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세계수를 따먹다-491화 (491/657)

< 491화 > 꿈 속에서 (2)

-답답한 ㅅㅋ

‘세영’의 카톡에 저장된 이시헌의 별명이었다.

"그, 고맙습니다."

어수룩하게 감사인사를 하는 이시헌을 보며, ‘세영’은 속으로 몇 번이나 한숨을 내쉬었는지 모른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호구처럼 살 수가 있을까?

친구 관계에서도, 여자 관계에서도 일관적일 것만 같은 저 남자의 모습은… 뭐랄까 불쌍한 동물을 보는 듯한, 호감보단 동정이 앞서 들었다.

‘어이구…우리 시골집 백구 같애.’

비에 쫄딱 젖은 버려진 강아지라거나 발이 다쳐서 절뚝거리는 고양이.

어딘가 하나 똑부러지지 못하고 시킨답시고 모든 일을 도맡아하는 그 모습을 보고 있을 때면, 참 이상하게도 눈이 많이 가는 사람이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

많이 피곤하긴 한가.

며칠에 걸쳐서 해야 할 일을 하루에 몰아서 하고, 그리고 그 일을 몇 주씩이나 반복하고 있다.

체력이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이런 격무는 감당치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런 면에선 이시헌의 정신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됐어요."

인수인계할 때까지만 해도 일 잘하고 똑 부러진 친구인 줄 알았는데.

고문관은 아닌데…. 참 뭔가 아쉬운 친구다.

‘세영’은 머리를 정돈한 뒤 어깨를 으쓱였다.

"나중엔 이렇게 쌓아두고 일하지 마세요."

"아, 네."

"…그리고 고마우면."

그러고보니 이번달 생활비가 빠듯하던가. 베푼 만큼 받아내자는 것이 이세영의 좌우명이었다.

베풀기만 하는 이 남자의 행동과는 정반대로 말이다.

"밥 아님 술이라도 사요."

"아, 네. 언제든지 사드릴 수 있어요. 언제 살까요? 하하."

머쓱하고 어벙한, 등신같이 웃는 이시헌.

이것봐라. 또 댕댕이 행동이다. 가만 보고 있으면 피식 헛웃음마저 피어오른다.

"나중에요."

서로 인사를 나눈 뒤에 각자 밟는 퇴근길.

‘세영’의 등 뒤를 따라 하나의 실루엣이 따라붙었다.

목인(木人) 이세영이었다.

‘요것 봐라?’

【 아무리 봐도, 세영님이 맞네요. 】

‘얘 핸드폰 봤어? 이시헌 답답한 새끼래. 크흐흐.’

어느새 훔쳤는지, 세영은 ‘세영’의 핸드폰을 오른손에서 까딱거리다가 핸드백에 자연스레 집어넣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설마 이 세계에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 있을 줄은. 그것도 무려 같은 회사에 친해지기 쉬운 선후배 관계.

‘야.’

웃은 세영이 아련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우리 어쩌면 정말로, 운명이 아니었을까.’

【 ? 】

‘왜. 뭐, 왜.’

【 세영님도, 숫처녀같은 면이 있었군요. 】

‘뭐래…. 나만큼 낭만적인 사람이 어디 있다고.’

죽은 남자친구 살리려고 온갖 지랄 다 해봤다. 이런데 안 반하고 배겨?

가슴을 활짝 핀 세영이 자신있게 미소지었다.

【 그건 보통 여성상이라기보단… 남성상에 가깝지 않을지. 】

‘알빠야? 행복하면 돼.’

그건… 그렇긴 하다.

인정한 백양이 수줍게 웃었다.

【 행복하면 됐죠. 】

‘그리고 쟤, 은근 성격 좋네.’

자화자찬인가, 하여 백양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세영은 쓴입을 다시고 있었따.

‘나는 안 그랬는데. 그래도, 이 세계에서는 좀… 성정이 나쁘진 않나 봐.’

가문을 박차고 나와, 범죄를 저지르며 꾸역꾸역 살아온 세영이다.

당연히 이 세계의 ‘세영’과는 차별점이 있고. 그것으로 자격지심을 가져서는 안된다.

백양이 세영을 지켜보았다. 세영은 어딘가 후회되는 듯, ‘세영’의 등을 빤히 보고 있었다.

‘나도, 제대로… 이렇게 만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세영과 시헌의 첫만남은 낭만적, 아니 정상이라 보기에도 여러 흠이 있었다.

당장 서적에 나올 만한 내용과 비교해볼까.

방금 시헌과 ‘세영’이 따스한 드라마에서 볼 법한 장면이었다면. 저쪽 세계의 시헌과 세영은…….

‘그리스 로마 신화.’

【 …갑자기요? 】

그런 거 있잖냐. 제우스가 여자 따먹고 처로 삼았는데, 그 관계가 어떻게든 유지되는 거.

