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9화 > 수염을 깎다, 여중생을 줍다 (7)
대한민국 헌터 협회 협회장, 한별.
서울에 위치한 헌터 협회의 한국지부는 협회장의 권한과 권위를 상징하듯 그 어떤 건물보다도 높게 솟아있었다.
그 가장 상층부.
접근 권한이 허락된 극히 일부의 헌터들만이 들어올 수 있다는 장소.
협회장실.
그녀 이름이 쓰인 명패가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넓디넓은 회장실에 별이 앉아있었다.
3년전 부상을 입어 협회장직을 수행하지 못하는 무궁 대신 올라온 별이.
거성이 쓰러져 대한민국의 위상이 크게 떨어졌지만, 별은 충분히 제 역할을 해냈고 세계적인 평화에 기여하며 무수한 사람들을 구원했다.
“우효~”
그런 별이 지금,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얼굴로 노트북을 노려보고 있었다.
매우 중요한 국면이었다.
-6번마 단풍 연라라…! 1등을 제칩니다!
“오케이…. 가자가자가자!”
최근 유행하는 나무 경마 게임. 목딸.
-자 이대로 굳히나요!
두 손을 싹싹 비비며 기도하던 별이 만세를 외쳤다.
“아자~!”
양 주먹을 불끈 쥐고.
승리를 손에 넣었다.
타국의 외교나 세계수와의 담판보다 눈앞의 게임이 소중한 그녀다.
별은 다리를 꼰 채 흥겨운 노래를 부르며 마우스를 클릭했다.
-딸깍, 딸깍.
다른 한 계정은 전원을 껐다 켰다, 열심히 캐릭터 뽑기를 하는 중. 리세마라라고 불리우는 딱히 알 필요 없는 뽑기 게임의 과정이다.
별은 동시에 켜놓은 같은 게임을 번갈아 보며 노래를 불렀다.
“즈큥 즈큥~ 하시리다시~ 큐큥!”
서울 강남에 우뚝 솟은 협회장실에서 애니 노래를 부르는 인생이란….
-덜컥!
끝내준다고 생각하려는 찰나 문이 열렸다.
“히에에엑!!!”
별이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그녀의 손이 노트북을 향해 뻗어져 나갔다.
우선 노트북 뚜껑을 닫아 강제로 전원을 끈다.
좋아하는 캐릭터의 가슴을 본 딴 마우스 패드를 기밀 서류 보관함에 집어넣고.
씹덕 굿즈들을 모조리 자신의 책상 안으로 집어넣었다.
초인적이고, 재빠르다. S급 중에서도 거의 탑 급.
한계에 다다른 속도. 문이 열리는 짧은 순간 주변이 한번에 싹 정리가 되었다.
얼마나 놀랐으면 힘 조절에 실패해 노트북에서 지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세요?”
목소리를 소녀처럼 깔며 묻는다.
좋아, 자연스러웠다.
문앞에는 이세영이 서 있었다.
“뭐하냐 너.”
“아…….”
터져나오는 진이 빠진 탄식.
별은 울먹거리는 눈으로 세영을 탓하듯 노려보았다.
세영은 그러거나 말거나, 협회장실에 들어오면서 복도에서 들린 노랫소리에 대해 물었다.
“너 아직도 그 씹덕 노래 들어?”
“그래서 뭐……왜 온건데.”
“삐졌네.”
“안 삐졌거등. 리세마라 잘 된 계정이었는데 날아간 게 아쉬운 거거등?”
“리세… 뭐?”
세영은 털이 달린 코트를 벗어 소파에 두고 그 자리에 편하게 앉았다.
별은 애꿎은 고장난 노트북 전원을 연달아 누르며 침울음을 흘렸다.
“리세마라…. 좋은 거 나올 때까지 계정 돌린다고.”
“뭐어? 돈도 많은 게. 그냥 질러.”
울컥.
“리세마라도… 컨텐츠란 말이야….”
“뭐래.”
“후우… 세영아. 초회에 풀돌해서 가져가는게 가장 중요하거든? 근데 세영이 네가-”
“나 그런거 잘 몰라.”
왈칵.
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야 설마 그런 걸로….”
“안 울어.”
뽑기가 잘 된 계정을 연동하지도 않고 버렸다는 현실에 억울함과 분노가 치민 별이 팔로 눈을 비벼 닦았다.
“시헌이는 이런 거 이해해줬을 텐데….”
“걔도 그런 건 잘 모를 걸.”
“네가 시헌이에 대해 뭘 알아!!!!”
극대노 하는 별을 보며 세영은 생각했다.
요즘 좀 피곤한가?
“그래서, 왜 왔어?”
“던전 공략 계획이랑, 이것저것 설명해주러.”
