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세계수를 따먹다-446화 (446/657)

< 446화 > 선전포고 (8)

루피너스는 허브의 일종으로, 일년생과 다년생으로 나뉘며 1m 정도의 직립한 줄기가 땅에서부터 자라나는 식물이다.

색깔은 푸른색, 흰색, 붉은색 등 다양하며 땅을 기름지게 하는 특징이 있다.

그 이름의 이명은 루핀(lupine).

라틴어로 ‘이리’의 뜻을 가진 그것은 이 식물이 토질을 더럽힌다는 뜻에서 유래된다.

하지만 전해지는 유래와는 달리, 현대의 루피너스는 오히려 사료나 녹비로 널리 이용될 정도로 흙 속의 독소를 흡수하는 식물로 알려져 있다.

루핀을 수호 기사로 두었다는 건, 성장의 세계수가 그만큼 편견이 없는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챙!

양 날의 검이 서로를 겨누었다.

두 사람의 검격에 풀이 갈라지고 꽃이 떨어졌다.

"…경지를 넘었나!"

짧게 속삭인 루핀이 자세를 고치며 뒤로 물러섰다.

루핀이 물러선 장소까지 닿은 이시헌의 검이 주변 식물들을 잘게 조각내었다.

지체해선 안된다.

검을 앞으로 뻗고, 왼쪽 발을 뒤에 둔 루핀의 몸이 밝게 달아올랐다.

"대모님. 물러서십쇼."

"네? 앗… 하지만 대화를!"

"지금 그럴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덕지덕지 솟아오른 식물 줄기가 루핀의 몸을 뒤덮었다.

경갑옷처럼 몸을 만 줄기는 곧 새파랗게 굳어 차갑게 변했고, 루핀의 피부면을 타고 증기가 퍼져나갔다.

파랗게 변한 검면에 상대의 얼굴이 들어왔다.

"…로빙화(魯氷花)"

노둔한 얼음꽃. 꽃말은 모성애.

그의 고향인 차밭을 형상한 풀들이 피어난다. 솟은 풀들에 꽃이 만발했다.

직후, 온도는 차갑게 가라앉고 주변에는 서리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날카롭게 가다듬은 신경은 금세라도 상대의 목을 갈라버릴 준비가 되었고,

꽃의 형상을 한 얼음들이 날카롭게 꺾여 루핀의 가장자리에 맴돌았다.

"……."

그 광경을 이시헌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마력의 질은 더 없이 훌륭하고, 무슨 능력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당장 처음 만난 상대였으니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다.

‘…한 번. 훔쳐보고 싶긴 한데.’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가, 다시 놓는다.

이시헌의 몸에서 팽창하던 검은 마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시간이 없네.’

이윽고 솟아나는 가시관.

눈에 핏줄이 서면서, 양어깨에 무언가 불쑥 튀어나왔다.

-웅웅!

온 공간을 진동시키는 무색의 일렁임.

【 1차 동화 】

몸 바깥으로 흉기와도 같은 갑피가 돋아났다.

흑룡포를 집어 삼킬 정도로 거대한 기운이 몸에 붙고, 눈동자는 무언가에 삼켜진 듯 붉게 불탔다.

가시관이 맥동했다.

【 2차 동화 】

-우우우우웅!

일어난 파동이 온 주변을 휩쓸었다.

소리의 진동을 따라 풀이 꺾이고, 루핀이 만들어낸 얼음꽃이 깨져 사라졌다.

‘무슨 저런 힘이….’

발을 떼지도 않았지만, 온몸의 기력이 한 순간에 빠져버릴 정도로 두려운 위압감이다.

루핀의 턱을 타고 흘러내린 땀이 땅을 적셨다.

루핀은 절망을 속에 감추었다.

설령 그가 지금껏 무수한 역전을 만들어낸, 수호 기사라 할지라도.

‘…이게 정말, 왕의 힘이라고?’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돌이킬 수 밖에 없었다.

그가 기사의 역할과 숲지기의 역할을 역임 받은 것은 전쟁이 끝난 이후였다.

설마 이정도일 줄이야.

‘…바깥에서는, 이미 상대가 없을지도 모르겠어. 무궁이라는 작자가 살아있다면 모르겠지만, 아무튼 얼마나 버틸 수 있지?’

저게 전부가 아니라고 루핀은 판단을 내렸다.

‘저 이상 왕관의 힘을 끌어쓰는 것은 아무래도 몸에 부담이 가는 모양이군….’

루핀은 마력을 끌어모았다. 하늘에서 내려온 푸른 빛이 그의 몸을 감쌌다.

아직까지도 성장의 세계수는 이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세계수님을 어떻게 할 생각이지?"

지원군이 올 때까지 시간이라도 끌어 볼 셈으로 뱉은 말.

이미 의도가 읽힌 걸까?

-번쩍!

소리의 진동이 격해지더니, 눈앞에서 사라진 왕이 루핀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

왕은 말이 없었다.

붉은빛이 한 점으로 이어져, 소름끼치는 눈동자가 루핀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쾅!

