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2화 > 이지선다 (2)
다음 날.
태양과 함께 처리할 업무들을 인계받은 후, 구슬과 엔가헤로, 홍연을 불러 자리를 가졌다.
평행 세계의 나라는 시련을 알리고, 왕관의 부재를 알리기 위함이었다.
“아는 것이라도 있나? 엔가헤로.”
모든 걸 설명한 뒤, 나는 가장 먼저 목령왕의 신하였던 그에게 물었다.
긴 흰 수염을 쓰다듬던 노인은 유감스럽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내게 사과를 구하였다.
“아쉽지만, 시련에 대하여는 언급할 수 없습니다.”
신하들의 충성은 옛 목령왕을 향해있다. 탑에서 본 녀석들도 그랬다.
그 ‘공작’이라는 녀석도 나보단 목령왕의 예언을 믿고 있겠지.
“그래. 할 말이 그게 전부인가?”
나는 엔가헤로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눈에 힘을 주고, 손을 까딱였다. 엔가헤로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인 뒤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저걸 확 목을 쳐버릴 수도 없고.’
엔가헤로는 구슬의 통제권을 쥐고 있다. 내 세력에서 구슬은 뺄래야 뺄 수 없는 정보원.
심지어 엔가헤로는 2구역에서 홍연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세력을 배후에 지니고 있다.
‘이름 없는 나무의 지배자.’
꽃말이 없는 불명예한 나무들을 거두고 그들의 지지를 받고있는, 중세로 따지자면 평민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는 힘 센 귀족인 셈이다.
나는 구슬을 바라보았다. 구슬과 눈이 마주치니, 녀석은 쓰게 웃어왔다.
‘얘랑 저 노인네에 대해서도 좀 더 알아 볼 필요가 있는데….’
“쯧.”
뺄 수 없는 가시는 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 나는 그 생각을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지금 안건은 시련에 대한 것이다.
“시련에 관해서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개인적인 표문을 말로써 풀어 드릴 수는 있습니다.”
내 반응이 꽤나 미덥지근한지, 엔가헤로는 두 손을 모으며 내게 발언권을 청했다.
턱짓해 승낙하자 엔가헤로는 답변했다.
“폐하께서 말하신 시련의 악마는, 세계수와 플라워를 위주로 무너뜨릴 공산이 커보입니다.”
“이유를 말해야지, 힘을 늘리기 위해서인가?”
“반쪽 난 왕관은 제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리고 몸도 망가졌다 하셨지요? 그 몸을 회복하기 위해선 세계수의 몸체가 필요합니다. 지금 그의 상태는 폐하와 똑같은 결점을 가지고 있다 봐도 무방하지요. 그 힘은 분명 강력하나, 강인한 세계수를 무너뜨릴 정도는 되지 못합니다.”
“글쎄.”
과연 그럴까.
내가 상대했던 놈은 이미 마력에 통달해 차원의 틈까지 비집을 정도로 노련하고 비열한 사냥꾼이었다.
솔직히 놈이 진다는 계산이 나오지 않았다.
“아닙니다.”
엔가헤로는 고개를 내저었다.
“5대 세계수는 경지에 오른 인물과 동격이라 칠만한 존재입니다만. 그 배후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배후라?”
“세피로트. 그리고…. 가장 높이 있을, 세계수들의 왕.”
후자는 몰라도 전자는 알고 있다.
현자가 키우던 지식의 세계수, 그 꼬맹이에게 꽤나 복잡한 사연이 있나보다.
“세피로트는 지식의 세계수이죠, 또한 방관의 세계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녀가 움직이지 않는 건 어디까지나….”
“흥미가 없을 때의 이야기이지.”
엔가헤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식 충족의 목적이 아니라면 어떠한 사건에도 개입하지 않는다. 달리 풀어 말하면…, 흥미 있는 존재에게는 마음껏 개입할 수 있다는 것.
알바는 현자를 맡을 시절 그 틈을 이용해 우리에게 접근해왔다.
세피로트 역시 전 현자처럼 움직일 가능성도 있다는 거겠지.
“그 여자가 움직이는 순간, 아무리 시련의 악마라도 버티긴 힘들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보관한,
에덴의 주인.
“세피로트는 순진한 꼬마아이던데.”
“……”
엔가헤로는 고개를 올렸다. 건조한 눈이 내 안면을 훑더니 얼굴을 좌우로 흔들었다.
“아이의 흥미가 곤충의 사지를 뜯는 법이죠. 그녀는 잔혹함을 모릅니다. 너무 어리기에 기본적인 윤리조차 이해하지 못하죠. 그녀는 흥미만을 쫓습니다. 지식을 채운다는 쾌락, 세피로트는 마약에 빠진 년과 다름없습니다.”
“네가 현자를 믿지 말라는 이유가 이래서였군.”
