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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를 따먹다-441화 (441/657)

< 441화 > 선전포고 (3)

【 숲지기 선발전 】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이다.

각국의 어린 실력자들을 모아 그중 최고를 뽑는 일인 만큼 그 중요도는 아주 막중한데, 시민들은 그들의 신을 지킬 인재들을 대중매체로 손쉽게 접할 수 있었다.

선발전의 참가자들이 받는 관심은 세계적인 연예인 이상.

‘숲지기’는 ‘신을 지키는 수호자’라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각 세대의 숲지기들은 그만한 인지도와 명예를 손에 넣게 된다.

그 예시로 정의의 세계수의 대리자인 안젤리카는 현재까지도 교단의 거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 성스러운 공간을 침범한다는 건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일.

몸의 대화가 먼저 이루어지긴 했지만, 내가 마로니에를 만난 이유가 바로 현자인 그녀에게 이 사실을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그래?"

새벽.

침대에서 빠져나온 우리는 잠시 이야기를 정리할 시간을 가졌다.

계획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았고. 그 덕분에 블랑쉬의 진심 어린 반응을 들을 수 있었다.

"있잖아."

테이블을 사이에 둔 채 나누는 대화.

홍차는 이미 식어 몸 하나 뎁힐 수 없었다.

마로니에는 눈앞 찻잔의 윗부분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내게 말했다.

"많은 사람이 요람을 지키고 있고, 거기서 원하는 걸 얻으려 한다는 건. 그만큼 죽여야 한다는 거잖아."

"그렇지."

"…왜 그런 일을 니가 해야만 해?"

걱정 한마디에는 왜인지 약간의 울분마저 묻어있었다.

현자의 자리에 올라서 더 넓은 세계를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내가 하려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녀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저렇게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거겠지.

나는 최대한 상냥하게 그녀를 다독였다.

"알잖아.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인 거."

"…알고 있어. 하지만 나는 그냥…. 사람들이 널 싫어하는 걸 보기 싫어."

조금씩 꺼내오는 진심.

"그리고 목령왕도 처음에는 엄청 착한 사람이었대."

내 힘의 근간인 만큼 꽤 조사를 해온 걸까.

손을 꼼지락대던 마로니에가 결심한 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전쟁이 길어질수록… 조금씩 정신이 마모되어서 점점 못된 사람이 됐나 봐."

"나도 그렇게 될 것 같아서 그래?"

-끄덕.

고개를 끄덕이는 마로니에.

괜한 걱정이라고 말하기엔 나도 내 앞길을 몰랐다.

왕관의 힘을 쓰다 보면 그 힘의 크기 때문에 스스로도 놀랄 때가 많다.

어쩌면 훗날에는 미칠 수도 있지 않을까. 마로니에는 그걸 걱정한 모양이다.

"그리고…."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블랑쉬는 손으로 슬며시 자신의 입가를 가렸다.

"나는 평생 널 좋아하고 싶은데. 만약 네가 어떻게 되면… 내 감정도 어떻게 변할지 무서워서."

음….

이거 사실상 청혼 아닌가?

분명 무거운 내용인데 입가가 근질거렸다.

침울한 표정이지만 어쩜 저렇게 사랑스러운 말만 골라 하는지.

크흐흐.

"…왜, 왜 웃어?"

"귀여워서."

"나, 나 진지하거든 지금? 맨날 사라졌다가 큰일 있을 때만 오니까-"

"걱정 마."

"으웃."

내 말에 말문이 막힌 마로니에가 시큰둥하게 날 노려보았다.

"…맨날 그 소리만 하고."

뭔가 억울해 보였지만,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랴.

살짝 웃음기가 섞인 얼굴로 마로니에를 바라보니, 그녀의 말랑한 볼따구가 난로 위에 올려둔 찹쌀떡처럼 부풀기 시작했다.

"나 이제 몰라."

몸은 성장했지만, 여전히 귀여운 밤냥이였다.

* * * * * * * *

"있잖아 너."

-끼익, 끼익.

지속적으로 울려오는 쇠질 소리.

새하얀 팔꿈치를 타고 흘러내린 땀방울이 바닥 타일에 자국을 남겼다.

-끼익, 끼익.

"그거, 언제까지 할 거야?"

