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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를 따먹다-457화 (457/657)

< 457화 > 검은 옷의 정원사 (4)

정원에 만연한 꽃의 향취에 빠져, 소녀는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봄의 정원(Descanso garden)은 격동의 세상에도 여전히 영화로웠다.

이곳은 올해 갓 풋내를 떨친 소녀의 땅.

하지만 그 누구도 이곳이 그녀의 것임을 부정하지는 못했다.

장애에 빠진 한 소녀를 모두가 믿고 따른다. 우스운 일이겠지만, 이 앞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꽃밭의 중앙에 앉아있는 소녀.

흰 나비가 날아와 머리에 앉았다. 꽃보다도 더 달콤한 향을 가진 그녀에게 벌과 나비가 날아드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아가씨."

메이드. 카멜리아가 물었다.

"…아가씨?"

이젠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목소리로.

소녀는 잠시 멍을 때리다가, 얼굴을 움직여 위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메이드는 없었지만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죄송해요. 조금 다른 생각을 하느라. 무슨 일…이죠?"

맹한 기운이 섞여있으면서도, 어딘가 힘이 있는 목소리.

소녀에겐 타인을 이끄는 힘이 있었다.

"곧 기사단 분들이 오십니다."

"…그렇군요."

카멜리아의 말에 소녀는 고개를 숙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갈까요?"

"네, 아가씨. 갈게요."

-끼이익, 끼익.

소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휠체어가 움직였다.

한 짝의 기계에 몸을 맡긴 소녀의 몸도 같이 움직였다.

-쿵, 쿵.

휠체어가 꺾이면,

시야가 흔들리고 보이는 광경도 달라진다. 적어도 카멜리아의 눈에는 그러할 것이었다.

저택의 기둥이 보이다가, 다시 꽃밭이 보였다가.

하지만 소녀는 어디를 가든 똑같은 암흑밖에 볼 수 없었다.

-덜컹.

바퀴가 흔들려도 어딘지 알 수 없다. 이러한 불확실함에서 오는 불안감은 언제나 소녀의 가슴을 쥐고 흔들었다.

"…카멜리아?"

"네, 아가씨."

"……미안해요. 조금 무서워서."

"괜찮습니다. 아가씨 곁에는 제가 있으니까요."

만약 이 자리에 카멜리아가 없었다면?

상상도 하기 싫다. 소녀에게 그 사실은 또 무섭게 다가왔다.

지금 당장 그녀가 보는 앞. 암흑. 깊은 심해를 보며 느끼는 감정.

만약 일이 생겨서 어딘가로 끌려간다면, 나는 과연 반항할 수 있을까?

맹인은 직접 보고 믿을 수 없다.

지고한 안목을 가져야 하는 귀족에게는 반맹(半盲)조차 매우 치명적인 결함이거니와, 이는 결국 신뢰의 문제에도 직결되었다.

날 때부터 맹인이었다면 모를까.

빛을 본 채로, 빛을 잃은 몸.

겨우 남아 있던 한 쪽 눈도 멀어버린 채, 보고자 했던 세상마저 저물어버렸다.

사람을 잃고, 손을 뻗지 못하고, 땅에 설 수 없으니.

-두근.

심장이 아파온다.

"…으."

"괜찮아요. 심호흡해요."

소녀는 가끔씩 공황에 빠지곤 한다.

벌벌 떠는 몸을 카멜리아가 두드렸다. 심호흡을 반복하자 겨우 경련이 수그러들었다.

-뚝.

소녀의 턱에서 맺힌 눈물이 정원의 흙을 적셨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소녀는 매우 지쳐있었다.

아직까지도 두 팔이 있는 것 같고, 걸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정작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아쉬움을 넘어선 공허함은 아무리 가슴을 쥐어뜯어도 이겨낼 수 없다.

거울을 보지 못해, 자신의 상태도 알 수 없었다.

누군가 독을 주면 동백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누군가 몸을 더듬어도, 문질러도.

심지어는 그 너머를 노리더라도.

"…!"

-번쩍.

동백은 정신을 차리고 숨을 골랐다.

하나, 둘. 하나, 둘. 머리로 숫자를 세며 침까지 삼키니, 겨우 부정적인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카멜리아가 걱정해왔고, 동백은 그녀의 팔에 머리를 기대었다.

희미한 살냄새가 몸을 진정시켰다.

"…괜찮아요."

왕에게 노려지는 몸.

어쩌면 그녀는 세상에서 제일 운이 없는 몸일지도 몰랐다.

부모를 잃고, 몸도 눈도 잃은 뒤.

이제 겁탈당해 죽을 처지라니.

"……가도록 하죠."

하지만 동백은 여전히 희망을 놓지 않았다.

괜찮은 척, 힘을 낸 척 목소리를 내 본다.

"후우, 다음 외출은 내일로 할까요?"

"몸을 좀 챙기는게 어떨까요… 아가씨?"

"괜찮아요."

적어도 아직은,

이 정원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으므로.

* * * * * * * * * * * *

세상에서 가장 먹기 힘든 밥이 눈칫밥이라던가.