엔가헤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어느정도 정보가 교환된 순간이었다.
“그래서?”
“시련의 악마가 스스로 무너지길 기다리는 것이 어떠한지.”
놈이 자멸할 때를 기다려, 마지막에 침입한다.
“세계수와 플라워의 세력을 동시에 깎아내릴 수 있죠.”
이이제이(以夷制夷).
확실히 그만한 괴물이 움직이면 나라가 궤멸하는 것으로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플라워도 큰 흉터를 가지게 되겠지.
나에게 있어선 반길만한 일이다.
“놈이 나한테 오지 않는다는 보장은?”
“악마란, 결판이 나지 않는 승부는 하지 않는 법입니다. 제 살을 깎아먹으며 어떻게든 성장하려 하겠지만…. 스스로 무너지겠지요.”
그렇게 극단적으로 해석하지 않더라도, 개입할 순간을 늦추는 건 꽤 매혹적인 제안이다.
나는 태양과 구슬, 홍연을 번갈아보았다.
“괜찮은 것 같은데요 형님. 좀 근거가 빈약하긴 한데, 저짝의 심리는 저 노인네가 가장 잘 알고 있기도 하고요.”
홍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엔가헤로의 조언에는 꽤나 신뢰가 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턱을 매만졌다. 선택의 권한은 내게 있었다.
“…헌데.”
한참을 고민하다, 미간을 찌푸렸다.
머리가 지끈 아파온다.
분명 괜찮은 제안일 것이다.
“그렇게만 흘러간다면 좋겠지만, 그럼 이게 시련일 이유는 없어지게 될 텐데.”
더군다나….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하는 거고.”
방치하면, 그만큼 사람들이 죽는다.
그리고 또 하나.
“만약 놈이 세계수를 털고, 힘을 되찾아서 온다면?”
“…그럴 일은.”
“그놈도 나야. 적어도 나보다 이십 년은 더 해쳐먹은 미친놈.”
아마 나보다 더 어려운 순간들을 헤쳐왔겠지.
나이를 먹은 만큼 결핍되는 것도 있겠지만 그 노련함은 무시할 바가 못 된다.
내가 기적을 겪어왔듯. 그 놈도 기적을 써내릴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럼, 지금 그놈을 찾아 나서게? 못 이긴다며.”
“생사결로 나서면, 가능성은 있어.”
“너도 죽을 확률이 있겠네 그럼?”
“놈이 강해지면 그 기회도 못 잡는 거지.”
나는 구슬과 속사포처럼 대화했다.
“어떻게 하게?”
“경우에 따라서, 잠시 세력을 결집할 필요도 있다고 봐.”
“뭐? 플라워, 세계수 그 년들이랑?”
“…뭐. 그런 셈이지.”
속이 들끓지만 상대가 상대다.
어찌됐든 이지선다.
나는 손아귀를 쥐었다 펴며 거듭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
알바가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래서, 직접 찾아온 거예요?”
“생각할 게 많아서.”
지능과 지식은 채우려고 해도 한계가 있다.
시간이 부족할 때라면 스스로 답안을 떠올리는 건 불가능하고, 때문에 타인의 지능을 이용해야만 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었다.
누군가의 위에 올라서는 왕은 선택의 순간이 많기에,
더더욱 누군가의 조언을 구할 필요가 컸다.
“세피로트 님에 대한 해석은 정확해요. 지식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려 하죠. 그게 다른 차원의 목령왕이라면 더더욱 그럴 거고요.”
물론 한쪽에 치우치면 안 된다.
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최후에는 내 스스로 선택해야 했다.
결과가 잘못 나오더라도 당연히 그 귀책을 물어선 안 된다.
온전히 내 책임이다.
“그런가.”
“네. 또 제 도움이 필요한 건가요?”
“……아니 뭐, 있으면 좋고. 없어도~”
“후후후.”
부드러운 살결이 배에 스치면서, 내 위에 올라탄 그녀가 내 머리를 품었다.
“귀여워라.”
내 입술을 손톱으로 지그시 눌렀다가 떼보고, 벌어진 입술로 혀를 집어넣는 알바.
고귀한 육체가 내 위에서 변태같이 얽혔다.
길게 키스하던 입술이 떨어졌다. 은은한 단맛이 혀에 남았다.
“밥은요?”
“오기 전에 먹었어, 위키랑 스승님은?”
“지금은 숙제 중이에요. 당신의 스승님은… 잠꾸러기라서요.”
“……그래서 또 이렇게 된 거야?”
“하기 싫어요?”
솔직히, 왕관을 잃고 나니 약간 부담이다.
이 사람을 안는 게 싫다는 건 아닌데.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철컹.
“……·”
그런데 어쩌냐.
이미 난 수갑에 묶인 상태고, 노리개가 될 대로 되어버렸는데.
“…처음 볼 땐 그렇게나 속살을 보이지 않을 것 같았더니.”