헬스벤치에 엎드린 메리가 운동 중인 시바를 보며 지겹다는 듯 물었다.

-끼익.

대답 없이 움직이는 쇠봉.

메리의 도넛처럼 꼬인 머리카락이 스프링처럼 둥실둥실 흔들렸다.

"…재미없어."

그러거나 말거나 시바는 여전히 헬스 삼매경이다.

-끼기기긱.

강철봉이 휘어버릴 정도로 커다란 중량. 헌터의 신체로서도 버티기 힘든 무게가 시바의 몸을 짓눌렀다.

B급, 아니 A급 헌터조차도 순수 근력만으로는 들기 힘들 정도의 중량.

놀라워 할만도 하지만 그보다 더한 걸 본 메리의 눈에는 지겨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졸기도 하고, 하품도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쿵!

덤벨 내려놓는 소리와 함께 잠에서 깬 메리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눈앞에는 젖은 탱크탑 위로 타올을 목에 두른 시바가 숨을 고르고 있었다.

"하암. 끝났어?"

"삐…. 아직도 있었어요?"

"당연한 거 아니야? 흐으으읏! 네 담당 나무가 나인데."

고양이처럼 기지개를 핀 메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런 여리여리한 애가 신이라니.

시바의 머릿속에 의문이 스쳤지만, 어쨌든 신은 신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메리는 무릎을 털며 시바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운동했어?"

"엄청 어릴 때부터 했었죠."

"왜?"

"음. 그냥요? 운동하면 아무 생각도 안 나잖아요. 가끔… 좀 외로울 때가 있거든요."

스트레스나 우울감을 떨쳐낼 때에는 운동이 최고라던가.

가끔씩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시바는 항상 조깅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곤 하였다.

물론 이유가 그것만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저희 엄마랑 이모가 걱정이 되게 많으셔서."

조금이라도 단련하는 편이, 걱정을 덜 사지 않겠냐.

"그 마음 알 것 같아."

메리는 시바의 말에 공감했다.

메리 역시도 똑같은 마음으로 지내왔으니까.

빡세게 생장을 한 이후에는 몸이 힘들어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를 그리워할 때면 메리는 더 열심히 가지에 힘을 주곤 했었다.

"또 그 사람 이야기에요?"

"앗… 들켰어? 헤헤."

"힘들었겠다."

메리는 수줍게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으응, 그래도 어머니 덕분에 버틸 수 있었어."

"어머니요? 세계수에게도 어머니가 있나요?"

"그건 아니고, 그냥 애칭이야. 요람에는 어머니가 있거든."

아는 사람은 다 안다는 성장의 세계수.

요람에서 나고 자란 세계수들은 모두 그녀의 손에서 길러지며, 모판 시절부터 함께 해왔기에 실제로 그녀를 어머니와 비슷한 존재로 여기는 나무도 많다고 한다.

듣기로는 5대 세계수와 비슷한 세월을 살아왔다고 하던가.

메리 역시 그녀에게 신세를 많이 졌었다.

"그렇구나."

"마침 저녁에 만나러 가는데."

"어떤 분이에요?"

"음… 순수하고 착하다고 해야하나?"

순수하고 착하다.

그 말에 시바는 잠시 키 작은 메리를 내려다 보았다.

어리고 순진한 메리가 그리 평가할 정도면 대체 어떤 인물일까.

궁금하지만 성장의 세계수를 볼 일은 없었다.

성장의 세계수는 절대 바깥에 얼굴을 비치지 않는다던가. 새장 속의 앵무새같은 느낌이다.

"화내는 걸 한 번도 본적이 없어."

"듣기만 해서는 아주 성모나 다름 없네요."

"성모 맞을 걸?"

하긴 그 정도는 되니 식목의 어머니라는 애칭이 생겨났겠지.

만에 하나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굉장히 큰 파란이 일어날 것이다.

"뭐, 그건 됐고."

자연스레 샤워실까지 따라온 메리가 시바의 몸을 대충 흘기며 말했다.

"멍이 꽤 많네."

"아, 이거요. 이모들한테 훈련받다 보니… 어쩌다 생겼어요."

"또 이모야? 누군데?"

한국 헌터협회의 협회장이요. 그리 말하려던 시바는 뒤늦게 말을 삼킨 뒤 쓰게 웃었다.

