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세계수를 따먹다-529화 (529/657)

< 529화 > 할 말 없어?

차원의 경계선을 넘어 세계수의 차원으로 돌아온다.

【 무슨. 】

처참해진 왕의 꼴을 보자마자 세계수는 넋을 잃은 반응을 보였다.

숲지기를 아무 상처 없이 제압할 정도로 강했던 그가 반송장이 된 채로 왔기 때문.

【 대체 누굴 상대했기에 그만한 부상을…. 현계에 그만한 존재가 있다니? 】

“입을 열어도 된다고 누가 허락했지?”

【 ……. 】

살벌한 성량에 세계수는 입을 닫았다.

왕은 축 처진 몸을 엎드렸다. 그의 몸에 자라있던 나무 조각이 후두둑 떨어졌다.

‘손실이 크군.’

안 그래도 부러져있던 왕관이 일부 고장났다.

시바의 존재에 침공 시기를 앞당긴 것은 자충수. 두 번 다시 사사로운 감정에 이끌리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다친 몸을 어떻게 수복해야 할지.

그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왕의 시야에 세계수의 모습이 들어왔다.

【 무슨 생각을…. 】

세계수는 몸을 떨었다.

그녀도 암컷. 왕의 눈에 든 순간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할 수밖에 없다.

왕에게 딱 잡혀 있으니,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다. 아무리 부상을 입었더라도 힘없는 세계수 하나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왕은 바위 옆에 자리를 잡아 고개를 떨구었다. 사지는 멀쩡했지만, 안은 그렇지 못하다.

듬성듬성 자라난 들판을 매만지며 졸린 눈을 감으니, 그의 눈앞에 인기척이 하나 다가왔다.

【 당신은…? 】

세계수가 먼저 놀라 반응했다.

투명하리만치 새하얀 머리카락. 귀족을 연상케하는 드레스는 아주 많이 보아 왕이 알고 있던 모습이었다.

“현자.”

건조한 목소리에 멈춰선 알바가 씁쓸한 조소를 지었다.

“저에 대해 아는 게 있으신지?”

“모를 리가 없지. 날 배신하고, 죽기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년이었으니.”

왕은 얼핏 보기에 덤덤했으나 그 끝에는 조용한 분노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배신… 잘 모르는 이야기네요.”

“모른다고, 뭐가 달라지는 게 있나?”

“미래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또 아가리를 놀리는군.”

-끼릭. 끼히힉?

왕의 촉수가 감정에 반응해 어깨에서 튀어나왔다.

현자의 눈앞까지 순식간에 도달하는 ‘가지’. 뾰족한 뿔이 그녀의 눈을 파내기 직전까지 도달했음에도, 현자는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았다.

“네년이 그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왔다는 건, 또 무슨 욕심을 부리고 있다는 거겠지.”

왕은 눈꺼풀을 감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현자의 속내를 완전히 꿰뚫어 보는 눈,

오랜 세월을 걸쳐 완숙해진 그의 모습은 명사(名士)의 것이다.

속을 읽을 수 없고. 수를 감추는데 너무도 익숙해져 버린 계책의 귀재. 도박사의 담대함도 타고났다.

저 노련함을 완성 시키는데 얼마나 무너지고, 또 절망했는지.

불신이 가득한 눈빛 속에서 그녀를 어떻게 이용할까 고민하는 왕의 모습은 이미 완연한 거물이나 다름없었다.

현자는 조금 슬픈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뭘 바라지. 이 자리에서 날 죽일 셈인가?”

“그럴 수 없죠. 제가 어떻게 당신을 죽이겠나요.”

윗입술에 검지를 내려놓고 작게 재채기를 한 현자.

“시바.”

그 이름이 현자의 입에서 튀어나왔을 때.

-끼히힉?!

파앙!

그녀의 몸을 일곱 개의 가지가 꿰뚫으려 했다.

-끼긱, 끼긱!

반투명한 방벽이 그 공격을 막는다. ‘가지’와 현자의 방벽이 서로 부딪혀 기괴한 소리를 내었다.

용접을 하는 듯 새빨간 불꽃이 튀는 접합면.

“다시 한 번 그 이름을 입에 담아 봐라. 당장 네 년을 잘게 써는 수가 있으니.”

“…….”

왕의 경고에 현자는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착각하고 있네요. 당신.”

“글쎄, 내 딸이 죽은 게 미래의 네년 때문이라면 이해하겠나?”

“…….”

“하나 더 조언해주지. 네년의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감정도 잃고, 겉가죽만 남아서 세피로트에게 되삼켜지겠지.”

“…이것 참.”

“현자, 네년은 네 주변의 모든 걸 한낱 장기말로 보는 게 문제야. 남자가 되었든, 왕이나 플라워가 되었든. 내가 이 꼬라지가 될 때까지 가장 후회한 게 뭔 줄 아나?”

-까드득.

왕의 뺨에 있던 이빨이 서로 맞물리며 깨졌다.

