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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를 따먹다-482화 (482/657)

< 482화 > 왕의 일곱 탑 (2)

왕의 일곱 탑.

이는 목령왕이 만들었다 전해지는 불가사의한 건축물로, 현대의 던전과 매우 흡사한 구조를 띤다.

【 탑 】은 다음 대의 목령왕을 위한 시련의 용도로 사용된다.

동시에 왕을 잃은 신하들의 은거지, 플라워와 세계수로부터 신하를 지키는 역할을 맡는다.

이러한 ‘탑’은 현대 기술로는 구현할 수 없는 것들이 쉽게 관측되곤 한다.

세계수의 거처처럼 분리된 차원 안에, 생태계를 꾸린 마물과, 각종 마석들까지. 탑이 가지는 가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도 그럴 것이, 왕이 가진 모든 권능을 총집산해 만든 것.

서적에는 과거 목령왕이 무찌른 수목의 힘을 구현하고, 그에 관련한 힘으로 적을 퇴치한다고 기술되어 있었다.

‘그 말에 의하면, 시간의 탑은… 하나 밖에 없지.’

아마도. 백양.

시간의 세계수의 힘을 구현해놓은 것이 아닐까.

그 이름을 다시 떠올릴 줄은 몰랐다.

백양, 그녀는 나를 과거에 보내주었던 시간의 세계수였다.

어쩌면 스승님 이상으로 지금의 나에게 영향을 준 녀석이기도 했고.

그녀는 왕에게 권능을 빼앗기지 않았다고 했지만, 왕은 어쩌면 시간을 흔드는 또 다른 수단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긴 그 정도가 되어야, 백양을 죽일 수 있었겠지.

‘나머진 직접 가봐야 알겠지.’

불을 끄고,

잠자리에 머리를 뉘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옆자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왜."

"너무, 그, 자연스러워서… 아무 말도 못했는데."

동백이다.

"왜, 함께 자는 거에요?"

떨떠름한 목소리로부터 당황한 기색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나는 동백의 허리를 손으로 감았다.

팔다리가 없는 몸뿐이라 그런가. 소녀는 저항 없이 내 품에 쏙 들어왔다.

팔에 힘을 주어 껴안자 동백이 침울음을 냈다.

"끄으응. 오늘도, 하는 거예요?"

"뭘?"

"알잖아요. 그거요…. 그거."

스르륵- 허벅지를 비비며 이불과 마찰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날 이후로, 저. 얼마나 아팠는지 알아요?"

"어디가?"

"그, 그게. 옹이 말이에요."

그놈의 옹이는, 무슨 보지의 고상한 표현이라도 되는가.

세계수부터 귀족들까지 남녀노소를 가리는 법이 없었다.

"당신이, 그… 너무 거칠게 하니까."

"하니까?"

처음엔 여자들이 남자들을 흥분시키려고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하다 보니 조금 점잖은 표현으로도 사용되더라.

옛날 초등 교육 때나 가르치던, 잠지라는 표현같이 말이다.

쭈뼛대던 동백의 얼굴에 땀이 삐질 흘렀다.

"거기…찢어졌단 말이에요."

찢다니. 자신의 순결을 말하는 건가.

"원래 그래."

"몰라요. 엄청, 엄청 아팠다구요. 당신이 알아요?"

"내가 어떻게 알아."

"우윽."

삐진 동백이 이불 안으로 얼굴을 숨겨버렸다.

팔 다리가 없어, 완전히 들어가지는 못하고. 이불 입구에 정수리가 보여 손으로 그 부분을 툭 찔렀다.

"아얏!"

울상을 지은 동백이 다시 이불 위로 기어왔다.

첫경험.

아프긴 할 추억이었을 터다. 아무리 흥분을 시켜놔도 크기가 원체 커야지.

동백과 관계를 하게 되면서 얻은 것은 아직 나도 모른다.

예전처럼 상태창으로 바로바로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만약 효과가 있다면, 나중에 나타나지 않을까.

"저…엄한 짓 안해요?"

되돌아온 동백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하고 싶어?"

"아니요!"

단호했다. 정확히는 단호한 척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말이 하고 싶다는 것 같은데."

"침실에 절 데려온 건 당신이었잖아요. 그러니까 그, 그걸 하는 줄-"

"기대했어?"

나야 어느쪽이든 좋다.

성욕을 비울수록 이성을 되찾을 수 있으니까. 상대를 떠나, 누구와의 관계도 마다하지 않는 이유다.

가시밭길을 밟은 동백은, 아차.