세영과 시헌의 첫 관계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음. 나도 쟤처럼 좀 더 여유있고…. 죄도 짓지 않았으면, 아카데미 교사로서 시헌이랑 만난 뒤에, 적절한 관계로….’

중얼거리는 세영. 그런 그녀의 눈이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잠결에 중얼거리는 듯한 모습에 심상치 않음을 느낀 백양이 소리를 질렀다.

【 잠깐! 】

‘…왜?’

【 세영님. 방금, 눈이 풀려 있었어요. 】

백양이 쾌재를 불렀다.

【 대충 알겠네요. 】

이 달콤한 꿈은 이세영이 내심 품고 있던 열등감을 자극하고 있었다.

-나도 쟤처럼.

-적절한 관계.

세영이 시헌과의 관계를 떠올리며 항상 아쉬워했던 것들.

그 감정을 부풀리게 해서….

왕의 권능은 이런 식으로 인물의 속내를 갉아먹으려 하는 걸까?

【 왜 달콤한 꿈이라고 했는지, 알겠어요. 】

이 공간이 실존하는 차원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하지만 하나는 알 것 같았다. 이 꿈에 취해서는 안된다는 것.

하지만 이윽고 떨어진 세영의 말에 백양은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소리야, 속내를 갉아먹긴.’

【 …네? 】

그녀의 말에서도 어딘가 괴리감이 느껴졌다.

‘까마귀’를 창설하고 온갖 거물들과 교류하며 능숙하게 키워 온, ‘의심’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 세영님…? 】

‘…열등감은 아니야. 그냥 보는 거야. 상상하는 것도 안 돼?’

세영은 입술을 삐죽이며, 양 손을 모았다.

‘그냥…. 작은 소망일 뿐이야.’

백양은 그 감정마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럴지라도 저 둘이 잘되는 모습을 본다면 그때도 세영은 똑같이 생각할까?

【 …할 말은 없지만, 자신의 감정을 경계해주세요. 】

‘일단 알았어.’

세영의 시선은 지하철로 향하는 ‘세영’의 등에 꽂혀 있었다. 이는 ‘세영’이 시야에서 사라지기까지 떨어지지 않았다.

*****

어리고 귀여운 부인이 생겼다.

애교도 부리고 지고불변한 사랑도 주며, 누구보다 남자를 일편단심으로 생각해 주는 꿈에 그릴 아내.

"그, 왜 이렇게 빤히 봐요… 사형?"

왜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거지?

내가 당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되새겨 본다.

빛에 관하여 조사를 하던 도중 이세영을 만났는데, 그녀에게서 도망치던 와중 빛을 목격했고, 이 차원으로 빨려 들어왔다.

무척이나 흐릿한 기억 탓에 원래 내가 이 세계의 인물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선 안된다.

나는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다.

"저기."

천도가 나에게 안겨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품 안에 있는 소녀의 여체는 내가 보았던 때보다 훨씬 더 성숙해져 있었다.

약관의 나이에 가까워지며 성장이 빨라진 건지, 여성의 몸에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살집이 보기 좋게 올라왔다.

향도 무르익어 달콤했다. 천도 복숭아 답게 약간은 시큼한 감도 있었지만, 오히려 좋았다.

그보다 더 내 마음을 쥐어뜯은 것은, 비록 꿈이라지만 그 스승님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었다는 거.

-와락!

"으앗! …사형?"

이미 한 이불을 쓰고 있었지만, 나는 어느새 천도를 힘껏 끌어안고 있었다.

사무치는 그리움에 얼굴을 비볐다.

천도는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내 얼굴을 잠시 스치듯 보더니 행복하게 웃었다.

"아이 참."

이윽고 팔을 뻗어 나를 끌어안은 천도.

수줍은 꽃잎같은 불그스름한 기운이 천도의 볼에 어리게 피어있었다.

"사형… 아니, 가가."

그녀가 말한다. 내 가슴을 폭 끌어안고.

성장했음에도 나에게는 한없이 작게만 느껴지는 여린 몸이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목소리가 예쁘다.

이른 아침에 피어난 소녀의 음색은 귓가에 너무도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저는 더없이 행복한 밤이었어요."

들뜬 심장이 차분해진다.

포근하다.

전기장판 하나 없는 겨울의 도원. 깔아놓은 솜이불 사이에서, 우리는 서로 이마를 맞대고 한참동안 체온을 공유했다.

"사형은, 행복했나요?"

아마도, 이런 미래가 있었다면.

"그랬겠지."

천도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미소로 답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가가."

그녀는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

"아침은 뭐가 좋을까요? 어제 받아둔 음식이 남아 있으려나."

-촤르르륵!

천도가 커튼 비스무리한 것을 걷어내자, 창 밖의 넓디넓은 도원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꿈에 잠긴 것처럼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렇게나 지키려고 했던 도원.

단숨에 무너졌던 그곳이 겹치듯 보인다.

