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7화 > 위키 클리포트 (3)
위키는 해복과 동시에 세상의 소명을 짊어진 아이이다.
가장 현명한 여성에게서 태어난 아이.
하지만 그렇기에 위키는 어머니에게서 세상에서 가장 혹독한 수업을 들어야만 했다.
‘내가 왜 이런 걸 배워야 해?’
위키가 마주한 학문들은 그다지 그녀에게 흥미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선악은 단지 진화의 과정일 뿐, 무엇이 옳고 그릇된 것인지는 세월마다 다르게 여겨지기 마련이었으니까.
위키는 자기가 이를 판단할 만큼 커다란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녀에게 도덕은 넓은 의미의 무기이며, 명분이자, 상대를 깎아내리기 좋은 사료일 뿐이다. 미덕이나 미추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상의 어두운 면을 알고 당면해온 문제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건 잘못된 일이 아니다.
세상의 밝은 면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건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 수는 있겠으나.
-알았죠? 위키.
적어도,
-위키가 해결할 문제에요. 언젠가 조금 더 큰다면.
위키를 둘러싼 세상은 그리 밝진 않았다.
-위키뿐이에요.
갓난아이 시절의 위키에게 있어 세상이란 현자의 흰 비단의 치마품이었으니.
어쨌든.
어린 위키에겐 의무가 있었다.
하층민들의 희망이나, 미래 같은 것들이 고작 이런 어린애에게 걸려 있다고 말하면 믿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놀랍게도 위키는 그럴만한 잠재력과 지능이 있었다. 어떻게?
[(전) 현자의 아이.]
[천마, 목령왕의 딸.]
당장 부모부터가 세계를 좌지우지했던 양반들이니까.
이것 참 부담감이 없을 수가 없는 환경이었다.
하지만 위키는 상관없었다. 이제와서 그런 거에 쩔쩔매는 것도 이상했고.
강도 높은 현자의 교육이 멘탈을 단단하게 해준 덕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자연스레.
위키는 어머니가 내린 소명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클리포트라는 세계수의 탄생을 위해.
위키는 조금씩 기계적으로, 어머니의 지식을 학습하기 시작했다.
위키 클리포트라는 3살배기 아이의 탄생이었다.
*****
“위키, 알고 있죠? 언제나 머리에 되새기고 있어야 해요. 위키가 가진 힘은 많은 걸 할 수 있고, 또 많은 사람들을 괴롭게 만들 수 있어요. 지식이 있는 사람에게 의무는 없지만… 많은 사람을 구원할 순 있죠.”
“알고 있어요.”
위키가 조금씩 운명을 받아들이고, 어머니의 교육도 어느 정도 적응되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다른 사람과 마주할 수 있었다.
갓난아이 시절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아빠.
그때까지만 해도 엄마의 입으로 전해 들은 것만이 아빠에 대한 모든 정보였었다.
“이 아이는 뭐야.”
위키는 처음 자신을 바라보며 엄마에게 따지듯 묻던 아빠를 무서워 했다.
몸은 던전을 무리하게 파헤친 탓에 죽기 직전까지 몰린 상태였었고, 등에는 그 던전에서 구해온 것으로 보이는 마석이 잔뜩 담긴 배낭이 매여 있었으므로.
척 봐도 잔인한 광경이었으니 당연한 셈이었다.
“뭐? 왜 말 안했는데.”
이시헌의 얼굴은 차가워 감정 하나 담기지 않았었다.
아빠가 엄마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까, 어린 위키마저 걱정이 될 정도였지만-
“그러니까. 얘가 내 애라고?”
-이윽고 이시헌이 사실을 전해 들었을 때.
그의 얼굴은 어딘가 복잡한 얼굴이 되더니, 위키가 보지 못하도록 한숨을 쉰 뒤 무릎을 구부리며 말했다.
“위키?”
“…….”
턱에 맺힌 피가 뚝뚝 떨어지는 꼴로.
감정이란 걸 처음 자각한 로봇이 어색하게 자신의 표정을 바꾸는 것처럼, 삐걱거리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위키의 눈에 상냥하다고 생각되는 요상한 얼굴을 하며.
“미안하다.”
이시헌이라는 남자는, 자신의 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아이에게 손을 건넸다.