“네년이랑, 내 신하를 믿은 것.”

“…….”

배신의 연속이었다.

필요가 없어지면 버림 받고, 차이고, 드러눕고.

시바를 되살릴 약이 현자의 손에서 깨져 사라질 때. 그는 마음껏 이성을 놓을 이유를 얻었다.

딱 하나,

내 딸만 살았으면 했다.

순결을 배신하고 현자의 편을 든 것도.

불쌍한 성녀의 목을 자른 것도.

그걸 위해 망나니가 되었고. 죄 없는 민간인을 썰어대면서도 정신 줄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아이가 없는 세상에 무슨 가치가 있다는 건가.

시바를 지키려고 했던 행동들은 고스란히 시바를 죽이는 일이 되었고….

그 주범이 바로 지금 왕의 눈앞에 있는 여자였다.

“오늘, 당신의 딸을 보기 위해, 움직인 것이 아니었는지?”

현자는 왕의 모든 말을 무시한 채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왕은 눈을 찌푸렸다. 이 여자가 또 무슨 감언이설을 뱉는가.

“만나게 해드릴 수 있어요. 당신만 원한다면.”

하.

왕의 눈이 날카롭게 좁아졌다.

“썩을년.”

*****

마음이 부러질 것같이 아프다.

“…흑, 흑, 흐윽.”

그 똑 부러지던 우리 위키가 목을 놓고 울고 있었다.

해바라기같이 자그마한 손을 벌벌 떨면서.

“왜, 왜 다쳤어요?”

“위키야, 아빤 괜찮아.”

“흑, 읍….”

위키는 내 몸 구석구석을 매만지면서 눈물을 흘렸고, 말을 더듬으며 허둥지둥 마력을 끌어올렸다.

“괜찮다니까. 응? 하나도 안 아파! 와 벌써 나았다~”

지독한 피 냄새, 위키를 떼어놓으려는 내 손짓에 눈물을 닦은 위키가 내 팔목을 탁 때렸다.

위키의 하얀 잠옷이 피로 더러워진다. 내 품에 안긴 위키가 몸을 더듬으며 마력을 불어넣었다.

수준급의 치유 마법.

하지만 권능으로도 잘 붙지 않는 살이 나아질 리가 있나.

“…읍, 끄읍, 끅, 흐윽.”

위키는 두 손을 꽉 쥐고 울음을 참아내고 있었다.

눈물을 참아내려고 하는지, 아니면 현자에게 감정을 드러내지 말라고 교육을 받았는지.

꺼억꺼억 울음을 참아내며 내 몸을 쓰다듬었다.

그럴수록 더 울분에 찬 위키는 내 가슴을 강하게 때리며 딸국질을 했다.

“왜, 히끅…. 아빤… 끕…. 맨날, 흑…. 다치는 일만…. 히끅, 해요?”

턱턱, 목이 막히면서 말이 자꾸만 끊긴다.

내 사정을 알고 있는 위키지만, 내가 다치는 건 보고 있을 수 없는 모양이다.

내 떨어진 살점을 본 위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괜찮아.”

“안 괜찮잖아….”

울분이 터져나오면서 길게 늘어지는 말.

“안, 안 괜찮잖아! 아프면서… 아빤 왜 말 안해요?”

아이고야.

나는 남아있는 마력으로 최대한 몸을 깔끔하게 한 후, 옷으로 상처를 가렸다.

“흑, 이잉….”

“위키? 아빠가 무슨 일 하는 지 잘 알지?”

-끄덕, 끄덕.

“아빠가 떠나버릴까 무서워서 그래?”

끄덕끄덕끄덕끄덕.

머리 흔드는 속도가 갈수록 빨라진다.

“이제 안 아파.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강하거든.”

최대한 위키를 달래주며 어화둥둥, 엉덩이를 두드린다.

인중에 흐르는 콧물을 닦아주고 뺨을 꼬집어주자 숨이 가라앉은 위키.

그래도 딸꾹대는 건 여전하다.

“엄마는 어디있어?”

“쿨쩍, 나갔어요.”

위키가 많이 놀랐구나.

하긴 아빠가 반 시체로 왔으니…. 애정이 진득한 위키에게는 트라우마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설마 이것조차 현자가 꾸민 일은 아니겠지.’

나에 대한 기억을 트라우마로 심기 위해 일부러 위키에게 숙제를 배분하지 않았다던가.

제길. 한 번 의심을 시작하니 끝도 없어진다.

현자의 속내가 대체 무얼지, 슬슬 강제적인 수단을 써서라도 그녀에 대해 알아내야만 할 것 같았다.

“하아.”

“무슨 소란이느냐?”

위키가 듣지 못하게 짧게 한숨을 내쉬니, 천도의 방문 앞에 있던 암막 커튼이 쳐지면서 스승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스승님.”

“잠깐. 너… 그 몸.”

위키와 똑같이 놀라긴 했지만, 비교적 담담한 천도.