해석에 따라서는 기고만장한 인맥 자랑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아무튼 어디가서 맞고 다니지 말라고 혹독한 훈련을 진행하던 별 덕분에 오늘날의 시바가 있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녀의 뛰어난 잠재력이 밑바탕이 되어주지 못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이모가 누군데?"

"……."

"아 됐어. 말해주기 싫으면 하지 마. 오늘은 이만 가볼 테니까. 푹 쉬고."

"네."

메리는 손을 탈탈 털고 탈의실을 나갔다.

그런 메리의 등을 바라본 시바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떴다.

청록색으로 빛이 나는 눈동자가 메리의 몸을 스캔하더니. 시바의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나타났다.

-번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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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메리(기품과 장난의 세계수) 】

【 능력치 】

-근력 5.3

-내구 3.0

-민첩 4.1

-체력 3.1

-마력 11.6

□권능(1)

□보유 스킬(4)

□기질(5)

-어리광쟁이(C)

-애교(C)

.

.

【 추정 잠재력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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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다.

창을 눈에 담은 시바는 손을 뻗어 그 창을 마구 문질러 꺼뜨렸다.

상태창이라 불리는 기이한 능력.

어느 순간부터 눈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상대의 힘이나 능력치를 한눈에 볼 수 있고, 이름은 물론이며, 장래의 잠재력이나 고유 능력의 방향성까지 직접 눈으로 살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적의 약점을 알아낸 것이 한 두번이 아니다.

‘왜… 이런 게 보이는 거야?’

시바는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바라보았다.

-스멀스멀

손바닥 공간에 균열이 생겨나며 문자들이 기어 나오더니, 이윽고 일정한 형태를 갖춰 나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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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이시바 (1세대 목인)

【 나이/신장/체중 】

4세 / 159cm / 48kg

【 능력치 】

-근력 7.5

-내구 5.8

-민첩 8.1

-체력 6.8

-마력 9.2

-매력  9.6

-지능  7

-잠재력 17

-행운 4

?매력, 지능, 잠재 능력, 행운은 선천적인 능력치입니다.

□권능(1)

【 청안(靑眼) 】 - NEW!

□고유 특성(2)

[전투형 신체(A)][잿빛 마력(-)]

□기질(4)

[검의자질(S)][마법의자질(A)][대기만성(EX)][불완전한(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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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내용들.

하지만 본능적으로 눈앞의 문자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시바는 떠오른 창을 두드리며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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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안(-)

[분류 : 권능]

"순수(純粹), 영원한 푸름."

-정보가 부족하여 설명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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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가 부족하다. 아마 상태창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이 ‘청안’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상태창은… 세계수가 만든 시스템인 걸로 아는데.’

샤워실에 들어가기 직전, 시바는 오랫동안 그 창을 바라보았다.

처음 발견한 것은 몇 달 전이었지만 이렇게 유심히 살펴본 적은 없었다.

하나하나 설명을 읽어내린 시바는 한숨을 뱉으며 자신의 뺨을 두드렸다.

"삐…꿈을 꾸는 건 아닌 것 같고."

확실한 건 자신이 세계수의 시스템에 간섭할 수 있다는 사실.

창을 살피던 시바는 또 다른 시스템을 발견하게 되었다.

‘상점?’

뽑기, 포인트로 물건을 파는 것들.

포인트가 없어 물건을 살 수는 없었다. 포인트를 구할 방법도 딱히 나와있지 않았다.

상점을 몇 번 두드린 시바는 흥미가 떨어져 결국 창을 꺼버렸다.

시바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삐. 씻자 씻어."

기분 좋게 땀을 흘렸는데 웬 미스테리한 현상에 밤새 잡혀있을 수는 없는 노릇.

샤워실에 들어간 시바는 곧 콧노래를 부르며 지친 피부를 달래기 시작했다.

-솨아아아.

떨어지는 물소리. 긴장된 근육이 이완되며 서서히 풀어진다.

상태창을 아직 다 끄지 못했던 걸까.

-삑.

【‘원망의 세계수’가 당신을 유심히 지켜봅니다.】

시야의 한구석에 나타난 그 문장을, 시바는 가볍게 넘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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