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2화 > 평화의 시대 (3)
“왕.”
헌터 협회와 교단의 안건에 최근 시류를 타기 시작한 최악의 이름이 올라왔다.
“예언이 떨어졌다.”
이제는 아카데미의 운영에서 내려와, 세계수의 측근으로서 활동하고 있는 안젤리카의 한 마디에 주변이 술렁거렸다.
“왕이라면…. 플라워의 여덟 번째.”
“이름만 그렇지. 플라워에서도 배척받는다던데.”
좌석의 길드장들이 떠들썩하게 아는 체 했고.
“천마나 이시헌… 그보다 더 한 놈이 나타났다는 건가.”
앞으로 다가올 재난에 많은 임원이 전율했다.
안젤리카는 주변 길드장들을 응시하곤, 시선을 아래로 내린 뒤 한숨을 내쉬었다.
“크게 걱정하지 마라. 새로운 던전들이 생겨나면서 인재들이 꽤 많이 충당되었으니.”
두 명의 거성이 저물고, 이시헌이 죽었던 그 날 세계적인 지각 변동이 있었다.
탑과 무수한 던전이 솟아났고,
마물들이 활개를 쳤다.
던전이 늘어나며 지구에 흐르는 마나의 질은 향상되었고, 던전에서 얻을 수 있는 경험치와 여러 아티펙트들이 헌터들의 실력을 일취월장하게 만들었다.
“황금 세대가 이끌어갈 시대엔, 경지를 뛰어넘은 자들 역시 많아질 터.”
고대 시대로 회귀하고 있다.
중국에는 무와 협이 발전했으며 유럽에는 기사와 용이 실존했던 그때로.
던전 중 일부는 목령왕의 세력이 잔존해 위험하지만.
“플라워에 나타난 그 왕은, 주변에선 정통적인 왕으로 취급되지도 않는 모양이니. 세력을 불리기 전에 하루빨리 던전을 제압해야한다. 위험을 감안하더라도 말이지.”
지난 나날.
플라워와 세계수는 던전을 함락시키기 위해 분전해왔다.
던전 최상층의 자원 확보가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키가 되기 때문이다.
“왕의 일곱 탑, 그리고 천이 넘는 던전까지.”
“왕의 탑이란 말은, 최근에 솟아올랐다던 그?”
길드장의 말에 안젤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헌터들의 무수한 시도에도 불과, 누구도 꼭대기에 다다르지 못했다는 목령왕이 만든 일곱 개의 탑.
“그 탑의 과반수를 먼저 먹는 세력이 앞으로의 전쟁에 우위를 가져올 수 있을 거라고. 저번에 세계수님이 신탁을 내리셨지요.”
“그래.”
이번에 길드가 소집된 것은 거기에 하나 더, 신탁을 내리기 위함이었다.
“플라워의 여덟 번째 잎새. 왕은 분명 강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세계를 집어삼킬 정도는 아니다.”
안젤리카를 향해 시선이 모였다.
“하지만 몇 그루의 나무들이 왕의 잠재력을 크게 띄워준다고 하군.”
그녀가 손을 뻗자 특이한 마력이 모여 지도가 펼쳐졌다.
지도 위로 하나씩 네 개의 빛이 그어졌다.
중국에는 중간이 갈라진 샛노란 잎이 하나,
한국에는 참나무의 한 종(種)이,
유럽에는 기상하는 한 마리의 용이 뒤척였고,
미국에는 잘 자라난 붉은 꽃잎이 피어나 있었다.
“네 그루의 귀목(貴木).”
아직 누구인지까지는 모르지만 금방 알 수 있을 거다.
안젤리카는 덤덤히 뇌리깠다.
“그 여자들이 겁탈당하지 않게 해야한다.”
만약 목령왕이 네 그루를 취하는 날에는, 세계수의 미래 따윈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
초여름 중국.
2년 전 정부의 붕괴로 인해 플라워와 세계수에게 쪼개진 버림받은 땅.
국목은 죽고, 계속된 부패 정치로 이 근방을 집어삼킨 홍연의 세력이 점차 커져나가고 있었다.
“……이거.”
무너진 건물의 꼭대기.
이 빈민가의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아래를 둘러보았다.
언젠가 이 풍경을 한 번쯤 본적이 있었다.
이단 판정을 받았떤 내가 한창 도망을 다닐 시절, 이 도시는 나름대로 경공업의 심장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까.
플라워의 세력을 가지고 이 땅을 내 손에 넣었을 때. 나는 내심 쾌재를 불렀었다.
그런데.
“여기… 너무, 무너졌는데.”
3년이라는 시간이 치명적이었다.
내 세력은 어찌저찌 갖추었지만 정작 터전이라 부를만한 것은 이런 황무지같은 땅들뿐이라니.
“플라워에 의탁한 빈민들은 물과 음식 부족으로 나날이 불만이 쌓여가고, 와중에 교체된 지도자 때문에 내 땅엔 반란까지 일어나기 직전이라.”
