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5화 > 기회
-팟!
두꺼운 콘크리트 벽을 뚫고 튀어나온 왕의 ‘가지’가 내 미간을 향해 쐐기처럼 날아왔다.
[째액! 쭈인님!! 안돼요!]
비명을 지르는 엘레오노르.
내가 상대의 공격에도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녀석은 자기 몸을 던져 나를 지키려 날개를 푸드덕거렸다.
‘가만히 있어.’
[짹?]
날아오르는 엘레오노르의 머리통을 잡고 비스듬하게 고개를 꺾는다.
왕이 내보낸 ‘가지’는 표적을 잃고 내 등 뒤로 쏘아져 나갔다.
-팟팟팟!
이번에는 연달아 내리쳐온다.
천장에서 창살이 내리치듯, 자유 의지를 가진 ‘가지’들이 내 목섶을 꿰뚫기 위해 날아왔고. 나는 마력을 끌어올려 신체 내부의 마력을 마기로 치환하였다.
‘엘레오노르.’
[넵!]
정령 동화. 내 눈빛이 녹색으로 달아오른다.
왕을 깨부수는 게 목적이었다면 천마신권을 사용하는 것이 옳았지만, 오늘 내 목적은 그게 아니었으니까.
마력의 흐름이 보인다.
정령의 시야가 나와 완전히 동화되자, 마치 곤충의 눈처럼 내 시야가 갈라졌다.
‘가지’의 진격에 갈라지는 공기의 틈이 보였다. 나는 흐르는 물결같은 손짓으로 왕의 ‘가지’들을 전부 회피했다.
-웅웅!
정령화는 회피와 예상치 않은 움직임에 안성맞춤.
지금 이 순간 왕은 내게 유효타를 먹이기 힘들다.
나는 먼 곳의 정령, 루시에게 명령했다.
‘루시.’
[네, 주인님.]
‘모든 정령을 이 근방에 전부 풀어놔.’
루시와 엘레오노르 말고도 여러 하위 정령이 이 근방에 펼쳐져 있다.
일일이 계약한 것은 아니고, 상위 정령인 엘레오노르가 정령계에서 끌고 왔다.
왕가의 공주인 엘레오노르는 정령사의 계약 없이도 인간계에 많은 정령들을 불러들일 수 있었다.
그 결과, 어떤 정령술사보다 더 많은 정령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무수한 정령들과 시야를 공유했다.
일대일에 필히 생길 수밖에 없는 사각지대를 보완하고, 마력의 낭비 없이 공간을 장악했다.
정령의 각 개체에는 내 마기가 깃들어 있어 파괴력있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이 건물 내부 전체에 A급 마법사가 빽빽이 들어선 셈이다.
【 소음 차단 】
【 충격 완화 】
건물 전체를 마법으로 도배한다.
교전을 파악한 헌터가 쳐들어오면 곤란하다. 노리던 바를 이루려면 우선 상대의 적의를 꺾어야만 했고, 나는 왕의 반항을 꺾기 위해 정령화를 택했다.
-팟, 팟!
이어지는 공격을 흘리며 수비적인 태세를 유지한다.
“오늘은 싸울 생각 없어. 좋은 말로 할 때 가만히 내려와.”
얼마 지나지 않아 낌새를 눈치챈 왕이 ‘가지’를 거미줄처럼 이용해 천장에서 내려왔다.
외눈박이 괴물이 누더기 차림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시체 두 그루가 놓인 처참한 방. 굴러다니는 머리를 대충 구석으로 차버리고, 가만히 놈을 흘겼다.
데구르르. 톡.
그 구르는 머리를 왕이 ‘가지’로 터뜨렸다.
-콰직!
“내 딸이랑 재미를 좀 보고 있던데.”
왕이 시바에게 접근했다는 사실은 먼젓번부터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당장이라도 쫓아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이야기가 꽤 다르게 흘러갔다.
왕은 차원의 모든 생명체를 말소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시바를 앞에 두고 머뭇거리는 그 모습에 나는 자그마한 대화의 가능성을 느꼈다.
시바를 한정해서 되찾은 인간성.
