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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를 따먹다-431화 (431/657)

< 431화 > 흑단나무 (2)

던전은 불가해한 현상을 동반하며, 이질적인 존재와 접할 수도, 때론 아득히 먼 경계에 달해 탐험가가 미치광이가 될 수도 있다.

던전이 헌터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이유는 이런 식으로 복잡한 과제를 주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검사와 성직자를 분리시킨다던가.

싸움이 제대로 이행될 수 없도록 항상 무슨 수를 써온다.

세계에서 분리된 차원선이기 때문에, 저항할 방법도 거의 없다.

“쩝.”

대형, 혹은 최근에 일어선 일곱 개의 탑이라면 모를까. 나와 깜둥이가 찾아온 이런 중형 던전은 이런 불편한 구조가 많지 않다.

요컨대 운이 좋지 않았다.

‘설마하던 전이 함정일 줄이야.’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직접 찾으러 다니는 수밖에 없다.

‘이봐.’

자리에 서서 눈을 감는다.

숨을 고르고 단전에서 마력을 끌어올려 언제라도 움직일 수 있도록 컨디션을 끌어올렸다.

“스읍, 하아.”

숨을 고르자 눈앞이 하얗게 물들며 서있는 장소가 바뀌었다.

심상 세계.

거대한 바위 뒤에 한 소녀가 숨어 있었다.

【 ……. 】

새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깜둥이보다 약간 더 성숙한 체형. 성격은 그 유명한 3대 지랄견보다 더럽다.

‘대답.’

【 ……뭐. 】

이 녀석을 길들이려고 얼마나 힘을 썼는지.

내 머릿속에서 이 왕의 ‘인자’라는 녀석은 사람이 아니라 개가 된지 오래였다.

남의 몸에 기생하면서 날 더러 나가라고 하는 요상한 년.

몇 달을 주기로 주도권 싸움을 걸어온다.

‘내놔야겠지? 힘.’

【 내가 왜!!!! 】

분개한 인자가 땅을 박차고 대포처럼 몸을 부딪혀 왔다.

펑! 소리와 함께 다가오는 신체. 어렵지 않게 받아냈다.

처음이야 힘겨루기가 이루어졌지, 이제는 주도권이 완전히 내 쪽으로 넘어온 지 오래다.

【 읏, 으욱, 으그읏! 】

떼를 쓰듯이 파닥거리며 나를 밀쳐내려는 녀석.

양 어깨를 결박한 채 품에 안고 쓰다듬었다.

“진정해 인마. 누가 보면 엄한 짓 당하는 줄 알겠네.”

【 했잖아!! 저번에- 웁! 】

“어허 스읍.”

파닥파닥파닥파닥!

활어처럼 튕기는 몸을 꽉 잡고 기다리니, 슬슬 힘이 빠진 인자가 푹 퍼졌다.

발꿈치까지 닿을 정도로 긴 검은색 머리.

키는 작고 얼굴은 어린데 몸은 여러모로 성숙하다.

생긴 것도 기가 세서,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떽떽 소리치는데. 한 번 해주면 금세 조용해진다.

“이번엔 또 뭐가 문젠데.”

【 ……왕이 왕 같지 않았다. 】

“뭐, 깜둥이나 얘들 다룬거?”

인자가 말하는 왕의 방침은 이러하다.

언제나 엄격하고, 조용하며 매사에 진지해야한다.

그리고 품어야 할 여성은 발밑에 두어야 한다던가.

내 행동이 이상적인 왕에서 멀어질수록 ‘인자’의 폭주는 심해진다.

당연히 왕관을 통한 힘도 빌려주지 않는다.

【 왕은…. 】

“야, 내가 말했잖냐. 어? 네가 걱정할만한 일은 안 일어난다니까.”

내가 가진 힘은 두 가지로 분류된다.

왕과, 천마.

경지를 넘어 ‘가시’를 꺼낼 수 있게 된 것이 천마의 힘이면, 인자를 통해 왕관을 쓰는 것이 왕의 힘이다.

동시에 사용하기에는 내 정신이 버티질 못하고. 기감의 폭주에 한해서는 왕관의 힘을 쓰는 편이 낫다.

“오케이, 그럼 동물원 콜?”

【 윽, 왕의 인자를 감히 그런 걸로 꼬시려 하냐! 내가 바라는 건 어디까지나… 왕으로서의 올바른…. 】

“츄러스.”

인자의 엉덩이가 씰룩거린다.

감각을 이을 수 있어서 내가 먹는 게 곧 이 녀석이 먹는 거다.

처음에는 기계처럼 왕의 본분만을 강조하던 녀석이었는데. 뭐라고 해야하나. 3년 넘게 함께 지내며 취향이 바뀌었다.

