뀌었다.

흰 머리카락이 붉게 물든다.

아파서 슬픈 얼굴이 되어서, 이시헌이 채 그 표정을 읽어내리기도 전에 여자는 달려들었다.

새벽임에도 눈을 뜬 붉은 머리의 여인이 이시헌을 와락 끌어안았다.

“…어, 스승님?”

왜 그러세요?

그런 말이 튀어나오기 전에 이시헌의 얼굴이 가슴에 묻혔다.

어찌나 강하게 잡아당겼는지 이시헌이 넘어져 천도의 품에 자국을 남길 것처럼 얼굴이 깊게 들어갔다.

“스승님…맞죠?”

헤진 옷이 손길에 찢어졌다. 이시헌은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고, 그 얼굴이 더욱 천도의 가슴을 찢어발겼다.

얼마 전, 서로 언쟁까지 했던 두 사람이 다시 서로를 끌어안았다

깜짝 놀랐던 이시헌이었으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싱긋 웃으며 천도의 등을 쓸어내렸다.

“스승님, 갑자기 왜 그래요.”

“…….”

숨결이 거칠었다. 향긋한 복숭아 향을 품은 땀과 공기.

그걸 건네받으며, 이시헌은 천도의 피부를 천천히 쓸어내리고 두드렸다.

마치 옛날 과거의 천도를 품었던 것처럼.

“뭐, 설마 지금 저 다친 거 때문에 그래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이유를 모르는 이시헌에겐 참으로 답답한 모습이었으나. 상황은 금세 알 수 있었다.

-톡톡.

등을 두들겨 고개를 내렸다. 천도의 오른쪽 귀와 이시헌의 왼쪽 귀가 맞닿으며, 서로 움찍거리는 심장 소리를 공유했다.

“다친 건 아니고. 금방 나아요. 치료 마법을 아끼고 있는 중이라.”

“…….”

“스승님이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실까.”

“…미안하구나.”

가까스로 기어나온 말에 이시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제가 미안하죠. 말 안 듣고 제멋대로 하는데.”

“네 사정을 몰랐다. 스승이 되었으면서 아무것도 몰랐구나.”

“사람이 어떻게 다 알고 삽니까. 정작 저도 스승님이 지금 왜 이러는지 모르는데.”

천도의 얼굴은 창백했다. 스승답게 체통을 지키려 했던 그녀가 꾸역꾸역 이시헌의 품에 파고들었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참으로 고통스런 목소리.

두 마디를 내뱉고 계속 그를 끌어안은 천도에게, 이번에도 이시헌이 먼저 말을 건넸다.

“저번에 심한 말 해서 미안해요.”

혹시 그때 그 일 때문이 아닐까.

짚어가면서 말을 한다.

“억지 부려서 미안하고. 저도 제 마음을 모르겠어서. 가끔 욱하는 게 있어요.”

“아니, 그게… 아니다. 내가 몰랐구나.”

“제가 스승님 제일 좋아하잖습니까.”

천도가 가진 말뜻은 이시헌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태양이 읽어내린 병은 이시헌조차 자각하지 못한 상태니까.

그리고 그걸 겨우 알아챈 천도 역시, 차마 그걸 이시헌에게 밝힐 수는 없었다.

“…힘든 것은 없느냐?”

혹여나 내뱉어본 말에.

“하나도요.”

웃으며 답하니, 차마 그 꼴에 대답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제 친구가 빨리 좀 나았으면 하네요.”

이시헌이 뻗은 손에 천도의 어깨를 가볍게 휘어감았다.

차가운 몸에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 혈관을 따라 움직인 피가 가슴에 모여, 뜨겁게 달군 그것을 품었다.

까슬까슬한 스타킹 감촉 너머로 전해지는 맨살.

천도의 불안한 목소리가 이시헌에게 닿았다.

“사실, 힘든 것 아니냐.”

“아… 뭐어……거짓말이 맞기는 한데. 요즘 안 힘든 사람이 어디있겠어요. 그런데 부담이 그렇게 많이 되는 건 아니니까. 예. 하하. 범죄자로 사니까 게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음.”

난잡해진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다듬는다.

머리를 쓰다듬는 감촉에 천도는 왜인지 간지러운 기분을 느꼈다.

어디선가 느껴본, 왜인지 굉장히 그리운 것만 같은 감각.

“조금만 기다려줘요. 행여 나서진 말고.”

“…….”

“부탁이에요. 세계수가 노리는 게 제가 아니라 스승님이 되지 않게끔. 안 그래도 최근 세계수쪽 움직임이 위험하니까요.”

“너는-”

“잠시만요. 음, 그게.”

이시헌은 천도의 품에서 벗어나, 이번엔 천도의 머리를 끌어안고 그 정수리에 가볍게 얼굴을 내려놓았다.

“제가, 스승님 많이 좋아해요. 조금이라도 위험하지 않았으면 할 정도로.”

볼과 볼이 닿았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듯한 감촉 아래로, 이시헌의 손이 천도의 목을 힘껏 끌어안았다.

비탄에 잠긴 얼굴을 그가 달랬다.

“셋 다한테 하는 말이니까.”

-쿵, 쿵.

떨리는 심장. 전해들은 백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가 빨리, 더 커서. 어떻게든 해볼게요.”

믿음직한 말에는 약간의 고통마저 어려있었다.

이시헌은 다부졌다. 그 넓은 어깨하며, 세세한 근육까지. 만지고 있으면 황홀감이 밀려올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방금 전에 들은, 한 번 무너졌던 목소리가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 바람에, 천도는 끝끝내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몸, 되찾아야 하잖아요.”

“……!”

백도가 말했던 미련함은, 아마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그 말마저 들은 천도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떻게든 제가 이겨내 볼게요. 스승님 제자잖아.”

그럼에도 그에 대고 아무 말도 해주지 못하는 자신이 밉기만 했다.

“죄송해요. 이렇게 미련한 놈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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