한겨울, 소복히 쌓인 눈이 인상적인 도원.

우리는 보고자 했던 겨울을 보지 못한 채, 모든 나무가 그랬듯 찬바람에 못 버텨 시들었었다.

그런 도원에, 따뜻한 함박눈이 내리는 겨울이 찾아왔다.

아무런 참사도 일어나지 않고 말이다.

‘……참.’

이런 꿈같은 공간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지 모르겠네.

그 아름다움을 입감하던 나는 솜이불에 둘러싸여 한참이나 멍을 때렸다.

그러고 있으니 와락!

뒤에서 몰래몰래 다가오던 천도가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거대한 천 같은 게 얼굴을 가린다. 무엇인가 하여 보니 커다란 수건이었다.

"…응?"

"밥, 금방 할 테니까. 먼저 씻어요."

정말 이게 현실이라고?

"아니면 씻겨드려요?"

"…아니. 혼자 할 게."

머뭇거리며 일어난 나는 천도가 걸어둔 수건을 쥐고, 세안실 안으로 들어왔다.

예전의 도원과는 달리 수도 시설과 전기가 완벽했다.

-솨아아아.

떨어지는 물을 맞으며, 또다시 의심 한 번.

거울에 비친 얼굴은 내 것이 맞았다.

새것 같은 분홍 면도기를 들어 턱수염을 정리한다. 복숭아 향이 나는 비누와, 샴푸로 몸을 깨끗하게 만들고 세안실을 나오니 부드러운 가정집의 향이 나를 반겼다.

천도의 요리 실력이 어떻더라.

그렇게 잘하는 편은 아니었던 걸로 안다.

그리 생각하며 식탁에 앉으니, 천도는 잘 끓인 버섯죽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죽.’

참 도원다운 메뉴다.

"…입에 맞아요?"

"아직 안 먹었어."

"아직도 안 먹었어요?"

자기 몫의 죽을 가져오면서 묻길래 그리 답했더니, 귀엽게 입술을 삐죽 내민다.

아니 솔직히…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자, 아~ 아!! 입 벌려요."

아직까지도 멍을 때리고 있으니, 장조림을 하나 얹은 천도가 내 입에 죽을 넣어주었다.

그게 또 뭐라고 좋아서 넙죽넙죽 받아먹었더니 천도가 프히히 웃었다.

"후후, 사형 귀여워요. 강아지 같아."

네가 좋으면 나도 좋다.

우물우물 죽을 먹고 있으니 의외로 솜씨가 또 괜찮다?

그 ‘천도’와는 완전히 다른 요리 실력이었다.

"오늘 할 일 말씀 드릴게요. 잡수시면서 들어요."

"…어."

"첫 번째로 아침엔 도원 하부 감사랑…. 둘째는…."

"천도야."

"네, 사형?"

아무래도 슬슬 인정할 때가 된듯하다.

저렇게 자연스럽게 술술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일단은 몇 가질 파악하는 게 좋을 것 같가도 판단했다.

가장 먼저….

"우리, 결혼했어?"

천도는 입을 닫더니 볼을 슬며시 붉혔다.

"아니요, 아직…."

아직이라는 건, 약혼일까?

내 물음에 천도가 푹 무르익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뒤에, 하기로 했어요."

"한 달 뒤."

"그야 그때가 제 성인식이니까요. 그때까지는… 사형이에요. 근데 잊어버렸어요?"

"…미안."

도끼눈을 뜬 천도는 어려도 무섭다.

내가 순순히 사과하자 다시 헤실헤실 웃는다. 여자는 이렇게 확확 바뀌는 게 두렵다.

"그러니까, 사형."

"응?"

"저희가 사형제로 지낼 수 있는 것도 이번 한 달이 끝이에요."

"그런, 거겠지?"

웃은 천도가 먹다 말고 나에게 다가왔다.

얼굴이 가까워지길래 내심 긴장했는데, 천도의 손이 내 눈곱을 떼주었다. 대충 씻어서 남았나 보다.

가까운 곳에서 천도가 말했다.

"저희 좋은 추억 만들어요."

"……."

왜 저렇게 신이 난 걸까.

아니, 그럴 만도 하겠지.

어린 시절의 천도가 날 상당히 좋아했던 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아마 나는 그 전쟁에서 죽지 않았고…. 도원도 멋지게 다시 재기했다.

나이 차이가 아무리 나도, 여기는 무림이고. 막말로 노인과 소녀가 결혼하는 일도 매우 빈번하기 그지없었다.

"헤헤."

그런 그렇고, 천도는 왜 이렇게 능글맞게 변했을까.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좋다고 웃는다.

‘…일단, 이대로 있어볼까.’

파악이 되지 않으니 가만히 있는 수밖에.

천도가 말한 그 하루 일정들을 쭉 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사형."

"응."

"매번 아침마다 하는 말이지만…오늘도 멋있어요."

매번 아침마다.

지독한 애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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