씹덕이든 애니든 게임이든 어디까지나 취미에 불과하고 본론은 지금부터다.
가짜 눈물을 쓱쓱 닦아낸 별은 협회장 자리에 앉아 기지개를 폈다.
“으으읏! 후…. 걔는 어떻게 됐어?”
뒷세력의 까마귀와 협회의 별빛.
거거했던 무궁에 비하면 빛이 바랜 면이 없지는 않으나, 별이든 세영이든 결코 무시할만한 인물이 아니다.
“데려왔지.”
별의 물음에 세영이 문밖에 턱짓을 하며 소리냈다.
“들어와.”
-끼익!
문이 열리면서 들어온 로브를 입은 금발의 여성.
가슴이 흔들리지 않도록 커다란 갑주를 입은 게 눈에 띄었다.
“사냥꾼.”
현자의 도움으로 정보를 말소하고 새 신분을 얻어 활동 중인, 현 시대에서 가장 명망 있는 헌터.
인식 저해가 걸린 마도구를 몸에서 떨어뜨린 그녀는 로브를 벗어 얼굴을 보였다.
-꾸벅.
무표정한 얼굴로 인사 겸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가슴 개 크다.”
아무리 사슬에 강철을 덧댄 갑주로 고정했다고는 하나, 저 크기면 갑주도 함께 출렁일 것 같은 느낌이다.
별의 솔직한 말에 세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할 말이 있어요.”
사냥꾼이 입을 열자 나직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세영과 별은 곧 그녀를 바라보았고.
이윽고 흘러나온 말에….
“응.”
두 여인이 침묵했다.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네.”
세영의 말에 사냥꾼이 대답했다.
얼마나 기다리고, 이를 위해 세월을 바쳤을까.
“목령왕이 남긴 탑에는, 신기에 가까운 마도구가 있다고 들었어요.”
사냥꾼은 덤덤히 설명했다.
칠(七) 탑.
목령왕이 남긴 일곱 개의 탑이자 무수한 힘이 깃들어있다고 추정되는 탑.
과거의 시절에는.
현시대의 전설. 천마나 무궁 그 이상의 것이 날뛰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무력으로 주변을 휩쓸었던 이름모를 세계수.
순리를 되돌리거나 멈추는 게 가능했던 시간의 세계수.
그리고 그 모두를 죽음으로 내몬 목령왕까지.
“잘만 하면… 가능성이 있다는 거구나.”
세영의 말에 사냥꾼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은 그런 세영을 보며 안타까운 미소를 지었다.
“문제는, 거길 어떻게 돌파할 거냐는 거지. 경지에 오른 사람도 죽을 수 있어. 그 탑이란 곳은.”
“…….”
“세계수들은 수틀리면 다른 세계선으로 도망칠 생각까지 하고 있어. 3년 전에 마나가 아예 없는 세계를 찾았다던데.”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넘어가며 별이 세영에게 물었다.
“아 맞아. 세 번째 왕이랑은 어땠어?”
세 번째 왕.
목령왕의 후계였던 이시헌이 죽으면서 나타났다 추정되는 세 번째 이름없는 왕.
이세영은 입술을 닫으며 한참을 고민했다.
“그게….”
“응? 무슨일인데 그래?”
“…….”
나이를 꽤 먹은 중년.
그 실력에서 비롯되는 위압감은 무궁에게서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깡이 좋은 세영조차 압력에 짓눌려 죽음을 각오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가운데. 그녀는 그에게서 묘한 괴리감을 느꼈었다.
그 이유를 몰라서 속이 터질 것 같지만 생각해봐야 탈만 난다.
“파토났어 그냥. 뭐가 문제였는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라고.”
“내가 볼 땐 왕한테 안 당한 게 용한 듯. 왕 능력이 그거라며?”
“……야.”
“앗, 미안.”
농담이야 치지만. 어쨌거나 경험인수 1의 여성들이다.
“그럼 일단 다음 던전 공략부터 만들어가볼까…. 앗, 잠시만?”
별이 손목시계를 보더니 급하게 리모콘을 쥐었다.
“갑자기 TV는 왜?”
“우리 시바쨩~ 선발전 봐야징~”
“아…. 벌써 날이 그렇게 됐어?”
TV를 켜자 마침 음악이 울리고 있었다.
최근 아카데미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이고 있는 시바.
세영이나 별의 도움도 있었지만, 진달래가 애 하나는 야무지게 키웠다.
화면에 나온 국목과 바로 뒤의 시바의 모습에 별이 꺅꺅 소리를 질러댔다.
“……?”
아무 것도 모르는 사냥꾼은 그저 고개를 갸웃였다.
“올해는 문제 없어야 할 텐데.”
시작되는 선발전을 보며 별이 중얼거렸다.
3년 전 개최된 선발전 이후 처음이다.
