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1화 > 평화의 시대 (2)
사고.
내가 세상에서 자리를 비운 3년간 많은 일이 있었다.
예전에 저질렀던 사건 중에 사소한 무언가가 복병이 된다거나.
관계를 가졌던 여자의 배가 불러온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소름이 끼쳤지.’
온연히 나만의 잘못이라 하기에는 서로의 부주의였다.
우린 앞으로 일어날 생명의 탄생을 내심 망각했었다.
그도 그럴게.
‘색공’을 배운 다음부터는 피임이 아주 손쉬웠으니까.
습관적으로 사고가 일어나지 않게 매번 조정했었는데. 그놈의 술이 원수지.
속도 위반도 아주 깔끔하게 끊어버렸다.
차라리 알고 있었다면 주의라도 하고 후회라도 했으련만.
“솔직히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해?”
“안해요.”
태양을 만나고 오는 길. 공간 마법을 사용해 여행중인 현자의 방을 찾았다.
아니. 이제는 (전) 현자라고 해야하나.
현자의 자리에서 내려온 그녀는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기아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선인이 되었다.
내가 누군가를 죽일 동안, 그녀는 누군가를 살려온 것이다.
현자가 짊어져야하는 하나의 규칙인 방관.
그걸 떨쳐냈으니 물 만난 물고기나 다름없다.
원칙상 현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내려올 수 없지만, 착실히 쌓아온 세피로트의 호감을 이용해 편법을 썼다던가.
뭐 그게 문제는 아니다.
가장 문제는 그녀와 나 사이에 형성된 꼬마애지.
“왜 말 안했어?”
“당신이 지우라고 할까 봐요?”
당신 눈에는 내가 애 지우라는 쓰레기로 보였나 보다.
억울한 감이 없지는 않고 많다.
“그리고 저도 생각이나 했겠어요?”
“…맞긴한데. 설마 한 번에 생길 줄 누가 알았겠냐고.”
알바(Alba)는 3년 전과 하나도 변함없는 어머니같은 자태로 과일을 깎고 있었다.
(전)현자가 여행을 다니는 이유는 자신의 아이를 보란 듯이 잘 키워보겠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었다.
동시에 우리 스승님의 치료도 겸해서 말이다.
“상태는 많이 호전됐어요. 구해준 약이 워낙 좋은 거라. 운이 좋으면 몇 달 안에는… 의식이 회복될지도 몰라요.”
현자의 당부에 내심 안심하며 옆자리의 스승님을 보았다.
처참했던 반 송장이, 혈색이 도는 여인으로 뒤바뀔 때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가.
그녀와는 딸과 마찬가지로 오랜 시간동안 만나지 못했다.
거의 1년만이었고,
그동안은 생사소식도 전하지 못했다.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연락이 끊어지게 될 거다.
내가 그만큼 바빴으니까.
-탁탁탁탁!
마침 들려오는 계단 올라오는 소리에 알바가 피식 웃었다.
“당신 딸이 오는데요?”
-벌컥!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까만 머리의 여자애가 알바를 향해 손을 들려다 말았다.
“엄마 나 왔…….”
눈이 마주치자마자 길게 이어지는 침묵. 어린 시절부터 눈에 익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대뜸 찾아와선 내가 아버지라고 말하니 현실감이 없겠지.
하지만 애도 나도 안다.
저 검은색 머리카락. 똘망하고 기센 눈.
절대 다른 씨에서 나올 수 없는 특유의 분위기까지.
“…못난 아빠 왔어요?”
요놈 봐라.
은근히 돌리는 것도 나를 똑 닮았다.
그리고 동시에 안절부절 발을 굴리면서, 좋아죽겠다는 티를 내는 것도 그렇다.
“위키.”
위키 클리포트.
내가 애를 보기도 전에 현자가 정해버린 이름이다.
자신이 그렇게나 싫어했던 ‘위키’를 설마 제 딸 이름으로 정해버릴 줄은 몰랐다.
내가 듣기에는 이쁜 이름인데 이 아이한테는 어떨지.
어색하게 웃어주며 두 팔을 벌리니, 쭈뼛쭈뼛 내 눈치를 보던 클리포트가 조심스레 다가와 내게 안겼다.
못된 아빠라고, 방금 말했던 나쁜 말이 못내 마음에 걸렸는지.
“…착한 아빠.”
툭 던진 한 마디에 나도 웃고 알바도 웃었다.
신체와 정신 나이는 아홉 살. 내가 딱 시바와 헤어질 때쯤의 나이였다.
시바의 성장에 비해 더딘 편이지만 무시하긴 힘들다.
