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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를 따먹다-471화 (471/657)

< 471화 > 첫 귀목 쟁탈, 그 이후 (完)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시바는 두 눈을 의심했다.

그녀의 눈앞에 크고 귀여운 골든 리트리버 한 마리가 사육자에게 교육을 당하고 있었다.

"맵쫀맛-"

"안 돼, 먹지 마!"

멈춰!

이쑤시개에 가던 손이 우뚝- 별의 사자후에 사냥꾼이 멈췄다.

"…떡볶이."

시무룩해진 사냥꾼이 고개를 숙였다. 침울해져 울렁거리는 눈망울이 꼭 호수같이 맑았다. 왕 크니까 왕 귀엽다.

생긴 건 멀쩡한데 맵쫀맛이 대체 뭐길래 저러는 걸까. 맵고 쫀쫀한 맛? 아니면 쫀득?

"이모… 그래서 무슨 애기를 하려고 온 거에요?"

"아 그러니까. 으휴."

사냥꾼의 머리를 두드린 별이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이 사람이 앞으로 너한테 검술을 가르칠 사람이야."

"네?"

떡볶이에 미쳐 사는듯한 이 사람이 내 교관이라고? 시바가 사냥꾼을 돌아보았다.

"…잉."

아직까지도 떡볶이를 입에 넣지 못한 게 꽁해서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는 그녀.

별은 되묻지도 않았는데 제 발이 저려 이것저것 변명을 늘여놓았다.

"엉뚱한 구석이 없지는 않은데… 그게, 싸움은 잘해. 이 시점에서 왕에게 맞설… 거의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고."

실감이 안 날 뿐이지 사냥꾼에 대해서는 시바도 들은 바가 있었다.

단조로운 헌터네임인 ‘사냥꾼’은 본디 한국에선 흔히 볼 수 있는 이름이었지만, 몇 년 전부터는 오직 한 여성을 해당하는 말이 되었단다.

소속 없는 용병인 ‘사냥꾼’은 물흐르듯 나타나 많은 길드를 영위하며 무수한 S급 던전을 돌파했다고.

"정말, 이 사람이 그 사람이었어요?"

‘사냥꾼’은 검성 이례 최고의 검사다.

경지를 이미 넘었다고도 추정되지만, 워낙 베일에 싸여있어 아무도 그녀의 정체를 모른다던.

"……말도 안 돼."

"…?"

시바의 시선에 사냥꾼이 잠시 떡볶이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빠안히, 시바를 바라보는 사냥꾼.

"삐, 왜 그러세요?"

의자에서 일어난 사냥꾼이 시바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시바가 긴장해 숨을 삼켰다. 별이 제지하기 위해 다가가려던 순간, 사냥꾼이 뻗어온 손이 시바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귀여워."

더듬더듬, 조심스런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어온다.

시바는 당황했다. 몸이 굳었던지라 움직일 수 없었다.

뭔가 느낌이 묘했다.

-시언,

-시언이 아니라 시헌.

-시헌.

-왜?

-나도 만져도 돼?

스멀스멀 눈가를 스쳐지나가는 기묘한 광경.

-삑?

금발의 소녀가 머리를 두드리자, 새싹 시절 시바가 경련하며 몸을 떨었다.

-삐이이이이익!!!!

-삐이잇, 삐에에에.

-시, 시헌… 내가 너무 세게 만졌나 봐!

-얘가 낯선 사람을 안 만나봐서 그러나?

[무서워. 아빠. 아빠 안아줘.]

이 과거는 대체 무얼까.

"…저기."

"응?"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어요?"

고개를 기울인 ‘사냥꾼’이, 시바만 볼 수 있게 자그만 아티펙트를 벗었다.

인식이 저해가 풀린 얼굴은 처음 본 얼굴보다 훨씬 예쁘고 아름다웠다. 마치 좋은 것만 골라 하나하나 깎아놓은 조각처럼 말이다.

"몰라도 돼."

‘사냥꾼’의 조용하고 어벙했던 말투가, 한 순간에 또렷해졌다. 예쁜 미소가 그녀의 입에 걸쳤다.

