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4화 > 걸어다니는 악몽 (2)
저택 복도,
-타다다닥!
벽면을 타고 날 듯이 다가온 검은 전사가 시바의 상반신을 노려왔다.
"…!"
시바의 몸이 힘에 짓눌린다.
겨우 속도밖에 따라갈 수가 없다. 지금껏 상대했던 어떤 사람보다, 빠르고 강했다.
-끼기긱!
검과 검이 서로를 긁으며 미끄러진다.
"끄으으!"
한 손으로 내리친 검을 양 손으로 막았음에도 힘이 부쳤다.
일촉즉발의 교전.
‘빨리 쓰러뜨리고 구해야 해.’
"…끄으읍!!"
‘구해야…!’
그 순간.
화르르륵!
저택의 불꽃이 시바의 몸을 덮쳤다.
이에 남자가 검을 뒤로 빼더니 한 차례 물러섰다.
화상을 몇 군데 입기는 했지만, 불꽃 덕분에 검에 베이지 않은 시바.
그녀의 충혈된 눈이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쿵쿵쿵쿵.
바로 위층에 발소리가 울리더니, 단숨에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위에서도 교전이 있었나.
분홍 머리가 흔들리며, 천장에서 내려온 여성이 시바의 앞에 착지했다.
온 몸에 잿투성이가 되어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소녀.
머리 위로 솟아난 짐승의 귀에 시바가 반응했다.
"사쿠 언니?"
"…시바쨩?"
짧은 피아 식별, 하지만 말할 틈은 없다.
사쿠를 따라 내려온 남성이 바로 그녀를 압박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도망- 꺅!"
검은 옷을 입은 전사들과는 달리 샛노란 갑옷을 입은 남자.
사쿠와 같은 국목의 존재에 시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영국."
-쾅!
영국의 국목, 벨.
-위이이이잉!
저 편에 들려온 전기톱 소리에, 또 다른 형질의 두 마력이 느껴졌다.
도깨비불같은 것이 흔들리며 누군가 밤을 빠르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반야.’
요리조리 주술들을 용케 피해내며, 호쾌하게 전기톱을 휘두르는 밤.
아주 약간이긴 하지만 밤이 반야를 밀어내는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팡!
시바가 머뭇거리던 때, 교전 중 벨에게 밀쳐진 사쿠가 뒤로 넘어졌다.
-드드득!
그리고 그 앞으로 떨어지는 시멘트와 철골 덩어리들.
사쿠는 돌무더기 사이로 부적을 붙여 단단한 방벽을 만들어냈다.
시간을 잠시 번 덕에, 생각할 시간을 가진 사쿠가 판단을 내렸다.
"시바. 수연상에게 가바요."
"네…? 그치만 언니는요?"
일어난 사쿠가 양손의 건틀릿을 매만지더니, 한 손으로 바깥쪽 어깨 근육을 두드리며 콧김을 흥 불었다.
나 힘이 세요, 할 때 하는 표정이다.
"밤쨩이랑, 어떻게든 해결할게요. 센빠이니까."
웅웅!
골반에서 뻗어 나온 사쿠의 꼬리와 귀가 2배로 커졌다.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 같았다.
"그리고 수연상, 위험한 거 같으니까. 도와줘야만-"
-쩌적!
방어막에 금이 갔다.
"-아무튼 빨리 가요."
또 다시 공세를 퍼붓기 시작하는 상대.
사쿠가 턱짓하자 시바는 바로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죄송해요."
수단과 방법을 가릴 수 없는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시바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몸 표면에 푸른 기운이 들쑥날쑥 튀어나왔다.
여기서 머물면 안된다.
조금씩 섞여가는 회색 마력. 정신을 모은 시바가 발을 뗐다.
‘조금만 기다려.’
-파앙!
시바의 몸이 전투기처럼 쏘아 복도에서 사라졌다.
동반한 칼바람이 그녀의 모습을 뒤따랐다.
* * * * * * * * * *
-콰앙!
문이 거칠게 열리며, 푹 젖은 분홍 머리가 흔들거렸다.
"허억… 헉."
다 죽어가는 숨소리의 카멜리아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눈앞 광경을 지켜보았다.
"아가씨…!"
짧게나마 요원들의 침입을 틀어막아 보려다 늦어진 시간.
다행히도 그녀가 생각한 최악의 결말은 아니었다.
-뚝.
내동댕이쳐진 휠체어, 바닥에 넘어져 몸도 갸누지 못하고 있는 동백.
그리고 그런 동백을 돌볼 시간이 없는 듯. 검을 쥔 수연이 쓰러지기 직전까지 몰려 있었다.
[ 뭐야. 저 애? ]
옷이 살짝 찢어진 꼬마 소녀가 말했다.
지루하단 듯 볼을 부풀린 꼬마는, 장난감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오른발로 왼발을 툭툭 치고 있었다.
"…."
카멜리아는 넘어진 동백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숨소리가 굉장히 거칠었다.
"후우, 후…."
동백의 미약한 한마디.
"카멜리아."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
분노해 눈이 돌아간 카멜리아가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감히 아가씨를…."