웃음이 난다.
“큭큭큭”
겨우 살아남아서 돌아왔더니.
“내가 해야하는 건 던전 타이쿤….”
으쌰으쌰. 던전을 키워 우리 마을을 강화해 보세요!
흔해빠진 핸드폰 게임의 화면이 떠올라 어처구니가 없었다.
세상의 경제는 던전이란 곳에 집중되어 있다.
막말로 마법으로 물이든 금이든 만들어낼 수 있는 지금. 마력이 모인 마석이 현물로서의 압도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티펙트의 값어치또한 상당하니 국가의 부강은 곧 던전의 수로 귀결되곤 한다.
‘그래도.’
고작 이런 거로 혀를 내두를 순 없다.
마침 누군가 나에게 다가왔다.
“홍연이냐?”
기척으로 보나 살금살금 걸어오는 조심스런 모습으로보나 뻔하다.
“헉!”
등 뒤에서 들려온 홍연의 목소리에 나는 눈을 감았다.
“……어떻게 알았지?”
“내가 널 모르겠냐.”
타박타박 걸어와선 캔 음료 하나를 건네주길래, 감사히 받아 마셨다.
“고마워.”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쭈뼛쭈뼛 서있길래 살짝 비켜주니 내 옆에 앉았다.
“왜 왔어?”
“그냥.”
“왕한테 한다는 말이 그냥?”
장난을 섞어 말해주니 무릎을 손으로 감싼 홍연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보고싶은 것도 문제…인가?”
그러고 보면, 많이 기다렸었지.
꽤 긴 세월을 걸친 관계. 과거에만 잠깐 들렸다가 나온 나로서는 실감하기 힘들다.
잠깐 눈만 맞은 뒤에 다시 3년.
플라워에게 꼬리 자르기를 당하고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억지로 이 세력을 이끌어온 그녀다.
여러모로 감사하고 있다.
“보고싶은 게 문제냐고?”
“응.”
“전혀 아니지.”
긍정적인 답변에 샐쭉 웃은 홍연이 팔에 얼굴을 묻었다.
개량 한복에 예쁜 비단을 덧대어 노출을 최소화했지만, 몸의 선이 고스란히 드러나 오히려 색기 있는 차림.
긴 적발은 윤기가 흐르는 게 언제 봐도 보기 좋았다.
“…….”
부담스러운 시선이 계속되는 가운데.
불 한 점 없어 어두운 골목에 주저앉아 주린 배를 감싸고 잠에 든 아이들을 보며 나는 혀를 찼다.
“도원. 아니… 이젠 시헌이라고 불러야 되나?”
“마음대로 해.”
“도원이라고 부르겠다.”
“응.”
이젠 그 시헌이라는 이름도 없어진 지 오래니까.
홍연은 아직 도원향에 있을 적의 기억이 소중한 지 내 호칭을 기어코 도원으로 정했다.
“내가 널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렇지.”
어색해져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다.
실제로 조금 서먹서먹하기도 했다.
그럴 텐데도 선뜻 자기 세력을 넘겨줄 때의 홍연은 아무런 망설임이 보이지 않았었다.
정말 이 녀석은 내게 특별한 감정이 있었을까. 있었다면 아직도 가지고 있는 걸까.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거라.”
지금까지도 홍연은 내게 이상할 정도의 신뢰를 가지고 있다는 것.
“이 꼴을 보고도 말이 나와?”
“망가진 도원향을 살렸던 네가 아니냐.”
“그때는 충분한 기반이 있었고. 지금은 아니지.”
좋은 세상을 만든다는 꿈은 개나 소나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좋은 세상을 구현하는 건 불가능하다.
적어도 내가 살던 세계는 그러했다.
수명도, 개인이 가질 수 있는 힘도 차원이 다른 이세계에서만이 아주 약간의 가능성을 내포할 뿐이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보려고.”
반쪼가리 평화가 아니라. 완전하게.
나는 자조했고, 홍연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좋은 결과라고 좋은 과정만이 있지는 않을 거다.
최근 부쩍 늘어난 성욕도 해소할 길을 찾기가 힘들다.
“저기.”
홍연이 쑥쓰러워하며 물었다.
“오늘은, 그… 술 한 잔 안하겠느냐?”
그렇게나 바라시던 술 한 잔. 오늘만은 잔 좀 나누어도 되지 않을까.
-우우웅.
주머니에서 울린 진동에 정적인 분위기가 박살이 났다.
핸드폰을 열어 메시지를 확인한 나는 홍연에게 아쉽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
시무룩.
고개 숙인 홍연.
“나중에 마시자.”
후다닥 도망가려고 하니 옷자락을 잡혔다.
밤중에 귀접한 처녀귀신처럼 내 발목을 붙잡은 홍연.
“…언제? 정해주지 않으면 안 보낸다.”
“이번주 일요일.”
“이번에도 어기면?”
“시키는 거 다하기.”
농담처럼 던지니 그제야 히죽 웃은 홍연이 내 옷자락을 놓았다.