경황이 없을 만도 하건만, 억지로 지은 미소에는 제 딸을 향한 어렴풋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위키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원래, 내가 같이 있어 줬어야 했는데. 이제 그걸 알았네.”
“…아녜요.”
어머니가 멋대로 숨긴 탓에 억울할 법도 한 상황이었는데. 왜 자기를 탓할까.
위키는 사람의 성격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빠라 불러야 할 저 사람에 대한 성격도 대충 알 것 같았다.
무엇이든 자기에게서 문제점을 찾으려 하는 사람, 그 탓에 갈등 해결까지 멀리 돌아가게 되는 타입.
손을 펼쳐 껴안으려다, 피칠갑이 된 상태라는 걸 깨닫곤 머뭇거리는 모습에서 그걸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표정이….
무감정했던 방금과는 다르게 최대한 여러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 인상에 깊게 남았다.
천마에, 목령왕.
위키는 걱정했다.
이 사람은 나에게 무엇을 가르칠까.
사람에 대한 인상은 둘째 치고, 위키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은 그것이었다.
지금의 삶이 일반적인 부녀, 모녀지간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으니까.
“오늘은 자고 가요. 무리 안 해도 될 텐데.”
“빨리 해야지…. 하루가 급해. 마석이 충당되면 바로 플라워에 들어갈 거야.”
어딘가 쫓기는 듯한 표정.
배낭을 내려놓는 손이 파르르 경련하고 있다.
위키는 그 모습이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엄마에게는 항상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을 들었으니까.
항상 고압적이고 차가운 사람으로만 연상했던 탓이다.
저렇게 필사적으로 무언가에 매달리는 모습일 줄이야.
첫인상을 제외하면 볼수록 왜인지 측은한 마음까지 들었다.
크게 마음고생하고 있구나 정도는 척 봐도 알 수 있을 정도.
위키는 냉혈한인 어머니의 걱정하는 듯한 눈도 난생 처음 보았다.
하지만 어린 아이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걱정되는 건 이제 배워야할 것들.
아빠는 무엇을 가르칠까. 궁금증을 넘어 두려움까지 느껴졌다.
맥락상, 위키가 배워야할 건 전투적인 부분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이의 예상은 단번에 깨어졌다.
아빠가 돌아오고 맞이한 취침 시간.
새근새근 잠에 들려 베개를 꼭 껴안으니, 문이 열렸다.
“위키?”
“…아빠?”
씻었는지 온 몸이 멀끔해져서 돌아온 아빠가 위키의 침실로 숨어들었다.
“쉿.”
검지를 슬며시 올린 아빠는 어색하게 웃으며 들어왔고. 어린 위키는 그만 눈이 동그래졌다.
“무슨 일이에요?”
“이야기나 잠깐 할까 해서. 엄마한텐 비밀이야.”
들키면 혼나니까.
뒷말을 생략한 아빠를 보며, 위키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첫만남이기도 했고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 날 위키는 이시헌에게 가지고 있던 편견들을 싹 떨쳐낼 수밖에 없었다.
“뭘 배웠어?”
상냥하게 물어오니, 대답했고.
“애썼네.”
격려하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안아줬다.
도중부터는 위키가 오히려 어리광을 부리기까지 했다.
사실 위키는 엄마에게 그다지 많은 사랑을 받지 못했으니까.
설마 그럴 리가, 라며 이시헌은 조소했지만.
위키에게 칭찬이란 꽤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단어였었다.
“이, 이거 배웠어요…”
손 위에 자그마한 반딧불이를 만들어내니 깜짝 놀란 얼굴을 한 이시헌이 위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하네. 정말 예쁜 걸? 하루종일 연습한 거야?”
“…네!”
위키는 기뻤다.
“힘들진 않았어? 많이 힘들었을 텐데.”
“그정도까진… 아니었어요.”
“노력했네.”
기쁜데 왜인지 슬펐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쳐 오르면서 품에 안기고 싶어져, 그만 위키는 아빠에게 몸을 맡기고 말았다.
“아빠 왜 이제 왔어요…?”
무릎에 턱을 기대고 아빠를 올려다 본 위키가 물었다.
정말 그런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말이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
우습다고 생각했던 말이다.
하지만 위키의 생각보다도 상냥한 달램은 그녀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따스한 불길. 빛 한 점 없지만 보이는 얼굴.
아빠라는 사람의 넓은 품에 안겨, 두 팔 가득 뿜는 애정.
