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세계수를 따먹다-388화 (388/657)

388

후끈후끈한 가정집의 분위기.

앞치마는 입지 않았지만, 일상복의 이시헌이 솜씨 좋게 일을 마무리한다.

“밥 먹을 수 있는 거 맞지?”

가정용 전기밥솥도 없어, 압력 밥솥으로 손수 만든 죽.

미음으로 만들까도 생각했지만 그래도 씹는 맛을 위해서 준비했다.

한참을 누워 있었으니 음식이 얼마나 고팠겠는가.

-달그락.

산수유의 앞에 죽 그릇이 놓였다.

미리 식혀놓아 뜨겁지 않은 따뜻한 죽.

호불호가 갈릴 야채는 일절 들어가지 않았다.

잘게 잘린 전복도 무리 없이 삼킬 수 있는, 먹는 사람을 배려한다는 게 척 보기에도 알 수 있는 음식.

산수유는 그 죽그릇을 빤히 바라보았다.

쇠그릇 양푼 위에 가득 쌓인, 왜인지 옛날 기억을 연상시키는 음식.

산수유의 몽롱한 눈 안에 과거의 기억이 펼쳐졌다.

늦은 새벽, 주방에서 아빠 몰래 죽을 끓여주던 엄마의 기억.

그녀가 아플 적이면 언제나 어머니가 죽을 끓여주고는 하였다.

-수유야, 엄마 요리 엄청 잘하지 않니? 다 옛날에 우리 엄마한테 배웠다니까?

천진난만하게 굴면서 왼손의 반창고를 숨기던 산수유의 어머니.

손가락을 꼼지락대던 그녀가 이시헌을 흘겼다.

“왜 그래?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시언 그게….”

“부담가지지 말고.”

너무 눈치를 본다.

무언가 묻고 싶은 것도 많고 배도 고파 보인다.

이시헌은 일단 최대한 사람 좋은 얼굴을 하며 수저를 직접 들어 내밀었다.

“아직 팔 움직이기 힘들어?”

처음에는 먹을 수 있는지조차 모르니까.

밥알이 조금만 들어있게 약간만 죽을 담아 내밀었다.

“…아아~”

산수유는 복잡한 얼굴로 서서히 입술을 벌렸다.

“옳지.”

입 안에 들어오는 죽.

미묘하게 짭짤하고. 물컹거리는 식감을 받아들였다.

산수유의 입이 오물거렸다. 죽은 상당히 맛이 있었다. 꽤 많이 끓여본 모양이었다.

다만, 몸이 아직 적응을 못해서인지.

-울컥.

“…콜록! 콜록!”

목을 타고 넘어가던 죽이 도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가슴께의 옷에도 죽이 묻었다. 식탁에도 밥풀이 튀어 이시헌의 몸까지 튀었다.

“아… 시언… 미-”

“괜찮아.”

손으로 대충 털어낸 이시헌이 다시금 죽을 떴다.

“원래 아픈 다음에 먹을 땐, 몸이 긴장해서 잘 안넘어가거든. 자, 아.”

“……응. 아아~”

죽을 뜬 수저가 산수유의 입안에 들어왔다.

색을 약간 잃은 선홍빛 혀가 마중을 나오고, 거기서 흘러내린 하얀 국물을 이시헌이 티슈로 닦아주었다.

산수유의 오른쪽 눈꺼풀이 경련했다.

반눈으로 뜬 눈이 떨리면서, 손가락에 힘을 꽉 주었다.

토해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입 안에 죽을 잘 굴려 씹은 다음에, 이물질이 완전히 녹아 액체가 되었을 즈음 삼켰다.

힘겹게 죽을 넘기니 미각이 조금은 돌아온 것 같았다.

-부글부글.

다시금 고통이 어리는 장기.

산수유의 낯빛이 싸늘해지며 다급하게 양 팔을 올렸다.

“…안아줘.”

2주동안, 산수유의 행동을 면밀히 관찰한 이시헌은 말없이 그녀를 안아주었다.

“으… 아읏.”

품에 안기면, 고통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정말 마법같게도 이 과정에서 안심을 느끼는 산수유였다.

품 안에 누군가가 있으면 꼭 하늘에 올라온 것처럼 몸이 두둥실 떠오른 것만 같았기에. 산수유는 힘도 잘 들어가지 않는 손을 꼭 부여잡고, 이시헌의 등을 동여맸다.

양 팔로 끌어안으면 살짝 버거운 남자의 등.

아마 그녀의 커다란 가슴의 탓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산수유의 허벅지가 위로 올라갔다.

가끔씩 고통이 심하면, 다리가 꺾이거나 발이 의도치 않은 곳을 향할 때도 있었다.

무릎이 꺾이는 고통에 찡그리는 산수유를 이시헌이 달랬다.

“괜찮아, 진정하고. 심호흡.”

어머니와 쏙 빼닮은 사람의 향기.

이시헌은 산수유의 허벅지를 꽉 짓눌러, 올라가지 못하도록 했다.

손가락 안에 파묻힌 살결이 벌벌 떨리다가 얼마 안 가 멎었다.