"야 너 뭐해."

"?"

별의 참견에 재빠르게 아티펙트를 가동한 ‘사냥꾼’이 고개를 기울이자, 별이 한숨을 쉬었다.

슬그머니 올라간 ‘사냥꾼’의 손은 이미 떡볶이로 올라간 상태.

"그만 먹어!"

"잉."

시바는 여성의 정체를 여전히 알지 못했다.

"후우, 아무튼 본론만 말할 게. 시바 너는 제대로 실력을 갖출 때까지, 어디 나갈 생각하지 마."

"…!"

땀을 닦은 별이 ‘사냥꾼’에게서 빼앗은 이쑤시개를 휴지통에 버리며 말했다.

그 말은….

"허락해주는 거…에요?"

별이 듬직하게 웃었다.

"응. 이모가 힘 좀 썼어."

* * * * * * * * * * *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가시지 않는 새까만 암영 바깥으론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

벌써 2주째. 베개에 머리를 올린 동백은 어떤 생각도 하지 않는 멍한 상태였다.

그녀에게 들리는 소리라곤 자신의 심장소리나, 꿈틀거릴 때 들려오는 살과 이불이 스치는 부스럭소리가 전부였다.

동백은 생각했다.

‘…대화하고 싶어.’

이 끔찍한 지긋지긋함에서 벗어나서, 누구라도 좋으니까 말 한번 섞고 싶다.

감정을 나누는 고마운 일 같은 건 바라지도 않는다. 날씨가 어떻냐는 둥 어떤 주제라도 좋으니, 동백은 사람과 말을 나누고 싶었다.

잠을 자려 애를 쓴다. 그렇게 한참을 자다가,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으면 최대한 상상을 하며 시간을 보내보았다.

부모에 대한 생각.

‘카멜리아.’

데스칸소 가든의 평화로운 풍경. 시바가 그려준 꽃그림.

그런 생각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버텨본다.

‘…….’

하지만 동백은 상상하며 시간을 보낸 것도 슬슬 그만두게 되었다.

행복한 상상이 지금 자신의 처참한 상태를 더욱 부각시킨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오히려 나만 비참해지니까. 눈물이 나니까. 어쩔 수 없이 생각을 멈추고, 기다리는 것이다.

동백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어떤 것도.

형태가 사각인지 삼각인지도 모를… 이 공간에 갇혀서, 침대에 누운 채 다음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을뿐이었다.

‘….’

왕은 끔찍한 사람이다.

왕은 이렇게 가두어 시간을 보내는 과정 하나하나가 자신을 약하게 만드는 걸 알고,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동백은 이를 안다. 그래서 더욱 이를 꽉 물고 버티기로 했다.

그렇다고 그게 효과가 있었나?

-똑똑똑.

"…들어와요…."

아니었다. 동백이 알게 된 건 단 하나뿐이었다.

내가 엄청 여린 사람이고, 외로움을 잘 타며, 슬픔이 많다는 거.

상대의 수법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 끔찍한 외로움이 싫어서, 그 사람을 기다리게 된다는 거.

"기다렸냐?"

"…아니요."

이 자그만 한 마디가, 고문같은 시간을 버티게 되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

죽도록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동백은 이 사람이 없으면 움직이지 못한다. 눈이 되어주는 것도, 저 남자고. 팔과 다리가 되어주는 것도 저 남자다.

하반신에 찝찝한 불쾌감을 지워주는 것도, 옷을 입혀주는 것도….

카멜리아가 해주었던 모든 것을 이젠 그가 해주고 있었다.

동성이 아니라 이성에게,

그것도 목령왕이라는 최악의 존재에게 말이다.

그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동백은 어떻게든 답을 찾으려 애를 썼지만, 눈과 사지가 없는 불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무것도 없었다.

"밥은?"

"…배고파요."

대화를 한다.

말을 할 수 있는 건 축복이었다.

"눈 떠 봐."

텅 빈 눈을 어루만진다.

생명체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그런 걸론, 치료 할 수 없다니까요."

"차차 된다니까."

자신을 억누르고 하는 말.