사람에게서 느끼는 성취감.
거부감이 느껴졌던 것도 잠시, 위키의 마음속에는 아빠라는 사람이 크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빠. 이것도 봐요.”
“…….”
“아빠?”
“…응? 아하, 불꽃 나비네~ 이쁘다.”
자신을 보며 어딘가 애틋하게 지어보이는 표정도,
위키의 머릿속에 강하게 남았다.
그녀는 똑똑하다.
그리고 감이 좋다.
자신을 보지 않고 딴 생각을 한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손짓은 슬픔이 배어 있어,
위키는 멍하니 두 눈을 깜빡 거렸다.
‘…….’
왜 조금 마음이 불편할까.
심술이 나지만, 기분 탓일 것이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
-쮸옵, 쫍, 쫍, 쫍.
바나나 우유와 요구르트를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이 뭔지 아는가.
-쭙쭙.
바로 폭이 좁은 흰색 짧은 빨대를 이용하는 것이다.
거의 국룰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섭취 방식.
바나나 우유를 양손으로 꼭 부여잡은 위키의 입가에 수줍은 미소가 지어졌다.
시헌의 입가에도 미소가 만개했다.
“맛있어?”
-끄덕, 끄덕.
빨대를 입에서 놓지 않는 위키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반쯤 억지를 부려 아빠의 팔에 앉아 마시는 바나나 우유.
방금 막 씻어 풍기는 향기로운 바디워시 향에 위키는 기분이 좋은지 고개를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배부르게 먹진 말고, 오늘은 일찍 자야 하니까.”
“응, 아빠.”
이시헌의 눈에 꿀이 떨어진다. 그리고 덩달아 씁쓸한 감정도 깃들었다.
-툭.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
또, 그 느낌이다.
위키는 빨대에서 입을 떼자마자 제 아빠를 올려다보았다.
‘…언니 생각.’
이제는 알 수 있는 그 감정의 정체.
심술이 난 위키의 볼이 빵빵해졌다.
“나쁜 아빠.”
“어, 왜? 아빠가 무슨 잘못 했어?”
치- 혀를 내민 위키에게 시헌이 당황해 마구 달래주었지만, 이미 감정이 상해버렸다.
딸과 아들은 가장 어린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를 꼭 사랑하고 넘어간다던가.
남근기(3세~5세)의 딸 아이들이 겪는 심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 어머니를 적대시하고 아버지와 교감하려는 현상은 생각보다 잦은 편이다.
어린 아이 특유의 집착과, 심리.
위키 또한 피해갈 수 없었다.
모든 칭찬이나 사랑은 자기가 받아야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요즈음엔 어머니인 현자에게마저 좋지 않은 감정을 느낀 위키다.
똑똑한 탓에 사리분별을 잘하리라고, 어른들은 생각하겠지만 글쎄.
-쪽.
오히려 똑똑하기 때문에, 위키는 어떠한 충동을 이루기 위해 머리를 쓸 수도 있었다.
볼 뽀뽀를 한 위키가 아빠의 품을 끌어안았다.
“졸려?”
위키의 손에 있던 바나나우유를 협탁에 둔 이시헌이 침대에 누웠다.
옆에는 다른 언니가 있었지만, 위키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꾸물꾸물거리던 위키는 아빠의 팔뚝을 물고 잘근잘근 씹었다.
“왜 그래. 우리 딸.”
우리 딸이라 부르는 상냥한 어감도 마음에 들어서,
위키는 그만 이시헌을 풀어주기로 하고 기분 좋게 품에서 잠이 들었다.
-쿠울.
하지만 얼마 안 가 잠이든 이시헌이 중얼 거리는 목소리.
“시바야….”
잠이 깬 위키가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치.”
대체 어떤 수를 써야만 애정을 고스란히 받을 수 있을까.
독점욕은 아이의 특권이다.
알바는 그걸 알아보고, 위키와 시헌의 거리를 은근히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애틋함은 더 커져가는 법이다.
위키는 자신이 조사한 그 이름을 떠올렸다.
‘시바 언니.’
아빠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위키의 눈이 촉촉해졌다.
넓은 아버지의 품은 따스했고, 또 기분 좋았다.
현명하고 똑똑하다고는 해도,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 위키.
까만 머리의 꼬마는 아빠에게 언제까지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