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3화 > 시바는 친구가 적다 (6)
-톡.
갈증이 심할 때 마시는 맥주는 그 이름만큼이나 각별한 맛이다.
-꼴깍, 꼴깍!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청량함!
“삐햐…!!”
시원한 탄사를 뱉은 시바가 울먹거리며 맥주캔을 두드렸다.
스트레스를 꽤 많이 받은 모양일까. 깔린 음식들이 반주 수준이 아니다.
작정하고 마시려는 듯 주전부리를 입에 털어넣으며 코를 훌쩍이는데, 왕은 어떠한 몸짓도 하지 못해 벙쪄있었다.
“몸에 안 좋다. 그만 마셔.”
“우씌, 아저씨가 뭘 알아요!!”
심장에 콱! 딸아이의 말이 창살처럼 꽂힌다.
“삐힝, 힝힝…. 난 글렀어.”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아니 그보다 술을 먹어도 되는 나이이긴 한 걸까?
소심해진 왕이 쭈뼛대며 시바의 말을 기다렸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시바는 꽁해진 마음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영화 약속을 잡은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 뒤가 제대로 안 풀렸다고.,
“삐익!”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시바가 취기에 소리를 질렀다.
충분히 민폐 행동이라 부를 수 있었지만, 그 특유의 귀여운 음성과 얼굴 때문에 아무도 시바를 말리려하지 않았다.
-쟤 귀엽게 생겼다.
-어? 누구? 오….
마침 편의점에 들어온 대학생 무리가 킥킥대며 시바를 바라보았다.
-같이 술 먹자고 말이나 걸어 볼까?
-…에이 시발. 네 얼굴에 무슨, 저런 애들은 사는 세계가 달라.
보통 예쁜 거라면 말이라도 걸어보겠지만, 시바가 원체 예뻐야지.
사는 세계가 다르다고 느껴지면 되려 기가 죽는 것이 남자다.
하지만 왕에겐 그조차 불쾌하게 느껴졌고, 이에 그가 고개를 돌려 놈을 째려보았다.
-…읏!
관심을 보이다가도 느껴지는 살기에 빠르게 도망가는 학생.
다른 사람들도 차례차례 그의 패기에 달아나버렸다.
왕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시바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일인데?”
최대한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묻자, 대답하는 시바.
“삐. 영화 본 것까진 좋았는데여….”
“응.”
“친구처럼 대하고 싶으니까… 영화 보면 보통, 까페가튼데 가서 이야기 하잖아요….”
“그렇지.”
“근데 걔가 못 가겠다고 하는 거 있죠…? 삐이이잉.”
요는 After를 따지 못했다는 건가.
시바는 소개팅이 잘 안 풀린 평범한 남자처럼 몹시 속상해 했다.
“이유는?”
“그야 말 안해주죠…. 나 싫어하는데!”
“정말 아무 말도 없이 거부했다고?”
설마 그럴 리 있나.
이렇게나 이쁜 아이를 그렇게 대차게 까내린다는 건 단언컨대 불가능한 일이다.
시바의 조르기를 무시하는 사람이라니, 차라리 신이 있다고 믿겠다.
시바는 잔뜩 화가 난 볼을 씰룩이며 토로했다.
“돈이 없대요 돈이… 그럴 리가 없잖아요.”
“뭐?”
“고작 커피 한 잔, 4000원! 그거 못 내겠다고 가는 건 그냥 저랑 있기 싫다는 거잖아요!”
해석에 따라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는 걸까.
돈이 없어 본 적이 없는 시바다.
상대가 지갑이 가벼운 사람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했나 보군, 빠르게 판단한 왕이 술을 마시려는 시바의 손목을 가볍게 부여잡았다.
“삐, 놔요!”
“널 싫어해서 그런 게 아닐 거다.”
“……그럼요?”
왕의 달램에 반응을 보인다.
시바의 촉촉한 눈동자가 왕의 심장을 찔렀다.
-두근.
…방금 또 맥박이 뛰었나?
아닐 거다. 왕은 참았던 숨을 뱉었다. 시바에게 사실을 고하기 위해.
“돈이 없다는 건, 변명이라기엔 너무 어색하다. 차라리 다른 약속이 있겠다고 말하는 것이 보통이지.”
“뭐에요? 삐. 그럼 정말 돈이 없다고요?”
“그 아이는 아마 솔직하게 답한 것 같다.”
“커피 한 잔 사 먹을 돈이 없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당연히 있지.
대답이 없는 왕의 모습에, 드디어 상식을 자각한 시바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삐…도 안돼.”
말도 안된다는 걸 말하고 싶은 모양.
“그, 그럼 뭐 먹고 살아요?”
“커피값이 비싼거다.”
최근에는 유류값이라던가, 전쟁의 여파로 물가 자체가 많이 올랐다.
마법으로 대체하는 것도 어느 정도 수준이지, 난항인 요즈음엔 아사하는 사람도 매우 많았다.
까놓고 말해서 한국 정도 되니까 이만치 사는 거다.
다른 나라에서는 사는 게 막막해 정부를 전복하려는 대중의 시도도 관측되고 있었다.