언제 꺾일지는 모르겠지만, 왕이 가지고 있는 정보엔 가치가 있다.
“이시헌.”
왕이 중얼거린다.
“그래. 이제 말을 나눌 생각이 들었어?”
친근하지는 않지만 최대한 능청스레,
나는 썩은 미소를 감추지 않으며 녀석에게 물었다.
솔직히, 속이 뒤집어지긴 했다.
“아니면 뭐, 이제야 아빠가 된 기분이라도 드냐?”
역린을 찌르자 솟아오르는 흉흉한 투기.
“엄한 소리를. 너야말로-”
“알지.”
대화의 주도권을 넘겨주지 않는다.
“아빠 될 자격 없지. 시바랑 있었으니까 알 거 다 알잖아. 내가 내 딸 버리고 도망친 거. 우리 딸 아빠 없는 애 만든 거.”
“…….”
“근데 내가 우리 딸을 참 금쪽같이 아끼긴 하거든?”
내 감정이 왕의 마음을 반증한다.
왜 이 녀석이 시바를 죽일 엄두를 내지 못했을까.
알기 쉬웠다. 비록 내가 아무리 썩고 비틀려도 시바는 내 혈육이니, 이 녀석은 시바에게 절대 손을 댈 수 없다.
시련의 악마가 이 세계에 온 이유 역시 이와 관련되어 있겠지.
섣불리 결론을 지어선 안되겠지만, 이쯤 되면 확실하다.
“죽었지?”
“…….”
“네 딸.”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아무리 다른 세계라도 나다.
비참한 미래를 겪은 놈에게 연민이라는 감정, 느끼지 않을 리 있나.
-쾅!
나는 왕의 몸에서 쏘아진 ‘가지’를 피하지 않았다.
뾰족한 가지가 손바닥에 찍혔다. 손아귀에 핏물이 진득하게 흘러나온다.
“서로에게 궁금한 게 참 많을 거야.”
-까드득.
‘가지’를 쥔 손에 힘을 주어, 놈의 무기 하나를 부러뜨린다.
우드득. 잘게 쪼개진 가지를 대충 바닥에 던진 뒤.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갔다.
손에 있는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어갔다.
“대화를 하지.”
“…뭐?”
왕의 한 쪽 눈에 이채가 스며든다.
“어차피 한 쪽은 죽어. 알잖아.”
“…….”
“그런데, 이쪽 세계 사정도 꽤 복잡하거든?”
제안이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피를 지워낸 나는 진지하게 놈을 노려보았다.
죽음이야 훨씬 오래전부터 감당해왔고, 죽어서라도 내 사람이 살길을 찾아왔다.
수목의 왕 역시 나름대로 제 딸을 살리기 위해 안 해본 게 없다.
매 순간이 도박.
나와 왕의 시선이 일직선으로 이어졌다. 마력이 진동해 벽에 금이 갔다.
서로의 의지에 대해 고저를 나눌 수 없으니.
해와 달의 고도가 같은 이상, 우리는 잠시나마 엮일 필요가 있다.
어스름한 밤 공기가 이 건물까지 새어들어와 허리춤이 시리다.
날이 어둡다.
해가 떠오르는 새벽인지, 아니면 달이 뜨는 밤인지.
시계를 보지 않아 알 턱이 없다.
“네가 아는 모든 것.”
“….”
“그리고 내가 아는 모든 것.”
나는 비겁하게 웃었다.
“바꾸지.”
왕의 눈동자가 커졌다.
“…진심인가?”
노성 섞인 왕의 되물음에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해라.
어차피 한 사람밖에 살 수가 없다면, 살아남은 쪽이 조금이라도 목적에 다가가는 편이 낫지 않나.
그게 기조다.
속내를 밝히자면 수목의 왕은 무수한 세계를 걸쳐온 정보 덩어리나 다름없다.
그 기억을 건네받는 것만으로도 나는 내 성취에 성큼 다가갈 수 있었다.
귀목, 플라워, 세계수…. 어쩌면 시련까지도.
“…먼저 묻지.”
수목의 왕이 말했다.
장소를 바꿀 필요 없이 우리는 응답을 주고 받았다.