“…하아, 하아.”

“스읍… 하아.”

두 사람의 숨이 거미줄처럼 엉켜 지나간다.

흘러내린 땀이 엉겨붙고, 흰 티는 살에 달라붙어 봉숭아 빛을 보여준다.

산수유는 겨우 고개를 떼어낸 뒤. 다시 이시헌의 얼굴을 흘겨보았다.

여전히 다정한 얼굴이었다.

“밥 먹어서 몸이 놀랐나 보다.”

농담이라도 던지듯 웃으며, 다시 수저를 쥐는데. 산수유는 그 모습을 보며 죄책감에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이렇게까지 해주는…. 이유가 뭐야?

입 안에 감도는 목소리는 결국 나오지 않았다. 잘못 대화를 했다가 행여나 이시헌이 고개를 돌리기라도 한다면 자신은 죽는다.

산수유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시헌이 없다면 죽었을 거고, 이후로도 그가 없다면 죽을 것이다.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인생.

사실 지금도 별 다른 미련은 남지 않았다.

서러움과, 우울이 극에 치달아… 인형처럼 멍하니 관조하는 생활.

그런 그녀의 곁에는 언제나 이시헌이 있었다.

마치, 이미 죽어버린 자신의 비서처럼 말이다.

“마저 먹을 수 있겠어?”

의뭉스러운 이시헌의 태도는 산수유로서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응….”

그럼에도 자신을 위한다는 게.

왜인지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 * * * * * *

한 달이 되던 날.

아카데미가 2학기에 들어갈 무렵. 당연하겠지만 산수유와 이시헌은 등교를 하지 않았다.

이단 취급이니 아마도 퇴학이 분명했다. 아카데미의 교사들은 예상컨대, 이번 일로 학교의 위상이 떨어졌거니. 학생을 잘못 받았니 하며 시헌과 수유를 뒤에서 까내리고 있을 것이었다.

이시헌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산수유는 항상 침대에 누워, 이시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밤을 지냈다.

그는 가끔씩 아주 크게 다쳐서 온다.

그럼에도 다음 날이 되면 몸이 다시 나아서 움직이고, 장을 보러 간다고 했더니 피범벅이 되어서 올 땐 아무리 감정이 없는 산수유마저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놀란다.

이시헌을 잃어버릴까 놀랐다.

이런 감정을 난생 느껴본 적이 있던가.

산수유의 세상은 언제나 무채색이었다.

대부분 회색. 때때로 검정과 하양.

색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

그녀가 본 세상은 그녀에게 그런 느낌밖에 전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당장 지금도 구분할 수 있었다.

이불이 하양색이고, 선반은 갈색이고. 매일 먹는 죽들은 고운 흰색이다. 때때로는 깨로 만든 검은 죽이 나오기도 했다.

감정이란 걸 느낄 수 없으니. 뭐든지 밋밋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바깥 바람이 상쾌하다. 누군가 죽어서 매우 슬프다. 비를 맞은 강아지가 불쌍하다.

그런 감정들을 매우 미약하게만 느꼈던 산수유다.

그런데 요즘은 조금씩 색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우습게도 산수유를 내려다보는 신은.

그녀의 세상이 6평 남짓의 단칸방으로 줄어들고 나서야, 조금씩 색을 선물해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창의 바깥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색도 보이지 않았다.

가끔 창밖에서 나이를 먹은 중년의 여성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 온다.

꺄르르, 꺄르르.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담소를 나누며 음식도 먹고, 세상이 떠나가라 웃어댄다.

산수유는 그럴때마다 두 무릎에 팔을 감고 거기에 얼굴을 묻어 이시헌이 오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왜…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어?”

언젠가, 그녀가 이시헌에게 했던 말이다.

돌아온 답은 별 게 아니었다.

“글쎄.”

대답을 회피했다.

산수유는 거기서 그의 속내를 읽어내릴 만한 능력이랄 것이 없었다.

그러나 평소의 태도로 미루어볼 때, 아주 약간은 그의 의도를 알 것도 같았다.

“너도 이제 가문에서 벗어났으니까. 편하게 살아야지.”

자신의 머리를 빗어주며 했던 말.

“맛은 어때? 옛날에는 너 이것도 맛없다고 했잖아.”

“…맵쫀맛-”

“그건 안 돼.”

걱정하면서도 다그치는데, 또 얼굴은 굉장히 웃고 있다.

산수유는 그가 자신의 편의를 봐주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것이 금전적인 것이든, 건강이든, 모두 하나같이 직접 나서서 말이다.

산수유는 다른 것도 알고 있었다.

매일 새벽, 가끔씩 잠을 자는 시간이 겹칠 때.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흐느끼는 소리를 말이다.

“시언?”

걱정되는 마음에 일어나 가슴을 두드리면, 이시헌은 언제 눈물을 흘렸냐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단장하기 시작했다.

“어, 왜? 배고파? 밥 차려 줄까?”

아무렇지도 않아. 멀쩡한 얼굴로 그리 물어왔다.