눈을 다시 뜰 수 있다는 사실 여부를 떠나. 동백은 단지 그 조그마한 행위에 이해할 수 없는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화장실은."

"마…마려워요."

"어떤 거."

"작은 거…."

-조르르르.

이제는 이런 수치스런 일조차도.

어느덧 익숙해져 버렸으니…. 귀족이라 불리던 사람의 모습에서 거리가 많이 떨어지지 않았을까.

동백은 매번 생각한다.

"입 열어."

"…아아."

하루나 이틀마다 한 번씩 오는, 이 짧은 시간.

그나마 입을 열고 말을 할 수 있는 이 시간이 조금이라도 길어졌으면 좋겠다고.

말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보지 못하고, 움직일 수도 없는데. 대화까지 못하는 사람이 되기는 싫었다.

"…."

-뚝.

왕이 내민 샐러드를 받아먹은 동백의 얼굴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까득.

샐러리가 씹힌다. 그 샐러리가 물이 되도록 씹었다.

목에 넘어가지 않게, 천천히 곱씹으면서 동백은 삼키지 않았다.

-탁, 타닥.

그러면 도저히 보다못한 왕이 이곳에 앉아 작업을 시작한다.

소리였다. 미쳐버릴 것만 같은 침묵만이 가득했던 이곳에 사람의 활동이 자국으로 남았다.

"안 먹어?"

"…씹고 있어요."

"참 오래도 씹네."

"당신, 밥은."

"후딱 먹고 왔어. 자. 아~"

입 안에 들어오는 방울토마토를 씹지 않고 굴렸다.

질긴 껍질은 오래도록 씹을 수 있다. 실수로 삼키지만 않는다면야.

"너, 이 괜찮은 거 맞냐? 사람이 이렇게 늦게 먹을 수가 없는데."

"…닥쳐요."

증오스러운 사람이, 제일 의지되고 있다. 이 비좁은 세상에 남은 사람이 왕밖에 없으니 당연했다.

마음이 그렇게 움직이는데 너무 질리고 괴로웠다.

사랑했던 사람 생각이 난다. 평생 함께한 카멜리아와, 몸에 문제가 있어도 선뜻 친구가 되어준 시바.

그런데….

"동백."

왕이 건조하게 말했다.

"…?"

"내일 외출이다. 대충 의안이 만들어졌다니까. 시착 해보자고."

"에…."

"못 나으면 어쩔 수 없는 건데. 적어도 볼 수는 있어야 뭘 할 테니."

왕의 말에 동백이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왜 자꾸 나는 걸까.

호의가 아닌 것 같은 호의에 쓸데없이 감동을 먹어서일까.

아마 그럴 것이었다. 지금 자신은 정신이 유약한 상태니까. 어떻게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는 왕의 수작이 분명했다.

혹시 이 사람은 생각보다 착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도록 유인하고 있는 거다.

동백이 중얼거렸다.

"…물 좀 주세요."

"어."

얼마 지나지 않아 패트병 입구의 딱딱한 감촉이 동백의 입술에 느껴졌다.

물이 조금 흐르긴 했지만 동백은 물을 곧잘 받아 마셨다.

-꿀꺽, 꿀꺽.

최대한 많이, 음식보다 더 많이 물을 마셨다.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야?"

"……목이 마른 걸 어떻게 해요."

"그러니까 항상 침대가 그 모양이지."

"…."

"새벽에 한 번 더 들려야겠어."

한 번 더 온다.

동백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런 짓까지 동원하려는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 * * * * * * * * * *

요 며칠간 동백의 머릿속이 많이 복잡해 보였다.

새벽에 찾아가니 역시나, 이번에도 실수를 저질렀다.

"…늦었어요."

"인마."

조금 더 참지.

하필 메리가 같이 자달라며 떼를 쓰는 바람에, 그 몇초가 탈이 되었다.

흥건한 이불을 치우고 나는 동백을 들어올렸다.

부끄러워하는 기색은 남아있지만. 이제는 벗겨지는 것도, 씻어지는 것도 익숙해진 동백이었다.

