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1화 > 시바는 친구가 적다 (4)
룸카페에 발을 들이니, 구석진 곳에서 핸드폰을 들고 살랑살랑 손을 흔드는 정시우가 보였다.
-피식.
가볍게 웃으며 함께 손을 흔들어준다.
“출소했네.”
“어떻게 지냈어?”
“나야 뭐 그냥 저냥. 아니 근데 넌 어째 변한 게 하나없냐. 머리색 빼고.”
“하하.”
백발의 정시우는 아카데미 시절 이후로 바뀐 것이 하나 없었다.
“바뀐 거 있지, 왜 없겠어? 여기 근육도 좀 붙었고.”
“아이고 그러십니까.”
시우가 해맑게 웃는다.
그 밝은 에너지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이야….’
남자인 내가 봐도 감탄할 정도로 곱상하게 생겼다.
애당초 분위기부터가 깡패다. 헌팅 포차에 가면 이 녀석은 여자에게 애꿎은 말을 걸고 꼬리칠 것 없이 바로 모텔로 직진하리라.
“뭐 시킬래?”
“막 시켜 그냥.”
아카데미부터 이어진 인연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나도 그렇고 정시우도 그렇고, 서로에게 빚진 게 있으니 당연한 노릇일까.
내가 이단자 판정을 받고 사경을 넘었음에도, 정시우는 오직 자기 눈으로 본 것만을 믿으려했다.
종교적 이단자라면 앞뒤 안 가리고 때려죽여야만 한다는 사회 분위기를 생각하면 정시우가 얼마나 올바른 그릇을 가진 사내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진짜 다 시킨다? 나 막지 마.”
-띡띡
시우는 내게 되물으며 부단히 손을 움직였다.
아무래도 차원에 갇혀 한동안 나오질 못했으니, 맛난 음식을 먹고 싶었을 터다.
테이블 키오스크에 추가되는 어마무시한 양의 빵과 케이크!
남자다운 것도 있지만, 은근히 여자스러운 모습도 있는 게 정시우다.
정시우는 커피를 홀짝대며 물었다.
“그동안 불편한 건 없었어?”
“없지.”
“…들키지 않은 것만 해도 장하네.”
이 녀석은 내가 아직도 죽음을 위장하고 피해다니는 줄 안다.
왕으로 행동할 땐 항상 인식을 저해시키는 아티펙트를 쓰고 있고, 심지어 그렇게 보이지 않는 얼굴마저도 인피면구를 뒤집어 쓰고 있으니 알 턱이 있나.
요컨대 정시우는 내가 플라워라거나 목령왕이라는 걸 알고 있지 않다.
세계수가 그에게 언질을 남겼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정의의 세계수는 정보를 숨기길 택했나.’
시우의 얼굴을 보니 뭔가 숨기는 게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난 아직도 왜 네가 그 취급을 받았는지 모르겠어.”
“낸들 알겠니. 세계수 그 년들이 날 그리 죽이고 싶다는데.”
“하하….”
세계수 진영의 핵심 인물인 정시우에게 세계수의 험담을 한다라.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정시우라면 괜찮다.
얘는 선하기만 한 게 아니라 이해관계를 어느 정도 숙지하고 있는 녀석이니까.
확실한 건 우리는 언제든지 적이 될 수도, 아군이 될 수도 있다.
지금 이렇게 친하게 안부를 묻는 건 어디까지나 사적인 친분이 있기 때문에.
정시우 역시 그걸 이해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거기 있을 거야?”
“아마도, 쭉 있을 것 같아.”
내 물음에 씁쓸하게 웃는 정시우.
선악과는 별개로 그는 정의의 세계수에게 가장 큰 수혜를 받았다.
정의의 대리자인 안젤리카보다도 더 많은 힘을 받았다 추정되니, 여부야 있을까.
정시우가 정의를 배반하는 순간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찾을 동생도 있으니까.”
“아직도 못찾았어?”
그리고 그런 정시우의 최종 목적.
“아니, 네 동생 찾으라고 내가 져준 게 벌써 3년 전인데 뭐하고 있었어?”
“아티펙트가 맛이 갔어. 그러니까… 네가 이단이 됐을 때였나?”
정시우는 그 날의 사정을 천천히 설명해주었다.
갑자기 아티펙트의 작동이 끊기더니, 정의의 세계수에게 여러 제안이 들어왔다고 한다.
플라워에게 대항할 힘을 기르게 해줄테니 더 복잡한 계약을 맺자고 했다고.