어느정도 사람 냄새가 나는 녀석으로.

【 츄러스 세개. 】

“두개. 너무 달아.”

【 ………동물원은? 】

“딱 30분만. 요즘 할 일 많거든.”

【 …알았어. 】

설득하기 쉬운 년이다.

왕의 인자의 피부가 녹아내리더니, 내 몸에 흡수됨과 동시에 그녀의 안에서 왕관이 튀어 올랐다.

【 이번만이야…. 다음엔 얄짤없어. 자기가 왕이라고 생각하고…! 】

지겹지도 않나 싶지만, 주도권을 뺏어올 때 왕 같은 역할극을 해주면 금세 순종적으로 군다.

최근 다시 반항이 많아지니 한 번쯤 버릇을 잡아줘야 할지도.

-웅웅!

심상세계에서 빠져나오며 나는 눈을 떴다.

온몸을 얇게 뒤덮은 무색의 일렁임이 공간을 비틀었다.

1차 동화.

던전의 모든 공간이 느껴진다.

한 발자국 내딛자 퍼져나가는 파동. 머리 위의 왕관이 한 차례 공명한다.

마음만 먹으면 반파정도는 시킬 수 있지만. 일단 내버려둘까.

‘찾았다.’

깜둥이의 위치를 확인했다.

-키릭?

발을 움직이려고 하자 들려오는 마물의 목소리들.

감지에 걸린 놈들이 하나같이 꽁무니를 빼며 내 반대편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지성과는 무관한 본능이 내린 선택.

아무렴 어떤가. 나만 편해진 셈이다.

의식하지 않아도 공기 중에 떠다니는 마력들이 몸에 흡수된다.

나는 앞으로 움직였다.

*****

시바는 뾰로통한 얼굴로 식판을 바라보았다.

“…….”

“시, 시바야.”

주변 친구들이 눈치를 보고, 싸늘한 공기가 자리에 저몄다.

숲지기 선발전 한국 생도들을 이송하는 여객기 안.

기내식에 떠오른 당당한 한국인의 밥상은 비빔밥.

“삐…럴수가.”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지만 어찌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비빔밥을 줄 수가 있을까.

갈색의 고사리와 녹색의 시금치, 붉은 고추장을 바라보는 시바의 얼굴에 암담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저, 저저저 불쌍한 새싹들 좀 봐라.

한국 여객기라고 비빔밥이라니, 안일하고 속 편한 생각!

이거 완전 공무원들 직무유기 아닌가.

시바는 비빔밥이 싫었다. 차라리 칼에 맞는 게 나을 정도로.

“…삐익. 괜찮아. 그냥 채소랑 밥이야. 먹으면 되는 거잖아 먹으면.”

울컥한 마음에 시바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볼은 터질 것처럼 커졌고, 손과 발이 막 떨렸다.

아! 이 비통한 목생이여. 어찌 나에게 비빔밥을 선사해주셨나이까.

수저를 쥔 시바가 비빔밥을 한술 떠 입에 가져다대었다.

달달달달 떨리는 손.

그 와중에도 아련맞게 스쳐 지나가는 광경은, 아마도 자신의 아버지일 것이다.

편식을 고치겠다며 입에 비빔밥을 넣어주던 아빠.

“삐에엥.”

“시, 시바야?”

그래도 시바는 비빔밥이 싫었다.

눈물 젖은 식사였다.

*****

환청이 들린다.

칼날이 달린 쇠붙이가 돌아가는 소리. 굳은살이 덕지덕지 낀 손길과, 씨앗.

-사람의 몸에 나무를 심다니. 분명 불가능할 겁니다.

-글쎄, 난 된다고 본다. 적성자를 찾았거든. 오빠 쪽은 쓸모없지만, 이쪽은……. 재능부터가 남달라서.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가족들.

자그마한 흰색의 실험실에서 반평생을 지내왔다.

-세계수가 쓰는 것 중 상태창이라는 게 있거든. 거기에 잠재력이 있는데. 보통 수치 6만 넘어도 대단하단 말이야?

-네, 뭐.

-그런데 얘는 어디 보자… 10을 넘어서고 있어. 우리 방식으로는 계산이 안 돼.

밖이 보고싶다.

언젠간 저 창 밖을 뛰노느라 맹세했다.

싸르륵 흐르는 밀밭을 흙발로 헤엄쳐, 저 앞에는 언젠가 소중했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기다리는….

그런 미래.

지끈!

“…!”

두통에 눈가를 찌푸린 소녀는 양 팔을 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빛 한 점 없는 동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두 손으로 주변을 더듬었다.

손아귀에 걸리는 딱딱한 나무 재질의 원목. 단검이다. 목숨처럼 그 칼을 꼬나쥐었다.