내가 구르는 거야 익숙할 거고…. 조금 고통스런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천도는 금세 듬직한 스승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쩌다 이렇게 됐습니다.”

“…시간이 지난 지금도… 똑같구나.”

“에이, 그런데 이제 걸을 수 있는 모양입니다?”

침대에 누워만 있던 천도가 이젠 방 밖에 나올 수 있게 됐다.

재활 치료는 꾸준히 진행하는 모양. 이걸 보면 또 현자에게 고마움이 든다.

제발 태도가 일관적이었으면 하는데,

“피가 흐르는구나. 이리 와라.”

“붕대는 괜찮습니다. 어차피 피는 계속 재생되고…. 마기를 좀 많이 써버려서 죽은 피를 흘려보내야 해요.”

“위키가 보고 있지 않느냐.”

“아….”

하긴,

딸 앞에서 계속 피를 흘리고 있는 것도 문제지.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스승님과 위키와 함께 방에 들어가 나는 재래적인 치료를 받았다.

“오거라.”

붕대를 감고 약을 먹는다.

포션까지 대충 들이키니 표면으로는 부상을 입은 티가 거의 나지 않았다.

구급 상자의 빈 칸에 붕대를 내려놓으며 슬픈 듯 눈썹을 기울이는 천도.

“너는 항상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구나.”

부드러운 천도의 손이 내 팔목을 가볍게 쥐었다.

말랑말랑한 손, 3년간 쉬니 굳은살도 없고… 평생 만져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내상이 심하군, 상대는 누구지?”

“접니다.”

“뭐?”

“정확히는, 다른 차원의 저라고 해야 맞겠죠. 왕의 시련에서 20년 뒤의 제가 소환되었습니다.”

“예상보다 더 놀랍구나.”

“예.”

현자와의 갈등은 최대한 언급을 피했다.

나는 옷을 벗어 근처에 걸어두었고, 상반신을 완전히 벗었다.

천도의 손이 내 가슴께를 스치자 짜릿한 감정이 일었다.

“…20년뒤라, 상상도 하지 못할 세월이로군.”

“그때가 되면 스승님은 저를 좀 좋아해주실까요.”

“지금도 좋아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

그 의미가 아닌 걸 알면서.

나도 모르게 대쉬를 하려다, 다리에 느껴지는 감촉에 나는 뒷말을 잇지 않았다.

여전히 내 다리를 붙잡고 있는 위키.

너무 울어서인지 꾸벅꾸벅 잠에 들고 있다. 한창 울고난 뒤에 잠에 드는 건 어린 아이의 특징이 아닌가 싶다.

“어디서 싸웠지?”

“서울이요.”

“…재난이었나? 헌터 협회와 세계수의 힘을 크게 떨어트릴 기회일 텐데.”

단편적인 정보만으로도 대충 상황을 파악한 천도.

“소중한 사람이 거기 있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너다운 말이구나.”

“스승님을 위해서라도 이렇게 될 수 있어요.”

“몸을 잘 사려야겠군. 네가 다치는 걸 보고싶진 않으니 말이다.”

피딱지를 휴지에 닦은 천도가 내 가슴을 때렸다.

“끝이다. 돌아 갈 것이냐? 아니면, 차 한 잔 하겠느냐.”

“스승님이랑 마시는 차를 제가 가장 좋아하긴 하는데…. 오늘은 거절할게요.”

서운한 듯 입술을 삐죽 내미는 천도.

우리 스승님 참 귀엽다.

나는 몰려오는 토악질과 고통을 참아내며 쓰게 웃었다.

“기다릴 사람이 있어서.”

*****

새하얀 드레스가 나부끼며 문틈에 비벼져 스르륵 미끄러진다.

피에 젖은 무복, 침대에 앉아 있는 피투성이의 남성.

온몸에 묶인 붕대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고. 방 안에 들어온 여인의 눈은 슬프게 좁아졌다.

“당신. 언제-”

“알바.”

당장 밀어붙일까.

아니, 서두를 필요는 없다.

수목의 왕 역시 빈사 상태니까, 몸을 달랜 뒤에 압박해도 무방하다.

알바는 시헌의 모습을 보고 마음의 준비를 한 듯 눈을 감았다 떴다.

무슨 말을 할지, 그리고 그에 대해 무슨 대답을 할지.

알바는 지금껏 이시헌이 요구한 물음을 여러 변명으로 빠져나왔고, 아마 이번 일에 대해서도 암묵적으로 답하길 기피할 것이다.

시헌은 어깨를 으쓱였다.

할 말 없어?

현자가 예상했고, 이시헌이 했어야 하는 말.

하지만 정작 이시헌의 입에서 빠져나온 내용은 달랐다.

“누나, 나 왔어.”

아무것도 묻지 않자 되려 당황하는 현자.

“…오늘은 좀 벅차더라.”

가슴을 조금 뛰게 만드는 그 말에, 현자는 메마른 입술을 꾹 눌러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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