"읍!"

가까스로 올린 검이 왕의 일격을 겨우 막아냈다.

견디지 못할 척력이 루핀의 몸을 저편으로 날렸다.

-쿵!

나무에 부딪히자, 오히려 부딪힌 나무의 몸통이 꺾이며 뿌리째 뽑혀나갔다.

완충제의 역할도 하지 못한 채 무수하게 꺾이는 나무들.

-쿵! 쿵! 쿵!

충격을 받아 날아가는 와중에도 루핀은 절대 눈을 감지 않고, 정면을 응시했다.

손목이 바짝 떨린다. 냉기를 받아들인 폐가 크게 수축했다.

‘겨우 보인다….’

자신이 아니라면 알아채지도 못할 속도의 움직임.

이시헌의 머리의 왕관 위로 희미한 연결체가 보였다.

저 연결을 끊어낸다면…. 신체의 변화가 돌아오지 않을까.

도박을 걸만 했지만, 가능할는지.

루핀은 어딘가에서 쏟아지는 성장의 세계수의 눈빛을 느꼈다.

‘…대모님.’

어떻게든 해야한다고.

그리 생각한 루핀이 검을 쥐었다.

* * * * * * * *

‘가시를 쓸 걸 그랬나.’

손아귀에 멱을 잡힌 놈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철퍼덕!

꺽꺽 소리를 내며 의식을 잃은 녀석.

루핀이라 불린 이놈은 원체 상대하기가 까다로웠다.

무궁이나 천마를 포함해도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물론 경지에 다다른 정도는 아니었지만….

놈은 위력차를 뒤집을 정도의 기술이 있었다.

권능인 ‘가시’가 아니라 확실한 방법인 왕관의 힘을 사용한 것은 옳은 판단이었다.

‘위험했어.’

하마터면 정신이 또 엇나갈 뻔했다.

이 힘은 너무 부담이 커서 문제다.

【 빼애애애액!!! 】

나에게 힘을 건넨 왕의 인자는 내 몸을 차지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상태.

내가 힘을 쓸수록 인자의 힘은 더욱 강해진다. 인자가 왕관의 힘을 관리하기 때문이다.

‘응 안 돼, 못 줘.’

그래도 내가 괜히 굴러먹던 게 아니지.

인자에게 엿을 먹이니, 머릿속이 쾅쾅 울렸다. 바로 윗층 사람이 바닥에 발길질을 하는 것 정도의 거슬림이 느껴졌다.

빡치긴 하지만 그 뿐이다.

【 두고 봐. 두고 봐아! 언젠간 몸을 뺏을 거니까! 】

‘두고 보는 건 네 아랫도리겠지.’

【 아아아악!!! 】

머리에 씌인 가시관이 가루가 되어 사라지며, 내 몸에 두르고 있던 무형의 기운도 사그라들었다.

쑥대밭이 된 주변에 파인 땅이 발에 밟혔다.

발을 대충 굴러 흙의 상태를 확인해보니 확실히 양질의 땅이다.

‘마력이 많네. 뭐, 그건 됐고.’

나는 눈앞에 서서 얼어붙은 성장의 세계수를 바라보았다.

-저벅.

한 발자국 다가가자, 입가를 떤 세계수가 눈을 감았다.

그녀의 머리에는 보석 하나 박히지 않은 금색의 왕관이 씌어있었다.

"……저를 죽이는 건가요?"

"그건 네가 하기에 달린 거지."

누워 있는 루핀을 한 번 흘긴 내가 다시 성장의 세계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걸까.

인간인 편이 훨씬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지만, 인간을 하등한 생물로 여기는 까닭에 세계수들은 보통 인간의 형태를 띠지 않는다.

하지만 성장의 세계수는 어딜 어떻게 보나 1세대 목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메리의 인간체를 처음 볼 때의 충격이 다시금 돌아왔다.

"…이번에도."

성장의 세계수가 날 보며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죽이지 않았네요."

기절한 루핀은 이미 전투불능의 상태다.

힘조절을 한 건 아니다. 이번에는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고, 있는 힘껏 들이받았는데 어쩌다 이 녀석이 살아남은 거다.

무슨 착각을 하는 건지.

내가 이번 습격에 불살이라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되도록 단전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그치긴 하지만… 내가 아무도 죽이지 않는다는 건 너무 넘겨짚기다.

"제가 죽으면 되는 건가요? 전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죠?"

살짝 불안이 섞인 음색이지만 제법 당돌하게 물어오는 성장의 세계수.

식목의 어머니라 불리는 그 신체는 생각보다 훨씬 젊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제가 아이들을 기르니까요. 당신은 세계수를 적으로 돌리고 있으니까."

세계수는 성장 환경에 따라 발현되는 힘이 천차만별이다.

성장의 세계수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지만.

"돌리고 있으니까?"

어머니를 죽여봐야 효과를 보는 건 몇 세기가 지난 후다.

최소 몇 년 이내에 전쟁을 끝내려하는 나에게 성장의 세계수의 죽음은 필요 없었다.