“마지막엔 중국에 있었는데. 올해 나와보니 하, 나라가 망해있더라고. 세상이 왜 이렇게 빨리 바뀌는지.”
여동생을 떠올리는 정시우의 얼굴은 침울하기 그지없었다.
“중국이라….”
내가 지금 발을 담그고 있는 곳이다.
내 땅에는 한국인도 여럿 있지만 정씨 성을 가진 소녀는 없다.
찾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만나게 해주고픈데.
“살아있을거야. 네 동생인데.”
“그렇겠지? 그래야만 해. 그럴려고 그분이랑 계약한 거니까.”
“그분…. 그 년을 그렇게 지칭할 정도야?”
정시우의 낯빛에 미안함이 스친다.
내가 정의의 세계수를 얼마나 혐오하는지 알고 있기에 보이는 반응이다.
“너한테 할 말은 아니겠지만…. 사람이 바뀌듯, 신도 바뀔 수 있을거라 생각해.”
“그러냐.”
“응, 고집도 세고. 가치관이 워낙 확고한 탓에… 좀 그렇긴 한데. 아마 그분도 꽤 고민을 하고 있을거라고 생각해.”
이러나저러나, 세계수 또한 자신의 존속을 위해 무언가를 포기하려는 것이다.
정시우의 선한 잣대는 오직 나만을 향하지 않는다. 그는 모두를 포용할 그릇을 지니고, 어쩌면 시우는 정말로 정의의 세계수마저 뒤바꿀지 모른다.
“글쎄, 내 생각엔 그 년이 널 이용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에이, 그걸 모를 리 있나. 이용당하고 있지. 알면서도 하는 거야. 이것밖에 답이 없거든.”
그러면서도 자기 처지는 잘 이해하고 있다.
나는 그런 정시우에게서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느꼈다.
‘비슷하네.’
이용당하는 걸 알고 있음에도, 왕의 인자와 신하를 끌어들이려 한다는 점.
그리고 어떻게든 내 중심으로 돌아가도록 유도하려는 점 등등.
내가 플라워 내부에서 애를 쓰는 동안 정시우도 교단에서 힘을 쓰고 있다.
너는 너만의 계획이 있겠지.
나는 커피를 마시며 피식 웃었다. 얘는 하나도 바뀐 게 없다.
“…너는 어쩌려고?”
시우가 내게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할 일 하는 거지. 옛날처럼.”
“교단이야?”
“응.”
수긍한다.
정시우는 내가 왕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지만, 내가 숨기고 있는 다른 사실 하나를 알고 있었다.
3년 전, 내가 이단을 몰렸을 때 처음으로 나에게 저자세로 다가온 그녀.
번영의 세계수와 했던 약속의 이행이다.
“교단을 분열시켜야지.”
“전쟁을 피할 수는 없다는 거네.”
“왜, 나랑 붙을 생각하니까 쫄려?”
“이길 수는 있고?”
“내가 널? 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걱정은 네가 해야지.”
“킥킥.”
번영의 세계수의 유언대로, 나는 번영의 교단에 여러모로 지원을 해주고 있다.
세계수를 분열시켜 내 땅으로 끌어들인다.
그와 동시에 왕의 세력도 빨아들이면…. 이제 정말로 몸집 싸움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나는 예전에 그녀가 내게 말했던 사실을 돌이켰다.
[제 뒤를 이을 세계수를 찾아주세요.]
‘번영’이라는 개념을 맡을 또 다른 세계수를 찾아야 한다.
[그 재능을 가진 아이가 한 명 있어요…. 목인이고, 그 아이는 자신의 수종도 모르겠지만. 저를 충분히 이을 수 있죠.]
번영의 권능은 필히 도움이 된다.
전쟁 이후 무너진 기반을 복구하기 위해선 더더욱.
그 부분만큼은 ‘치유’의 상위호환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걔를 어디서 찾아야 하나.’
아직까지는 힌트도 뭣도 없는 상황이지만, 번영의 힘을 가졌다면 언젠간 수중에 떠오를 것이다.
어쩌면 귀목과 연관이 있을지도.
“아.”
정시우의 한숨이 내 긴 사념을 깬다.
녀석은 커피잔을 꼭 쥐며 긴 탄식을 뱉고 있었다. 눈은 꽤 슬퍼 보였다.
“왜 다들 그렇게 치고 박고 싸우려하는 걸까.”
이상론.
다 함께 돕고 지내면 얼마나 좋겠냐.
“그러게나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다.
