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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를 따먹다-395화 (395/657)

395

“시헌.”

귀를 간질이는 예쁜 목소리에 눈을 뜨니, 확 풍겨오는 여자의 살내음.

코앞에 산수유의 얼굴이 있었다.

“응… 왜.”

아직 남은 잠기운에 어리둥절.

흐린 시야에 산수유의 얼굴이 비친다.

그녀의 샛노란 눈동자가 하품하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화장실 가고 싶어서 그래?”

“으응~”

휘휘 고개를 내젓더니, 고개를 숙여 내 가슴에 볼을 문 댄다.

말랑한 볼이 꾹 눌린 산수유가 내 가슴 위에서 나를 올려다 보았다.

“그냥, 이야기 하고 싶어서.”

나는 베개맡을 뒤져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대체 몇 시인가 싶더니. 새벽 2시.

졸린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흐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화면이 아래로 향하도록 핸드폰을 엎어두고, 나는 팔을 모아 산수유를 끌어안고 등을 두드렸다.

다른 한 손으로는 입안에 들어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니, 한층 인물이 산다.

원룸에 들어갈 침대는 사실 그리 크지가 않다.

뭘 어떻게 해도 둘이 나란히 자려면 신체 접촉이 불가피했다.

나야 좋지만, 얘는 어떨까.

“…….”

자신이 물고 있던 머리카락을 손으로 떼주니, 산수유의 눈꺼풀이 몇 번이나 깜빡거렸다.

-꾸물꾸물.

그러다가 갑자기 이불 속으로 얼굴을 숨기는 녀석.

뭘 하나 보고 있는데, 내가 못 본 새에 은근슬쩍 자기 머리카락을 물고 튀어나왔다.

두 세 가닥도 아니고 여름철 냉면마냥 머리카락을 집어삼키셨다.

“나 또 머리카락 입에 들어갔어…!”

산수유는 슬쩍 오른쪽 볼을 내밀었다.

창의성 돋보이는 아이디어라고 제딴에는 생각했는지, 입가에는 만족스런 미소까지 걸려 있었다.

뭔가, 뭔가다.

‘뭐라고 해야 하나. 시골 똥강아지?’

원반을 물어온 강아지가 다시 던져달라며 조르는 느낌.

사실 예전부터 산수유가 댕댕이스러운 면모를 가지긴 했었다.

힘은 좋은데 둔하고 착하고.

뭣보다 화를 잘 안낸다.

감정이 없어서 그러겠거니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 아무래도 산수유의 원래 성격이었던 모양.

자질구레하게 할 것도 없이 대충 강아지의 특징과 비교해봐도 그렇다.

하나. 강아지들은 애교가 많다.

둘. 귀엽다.

셋. 관심을 갈구하고, 종에 따라 말을 잘 듣는다.

“수유야.”

“응?”

때아닌 실험 정신에 이름을 부르니, 머리카락을 물고 있던 산수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등을 슬그머니 내밀어 뺨에 가져다 대자. 산수유는 내 의중을 묻는 듯 눈을 깜빡거린다.

“으응? 시헌, 왜 그래?”

가만히 나를 바라본다. 왜 손을 내밀었는지 이유를 묻고 싶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나는 대답 없이 기다렸고. 곧 결과가 나왔다.

-부비적.

내 손에 볼도 비비고, 입술도 닿고, 사람 홀리는데 작정한 똥강아지나 다른 게 없다.

귀여운 건 증명할 필요가 없음이다.

내가 아는 누구보다 가슴이 크고, 꽤 키도 있음에도 그렇다.

산수유 특유의 순딩순딩한 얼굴에 감정까지 돌아오니 말할 필요가 없다.

‘…오.’

이번에는 검지와 엄지를 제외한 손가락을 모두 접었다.

자연스럽게 브이 형태가 되는 손.

“여기에 턱 얹어볼래?”

“…왜?”

한 마디 부탁에 산수유는 이유를 물었다.

그러면서도 턱을 곧이 곧대로 옮겨 내 브이자 위에 턱을 꾹 옮겼다.

볼살이 손에 말려 올라간다. 열매같이 새빨간 입술이 톡 튀어나왔다.

‘완전 댕댕이네.’

이젠 반박할 수 없다.

산수유는 강아지다.

최근 좀 아파서, 털까지 많이 빠지는 걸 고려하면 완전 개의 화신이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

나는 손가락으로 살살 턱을 긁어주었다.

“…강아지 취급하는 거야?”

이제야 깨달은 녀석.

동그랗고 순한 눈을 깜빡거려 온다.

약간 나 놀랐어요 하는 표정이다.

예전 산수유라면 절대 짓지 못할 다색적인 표정을 입감하니, 즐거움이 쏠쏠했다.

수집형 게임을 처음 할 때의 즐거움을 아는가.

고인물들은 도감 한 마리 채우려고 낑낑 기를 써대지만, 처음 할 땐 그렇지 않다.

대충 아무거나 클릭해도 새로운 도감이 뿜어져 나오는 극한의 재미!