심지어 이시바?
갑부 엄마에 갑부 둘째 엄마, 갑부 이모에, 역대 최강의 헌터의 사랑까지 받고 있다.
“아마 이번 약속을 들어준 것도.”
“…남은 티켓이 공짜라서?”
고개를 끄덕이는 왕. 시바는 드디어 진리 하나를 깨달아버렸다.
“그러고 보니까, 팝콘이랑 콜라를 싫어한다고 했었는데….”
“확인해보는 것도 낫겠지.”
“콜라를 한 번 줘본다거나?”
“그래.”
“삐잇!”
유레카!
밤은 돈이 없는 여자였구나!
밤이 들으면 크게 상처가 될 사실을 돌이킨 시바가 피식피식 웃었다.
“그럼 제가 사주면 되는 거네요?”
“…그것도 되겠지만. 되도록 돈이 안 들게 노는 게 답이겠지.”
왕의 뒷말은 시바에게 닿지 않았다. 중요한 건 돈. 밤이 돈이 없다는 것이었으니까.
시바는 잔뜩 기뻐선 방실방실 엉덩이를 흔들었다.
“아저씨 물건이었네! 어떻게 여자 맘을 그렇게 잘 알아요? 삐! 그런데… 옷은 또 왜 그래요.”
이제야 왕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걸까.
왕의 누더기차림에 시바가 눈을 치켜떴다.
“제가 사준 옷은 어쨌어요?”
그 옷을 어떻게 입을까.
다름이 아닌 시바가 사준 옷이다. 먼지조차 묻어선 안 될 옷가지. 주객이 전도되었음에도 그에겐 무척이나 소중한 물건이었다.
“아꼈다.”
“뭘 아껴요, 아끼긴. 돈 없는 건 아저씨도 똑같네.”
“…….”
“다음부턴 꼭 입고 와요, 네? 알았어요 몰랐어요.”
“알았다.”
다음부턴 꼭 입고 와라. 그건 다음이 있다는 말이다.
왕의 등에 솟아난 ‘가지’가 씰룩이며 들어갔다 나오길 반복했다.
언제든지 죽일 수 있으니까….
조금만 더.
“에휴, 그래도 아저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하마터먼 오해할 뻔 했잖아요.”
“그럼 다행이지.”
“삐히힣. 또 만날 줄은 몰랐는데, 아 그래. 내친김에 번호라도 교환할래요?”
“…번호.”
“네 번호요.”
“번호는 없다.”
애초에 이 세계의 핸드폰이 왕에게 있을 리 없지.
시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곤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으으음, 그럼… 아! 제가 사드릴게요.”
“그럴 필요는 없는데-”
“삐잇, 빨리요! 아빠 같아서 그래, 아빠 같아서!”
흠칫.
시바의 장난섞인 말에 왕이 손을 떨었다.
아빠같다. 그게 정말일 거다. 목석같이 굳은 왕의 모습에 시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저씨 왜 그래요?”
“…아니다.”
“아, 같다는 게 좀 그런가? 사실 좀 젊은 편이에요?”
“아니, 그것도 아니다. 그렇게 아빠같나?”
사실 그냥 한 말이긴 했는데….
말을 늘어뜨린 시바가 왕의 이목구비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분위기는 확실히 그리운 듯했지만, 가물가물한 기억에 매치시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음, 사실대로 말하면… 삐. 아빠 기억이 잘 안나요. 어릴 때 돌아가셔서.”
“?”
이번에는 왕이 놀랄 차례.
시바는 먹던 음식들을 치우며 왕에게 넌지시 말했다.
“좋아하고, 그립고, 그런 건 아는데. 얼굴이 잘 기억이 안 나서. 삐히히. 그래서 뭐라 답할 말이 없네요.”
그런가.
시바는 자신의 아빠에 대해 기억이 없구나. 이 세계의 이시헌은 제 딸의 안위를 위해 딸의 곁을 떠났구나.
그게 수목의 왕과 이시헌의 결정적인 차이다.
시바는 머쓱하게 볼을 긁었다, 아빠의 얼굴을 잘 모른다며 웃는 그 미소엔 약간의 슬픔이 어려 있었다.
시바는 분명히 아빠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미안한 말을 했구나.”
“아녜요. 앗. 이거. 저번에 한 대화랑 비슷하지 않아요? 그게 그.”
“내 딸 이야기?”
“예. 상황이 반대로 되니까 체감이 확 되네요. 아저씨가 괜찮다고 한 거 안 믿겼는데…. 이제 좀 알 것 같아.”
“하.”
헛웃음.
하지만 의미가 있는 웃음이다.
엔트의 입꼬리가 찢어지며 킥킥 웃어댔다. 시바는 그 광경을 보고도 그리 놀라하지 않았다.
순수한 만큼이나 편견이 없다. 핸드폰 매장으로 향하는 길에도, 시바는 왕에게 친근하게 달라붙었다.
“아저씨 딸은 어떤 사람이었어요?”
“…너만큼 귀여웠었지.”
“음. 잘 이해가 안가요.”
“세상에서 가장 귀여웠다.”