-두근, 두근.

심장이 떨려왔다.

폐소된 공간이 목젖을 후려쳤다.

벽이 어딘지도 모르는 상황. 언제 마물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소녀는 양 손에 검을 꼬나쥐었다.

“…아저…씨?”

처음으로 불러본 호명에도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깨달았다.

던전에 홀로, 불빛도 없이 남겨졌다고.

-크르륵!

벽 너머에서 들려온 마물의 울음소리가 그녀의 어깨를 움츠리게 했다.

소녀는 떨리는 손으로 주변 배낭을 찾았다.

꽤 멀리 있었지만 가까스로 찾았고, 그 안에서 손전등 하나를 꺼냈다.

손 떨림 탓에 손전등을 세 번 정도 떨어뜨린 뒤, 겨우 들어서 불을 켰다.

-딸깍.

갇힌 곳은 벽돌로 사방이 막힌 방.

다행스럽게도 위협이 되는 마물은 없었다.

벽에 등을 기댄 소녀는 몸을 움츠리고 무릎을 감싸 안았다.

손에 꽉 쥔 단검을 들고 숨을 골랐다.

-파르르르.

가만히 있었다.

기계처럼 손전등을 움직이며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검의 손잡이를 쥔 손에는 단 일 초라도 손에 힘이 풀린 적이 없었고, 공포에 떨었다고는 하나 방심하지 않았다.

소녀는 기다렸다.

-드득!

그리고 빛을 보았다.

-쾅!

벽이 바스라지며 그 균열 틈새로 빛무리가 들어왔다.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밝은 구는 마법일까.

소녀를 찾아온 남성은 말이 없었지만, 형언할 수 없는 압력을 품고 있었다.

마음이 안정되려던 찰나 남자의 모습을 보고 다시 굳어버릴 정도로.

왕관?

소녀의 눈에 가시관이 스쳤다.

【 너, 미워. 】

꿈틀.

방금 들린 여자애의 목소리는 누구의 것일까.

생각이 미치기도 전에 남자의 몸을 두르고 있던 무형의 마력이 벗겨져 나갔다.

*****

만약 나와 깜둥이의 전이 시간에 차이가 있지 않다면, 내가 깜둥이를 찾기까지 걸린 시간은 1분 남짓이다.

다만 이 공간만은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지. 아니면 깜둥이가 겁이 많은 건지.

깜둥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 녀석을 찾아낸 건 좋지만 문제가 없진 않았다.

시간이 지나야 다음 층이 풀리는 패턴.

적어도 일주일은 여기서 지내야만 한다는 소리다.

‘흠.’

마음만 먹으면 여기서 나가는 건 일도 아니겠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스승 제자간의 정이라도 쌓아볼까.

자리에 앉은 나는 무릎을 꿇은 깜둥이를 바라보았다.

-사각.

딱딱한 복숭아를 하나 깎으면서 물었다.

“할만해?”

“…….”

고개를 끄덕여온다.

“그럼 다행이고.”

깜둥이는 재능이 있다.

나와는 달리 단전에 뭉쳐진 마력의 양부터가 달라서, 약간의 훈련으로도 빠르게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무작정 다량의 마력으로 부딪히는 부류. 구슬이나 산수유가 여기에 속한다.

바른길로 잘 이끌어준다면 훌륭한 인재가 될 듯하다.

“잘했어.”

반으로 자른 복숭아의 씨를 빼고 아이의 손에 들려주었다.

머리를 좀 쓰다듬어주자, 오늘은 웬일로 그다지 반항하지 않고 받아주었다.

‘다음 던전은 어디로 가볼까.’

불확실한 함정이 많은 던전은 실전 경험을 키우기 걸맞다.

실력도 쑥쑥 늘고, 위기에 대처하는 방식도 다양해진다.

나는 성장 시간이 짧긴 했는데. 아무튼.

-사각.

오물오물 복숭아를 주워먹던 녀석을 보니 피식 웃음이 튀어나왔다.

“넌 딱복이 좋냐, 물복이 좋냐?”

“……?”

문득 떠올라서 해본 말.

“처음… 먹어 봐요….”

아.

괜히 분위기만 싸해졌다.

“미안하다.”

도리도리 고개를 흔드는 깜둥이.

깜둥이, 깜둥이 하니 슬슬 이름이 알고 싶기도 하다.

조금 더 뜸을 들인 나는 녀석에게 물었다.

“이름 물어봐도 되냐?”

“…….”

“솔직히 스승이 제자 이름도 모르는 게 말이 되냐, 어?”

아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흑단. 이요.”

드디어 자신의 이름을 입에 담아주었다.

흑단.

내 제자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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