바라는 건 권능 하나.

땅의 양기를 되살릴 힘을 찾으러 왔다.

"그러니까…."

내 표정을 보고 자신의 생각이 잘못됐음을 인지했는지, 입을 다문 성장의 세계수.

절망을 느끼는 걸까.

"……."

머지않아 그녀가 말했다.

"…오래, 살기는 했죠."

"뭐?"

탄식이 섞인 체념.

"…늙은이는 죽어야 마땅한 거겠죠?"

주섬주섬 왕관을 손에 쥐고, 바닥에 내려놓는 성장의 세계수.

"다, 다음 아이가 태어나는 것만… 지켜주세요. 이 왕관을 이어받을 아이를 금방 낳을 테니까."

"너 지금 뭐하냐?"

적에게 자비를 구걸한다?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애 살짝 머리가 맛간 것 같기도 하고. 좀 엉뚱하다.

‘노망이 좀 많이 들었나 본데.’

내가 아는 어떤 세계수와는 다르게, 오냐오냐하는 삶의 과정에서 거만해진 게 아니라 멍청해진 느낌.

산수유와는 또 다른 느낌의 백치미다.

‘시간이 없다.’

애들은 다 일을 치렀으려나.

나는 성장의 세계수에 한 발자국 다가갔다.

-저벅.

왕관을 껴안은 성장의 세계수가, 꼭 단두대에 끌려나가는 프랑스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같은 표정을 했다.

눈물 하나 흘리지 않는데 표정에서 감정이 느껴진다.

쓸데없이 풍기는 고고함은, 여왕이라는 호칭이 괜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손을 펼쳤다. 세계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안하네요."

뭐가 미안한지.

뭘 느끼고 있는지 모르니 되려 궁금해진다.

하지만 시간이 없어 이 이상 무언가를 물을 수는 없다.

뻗은 손에 공간 마법을 사용하기 위한 마력을 불어넣으니, 성장의 세계수가 고개를 들었다.

"…뭘, 하는 건가요?"

그것이 공격성을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을 눈치 챈 성장의 세계수가 물어왔다.

잠시 대답할 말을 고민하다가, 그녀에게 뱉었다.

"너 납치된 거야."

넌 내꺼다.

* * * * * * * *

우당탕탕 씨앗 털기.

-끼리릭~!

위키가 열어놓은 포탈을 향해 구슬이 죽어라 카트를 밀어 넣고.

"비켜! 비켜!"

재빠르게 다른 카트를 향해 움직인 구슬이 흑단에게 소리쳤다.

조그만 품 안에 모판을 가득 담은 흑단이 허둥지둥대다 모판을 안고 넘어질 뻔 했다.

그야말로 개판.

"넣어!"

이미 들킬 대로 들켰기 때문에, 마력을 써도 관계없다.

포탈을 연 위키는 마법을 사용해 성에 있는 창고로 꾸역꾸역 모판들을 옮겼고, 재단의 아이들은 그렇게 순식간에 황폐해진 땅으로 이동되었다.

도중부터는 이들을 척결하기 위한 사제들이 도착했으나.

-탕, 탕!

때맞춰 준비한 구슬의 총탄과, 위키의 마법으로 만든 장벽에 의해 침입이 막혀버렸다.

-찰칵.

권총으로는 부족했는지, 바닥에 마법진을 그린 구슬이 기관단총을 꺼내들었다.

총을 꺼내기를 1초. 접이식 개머리판을 펴기를 1초.

-투다다다다!

쏟아지는 비탄을 마력을 이용해 원하는 곳으로 이동시킨다.

분당 350발로 쏟아지는 각 자아를 지닌 총알.

하나의 위력이 모자랄지라도 그게 다섯 발, 열 발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큭, 빌어먹을…."

입구에 선 사제들이 차마 들어올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자, 구슬은 박차를 가해 더욱 탄을 쏘아댔다.

"위키!"

"네…."

"언제까지 해야해?"

"목표는 이미 채웠는데… 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더 담아 최대한!"

아주 싹을 뽑아버릴 생각인지. 사제들의 얼굴에 절망이 스친다.

포탈 속으로 사라지는 예비 신들. 플라워가 정말 전쟁을 일으키려는 걸까?

앞날이 어떤 흉측한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몰라도, 그들은 지금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그들이 상대할 존재가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삼재라는 것을.

동시에 현자의 아이이자, 마법으로는 이미 아득히 먼 고지에 도달한 마법사가 여기 있다는 것을.

"……읏!"

양민인 흑단만이 상황에 휩쓸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몇 명의 사제를 무찌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구슬에 의해 쓰러지는 상태.

마법사인 위키를 지켜야겠다고 본능적으로 판단했지만, 위키의 주변에는 이미 거대한 방벽이 만들어진지 오래였다.

침착하자.

검은 마력을 단검에 묻힌 흑단이 마침 인기척이 느껴진 곳을 바라보았다.

사제가 들어오지 못했던 장소. 자그마한 터널.

"…?"

녹색 머리의 한 목인이 터널 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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