입꼬리를 떨면서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하기 싫어요. 그런 것치곤 아까 말할 때의 표정이, 마치 산타를 기다리는 아이같았지만.

"그럼 그냥 자자."

한 번 떠보자. 동백이 침을 삼켰다.

"네. 그럼, 그냥 자요…. 푹 자요."

아쉬운 티를 팍팍내는 동백. 자기는 제 감정을 알고 있을까?

손을 움직여 엉덩이를 움켜쥐자, 동백이 깜짝 놀라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

고개를 올린 동백이 나를 노려보는 듯했다.

두근두근.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어깨를 잡고 껴안자, 부비적. 볼을 비벼오는 동백.

"……."

후욱후욱, 그녀의 숨이 거칠었다.

속궁합이 심하게 좋으면 가끔 이런다. 도저히 머릿속에서 그때 경험을 떼어놓을 수 없다고.

아마 동백도 그런 경우가 아니었을까. 나야 익숙해져서 괜찮지만, 그녀는 아니다.

"저기…. 왕, 님?"

"응."

"세삼, 스럽긴 한데. 그, 그게. 저 그쪽 이름도 모르고, 살았다 싶어서요."

잠옷 안에 손을 집어넣자 애액이 충분히 흘러나와 있었다.

옅게 웃으니, 얼굴을 빨갛게 붉히는 동백.

기분 탓일까?

머리카락이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름은, 뭐에요?"

머지 않아 그녀의 입에서 애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 * * * * * * * * *

문이 열리면서, 카멜리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침대 위에서 팔과 다리가 완전히 묶인 채. 이쪽을 째려보고 있는 카멜리아.

나는 앉지도 않고 문 앞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카멜리아."

"…."

"조금 더 살갑게 구는게 좋을 텐데."

"……."

텅빈 눈빛으로 카멜리아가 적의를 내비쳤다.

그때 그 복장 그대로, 주름 진 메이드복을 입은 그녀는 언뜻 보기엔 고결해보였으나. 이미 충분히 더럽혀진 몸이었다.

정신도 그렇고 몸도.

마음만 먹으면, 그녀를 취하는 건 들꽃을 꺾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철컥.

다만 지금은 보다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문을 열고, 동백을 들이자 카멜리아의 눈이 동그랗게 트였다. 그녀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아가씨?"

의수와 의족을 착용한 채, 휠체어에 끌려 모습을 드러낸 동백.

그녀는 카멜리아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슬그머니 미간을 찌푸렸다.

"카멜리아."

"아가씨, 읍, 잠깐. 이걸 풀어, 풀어주세요."

나는 동백을 들어 의자에 앉았다.

동백은 아무런 반항 없이 내 품에 안겼다. 의수가 멋대로 움직인 덕분에, 그림은 마치 동백이 나를 끌어안은 것처럼 되었다.

"아, 아가씨."

카멜리아가 충격에 중얼거렸다.

"카멜리아."

"아가씨… 왜."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제 말을 들어주세요. 전 이 사람 밑에서 일하기로 했어요."

동백의 머리색은 분홍색이었다.

카멜리아조차 처음 보는, 그런 머리색.

"약속도 했어요… 당신은 건드리지 않기로. 대신 제 밑에서 일하게 해주기로. 그, 그렇죠?"

어깨를 움직여 내 몸을 두드린 동백이 불안하게 물어왔다.

아직도 약간의 의심은 남아있는 모양이라, 나는 동백의 품을 끌어안고 얼굴을 맞대었다.

동백은 조금 머뭇거리더니, 입술을 내밀어 얼굴에 입맞춤을 남겼다.

"그만… 그만!"

보다못한 카멜리아가 기겁해 소리쳤다.

"…더는 보고 싶지 않아요. 아가씨."

"카멜리아. 왕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그냥, 저희 모두가 피해자였어요."

"제발."

"금방 알게 될 거에요. 스스로를 다치게 하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줘요. 그리고 며칠만, 저랑 이곳에 남아줘요. 부탁이에요. 전 카멜리아가 상처받는 걸 원치 않아요."

이미 상처 받을대로 받아서 망가졌다만.

카멜리아는 동백의 말을 들으며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쇠사슬에 매달려 어깨를 들썩이며, 동백의 뒤에 있는 나를 힘이 빠진 눈으로 보고 있었다.

동백의 설득은 계속되었다.

"이 사람이… 제 눈을 고쳐주겠다고 했어요."

"…!"

"처음에는 믿지 못했고 화도 냈는데. 조금은, 아주 조금은 진전이 있는 것 같아요."