"오늘… 외출인가요?"

"어."

"…설마, 안겨서 가는 건."

"휠체어를 쓸 거야. 의수와 의족은 쓰지 않을 거고."

"그렇군요."

털이 조금 난 음부를 살살 문질러 씻었다. 동백의 잘린 하반신이 조금 움찔거렸다.

평소처럼 씻겨주고, 말려주고, 시트와 이불을 교체하니 끝이 났다.

"오늘로 며칠이지?"

"…16일이요."

잘도 세고 있었네. 하기사 여기서 할 일이 뭐가 있겠냐.

침대에 앉은 나는 힘없이 누운 동백을 바라보았다.

‘카멜리아는, 일주일 후 정도면 될까.’

동백의 수발은 둘째 치더라도 조금은 뜸을 들이는 게, 카멜리아의 절박함을 배로 끌어 올려 줄 것이었다.

‘그건 둘째로.’

동백이 꽤 잘 버틴다. 이만한 정신력은 솔직히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눈과 팔다리만 회복하면…. 홍연에 버금가는 내정의 인재일 수도.

-꿈틀.

"…갔어요?"

"아니 아직."

"흣. 간 줄, 알았어요."

말 없이 너무 오래있었다. 나는 동백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가면 뭐 문제라도 있어?"

"아니요… 그건 아닌데."

"그럼."

"……몰라서, 묻는 건가요?"

나를 다그치는 말에 웃음을 짓진 않았다.

-째깍.

약간의 시간이 더 지났다. 동백이 꿈틀 거렸고, 나는 내가 아직 남아있다는 표시로 어깨를 잡았다.

동백의 얼굴이 한층 편해졌다.

"잔인한 사람…."

"어."

"여기 있으면서… 당신 때문에,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몰라요."

"그렇겠지. 오래 있었으니."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그 말투도 싫어요. 그런데, 더 비참한 게 뭔지 아세요?"

동백은 체념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잔인해요. 그런데…. 그 잔인함 때문에 제가 살고 있어요."

약간 추상적인 말이지만 이해는 된다.

내가 만든 공간에 가두어져, 죽고 싶은데. 또 나와 만나는 걸 기다리면서 살아가고 있다.

"미칠 것 같아요… 진짜로."

나는 건조하게 답했다.

"그러냐."

"…조금만 저랑 더 대화해주세요."

"방법을 마련해 볼게."

"마음의 준비도… 끝났으니까."

동백의 말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밤이 늦었다.

"간다."

"읏, 우읍…."

내 말에 울음을 터뜨리는 동백.

세계수나 다른 녀석들과 만나게 해주고 싶지만, 아직 동백에게는 신뢰가 가지 않았다.

심지어 나와 구슬은 아직 일이 많았다.

동백이 바라는 것을 해주려면, 적어도 며칠 정도는 더 기다려야 했다.

-쿵.

문을 닫자, 그 문 옆에 서있는 구슬이 질린다는 듯 입꼬리를 떨었다.

"잔인한 사람."

너도 똑같다.

"…쟤도 완전히 꺾였네. 노리고 한 거지? 쉽게 다룰려고."

"신앙이 너무 컸어. 꺾어줄 필요도 있었거든."

"하."

웃은 구슬이 조그만 마석을 내밀었다.

"구해 왔어. 마지막 재료. 아무리 귀목이고…예언의 여자라곤 하는데. 대체 쟤를 위해 얼마를 쓰는 거야?"

"언제 어떤 상황에 필요할지 모르니까."

결과가 좋아도, 잔인한 인간이라는 평가는 피할 수 없을 거다.

나는 구슬의 마석을 받아들였다.

"나흘 내로 끝내자. 카멜리아는 내가 접근하지."

"오키."

구슬이 내 앞에 바짝 다가가 팔짱을 꼈다.

그렇게 다시 일터로 돌아가는 길. 문득 동백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당신은 잔인해요. 그런데…. 그 잔인함 때문에 제가 살고 있어요.

많이 무거운 한 마디. 가슴에 새겨두되, 머리로는 떨쳐버리자.

나는 허리춤의 검집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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