당장 쏘아나갈 기세로 발을 내딛은 카멜리아의 눈앞에, 피투성이의 팔이 내밀어졌다.
"지금은, 후우. 멈춰줘요."
수연이 처음으로 움직여 그녀에게 말했다.
그림자에 가려진 그녀의 눈은 지독하게도 차가웠다.
"…가만히 있는 게 좋아요."
"예?"
-툭, 툭, 툭.
분위기와 다르게 아직까지 딴청을 피우는 꼬마 소녀.
그런 소녀의 뒤에 난처한 얼굴의 에이비가 있었다.
"…레라드."
[ 왜? ]
"슬슬 끝을-"
[ 싫어. 재밌는 게 오고 있는걸. 아!! ]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카멜리아가 수연을 바라보자, 수연은 숨을 고르며 이를 꽉 물었다.
수연이 그녀에게 속삭였다.
"저 녀석… 누굴 기다리고 있어요."
"네?"
파란 머리에 민트색 눈.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녀석은 누구보다 강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수연의 몸이 이렇게 핏덩이가 된 것도 저 여자애에게 당한 것이다.
"지금 싸워봤자 아마 개죽음을 당할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 아! ]
수연과 카멜리아의 대화를 뚫고 레라드가 돌연 소리를 내었다.
양손을 모아 뒤통수에 가져다 댄 레라드는 오빠라 불리는 남성에게 삿대질을 했다.
[ 그래 맞아…! 오빠가 저 여자를 확보하고, 내가 막으면 되는 거잖아? ]
"그러니까 누구를-"
-타앙!
저택 외부로부터 갑자기 쏘아진 빛무리.
레라드가 에이비의 몸을 후려치자, 그의 몸이 휘청거렸다.
에이비가 서 있던 곳 바닥에 거대한 구멍이 하나 새겨졌다.
-씨익.
웃는 레라드의 잇새로 수증기가 흘러나왔다.
[ …왔다. ]
쿵.
창문 사이를 밟고 들어온 검은 머리의 여성.
양 손에 권총을 든 구슬이 레라드를 보며 도발의 미소를 지었다.
"안녕?"
-탕탕탕!
총구가 끊임없이 불을 뿜었다.
좌우로 스텝을 몇 번 밟더니, 총을 피해대는 레라드.
구슬은 레라드에게서 눈을 떼며 카멜리아와 수연에게 말했다.
"우리 면식 있지? 저 남자는 알아서 해결해. 프히히."
"…넌-"
"왕이 오고 있거든. 잘 지켜보라고."
왕.
그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얼굴에 난처함이 스쳤다.
"쯧."
에이비는 즉시 손에 마력을 뿜어 창을 만들었고, 수연과 카멜리아도 전투태세를 취했다.
그리고.
탄을 피하던 레라드의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며 구슬의 배를 걷어찼다.
[ 어딜 봐? ]
"응응. 금방 놀아줄 테니까, 아가리 닥치고 있을래?"
공격을 허락한 채, 저택의 창문 아래로 함께 떨어지는 둘.
구슬은 허벅지에 박혀있던 두 마디의 쇠막대를 각각 뽑아냈다.
마력의 흐름을 끊고 있던 구속에서 벗어나자, 신체에 활력이 돋았다.
두 삼재가 서로 맞부닥쳤다.
* * * * * * * * * * * * * *
다년간의 실전으로 훈련된 베테랑 헌터들의 공통점을 꼽아보자면,
그들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결코 자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후둑, 후두둑.
정원의 여러 동상이 무너져 내린다. 풍향을 따라 들불이 제 몸을 뒤척였다.
-화르르륵!
불길과 연기가 거세 앞이 보이지 않는 공간.
검을 질질 끌며 나는 중얼거렸다.
"흑단아."
"…네!"
"이런 놈들을 상대할 땐 조심해야 해. 아주 조용히 숨통을 노려오는 것들이 많거든. 이렇게-"
담담하게 중얼거리며 옆으로 손을 뻗는다.
-팍!
흑단의 코앞, 내 손에 화살이 꽂혔다.
거칠게 진동하는 마력 화살을 아귀힘으로 짓뭉개니, 서서히 녹아내렸다.
"-약아빠진 놈이 구석에 숨어있을 테니까."
바로 옆에서 흑단이가 침을 삼켰다.
"알…. 알았어요."
"그래."
목숨은 언제든지 위험해질 수 있어.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거든.
사람의 일은 언제나 모르는 법이니까.
"일대 다수에서는 어지간하면 도망쳐. 수적 우위를 얕보는 건 바보나 할 짓이야."
-파앙! 팡!
불길 사이를 꿰뚫고 날아오는 양면의 마법들.
"아저…씨!"
첫 번째 마법은 빛 계열.
새하얀 구체가 내 눈앞에 터지며 나의 시야를 가린 뒤, 마력을 마구잡이로 흩뿌려 다음 마법의 감지 능력을 퇴화시킨다.
-번쩍!
다음 마법들은 살상 능력이 충분한 속성 마법이다.