목소리를 떨면서, 고개를 숙인 그녀.

"평생 앞을 못 볼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제, 카멜리아의 얼굴을 또 볼 수 있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항상 몸이 들떠요."

"…아가씨. 그래도 전, 저 남자를…. 아가씨를 겁탈한-"

"제가 허락했어요."

카멜리아는 이를 꽉 깨물었다.

"평생 모셔온 세계수님은 절 죽이려 했고, 이 사람은 절 고쳐주려고 했죠. 방식에 과한 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영지를 지켜준 것도, 이 사람이었잖아요."

카멜리아는 내게서 눈과 귀를 닫았다.

하지만 동백의 말만은 거부하지 못했다. 평생을 모셔온 주인이었으니까.

"제 얼굴을 봐서라도. 이번만, 절 따라주시면 안될까요?"

카멜리아는 말이 없었다.

나는 동백을 다시 휠체어에 앉히고 카멜리아의 수갑을 풀어주었다.

구속에서 풀린 카멜리아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전…아가씨를 구하려고."

"그럴 방법은 없어요. 그리고…. 저도 이제는, 나가고 싶지 않아요."

동백을 거둔 시점부터 그녀의 미래는 정해져있었다.

카멜리아는 동백의 명령을 거스르지 못한다. 귀족과 천민의 차이로도, 평생을 함께해 온 동반자로서도 그렇다.

동백은 말했다.

"카멜리아. 이게… 최선이에요."

내가 했던 말과 똑같은, 어디에 끼워맞추어도 될 그 말이었다.

* * * * * * * * * * *

시간의 탑.

왕이 남겼다고 전해지는 탑에 관한 서적들이, 테이블의 앞에 중구난방하게 펼쳐져 있었다.

-스륵.

"차원…. 세계선."

책을 읽어내린 ‘사냥꾼’이, 입술을 모아 삐죽 내밀었다.

끝이 날카로운 볼펜이 그녀의 입술을 몇 번이나 두드렸다.

‘사냥꾼’은 학자로서의 이름도 꽤 널리 알려져 있었다.

몇 가지 아티펙트를 두드린 ‘사냥꾼’은, 동그란 눈을 깜빡거리며 논문들을 천천히 읽어내렸다.

로브 안에 튼실한 가슴 때문에 약간 시야가 가려지지만.

이 가슴은 세상의 모든 남자들의 꿈을 담고 있었다.

"이 안에선, 논리가 통용되지 않아."

‘사냥꾼.’

산수유는 로브를 벗으며 진지하게 눈을 좁혔다.

그녀의 뒤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산수유."

"응."

"준비는 잘 되고 있으신가 해서요."

"문제 없어, 다 잘 풀릴 거에요. 차원의 뒤틀림에 대한 대책도 완벽해요."

산수유의 옆에는, 오래전 현자의 모습을 연상시킬 정도의 책들이 쌓여 있었다.

산수유는 등을 돌려 현자를 바라보았다.

현자… 아니.

전 현자라고 하는게 옳을 것이다.

과거 방황하던 산수유를 잠시 거두었던 현자. 알바.

"…이 탑을 공략하면, 시헌이의 단서를 얻는다는 거."

살린다가 아니라. 단서다.

별이나 세영은 그렇게 알고 있겠지만 산수유는 달랐다.

"사실이죠?"

"머지않아 알게 되겠죠. 어쨌든 시간의 탑은, 공략되어야 옳아요."

"뒤숭숭한 말이네요."

똑 부러진 산수유의 모습에 알바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산수유의 힘은 과거, 불멸을 각성한 시점에서 현자조차 파악하지 못한 불가해한 존재가 되었다.

일단은 산수유의 신분도 마련해주고, 갈 길도 마련해주었다지만. 어디까지나 과거의 이야기.

코르너스 가문이 가지는 특유의 분위기가 이젠 산수유에게서도 느껴지고 있었다.

"…만약."

산수유는 논문을 접으며 말했다. 그 눈에 힘이 담겼다.

"당신이 시헌일 어떻게 하려고 한다면. 가만히 있진 않을 거에요."

성숙해졌다.

"저도 제 목숨이 아까워서요. 그럴 일은 없을 거에요."

"시헌인 내꺼에요."

"……."

…아닌가?

옛날에 보여주던 그 어린이같은 모습은 지워지긴 했지만, 이시헌에 관해서만큼은 집착을 잃지 않았다.

저조차도 초기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을 정도.

현자는 그런 산수유에게 미소만을 지어 보였다. 언제나 그렇듯 속을 알 수 없는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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