알바의 혹독한 가르침 아래 쌓아놓은 지식은 벌써 나를 뛰어넘었을 정도.
교육이 보통이 아니라 왜 이렇게 딸을 못살게 구냐며 은근히 눈치를 주었던 적도 있었다.
-시헌씨. 세상에는 각자의 소명을 위해 태어난 존재가 있답니다. 제가 그러했듯이요.
내게 일축했던 알바는 가끔 보면 딸을 도구로 보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사랑을 주는 빈도로 보나, 애정의 크기로 보나 알바가 앞섰고. 아버지의 의무에서 회피해온 나는 무어라 거들 말이 없었다.
나와 현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말은 그렇게 하지만 취급은 달랐다.
내 역할은 아버지보다는 씨앗을 제공한 사람에 가까웠다.
위키는 알바의 딸보단 후계자였고. 그런 애매모호한 관계가 몇 년이나 지속되어 왔다.
사실은 나에게 딸이 있다는 소식조차 알리려 하지 않았다고.
알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는 아직 알지 못 한다.
“아빠 안 나가면 안돼요?”
“위키.”
“…알았어요.”
알바의 한 마디에 위키의 투정이 쏙 들어갔다.
응당 아빠로서 딸에게 줬어야 할 애정조차 알바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 점만은 완고했고. 나는 이렇게 잠시 안아주거나 등을 토닥이는 것밖에 하지 못한다.
그것만으로 위키는 히히덕거리며 내 목의 옆부분을 쥐어 감싼 채 행복해했다.
“아빠 힘들겠다.”
알바의 이어진 한 마디에 입술을 삐죽 내밀며 불만스런 얼굴로 품에서 빠져나오는 위키.
나는 그 모습을 측은하게 바라보다 알바에게 눈치를 주었다.
“오늘은 냅둬.”
“…….”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알바.
소용 없다.
아무리 기러기 아빠다만 내가 어디 가서 발언권이 꿀리지는 않는다.
“……후우 알았어요.”
아빠, 딸. 일동 활짝.
현자의 누그러진 시선에 고개 돌린 위키의 입가에 함박 웃음이 지어졌다.
한참 놀아주고, 볼 뽀뽀도 해줬다.
“…꺄악!”
*****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아빠와 딸의 시간.
위키의 얼굴을 볼수록 떠오르는 다른 아이의 얼굴이 있다.
“시바에 대해 생각하세요?”
“그것도 있고. 이렇게 시간이 빌 때야말로 한 번쯤, 만나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
“당신이 원한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당신도 알거라 생각해요.”
3년 전보다 훨씬 부드럽고 나긋한 말투의 알바.
그녀가 말한대로 알고 있다.
지금 내가 하려는 게. 내 옛날 지인들에게 알려진다면 고운 시선은 물론이고, 괜한 갈등만이 유발될 수 있다.
물론 몇 명정도는 만나긴 했다.
정시우라던가. 마로니에라던가.
정시우는 1년 전에 내가 의도로 한 번 접근한 적이 있었고, 마로니에는 볼 일이 있어서 한번 눈도장을 찍었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듣자 하는 바로는 다들 잘 지내는 것 같았으니까.
그래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만나기를 빌어본다.
“힘들죠?”
알바의 물음에 나직히 속삭였다.
“그다지.”
“갈수록 거짓말만 느네요. 저희 제법 꽤 오래 있지 않았나요? 슬슬 사실만 말하고 지내도 좋을 텐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넌 못 믿겠더라.”
“…푸흡.”
진심인데.
(전)현자라지만 난 아직도 이 여자를 현자라고 생각하고, 믿을수가 없다.
요즘도 가끔 현자한테 뒤통수맞는 꿈을 꾼다.
“상관 없어요. ‘구 체제’로 돌아가는 게 당신의 목적지라면, 제가 당신을 배신하는 일은 없겠죠.”
구 체제. 앙시엥 레짐.
프랑스의 혁명이 있기 이전 절대 전제 군주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목령왕의 통치가 지속되던 날이기도 했고.
여덟 번째 잎새의 세력이 내 손아귀에 돌아옴으로써 그 체제는 현대화되어 서서히 모습을 갖추는 중이었다.
내가 살던 세계와는 다르다.
죽지 않는 인간이 있었고.
영원한 통치도 이어질 수 있다.
과거,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일컫는 소수의 엘리트에 의해 이루어지는 통치.
변혁을 가장 빨리 일으킬 수 있는 체제임과 동시에.
내가.
두 세력을 뛰어넘을 수 있는 유일한 형태의 구조.