"맛있게 드세요. 여러분."

팔 다리를 전부 쓰지 못하는 소녀를 앞에 두고, 시바는 좀처럼 맛있게 밥을 먹지 못했다.

"……."

첫 임무로서 배정된 호위, 대접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소녀의 모습을 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여러분?"

"맛있게 삐…먹겠습니다!"

"하잇!"

동백이 조금 불안한 음색으로 말하자, 시바와 사쿠가 깜짝 놀라 대답했다.

동백은 그제야 안심한 얼굴로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휴, 입에 맞았으면 좋겠네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 시바는 고개를 내려 자신의 그릇을 바라보았다.

무쇠 양푼, 안에 섞여 있는 익숙한 혼종 덩어리.

이제는 지긋지긋한 새싹 비빔밥에 시바는 눈을 감고 절로 묵념을 하고 싶어졌다.

‘…왜.’

이정도면 비빔밥이 스토커가 아닐까.

음식이 맛이 없던 건, 비단 동백의 앞에 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한국인들이 세 분이나 있으셔서 흔히 좋아하시는 식단을 가져와 봤어요."

"그렇군요."

"비빔밥! 초 오이시데스."

수연과 사쿠가 담담하게 대답하자 동백이 더욱 미소를 지었다.

저 미소를 보고도 도저히 편식을 할 수는 없겠더라.

눈을 찡그린 시바가 침울한 얼굴로 식탁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등 뒤에서 한 여성이 시바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기. 시바님?"

동백이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삐? 네?"

"못 드시는 음식이 있으시면, 이걸….."

아까까지 동백의 뒤에 꼭 붙어 서 있던 분홍 머리의 여자.

카멜리아라고 했던가.

카멜리아는 조용히 다른 접시를 내민 뒤, 흉물스런 새싹 비빔밥을 수거해갔다.

시바의 눈앞에 잘 익은 고깃덩이가 놓였다.

"메이드님…!"

감동의 눈물.

시바의 벅찬 말에 카멜리아는 엄지를 척 올린 뒤, 다시 동백의 곁으로 돌아갔다.

눈칫밥의 난이도가 한 세 배는 줄었다.

시바는 빠르게 썬 고기를 입안에 넣고 씹었고, 곧 육즙의 행복에 겨워했다.

그렇게 지난 시간.

얼추 식사가 끝이 나고, 차까지 대접을 받을 무렵. 수연이 동백에게 물었다.

"최근에 무슨 일은 없으셨나요?"

"네, 당장은요."

이제 슬슬 임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걸까.

수연이 묻고 동백이 답하는 식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토의를 하기 시작했다.

"왕은 위험해요. 요람 전체를 휩쓸고도 아무 상처가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마음 같아선… 세계수의 요새로 부르고 싶지만."

"…그건 안돼요."

"네, 그러겠죠."

"죄송해요. 아무래도… 이곳을 빠져나가면 몸이 안 좋아져서."

"이해해요."

수연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동백의 메이드에게 물었다.

"이곳의 방비는 어떻게 되어 있죠?"

"사용인과 관련인을 제외하면 출입할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수연의 말에 카멜리아가 즉시 대답했다.

"카드키나 암호는 매일 바꾸고 있고, 밤에는 사용인도 출입이 불가합니다. 일곱 형식의 아티펙트로 저택 외부를 보호하며, 일이 일어났을 때를 대비해 일부 길드와 방위 조약을 맺고 있습니다."

"방위 조약이라함은?"

"대가를 제공하는 대신, 선별한 일부 헌터들을 경비로 쓰고 있죠."

"알겠습니다. 혹시 실례가 안된다면, 경비 방식에 조금… 참견같은 걸 해도 되겠습니까?"

카멜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이 문제는 그녀가 대답할 일이 아니었으니까.

자기 지역에 외부인이 들어온 걸 넘어, 그들이 영지의 시스템에 관여한다는 것은 영주에겐 불쾌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동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승낙했다.

"물론이지요."

흔쾌한 대답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수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끼익!

동백은 그런 수연의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의자의 소리로 대충 파악했는지 입 모양을 동그랗게 말아 말했다.

"혹시, 고개를 숙이는 거라면 괜찮아요. 절 보호하려고 오신 분들인데 당연히-"

"아닙니다."

수연은 진심을 보태 말했다.

"트리 나이츠의 임무를 받고 온 바, 성목에 맹세하여, 가주님을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한 나라를 지탱하시는 분에게 그런 소릴 들으니, 뭔가 놀랍네요."

어안이 벙벙한 듯 몸을 떠는 동백.

하지만 기분이 나빠보이지만은 않았다.

"그럼, 잘부탁해요. 여러분."

왕에게 노려지지 않기 위해, 만약 노려지더라도 막을 수 있게.

눈치를 보던 ‘떡잎’의 세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똑같이 고개를 숙였다.

* * * * * * * * * * * * * *

정원에 잠입한 지 2주가 지났다.

슬슬 무언가 일어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을 즈음, 처음으로 동백과 동선이 겹치게 되었다.

"위든? 오늘은 좀 일찍 나왔네요?"

