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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를 따먹다-461화 (461/657)

< 461화 > ATU (1)

방법이 필요했다.

-카멜리아, 당신만 들어요.

아가씨가 4대 귀목이라는 사실을 전해 들었을 때부터 쭉, 카멜리아의 머릿속은 생각으로 포화해있었다.

‘어떻게 해야.’

아가씨를 지킬 수 있을까.

절망적인 상황에서 준비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왕에게 제압당한 뒤로는 더더욱 그랬다.

‘다 포기하고 세계수님께 알린다면?’

늦는다.

설령 올지라도 왕이 아가씨를 노리는 게 먼저다.

‘암살은’

실력 차가 너무 커 불가하고.

‘용병이나 다른 길드의 도움조차.’

불가능할뿐더러, 그만한 금전이 남아있지 않다.

현재 영지는 전쟁으로 인해 자금난에 시달린다. 전력이 될만한 인재도 아주 적었다.

‘무엇보다, 그 남자를 쓰러뜨릴만한 사람이 없어.’

무궁을 데려와라. 그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그는 요양중이며 전투가 가능한 상태가 아니다. 그럼 누구를 데려와야 하는가.

세계수?

플라워의 간부?

‘…아니. 설령 그들이라도-’

그 날 그 남자의 움직임이 머릿속에 스쳤다.

-펑!

눈앞에서 사람이 사라져서는,

-쿵!

마력을 몸에 두르지 않아도 압도하는 힘과 속도.

-우드득!

그리고, 몸 안의 마력 회로를 난잡하게 꼬아버리는 기술.

카멜리아의 손이 저절로 갈비가 있는 곳을 향했다.

그날 이후부터 이따금씩 이렇게 환상통이 느껴졌다.

"또야…."

-까득!

손에 있던 깃펜이 꺾인다.

옷감 하나를 넘어 들쑤시는 고통은 지겨워지질 않았다.

‘제기랄.’

집무실 안, 한때 가주가 있던 자리에 앉은 카멜리아는 쭉 고뇌하고 있었다.

【 내 말을 들어 】

귓가에 울리는 조여오는 공포.

심장 근육을 손톱으로 살살 긁어 찢는 듯한, 무형의 압박이 카멜리아의 머리를 흔들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도망쳐야 해. 하지만.’

무심코 그렇게 생각하고 말고.

‘…어디로?’

이윽고 좌절한다.

상대는 왕이다. 그 목령왕이다. 과거 무수한 신을 죽이고 세상을 지배하기까지 다다랐다는.

그런 최악의 존재가 플라워라는 최악의 세력을 등에 업고 태어난 것이다.

플라워와 떨어진 독립 세력이라는 소문이 있지만, 만약 그게 소문이 아니라면?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끝이야.’

이미 왕은 자신들의 목 앞에 있었다.

차라리.

아가씨가 노예가 되기 전에, 직접 자신의 손으로….

-탁!

‘무슨 개같은 생각을 하는 거야, 카멜리아. 아가씨를 살릴 생각을 해야지.’

카멜리아는 고민했다.

‘…트리 나이츠에 솔직히 털어 놓는 건? 안 돼. 갑자기 많은 인력이 들어오면 들킬 수 있어.’

밤새 생각했다. 하지만.

‘아가씨가 요새에 가는 날을 속이는 건? 이것도 아니야…. 왕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 몰라.’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희망이 남아나질 않았다.

머리를 쥐어 감싼 카멜리아가 병적으로 손을 떨었다.

그 남자의 얼굴이 눈앞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 내 말을 들어. 】

끝을 모르고,

속을 알 수 없는 멍한 눈.

‘…마법이 아니었어. 권능도.’

표현할 구석은 없다. 그게 가능했다면 왕이라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리라.

설령 검은 머리의 여성과 함께 있을 때 보인 모습이 우스꽝스러웠을지라도, 그게 진짜 그 남자의 천성일지라도.

카멜리아는 알고 있다.

그 남자의 속에 왕의 편린은 분명히 있었다.

-…여보세요.

쿵.

세계가 변하듯 눈앞이 흔들렸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카멜리아의 눈이 조용히 옆을 향했다.

바깥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최근 아가씨랑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아니고, 어투를 생각하면 일본인인 그녀도 아니다. 숫기가 없던 밤색 머리의 소녀도 아니었다.

‘그럼 국목.’

한국의 국목, 김수연.

적어도 캘리포니아에 있는 주 안에서는 왕을 빼면 누구보다 강한 사람.

카멜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심코 문 앞으로 다가갔다.

희미했던 그녀의 목소리가 더 가까워지자 명확히 구분해낼 수 있었다.

-세계수님의 명령…이요?

명령?

-제대로 확인된 거 맞나요? 아… 방금 직전에. 네, 네.

김수연의 목소리가 급하게 어두워졌다.

-…아무리 그래도.

세계수의 명령, 조심스러워 보이는 말투.