처음부터 이런 일이 없었다면, 나도 정상적인 헌터가 될 수 있었겠지.
적당히 커서, 적당히 원망을 찾아 복수하고, 내 사람들이랑 한 집에 삼삼오오 모여 즐겁게 살 수도 있었을 거다.
‘창남짓을 안 해도 됐겠지. 엄한 곳에 좆질할 일도…. 행동 하나하나가 내 사람을 배신하는 방향으로 갔던 것도.’
정말 말 그대로 꿈에 그리던 미래.
하지만 나는 내 선택이 잘못됐다고 생각지 않는다.
-다 살릴 수 있어요.
알바의 말대로, 나도 믿고 있었다.
‘어쨌든 정보는 얻었어.’
정시우와 만난 이유는 단순한 친분 교류도 있었지만, 이 녀석이 나를 얼마나 아는지 가늠할 필요성이 있어서였다.
정의의 세계수는 나에 대해 침묵했다.
지금 시우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던 걸까?
‘정시우를 나와 완전히 적대하도록 만드려는 게 목적이겠지.’
그렇다면 목령왕이나 플라워로는 부족하다.
나는 이미 세계수를 혐오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플라워에 들어간 사실을 밝혀봤자, 정시우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게다가 이 녀석은 자기 눈으로 본 것만을 믿는다.
내가 뜬금없이 누군가를 강간하고 다녔다거나, 무수한 희생자를 만들었다 해도 믿지 않겠지.
정의의 세계수의 선택이 이해가 되었다.
판단을 마친 나는 케이크를 우물거리는 시우에게 물었다.
“이제 뭘할 거야?”
입술에 묻힌 크림을 혀로 핥은 시우가 아무런 의심 없이 순수하게 답했다.
“전선에 갈 거야. 그리고, 시련의 악마의 토벌도 부탁받았어.”
역시 그렇게 되려나.
고개를 끄덕인 나는 녀석에게 하나 경고했다.
“놀라지 마.”
“뭘?”
“보면 알 거야.”
그 시련의 악마라는 놈.
나를 아주 닮았으니까.
*****
와 봐라!
답해라!
편의점 안. 아르바이트생이 의문 섞인 눈으로 남녀를 바라보았다.
[나 : 남는 티켓이 있어서 그러는데. 영화 보러 가자 ㅠㅠ]
[밤 : 뭐가 자꾸 남아요…?]
떨떠름한 반응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될 정도로 화면을 바라보는 시바.
그 뒤에서 왕이 계속된 조언을 해주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밀어붙이는 것도….”
“삐, 안 먹히면 어쩔 건데요?”
세상을 멸망시킬 왕이 이런 어린애한테 휘둘려 고작 친구 하나를 사귈 방안을 짜내고 있다.
현자의 도발과 맞물려 마음을 독하게 먹었음에도, 역시 딸이라는 걸까.
누가 보면 우스워할 광경이었다.
[나 : 한 번만!!]
[나 : (새싹이 ‘삣!’거리며 절하는 이모티콘)]
[나 : 진짜.]
[나 : 나 영화 보고 싶어.]
[나 : 근데 혼자라.]
[밤 : ;;;;]
시바는 불안한 눈을 자꾸만 꿈뻑거렸고. 왕은 힐끗힐끗 시바의 안색을 살피며 눈치를 보았다.
“…미안하다.”
“삐. 아녜요.”
시바는 마지막으로 새싹이 죽어가는 듯한 이모티콘을 보냈다.
나랑 영화 안보러가? 그럼 나 죽어!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 시바와 왕의 간절한 눈빛이 핸드폰을 뚫어버릴 듯하다.
‘제발.’
친구를 사귀어야만 퀘스트를 깬다.
붙임성 없는 시바가 펼치는 혼신의 기다림!
그 기대감이 신에게 닿았을까?
[밤 : …알았어요. 언제에요?]
[밤 : (다람쥐가 한숨을 내쉬는 이모티콘)]
시바의 얼굴에 환희가 돋아났다.
“!!!!!!!”
이거 친구 각이냐?
시바의 얼굴이 즉시 퀘스트창으로 뻗어나갔다.
[ 친구 수 (1/3) ]
아직 아니다. 호감도가 부족했다.
-지끈!
“삐익!!”
하지만 친구가 될 가능성은 있는 게 아닌가.
고개를 훽 돌린 시바가, 촉촉한 눈망울로 왕을 올려다보았다.
“아저씨….”
귀엽게 중얼거리며 감탄한 듯한 모습.
왕의 입가가 한 순간 씰룩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