"하하, 아름다운 정원을 빨리 보고 싶어서 말입니다."

‘위든’이라는 가명은 이제 이곳의 사용인으로부터 어느정도 인식되기 시작했다.

굉장히 일을 잘하는 사람, 가끔 다른 사람의 일도 도와주면서 고민도 들어주니 평판작이 꽤 제대로 됐다.

시간은 2주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제는 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일 잘하는 위든과, 어수룩한 헤리! 헤리는 흑단을 뜻하는 말이다.

"아, 위든! 저번에 부탁한 거 고마워."

"응. 작업은 잘 됐나 봐?"

"하하, 덕분에."

이 모든게 과정.

제대로 스며들었다면 좋고, 도중에 의심을 샀더라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탁, 탁.

가지를 몇 개 잘라낸 나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마침 도착한 동백이 바로 옆 길을 건너가고 있었다.

분홍 머리의 메이드가 미는 휠체어에 앉은 동백. 메이드는 동백에게 무언가를 속삭이더니, 갑자기 이쪽으로 휠체어를 돌려버렸다.

"저기, 위든님?"

메이드가 내게 물었다. 나는 최대한 태연한 척 반응했다.

"네?"

"영주님의 전속 하녀인, 카멜리아라고 합니다. 아가씨가 잠시 뵙고싶다고 하셔서요."

올 때가 왔다.

가끔씩 있다는 사용인 면담. 나는 사다리에서 내려와, 가위같이 흉기로 여겨질 법한 물건을 전부 나무 뒤로 옮겨두었다.

그렇게 기다리니 곧 동백이 다가와 물었다.

쭈뼛쭈뼛, 하지만 이 과정이 익숙하다는 듯.

은근히 즐거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음, 위든?"

"네 아가씨. 처음 뵙겠습니다!!"

씩씩하게 대답하자, 깜짝 놀란 동백.

"너무 큰 소리를 내지 마세요."

그녀의 메이드에게 바로 혼이 나버렸다.

"괜찮아요 카멜리아."

후후, 수줍게 웃은 동백은 내가 서있는 곳이 아닌 다른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일은 즐거운가요?"

"즐겁습니다. 조수도 같이 일하게 해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하하, 이야기가 자주 들려요. 굉장히 열심히 일한다고. 혹시 뭐 힘든 일이 있거나…. 급여 문제는 없을까요?"

"물론 없습니다."

사용인에게 친절하기로 소문이 난 이유가 있을까.

동백의 목소리는 소녀답게 고와 듣기 좋았다.

"다행이네요. 위든이 일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게 정말 안타깝네요."

"……."

이건 어떻게 대답해야하나. 카멜리아를 바라보니, 그녀는 말없이 동백의 휠체어를 밀었다.

"헤리는요?"

"아, 제 조수는 다른 방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가요……. 굉장히 아쉽네요."

표면적인 말이 아니라 정말로 아쉬운 지 입꼬리를 내리는 동백.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니, 생각보다 선량한 사람이었다.

원래도 선량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말투나 표정에서 묻어나오는 그런 느낌이 있지 않는가.

굉장히 활기차다.

하지만 반대로, 몸의 열에 지쳐 가빠보이는 숨도 관측할 수 있었다.

"가주님. 괜찮으십니까?"

"…네? 뭐가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숨을 좀 거치게 쉬셔서."

"아, 이게 평상시에요. 후후. 걱정끼쳐서 죄송하네요. 위든님은 마음이 참 하얗네요."

오히려 사과한 동백은 고개를 살짝 숙이기까지 했다.

본디 신분은 정말 하늘과 땅 차이일 텐데도.

장애가 그녀에게 무슨 영향을 끼친 걸까. 아니면 원래 이런 성격이었던 걸까.

"아가씨."

"앗, 이만 가봐야겠네요."

카멜리아의 말에 동백은 손 대신 머리를 슬며시 흔들었다. 그녀만의 인사인 것 같았다.

"고생하세요 위든."

"넵"

카멜리아의 휠체어에 덩달아 움직이는 동백.

나는 동백에서 슬며시 카멜리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헌터네.’

몸에 있는 마력 구조부터, 근육 밀도까지.

한 번에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헌터였다. 그것도 꽤나 실력자의 축에 속하는.

-끼리릭.

휠체어가 돌아갔다.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고 있으니, 시선에 고개를 돌린 카멜리아가 나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위든님."

"네?"

"2주 전에 뵈었을 때보다, 머리가 좀 많이 자랐네요."

머리?

변장은 완벽하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다.

무심코 뒷머리를 만진 나는 우선 자연스럽게 답했다.

"슬슬 다듬을 때가 되긴 했죠."

"그렇군요. 마침 내일이 주말이니까…. 아. 너무 시간을 뺏었네요."

"아닙니다."

하하.

어색하게 웃었지만, 눈썰미가 꽤 상당하다.

카멜리아가 구태여 그걸 왜 물어봤는지는 모르겠다.

하나 확실한 건, 저 여자는 꽤 눈엣가시가 될 거라는 거.

순수한 실력도 잘 모르겠지만. 일단 눈에 담아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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