단어 하나하나가 부정적으로 다가오는 말에 카멜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세계수가 둘 수 있는 수 중. 가장 극단적이면서도 확실한 수.

하지만 그걸 시도하려면 언론을 확실히 휘어잡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왕이 대비를 했을지는 몰라도….’

이루어진다면 이 데스칸소 가든은 망하게 될 터.

카멜리아는 눈을 감았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해서는 안 될 생각을 해버렸다.

* * * * * * * * * * * *

"그래서, 그동안 성욕은 어떻게 푼 거야?"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서."

"이야, 말에 힘없는거 보소."

건조한 대답에 웩- 혀를 내민 구슬이 갑자기 침대에 앉았다.

"내가 이 근방을 싹~ 수색해보니까. 어떤 소문이 돌던데."

"……."

"잘생기고 밤일 잘하는 귀족이 호텔에 가끔씩 나타난다고. 몇몇 여자 귀족들 사이에서 싹 소문이 퍼진거야."

"그래?"

"근데 내가 잘 생각해봤는데…."

-툭.

앉은 그대로 몸체가 서서히 넘어오더니, 구슬의 뒷통수가 내 배에 다다랐다.

구슬이 고개를 돌린다.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어라?"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핸드폰을 두드리던 손이 멎었다.

"…여기 있네?"

지랄.

-팡!

"꺅!"

배에 힘을주자 튕겨나간 구슬이 천장을 찍고 바닥에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엎어진 채 자리에서 일어나는 구슬.

여전히 올라간 입꼬리는 내려올 기색이 없었다.

"내 생각 많이 났지? 그치? 에이, 솔직하게 말해봐."

"노리개가 없어서 많이 피곤하긴 했지."

"그래, 그렇다니까?"

노리개 소리를 들어도 아무 타격이 없는 걸 보아, 작정한 듯했다.

-드르륵.

마침 문이 열리면서 샤워를 끝낸 흑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홱 고개를 돌린 구슬이 밝게 인사했다.

"?"

"흑단이 왔어?"

"아…. 언니?"

잠깐.

"야 흑단."

"네?"

"너 왜 나한텐 아저씨라하고 쟤는 언니냐?"

나나 구슬이나 별 나이 차이도 나지 않는데.

내 얼굴이 이런 건, 그저 중년 모습의 변장을 많이했을 뿐이다.

"와 째째해. 저게 왕 맞냐? 스승이 제자한테 오빠 소리 듣고 싶어?"

어느새 흑단의 옆까지 다가가, 꼭 껴안으며 소리치는 구슬.

흑단이는 쭈뼛쭈뼛 구슬에게 안겨 미안한 듯 날 보고 있었다.

"그리고, 있잖아요 폐하. 원판도 좀 늙긴 했거든요. 워낙 던전에서 많이 구르고, 정신도 안 좋아서."

"안좋아서?"

"삭을 수밖에 없는 걸…. 왜 일어나?"

.

점점 신랄해지는 비난에, 나는 먹고 있던 약병을 닫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구슬의 얼굴이 아주 살짝 굳었다.

"네가 매를 버는구나."

"어? 어어…."

구슬이 흑단을 자기 앞으로 밀며 슬그머니 다리를 뒤로 뺐다.

"그게 내 말은, 마사지를 좀 받으시면-"

앞으로.

"오빠 소리를 들을 외모가 되지 않을- 아앟!"

흑단의 머리 옆을 지나친 다섯 손가락이 구슬의 안면을 콱 잡았다.

순식간에 몸이 끌려오는 구슬.

-콰당!

"응앜!"

만화에나 나올 법한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바닥에 미끄러진다.

"흑단아."

"…네, 네."

"잠깐 작은 방에 들어가 있어. 거기서 자도 좋고."

"네!"

눈치 좋은 흑단이 사라지고, 나는 손을 올렸다.

바닥의 구슬은 차마 일어나지도 못하고 호달달달 떨고 있었다.

"…폐하, 내가 너무 심했죠?"

-저벅.

"저기, 있잖아. 지금 좀 진지할 타이밍 아니야? 4대 귀목 정복이 코앞인데."

"응. 그렇지."

그 분위기를 누가 깼을까?

-찌이이익.

구슬이 입고 있던 라이딩 슈트가 한겨울 귤껍질처럼 쓱 벗겨졌다.

"…오늘은 몇 시간이야?"

"네가 하기에 따라."

"조졌네."

단념한 구슬이 입을 벌렸다. 가지런하고 새하얀 이가 전등 빛에 닿아 반짝거렸다.

"웁, 웁!"

* * * * * * * * * * *

"준비는 얼추 끝났어."

"죽이기만 하면 된다는 거지? 근데 반야 쟤는 왜 아직도 저러고 있냐."

ATU의 주체들과 특수 요원들이 한 곳에 모여 몸을 풀었다.

벨의 물음에 가만히 있던 에이비가 어깨를 으쓱였다.

"잠깐 점을 친다던데."

이제는 ATU 요원들에게 너무도 익숙해져버린 그 ‘의식’.