마치 가면이라도 한 꺼풀 뒤집어 쓴 것처럼 말이다.

산수유는 잊지 못했다.

사람을 죽이기 싫다거나. 아프다거나. 경련이라도 온 것처럼 몸을 떨면서, 가끔씩 심장이나 배 부분을 끌어 안으며 울던 모습을.

왜인지 눈에서 도통 떼어낼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시언이가 많이 힘든가보구나.

그렇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고뇌에 빠진 산수유는 결국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이렇게, 양 손을 모으고. 몇 번이나 쥐었다 피면서 이시헌을 기다릴 뿐이다.

이시헌이 아픈 모습을 보일 때마다, 산수유의 의문은 갈수록 깊어졌다.

언제나 끊어지지 않았던.

그러나 차마 물을 수 없는.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

-드르륵.

산수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다행인 건, 오늘은 다치지 않았나 보다.

베인 상처 하나 없이 들어온 이시헌의 손에는 재료가 가득한 장바구니가 쥐어져 있었다.

“나 왔어.”

“…시언.”

“오늘 뭐 먹을래?”

신발 안에 그득히 쌓인 모래를 대충 털어낸 이시헌을 향해, 산수유가 양팔을 벌렸다.

이시헌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에 앉아 산수유를 품에 안았다.

커다란 가슴이 담쑥 안겨 뭉그러진다.

“집에 누구 안 왔지?”

“…응. 기다렸어.”

기다렸다.

집 안에서 나가지도 못하는 산수유니까.

그래도 이런 말을 듣는 것이 처음이었던 이시헌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산수유는 간지러운 듯 자신의 옷을 서서히 풀어헤쳤다. 오늘 아침 그에게 요구한 게 있었기 때문이다.

단추를 풀고 셔츠를 내리자, 숨 막힐듯한 가슴이 출렁거리며 튀어나왔다.

씻는 것조차 쉽게 못하기에. 직접 해줄 수밖에 없다.

사실 이 과정도 이시헌에게는 매우 익숙하기 그지없었다.

소변까지 처리한 적도 있었으므로.

“고개 돌리고.”

땀이 고인 날개뼈와 겨드랑이를 젖은 수건으로 닦았다.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몸이 불쾌해서 짜증이 난다.

다리에 힘이 잘 안들어가서 서있기도 힘드니. 샤워가 가능할 리가 있나.

성욕이 돌지 않게, 억누르는 이시헌의 손길에 산수유의 피부가 떨렸다.

가벼운 행위가 끝나고나면 그 다음엔 밥을 먹고. 취미생활을 보낸다.

사실 취미랄 것도 없었다.

그저 침대에 누운 산수유에게 이시헌이 대화를 건네거나, 어쩌다 나온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일 뿐이다.

불과 3시간이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을 산수유는 매일 기다렸다.

마치 하루 빨리 종례 시간이 다가오기를 고대하던 학생들처럼 말이다.

“오늘은 이걸 가져왔지.”

침대에 앉아 허리 틈 사이에 베개를 두고, 벽에 등을 기댄 이시헌이 앉은뱅이책상을 침대로 가져왔다.

그가 꺼낸 것은 자그마한 노트북.

인터넷을 많이 했던 산수유가 금방 흥미를 보였고, 이시헌은 산수유를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혔다.

“인터넷….”

산수유의 눈이 이 방에 온 이후 처음으로 반짝거렸다.

잠옷을 입은 산수유의 배를 가볍게 끌어안고, 마우스를 움직이는 이시헌.

그의 위에 올라탄 산수유는 똑같이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리 비울 때가 많아지니까. 노트북이라도 하고 있으라고. 드라마라도 볼까?”

“드라마?”

다른 이름의 신분을 사용해 사이트에 들어가 영상 하나를 재생하니, 얼마 안 가서 1시간 남짓한 드라마가 흘러나왔다.

나무 변호사 목영목.

목인이 하는 직업을 수목이 직접 하는, 최근 유행이라더라.

-특히 나무 얘기 하지마.

-음… 나무 얘기가 꼭 필요한 상황이라면?

-수목원에서 일하냐? 나무 얘기가 꼭 필요한 상황이 어딨어.

흘러나온 대사들. 산수유는 그다지 몰입하지 못했다.

그래도 꾸역꾸역, 어떻게든 시간을 때우기 위해 보고 있으니 등 뒤에서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응….”

산수유의 말랑말랑한 배를 찰흙처럼 쥐고 있던 이시헌이 눈을 감고, 아주 잘 잠들어있다.

항상 찡그린 얼굴이었던 반면 오늘은 아주 맑은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산수유는 드라마를 보다 말고 그 얼굴을 조목조목 뜯어보았다.

익숙한 냄새. 마치 그걸 몸에 묻히기라도 하듯 산수유는 그를 끌어안았다.

-사람의 마음은 정말 어렵습니다.

사람 위에 애견이 올라타 잠을 자는 것처럼.

흘러나오는 드라마 소리를 오르골 삼아, 산수유는 이시헌의 품에서 눈을 감았다.

오늘은 아무도 악몽을 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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