“잊으셨어요? 술 먹이고 절 덮친 건 당신인데?”
“그때 누나가 참 순수했는데. 왕왕 거리면서 나한테 매달렸지 아마.”
“시끄러워요.”
허공에서 동그란 걸 꺼낸 현자가 내 입에 무언갈 쑤셔박았다.
“웁!”
동그란 영약 같은 것이 입 안에 들어오더니, 몸이 갑자기 달뜨고 뜨거워졌다.
하복부에 몰리는 열기에 눈앞이 어지러워질 무렵.
알바는 수상해보이는 향로를 꺼내 그것을 협탁 위에 올려 두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삼켜요.”
반쯤 협박인 목소리.
나는 몽롱해져선 고개를 끄덕거리며 영약을 삼켰다.
“단전이 꽤 무리가 갔잖아요. 제가 만든 약이에요.”
“……꿈을 꾸다가 단전이 꽤 무리가 가긴 했지. 근데 누나 이거 왜 미약같지?”
“넣었으니까.”
이완되는 근육. 내 몸을 더듬던 현자는 서서히 허리를 움직이더니….
새하얀 곰돌이 속옷을 젖히고 그 끈적하고 뜨거운 질내로 내 자지를 집어넣었다.
-질퍽.
물풀을 꽉 차게 넣어놓은 듯 뜨겁게 얽히는 속내.
‘이게 어딜 봐서 귀족이냐고.’
내 위에서 콩콩 허리를 흔드는 현자를 보며 나는 눈을 감았다.
-철컥.
수갑을 풀더니, 내 손을 꼭 부여잡은 알바.
깍지 낀 손을 살살 비비며 송곳니를 내보인 채 가슴을 할딱거렸다.
“이불 덮을게요.”
“…응.”
졸린 채 범해지는 감각.
우리 두 사람의 위에 커다란 이불이 덮어지고 이내 매트가 격렬히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흡, 흐읏…. 후후후.”
이불에 튀어나온 현자가 매혹스레 웃는다.
내 입술에 키스를 하며 팡팡 찧어대는 현자.
“…졸려요 당신?”
지식인일수록 쾌락에 정복되기 쉽다던가.
나는 뜨거워진 양물을 견디지 못하고 현자의 허리를 휘어감았다.
부드러운 이불 사이로 뭉개진 가슴이 출렁거렸다.
“만져줘요.”
손가락에 파묻히는 살결. 아랫가슴을 쥐어짜고, 서서히 위쪽으로 젖소의 우유를 짜듯 밀어낸다.
사랑스러운지 내 볼을 매만지며, 머리를 쓰다듬는 현자.
분명 처음 관계를 나누었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생각해보면 3년간… 이 사람과 많은 일이 있었긴 했다.
“흐읏, 앙. 읏, 흐웁….”
“누나…?”
자지러져서 허리를 떨며, 물이 흐르는 허벅지를 내 허벅지에 비벼대면서, 애타게 달뜬 소리를 내뱉던 그녀.
현자의 눈이 실눈으로 좁혀지더니 예쁜 입술을 내 귀에 대곤 아찔하게 속삭여왔다.
“누나… 잡아먹혀요.”
빌어먹을 미약.
송이송이 맺힌 뽕나무 열매가 흰 베개에 떨어져, 우리의 몸에 뭉개졌다.
새하얀 베개는 금세 보라색으로 더러워졌다.
내 배 위의 현자의 허리를 끌어안고 뒤집는다. 주도적으로 그녀를 깔아뭉개니 현자의 입에서 행복한 신음이 퍼져 나왔다.
“읏… 흐아아아….”
여리게 흔들리는 백발.
세계 최고의 마법사는 무슨, 탕녀같이 울어대는 현자는 내 허리를 다리로 걸어 조여왔다.
-툭.
갑자기 꺼지는 주변 마법.
방 밖으로 소음이 새어나갔지만, 그런 거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스승님이 들을 수도 있을 텐데. 이 사람이 미친 걸까.
“…흐으, 흐이…. 당신…?”
오히려 그 순간 더 쾌락을 느끼는 듯, 보지를 비벼오는 현자에게 나는 넋을 놓고 자지를 박아댈 뿐이었다.
“앗, 앙! 아앙…! 좋아요 당신… 좋아요!”
달빛같이 창백한 그녀의 살결이 흔들린다.
나는 참지 못해 양물을 빼내 천박한 액체를 토해냈고, 현자의 아랫배와 가슴에 정사의 흔적을 뿌려댔다.
사냥당한 곰처럼 드러누워, 행복한 숨을 뿌려대는 여자.
“흣, 하아.”
성욕을 푼 뒤에야 나는 이 빌어먹을 여자에게 따먹혔다는 사실을 깨닫고,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오늘 입은 곰돌이 속옷은 웃는 곰의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