“내 생각이 바뀌는 때에는?”
딱딱해진 입술을 핥으며 묻자 현자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럴 일은 없어요. 당신의 연인과 시바를 끔찍이 아끼는 당신이라면.”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영원히 제가 당신 편이라는 소리죠.”
“딱 그 말만 했으면 굉장히 로맨틱했겠네.”
“그쵸?”
“그쵸는 지랄.”
이 노릇도 해먹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힘이 있어도 병력의 운용에는 두뇌가 필요하다.
민중을 끌어당기는 매력은 또 다른 문제다.
나를 시기질투하는 녀석들도 많았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포기했을 거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잖아요?”
맞는 말이긴 하다.
“천마.”
“…….”
어깨에 두른 흑룡포가 돌연히 불어온 바람에 스쳐 흔들렸다.
눈을 아래로 뇌까렸다.
굳은살이 박힌 손은 두터웠고, 팔목은 굵다.
첫 만남 때보다 훨씬 커진 키 덕분에, 눈높이는 높아졌고 제법 그녀들이 바라던 몸이 되었다.
“이제. 스승님만 일어나면 되는데.”
아직은 그 날이 멀다.
그래도 모든 게 희망적이다.
나는 마력을 일으켰다.
“슬슬 간다.”
알바에게 툭 던지듯 한 말을 남기고 나는 공간 마법을 일으켰다.
헤어짐이 길어지는 일 따위는 없었다.
-번쩍!
시야는 바뀌고, 재차 찾아온 세력 안.
지독한 피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
나를 중심으로 에워싸듯 대기하고 있던 무수한 플라워의 조직원들.
자잘한 살기들이 모여 피비린내를 내고 있다.
변화에 납득하지 못한 플라워가 날을 갈며 나를 향해 무기를 들었다.
‘또 좌표를 바꿔야 하나.’
“스폰킬만큼 비겁한 게 또 없는데.”
“……?”
“웃어. 새끼들아.”
나는 흑룡포를 옆으로 제치며 검을 빼들었다.
거대한 장검이 철컥, 불온한 소리를 내며 시퍼런 검날이 검집에서 빠져나왔다.
-서걱!
*****
“옷 챙겼어?”
“챙겼어~”
“엄마가 사준 검은?”
“챙겼지.”
“엄마 사랑은?”
“…삐?”
가끔.
시바는 능글맞은 진달래의 사랑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솔직히 조금 낯부끄럽다.
“헤헤, 챙겼어?”
웃는 얼굴에는 그래도 침을 뱉지 못한다고.
시바는 다 싼 짐을 두고 일어나 진달래에게 안겼다.
“챙겼어~ 챙겼어~”
흐물흐물해지는 진달래의 얼굴에 시바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엄마….
나 없이 어떻게 살까.
외할머니랑 사이라도 좋아졌으면 하는데. 요즘 보면 또 연락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냥 우리 딸 1학기처럼 다닐래?”
“엄마…. 2학기는 안된다고 했잖아.”
1학기는 편법을 사용해, 자택에서의 등교가 가능했지만 2학기부터는 얄짤이 없었다.
최근 부활한 숲지기 선발전에도 나가야 하고.
지금 시바가 집을 나서는 것도 그 ‘숲지기 선발전’의 이유가 컸으니까.
그에 관해서 특훈을 받아야 한다니 하루 일찍 기숙사에 가야만 했다.
“위험한 일 있으면 꼭 연락하고.”
“…….”
연락하라니, 위험한 일보다 그게 더 위험하다.
시바는 오래전에 있던 일을 떠올렸다.
아주 사소한 괴롭힘. 그게 계기가 되어 무려 한국 헌터 협회의 협회장까지 움직였던 사건.
울고불고 빌던 한 남자애를 시바는 기억한다.
‘…엄마랑 이모는 걱정이 너무 심해.’
특히 별이가 심각하다.
자기 딴에는 떽!
제딴에는 호통만 치려고 했겠지만, 협회장 수준이면 그 호통이 국가적인 경고가 되어 버린다.
세영 엄마에게 혼나서 눈물이 쏙 빠졌던 건 비밀이 아니다.
“별 일 없을 거야.”
시바는 짐을 등에 지고 가슴을 치며 말했다.
“시헌이도 그 소리 하고 선발전에서 싸우고 왔거든?”
“…??”
“조심하라면 조심해.”
진달래의 당부에 시바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빠….
대체 어떤 사람일까?
그의 무용담을 들으면 들을수록 시바는 아빠의 인생을 떠올리기가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