나는 거대한 흑룡포를 정돈하며 어깨를 풀었다.
“살면서 그 모습을 다시 볼 줄이야.”
“뭐래.”
반란이 또 일어났다.
*****
반란이 일어나는 이유 중 가장 큰 점을 꼽아보라면, 너무 급진적인 규칙의 변경 때문이다.
마약 밀매와 노예.
무정부인 땅덩어리에 우후죽순 솟아난 범죄 세력들.
플라워의 근간이 음지에 있었던 만큼, 플라워의 자본은 마약처럼 어두운 경로로 인한 수입이 가장 컸다.
여덟 번째 잎새 역시도, 무수한 마약과 노예상 등의 집단들이 번성했던 상태.
돈이 없다면 세력을 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음지의 세력이라면 더더욱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돈을 끌어올 수 있는 불법적인 수단이 돈벌이로서는 최고다.
‘부작용이 컸어.’
내버려둔다.
그런 선택지도 있다.
나라고 세상을 완전히 깨끗하게 다잡을 수는 없다.
상황에 납득하고 들어오는 자본을 흡수한다면, 반란은 없을 테고 내 세력은 점차 불어났으리라.
하지만 그 경우 문제가 있다.
‘노예를 구하겠다고 내 땅에서 태어난 애들을 잡아간다거나. 내다 팔기 위한 마약이 내수에서 돌아다닌다거나.’
문제가 컸고.
그렇기에 빼앗았다.
수확한 돈은 단기적이고 위험한 사업이 아닌, 멀리 보는 투자로 이용하고 있다.
당연히 기존 자본주의 체제였다면 불가능했을 행위였지만, 그렇기에 세운 왕정이다.
사익을 우선하고 제 배를 배불리 하던 녀석들을 숙청했다.
지역의 마약왕이니, 카르텔이니 하던 것들을 반항이 무색하게 정리하고 나니 어느정도 이름이 알려졌다.
아이들이 굶지 않게 배급을 늘렸다.
보육시설을 확충하고 여러 건물을 세웠다.
‘본래였다면, 불가능했지.’
길게는 십수, 짧게는 몇 년을 두고 보는 도시 계획을 몇 주만에 성취해냈다.
나와 현자의 마법 덕분이었다.
내가 2년간 죽어라 벌어온 마석을 사용한 덕분이기도 했고.
하지만 아까 말했듯 플라워는 본디 범죄 세력이었고, 음지의 사업을 그대로 받아들였던지라 간부들 역시 이에 뿌리 깊게 관여한 녀석들이 많았다.
내 앞에선 고개를 숙일지라도.
뒤에서는 아직 남아있는 어두운 시장을 쥐락펴락 하고 있다는 것.
“한 번에 바꿀 순 없어. 아주 천천히 바꿔나가야지.”
결과적으로 내 적은 많아졌다.
뼈대를 완전히 깨부수었으니 홍연이 유지했던 여덟 번째 잎새는 조각조각 나뉘어졌고 그나마 나에게 충성한 녀석들만이 내 곁에 남았다.
구슬과 홍연, 그리고 웬 노인네 하나.
어찌저찌 무력으로 장악을 했지만, 여전히 불안점은 많다.
나를 향한 암살 계획이 무수했던 것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언제 나서게요?”
옆에 앉아있던 구슬이 깡충깡충, 바니걸 차림으로 물어왔다.
별 건 아니고 여기가 노예를 파는 장이다.
그간 나한테 해온 것도 있고, 벌 삼아 저 옷을 입게 시켰다.
“…….”
구슬을 향해 모이는 음험한 시선들. 구슬은 나에게 눈치를 주며 슬그머니 은 쟁반으로 엉덩이를 가렸다.
이곳. 노예 시장.
돈 좀 있다 하는 졸부들이 모두 한 되 모여 다음 노예를 기다리고 있었다.
“캬. 보이냐. 구슬아? 내가 그렇게 잡았는대 아직도 있다.”
“…소리 좀 죽여요.”
아무리 시해하려 해도, 할 수 없을 거고.
아무리 내 눈을 피하려해도 결국엔 내 손에 들어오게 될 거다.
‘니들이 원체 해먹었어야지.’
인간의 평등을 추구한다는 새끼들이 이러고 있으면 과연 누가 감화되어줄까.
사실 누구보다 인간이나 목인들을 경시하는 놈들이다.
그걸 3년간 충분히 배웠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는 달리 나는 외지인이 아니었다.
-드르륵.
저 멀리서 금 치장이 된 의자가 움직이며 한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타겟 중 하나, 이름은 중국어라 잘 기억이 안나는데….
“탄 웨이에요. 그리고 저 옆에는 보디가드.”
보디가드는 보지도 않았다.
탄 웨이가 되었든, 그 옆의 보디가드든, 지금 당장 조져야할 놈인 건 변하지 않는다.
나는 손을 풀며 때를 기다렸다.
마침 시작되는 장.
첫 번째 노예가 무대 위로 올라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