무감정했던 산수유의 원판이 바뀌어 가니, 친구로서의 만족감이나 즐거움도 충족되어 간다.

“화났어?”

“…화를 왜 내?”

혹시나 물어보니, 질문이 역으로 돌아왔다.

‘그럴 만한가. 이제 막 감정이 돌아왔으니.’

앞으로는 조금씩 그런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서도 이해하리라 확신한다.

산수유의 손이 내 겨드랑이 사이를 파고들었다.

약간 묵직한 무게감이 가슴과 허벅지에 이어졌다.

찰싹 달라붙은 모양새. 산수유의 눈꺼풀이 서서히 닫혔다.

이제 눈 좀 붙일까.

하는 순간, 어깨 쪽에서 희미한 물기감이 느껴졌다.

설마 또….

“으응….”

아뿔싸.

몸을 일으키니 이미 늦었다.

한 번 터져버린 댐은 그 어떤 기술자가 와도 막을 수 없었다.

* * * * * * *

“…….”

“다시는 모유를 쏟지 않겠습니다. 실시.”

“…다시는 피곤한 시헌이한테 모유를 쏟지 않겠습니다.”

치욕적인 말을 중얼거리는 산수유의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천장 위로 번쩍!

그녀가 양 팔을 든 건 사실 체벌의 이유라기보단, 분위기에 탄 나의 만행이다.

우물쭈물 거리는 산수유의 팔이 경련했다.

“…시헌, 나. 이상해… 막 얼굴이 화끈거리고. 끄응.”

“아아. 그건 부끄럽다는 거다.”

오늘도 낭낭히 산수유 표정 도감 1스택.

슬쩍슬쩍, 젖어버린 가슴을 나에게 훤히 보이며 움찔거리는 겨드랑이가 볼만 하다.

음란마귀가 자기 차례라며 나오지만, 사뿐히 억눌러주었다.

“이제 내려.”

허락이 떨어지니 순식간에 팔을 내려 가슴을 가린다.

“…부끄러워?”

“응. 맞아.”

이렇게 표현하는 게 맞냐는 듯 나에게 물어오더니.

“부끄러워….”

물음표를 떼고 곧잘 사용한다.

예전엔 친구끼리는 뭐 보여줘도 문제없다면서.

스킨십은 많아졌는데 그만큼 수치심도 늘어나고 말았다.

마치 사춘기가 온 딸내미를 보는 느낌이다.

“이야… 이걸 또 언제 치우냐.”

나는 모유범벅이 된 침대를 보며 탄사를 흘렸다.

치유 권능과 치료 마법, 두 단계에 걸쳐 산수유를 치료했던지라 청소로 돌릴 마력이 여의치 않다.

‘괜히 신나서 스승님 만나고 오자마자 모든 마력을 때려 부은 게 문제였구만.’

청소라는 마법의 난이도는 상당하다.

바닥에 있는 물질 중 버려야 할 것과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전부 구분하고 처분하는 마법인 셈이니, 어지간한 사람은 꿈도 못 꾼다.

내가 이 마법을 배운 게, 마법의 극의라 통하는 공간 좌표를 계산할 즈음이었으니. 개인적으로 배우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만.

보통 마법사들은 명함도 쉽게 내밀지 못한다.

그만큼 마력도 상당히 들어서 효율도 별로 없다. 나나 천도같이 마력 탱크들이나 쓰는 마법이다.

‘그러고 보니 치유의 권능 이후에 모유가 나오는 부작용을 잊고 있었어.’

특히나 이번엔 대단했다.

흰색의 모유가 모여 섬진강. 한강을 만들어 이 원룸에 촉촉함을 전파하고 계신다.

저번보다 양이 거진 세 배는 되어보였다.

‘곤란한데.’

저게 단순한 모유였다면 몰라도…. 산수유의 모유라는 거.

끈적한 여름 열대야와 뒤섞이니, 바닥지에서부터 은은한 달콤한 향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호흡기를 통한 섭취도 인정해주는지. 아랫도리가 불쑥. 솟아올랐다.

최대한 다리를 모으고 손으로 짓누르며 심신을 달랜다.

“시헌….”

“응?”

“화났어?”

내가 했던 말을 잘도 써먹는다.

“화난 건 아니고….”

조금 어처구니가 없긴 했다.

아니 임신도 안 한 애가 왜 이러는지.

‘농담 치기 좀 그런 상황이긴 한데. 이 정도면 수십 명도 감당 가능하지 않을까.’

밀과 쌀에는 각각 인구 부양력이 있는데, 아무래도 산수유의 인구 부양력이 정점이 아닐까 싶을 정도.

의혹이 불거지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전처럼 막 가슴이 아프진 않지?”

“…….”

산수유는 아무 말도 없었다.

“설마 아파?”

내가 물으니 고개를 도리도리.

대답 않고 가만히 산수유를 바라보니, 이윽고 솔직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아픈 건 아니고… 간지러워.”

“간지럽다니?”

“…….”