아마도 화염창이나, 번개… 그런 류의 것들.
단순해 보이나 그렇기에 위험하다. 실력이 좋은 마법사일수록 더욱 단조로운 마법을 사용하는 법이다.
아주 자연스러운 마법의 투로.
나는 몇 번이나 이 구조를 겪어본 적이 있었다.
-쿵!
앞으로 발길질을 하자, 바로 아래에서 흙으로 된 벽이 올라왔다.
나를 향해 날아오던 마법들이 거대한 벽 앞에 가로막혔다.
-쿠콰카카카!
창과 방패.
아카데미 학생들의 훈련에서 볼법한 이것은, 프로 헌터들의 싸움에서도 꽤 자주 나오는 구도이다.
"마법은 배워두는 편이 좋아. 한 번 제압해두면, 알아서 기가 죽거든."
마법으로 인해 번져진 공중의 열상이 공간의 일그러짐과 함께 서서히 사라졌다.
나는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한 번 휘두른다.
-파시시식.
소화기를 뿌린 것처럼 저무는 들불.
주변의 소리가 바람에 먹혔다가, 귀가 먹먹해진 이후. 검은 마력으로 진동했다.
흑단의 각막에 검이 비쳤다.
-서걱!
공간을 베어낸다는 감촉. 일렬로 이어진 현상이, 세상을 잠시 두 쪽으로 나누었다.
단면에 미끄러지듯 공간이 어긋나더니, 그 틈새 사이로 마력이 퍼져나갔다.
검기(劍氣).
검은 먼 곳까지 닿아, 요원의 목을 갈랐다.
그 장면을 흑단이 멍하니 보고 있었다.
‘…인자.’
왕관을 꺼내 쓴다.
급한 상황에 대화는 필요 없다. 내 머리 위로 흑색의 가시관이 솟아올랐다.
【 1차 동화 】
신중하게.
일방적인 학살 구도로 변한 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빈틈을 내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나와 상대의 이 애매한 거리가 조절되지 않으면 아무리 나라도 시간을 끌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기를 죽여놨음에도 빈틈 하나 보이지 않는 건, 그만큼 무수한 전장을 누벼왔다는 것.
꽤 강한 놈들이다.
아무래도 빈틈은 스스로 만들어야 될 성싶었다.
-쿠구구.
마력을 일으켜 주변을 압박한다.
바닥이 아래로 꺼졌다. 쩌저적- 갈라진 대지 위로 수증기가 퍼져나왔다.
-쿠구구구!!!!
더 강하게,
-콰가가!
마력의 울림만으로 일어난 지진이 정원을 뒤덮었다.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도록 더. 지금 막지 않으면 도시째 쓸어버릴 기세로. 정신을 집중한다.
고개를 숙인 채, 검 끝을 바닥으로 향하게 내버려 두고.
나는 미동을 멈추었다.
"……."
침묵이 찾아온다. 고요한 새벽 속, 다 꺼져버린 불 탓에 시야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어버렸다.
새까만 마력이 검면을 타고 기름처럼 떨어졌다.
방울방울 떨어진 검기가 바닥에 닿자 파스스- 기화되어 사라졌다.
이러한 어둠 속에도, 우리는 잘 볼 수 있다.
-스스.
지금.
-까앙!
휘어진 검기가 서로 맞부딪혔다.
흑단이 밀려나지만, 지금 이 순간 녀석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 하나의 전력이라도 나를 노리지 않으면 내 목이 떨어질 일은 없을 테니까.
-툭.
검은 갑옷을 걸친 한 남성이 내게 검을 휘둘렀다.
용기 내어 왔지만, 꽤 몸이 둔하다.
찌를까. 생각하려던 찰나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머리 위에 기척이 하나다. 등에도 하나 있다.
지금 앞에 놈과 구태여 싸워주며 각을 내어줄 필요가 없었다.
-챙!
위에서 내리친 일격을 받아내며, 스텝.
반달을 그린 발의 방향을 따라 고개를 꺾어 다음 검격을 피했다.
-펑!
나는 주변에 짙은 농도의 마력을 퍼뜨렸다.
마력의 움직임으로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는 이들에게는 이것이 적격이었다.
파훼법은 한 가지.
보통 몸에 두르는 마력과 바깥에 방출한 마력의 질에는 차이가 있기 마련이라, 그 질의 차이를 꿰뚫어 보고 상대의 위치를 판가름하는 것이 정공법이지만.
못할 거다.
신체에 두른 마력과 주변에 뿌린 마력의 질이 동등할 경우.
위치를 알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서걱!
마법으로 오감까지 가려준다면, 금상첨화.
경지를 넘은 마력량이 뒷받침을 해준 덕에 가능했다.
나는 검으로 차근차근히 상대의 목을 쳤다.
"흡!?"
"큿!"
차례차례 쓰러진 검사들이 바닥에 드러눕는다.
"…남은 놈들은."
일곱. 갈 길이 멀다.
조금 더 속도를 높여보자. 나는 검을 쥔 채 단전을 개방했다.
-웅웅!
머리 위의 가시관이 거칠게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