자신의 미래를 점쳐보는 반야의 힘은 세계수나 플라워의 것들보다 훨씬 우수했다.

-우우우웅!

이윽고 일어난 불길한 마력.

흔히 주술이라 불리우는 저것은 흔히 통용되는 마력과는 결이 다르다.

형질부터가 완전히 어긋난, 이 세계에서는 반야를 비롯한 극소수만이 다룰 수 있는 힘.

"기원을 따져보면, 뭐라고 했더라… 엘프?"

"엘프 선지자."

과거 목인의 기초가 되었던 신비로운 존재인 엘프.

선지자로부터 내려와, 동양에서는 주술자로 쪼개져 현재는 주술에 달하기까지 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도 세계수가 그 힘을 억압하려 든 것이 반야의 배신 원인이라던데.

자세한 속사정을 아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세계수와, 원시 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진 존재의 힘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

"그래도 뭐. 그걸로 덕 좀 봤잖아? 지금 이 세력이 이렇게 커진 덕도 그거고."

ATU요원 대다수는 3년 전 S급 헌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거기에 최근 솟아난 던전과 탑의 기연으로, 그때보다 훨씬 더 큰 힘을 얻게 되었으니.

특수팀만으로도 어지간한 세계수의 군대는 제압할 수 있었다.

-우우웅!

여전히 울리는 마력의 흔들림.

요원들의 얼굴에 물음표가 띄었다.

"…어렵네."

앉아있던 반야가 중얼거렸다.

"전부 나가줘."

"네, 네."

요원과 벨, 에이비가 순차적으로 나갔다.

텅 빈 준비실에 반야는 더욱 마력을 집중시켜 눈에 힘을 모았다.

"…왜. 안 보이지?"

이마가 서서히 열리며, 푸른 빛이 뿜어지자 몸이 불투명하게 변했다.

제 3의 눈,

엘프가 꾸렸던 종교에서는 흔히, 반 초월 상태라 불렸던 것.

정령과 상당히 흡사한 상태인 반야는 자신의 옷을 벗고 나체의 상태로 임했다.

"……끄응."

그래도 잘 보이지 않는 터라.

반야는 벌떡 일어났다.

-쾅!

"뭐야, 쟤 어디가?"

"옷은 입고 가!"

끈으로 된 속옷과 브레지어만 걸친 채, 반야는 방을 나와 자신의 공간에 접근했다.

당황한 요원들이 그녀의 몸을 어쩔 수 없이 쳐다보았지만, 반야는 노출이 서슴지 않았다.

‘이상해.’

무언가 불길하다.

-탁, 탁.

방 안에 들어온 반야가 빠르게 판을 마련했다.

거대한 석상 앞에, 사람이 앉을만한 빨간 접시를 두고.

양 옆에 촛불을 켠 뒤 그곳에 옷을 벗고 무릎을 꿇었다.

-팟팟팟!

반야는 앞에 있는 흰 분(粉)을 몸에 흩뿌렸다.

-솨아아아.

주변에는 물이 떨어진다. 중간에 흐르는 물줄기가 반야의 정수리를 흠뻑 적셨다.

‘설마… 아닐 거야.’

초조하게 열어보는 3의 눈. 반야의 눈앞에 흐릿한 세상이 펼쳐진다.

떠오르는 고대어.

아주 제한적인 정보였지만 반야는 이를 해석하는데 능통했다.

-우우웅!

양초가 꺼지고 어둠이 몰려왔다.

눈을 감은 반야는 흠칫 몸을 떨며 자신이 본 광경을 목도했다.

‘이건. 안 좋은데.’

인원을 줄일 필요성을 느꼈다.

* * * * * * * * *

슬슬 플라워와 세계수가 움직일 때가 되었다.

나는 흰 쌀밥을 입에 넣으며 그대로 씹었다.

아래의 뷔페를 이용해도 될 텐데, 무슨 생각인지 습관적으로 밥을 차려놨다.

‘약 탄 거 아니야?’

그런 의문이 들지만 최근 또 한식이 생각났던 터라 싫지는 않다.

맛있게 먹어주기로 했다.

"……."

"흑단이 왜."

"언니는… 안 먹나 해서요."

"쟤?"

나는 고개를 돌려 소파에 벌러덩 누워있는 구슬을 가리켰다.

어느새 돌핀 팬츠와 가벼운 반팔로 갈아입은 구슬은 손을 들어 격렬하게 흔들었다.

"흑단아, 나 배불러,"

"아무 것도… 안 먹지 않았아요?"

"준비하면서 많이 먹었어. 그래도 너 밖에 업따."

많이 먹긴했다.

실제로 약간 윗배가 부풀었기도 하고.

"이시헌 너 할 말 없어?"

"???"

흑단은 이해하지 못한 듯 얼굴을 기울였다.

"와… 태연한 것 봐, 저 화상."

구슬의 원망 섞인 눈초리를 무시하며 나는 수저를 입에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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