3년 전에는 플라워의 습격 떄문에 국목들도 많이 죽고 아주 개판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괜찮다.
이번에는 그때를 대비해 정말 탄탄히 준비해놨으니까.
설령 플라워… 아니. 최근에 대두된 여덟 번째 잎새가 오더라도 문제없을 것이었다.
“아, 현자다.”
“그 예전 프랑스 국목?”
“나 저 사람 귀여워서 좋아해. 개냥이 같아.”
무사히 개최된 숲지기 선발전.
그 끝이 정말 문제가 없을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
우리 집에 강아지가 늘었다.
“도원~!”
내 팔에 찰싹 달라붙어선 온갖 애정 공세를 하는 홍연.
얼마나 적극적이면 얼굴에 침이 마르질 않는다.
어디까지나 잠자리에 한해서고, 회의를 할 때나 평소에는 과묵하고 열심히 일하는 직장 동료같은 느낌이다만.
“스읍, 하아….”
“왜 자꾸 숨을 들이쉬어?”
“옛말의 내가요상술이란 과연 이런 걸 말하는 것이로구나.”
“뭐?”
“내공으로 내상을 치료하는 것을 말하니라.”
어이가 없다.
나 좋다고 달라붙으니 떼어놓을 수도 없고.
무엇보다 평소에 참고 있다는 걸 티를 팍팍내는지라 모를 수가 없다.
“주말에 한 번 있는 동침….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볼에 입맞춤 한 번만… 해주면 안되겠느냐?”
“그래그래.”
-쪽.
“…후흐… 흐후후…후.”
이상하게 웃으니 무서울 지경이다.
홍연이 내게서 안정을 얻어간다는 건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맥박이라거나…. 정신 상태라거나. 내가 옆에 있으면 크게 안정된다고.
졸지에 도원 테라피가 되고 말았다.
“절대 내 품을 떠나지 말아주거라.”
새벽 감성에 촉촉이 젖은 말. 녹음기에 넣어 나중에 들려주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까 궁금해진다.
손을 들어 홍연의 어깨를 감쌌다.
품에 쏙 들어오니 그 따땃한 열기가 전해져온다.
“내일 아침은 핫케이크로 할까.”
“…핫케이크?”
“메이플 시럽 뿌리면 먹을만해진다던데.”
“…….”
내 말의 의미를 깨달았을까.
베개를 살포시 주워든 홍연은 그것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섹스를 할 때, 표정을 보이는 게 많이 부끄러운 모양이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항상 이렇다.
“…상냥하게. 부탁하마.”
손까지 빨개진 홍연은 슬며시 가슴을 내게로 내밀었다.
아침까지 괴롭혔다.
*****
“왕이시여.”
“어.”
나이를 지긋이 먹은 한 노인이 구부정한 자세로 내게 말했다.
“슬슬 옥체를 움직이실 때가 된 듯 합니다.”
트 마투아 엔가헤로.
세 번째 목령왕의 신하다.
이름 없는 나무인 구슬을 거두고 키웠으며, 홍연을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노인.
주름진 손으로 턱수염을 쓸어내린 그가 나를 종용했다.
“숲지기 선발전이 시작됐습니다.”
여덟 번째 잎새의 세력권은 못 쓰는 땅이 많다.
인간의 힘으로는 대지를 복구시키기 힘들고, 내 말을 잘 들어주는 나무들이 필요했다.
‘그런데.’
세 번째 신하라고 한다면,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어디에 있는 거지?
간부라 부를만한 녀석들은 전부 숙청하거나 내 아래로 들인 지 오래다.
‘흠.’
이미 죽었던가, 도망쳤던가.
고개를 숙인 노인을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생각은 있다.”
“….”
“성장의 세계수.”
요람의 어머니.
그녀를 앗아와야 한다.
요람에는 무수한 씨앗이 있다. 하나하나가 대지에 충분한 에너지를 줄 도구들이다.
그리고 그것을 성장시키는데에는 성장의 세계수의 힘이 필연적이다.
내가 힘을 앗아오든, 힘을 가진 그녀를 앗아오든 둘 중 하나를 해내야만 한다.
‘겸사겸사.’
같이 데려올 애들도 몇 있었고.
물론 그 전에 던전 하나를 더 공략해야했다.
돈벌이 겸, 마석벌이 겸.
우리 깜둥이의 첫 무대로 삼기 알맞은 곳을 눈에 골라놨다.
“하던대로 움직여라. 내가 알아서 하지.”
“예. 망극하옵니다.”
고개 숙인 노인을 손을 흔들어 내보내고, 나는 왕좌에 앉아 잠시 생각했다.
3년 전에는 외습에서 지켰던 내가. 이번에는 습격을 하는 입장이 되다니.
“하.”
생각할수록 우스운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