“이건 건강에 좀 직결된 문제니까…. 말해 줘.”

최근 감정이 생기면서, 나에게 말 못할 사정이 몇 개 있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밤에 돌아올 때 훤히 켜져있던 노트북을 황급히 닫는다거나.

매일 잘 때 은근슬쩍 내 몸을 더듬는다거나. 외에도 많다.

다 이해해도 건강 문제는 평범한 게 아니다.

내가 몰아붙이니 산수유는 우물쭈물 거리며 자신의 가랑이 사이로 양 손을 집어넣었다.

그 탓에 숨기고 있던 가슴이 튀어나왔다.

“…그, 그게.”

흰 티셔츠의 튀어나온 돌기 부분에 맺힌 한 방울의 모유가 뚝-

참회하는 강아지처럼 머리카락이 축 늘어진 산수유가 조심히 고해왔다.

그 말을 전해들은 내 얼굴이 바싹 굳어들었다.

“…그러니까. 나 때문에?”

-끄덕끄덕.

“그래서. 해달라고?”

-……끄덕.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다. 나는 손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방 안은 여전히 고소하고 달달한 향으로 꽉 찬 상태.

“…안하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니, 슬그머니 자신의 앞가슴을 내밀었다.

“안…될 것 같아.”

“진짜? 그… 혼자는 못해?”

이게 진짜 그 가슴으로 하는 사랑인가 뭔가냐.

우리 순진무구한 산수유가 인터넷 친구들한테 아주 몹쓸 것을 배워온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단다.

‘가슴에서 나오는 물’의 키워드를 시작으로.

‘가슴에서 나오는 우유’ ⟶ ‘모유’ ⟶ ‘모유플’ 순으로 이어진 자동 검색어를 계속해서 타고 가다 보니, 그런 쪽 지식을 알게 될 수밖에 없겠더라.

모유에 환상을 가진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다.

여기서도 뭐 나무의 꽃에서 흐른 물이니 뭐니, 모유에 관한 말이 꽤 많기도 하고.

그런 주제에 내가 살았던 한국보다 검열이 심하지 않아 인터넷에서 그런 정보를 쉽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새벽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가…. 그냥, 성욕이라고…?”

몸이 나아서 나오는 게 모유인 줄 알았다.

그게 틀린 게 아니었다. 실제로 내가 권능을 쓰면 산수유의 가슴은 눈에 띄게 부풀어 올랐다.

방금 모유를 쏟기 전까지만 해도 최대 크기를 갱신했을 정도니까.

아마…. 좀 물이 새게 되는 트리거가 여러 개인 모양이었다.

요컨대. 책임져라.

-꿀꺽.

마른 입을 타고 침이 넘어갔다.

* * * * * * * *

“일 진행 상황 보고하러 왔습… 얼굴이 왜 그래요?”

흰개미의 여성 요원이 내 얼굴을 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것도 아니야. 시바는?”

“아, 왕님 따님분 정보는 확실하게 조작이 끝났습니다. 3월부터 8월까지 엘 아카데미의 모든 CCTV 기록을 지웠고. 잠시나마 서울에 얼굴을 비쳤던 기록들도 전부 없어졌어요. 진달래님이나 이세영님이 발설하지 않는 이상… 알 방법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죠.”

여러모로 할 일이 많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휘하는 것에 대해, 내가 뭘 선호하고 선호하지 않는지는 관계가 없었다.

내가 정해둔 그 기간까지. 얼마나 더 준비를 할 수 있는가.

나를 빤히 바라보던 요원이 다시 슬그머니 물었다.

“다음은 한국 헌터 협회의 움직임인데……. 저기… 왕님.”

“어.”

“진짜 얼굴 왜 그래요?”

“실수를 좀 했어.”

“그, 항상 사람같지 않을 정도로 철두철미했던 왕님이 실수를요?”

그 꿈에서 있던 일 이후.

내 몸에 변화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정신이 하나로 모아지니 불안정한 것은 당연하고, 마법의 발현도 상당히 불완전했다.

힘을 쓰는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지만… 가장 큰 건-

“강해진 왕의 인자 때문인가요?”

흰개미를 통솔하고, 정보를 모아가면서 알게 된 것이다.

내 몸에 있던 왕의 힘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그 꿈을 기점으로 다시 체크해 보니, 흐르는 기운이 내 몸의 거진 절반을 잡아먹고 있다고.

요컨대. 음란마귀 이상으로 성욕과 정력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내 몸 상태를 잠시 망각해버릴 정도로.

그렇게나 순수한 산수유를 고장나게 만들었던 것도 말이 안 된다.

‘잘 넘어가면 됐던 건데…. 그놈의 모유 때문에.’

집무실에 앉아 턱을 괸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실수가 맞았다.

그 탓에 이제, 매일 저녁에 잠자리를 요구 받는 게 당연시 되어버렸다.

이것도 변화라고 한다면 변화겠지만. 입이 쓰다.

어둑한 내 시야에 며칠 전의 일이 선명하게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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