“삐?”
그럼 나도 그렇단 소린가.
시바는 시큰둥하게 눈을 깜빡였다. 시바는 자신의 외모가 평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럼, 저희 신세가 똑같네요.”
“신세라니?”
“저는 아빠 없는 딸이고, 아저씬 딸을 잃은 아빠니까. 그쵸?”
“…….”
들으면 불쾌해야할 말이, 전혀 불쾌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웃음이 난다.
“큭, 그런가.”
“그렇다니깐요.”
신세가 같은 사람은 서로를 까대도 그다지 데미지가 없다.
둘이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도 대충 그런 느낌이지 않을까.
하지만 다르다.
시바는 아직 알지 못했을 뿐, 그녀의 아버지는 여전히 살아 있었으니까.
“…만약 네 아버지가 살아있다면. 어쩔거지?”
“삐?”
시바는 턱을 잡고 잠시 고민했다.
이윽고 그 여린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피어났다.
“그야, 찾아야죠. 내 아빤데.”
“그래.”
“엄마가 아빠 자랑을 엄청했어요. 멋지고, 잘생기고…. 상냥하고 다정한데다 잘 싸운데요. 말 그대로 완벽하다는데, 당연히 보고싶죠. 그리고.”
“그리고?”
“어렴풋이 기억하거든요. 우리 아빠… 엄청 좋아했으니까.”
시바의 어린 시절,
새싹부터 시작해 흙투성이의 어린아이부터 유치원생까지.
시바는 아빠 없이는 못 살 정도로 이시헌바라기였었다.
어쩌면 연인인 세영이나 달래보다도 더 많이 그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가족이기에 주는 무상의 사랑은, 꼭 일방적이지만은 않다.
“삐. 살아있을 때 이야기지만요.”
“…….”
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저씨도 딸이 살아있으면 어떨거 같아요?”
왕은 잠시 지난 나날을 돌이켰다.
‘근원’과의 계약. 시바를 살리려는 유일한 길. 그러나 그조차도 도박에 불과하다.
‘만약 내가 이 세계를 부순다고 해도.’
시바가 살아날 확률은, 그다지 없다.
‘근원’이 계약을 이행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며, 그 실낱같은 희망은 언제든지 배신당할 수 있는 일이었으므로.
그렇기에 왕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왕은 한참을 고민하다, 툭 던지듯 말했다.
“살아 있지 않아.”
“삐?”
“다신 오지 않을 테니. 너랑은 다르다.”
“그게 뭐예요.”
“너는 아버지의 죽음을 옆에서 지켜본 거니?”
“그건 아니지만… 그럼 아저씬.”
왕은 그저 웃었다. 씁쓸하고 고독한 웃음이었다.
시바는 그 표정에서 어떠한 감정을 느꼈다. 텅 빈 눈동자. 허무함이 무척이나 감도는 그 시선에, 시바의 눈망울이 촉촉해졌다.
“…삐익.”
“왜 울지?”
“아저씨 불쌍해. 삐이잉.”
“불쌍하긴.”
“…제가 아저씨 딸 할게요.”
취기도 있고, 대충 내뱉은 막말이지만.
왕은 그 말을 시바만큼 대충 넘겨 들을 수 없었다.
“아마, 그건 이루어질 수 없을 듯하구나.”
당연한 소리. 그러나 어딘가 씁쓸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다.
시바는 찔끔 나온 눈물을 닦으며 왕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왕은 그런 시바의 귀여운 몸짓 하나하나를 눈에 담아두었다.
“삐잉, 그럼 친구 해요 친구….”
“친구?”
“핸드폰 사드릴테니까, 오늘부터 친구에요.”
친구비로 핸드폰이라니.
거 참 시바다운 권유가 아닐 수 없다.
왕은 멍한 표정으로 시바를 바라보다가, 이내 자신의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입꼬리가 부들대고 있었다.
“…친구는 말이다. 돈이나 그런 걸로 해결되는 게 아니다.”
“알아요. 하지만 제가 해낼 수 있는 선에서 주는 호의는 괜찮을 것 아녜요?”
“그렇지. 다만, 널 이용하려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다. 세상엔 너처럼 모두 귀엽고 착하지 않으니까.”
“그럼 아저씬 괜찮네요?”
“……그런가.”
피식 웃는 시바.
갑자기 시바의 눈망울이 반짝거렸다.
“어? 어어?”
시바의 눈앞에 펼쳐진 퀘스트 창. 그녀의 바람대로 친구 수가 늘어나기라도 한 걸까.
“삐, 삐익!!?”
환희에 찬 시바가 왕의 팔을 잡고 마구 흔들어재꼈다.
“친구, 친구 맞죠? 아저씨!”
“…네가 그렇다면.”
“꺄아악! 아저씨 삥! 삥이에요 삥!”
짱을 말하고 싶은 걸까.
시바의 즐거운 모습을 보면 볼수록, 왕의 얼굴은 일그러져만 갔다.
-툭.
그리고 그런 시바의 품에서, 새 모양을 한 자그마한 정령이 시바 몰래 왕의 얼굴을 흘겨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