‘루시, 엘레오노르. 들어가.’
[짹!]
[네 주인님.]
정령을 불러들이고, 내 적의가 없음을 판단한 왕이 ‘가지’를 거두었다.
“어떻게 시바가 살아있는 거지?”
“네 사정을 알아야 내가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서로의 세계에서 한 경험을 대조할 필요가 있다.
왕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곤, 천천히 자기 세계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시바가 살아있는 세계선은 지금껏 없었다.”
“뭐?”
“…대처가 부족했어. 어느 한쪽을 틀어막으면, 다른 한쪽이 무너졌지.”
“대처라면? 세계수? 아니면 플라워?”
“전부.”
왕은 ‘가지’들에 둘러싸여 고독히 중얼거렸다.
“시바는…. 놈들에겐 살려둬선 안되는 재앙이다. 그 잠재력으로 보나, 어느 쪽으로 보나, 플라워든 세계수든 지겹게도 시바의 목을 노려댔지.”
내가 우려하던 상황 중 하나였다.
시바가 노려짐으로써 내 움직임에 부하가 걸리는 것.
내 힘의 성장이 늦춰지는 요인 중 하나였고, 그러한 이유가 겹쳐 나는 3년 전에 시바의 곁을 떠났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이 세계는 이상할 정도로 시바를 방치하고 있더군. 아무리 그 여자가 시바의 뒤를 봐주고 있다고 하여도….”
“그 여자?”
“순결의 세계수.”
“……난 그 녀석의 얼굴도 모르는데.”
“뭐?”
시바는 엄마를 부르던데.
왕의 이어진 말에 나는 답을 꺼냈다.
“시바 엄마, 진달래야.”
“…?”
“왜.”
“아니, 잠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 그랬었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왕을 두고 나는 녀석에게 질문했다.
“순결의 세계수를 본 적이 있나?”
“…당연히.”
왕의 눈에 후회가 얼핏 스쳤다.
“날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여자지. 내가 심장을 취하는 그 순간에도.”
“네가 죽였다. 사정을 들어보니 꽤 좋은 결말은 아니었겠는데.”
“…좋은 결말이었다면 내가 이곳에 있을 리 없지.”
“그렇긴 해.”
순결에 대해서는 궁금한 게 많았다.
왕에게 들어야 할 게 더 많아졌다. 나는 마법으로 대충 의자를 만들어 그곳에 걸터 앉았다.
“조언이 필요하겠군.”
말하는 걸 꺼리더니, 무슨 감상이 들어서일까.
정보를 직접 풀어준다면야 나야 고마운 일이다.
“그 여자를 의심하지 마라. 호감도창을 전에 본 기억이 있다면 알겠지.”
“알지.”
순결의 세계수. 그녀의 호감도는 단 한 순간도 변함없는 100이었다.
“무수한 세계를 돌아다녔지. 매번 그 여자를 죽였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날 거부한 적이 없어. 마음만 먹으면 막아낼 수 있을 텐데도. 오히려 사과하더군.”
“사과?”
“……이렇게 될 때까지 방치해 미안하다고. 그 여자는 운명을 바꿀 수 있다. 어째선지 늘 다른 차원선에 있어 그 힘을 자유자재로 쓰지는 못했지만.”
운명을 바꾸는 존재.
예전에 들은 것이 머리에 스치지만, 지금 우선할 것은 그게 아니었다.
“이야기 꽤 많이 틀어졌네. 시바의 죽음. 다시 그 얘기로 돌아가자.”
“돌이키기도 힘들군. 말을 줄이지. 시바는 병으로 죽었다. 잠시 마석을 구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짧은 순간. 세피로트의 저주를 받았지.”
“…….”
“세피로트, 그 년은 시바에게 관심을 가졌어. 엘프의 힘. 회색 마력. 모두 자기가 모르는 것이었으니까. 여기도 곧이야. 엘프의 힘이 발현만 된다면 금방 관심을 가지겠지.”
“관심을 가지는데 저주를 걸었다고?”
“평범한 저주가 아니지. 세피로트는 시바의 몸을 가지고 놀았어. 병을 주고 온갖 생체실험을 했지.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죽을 때까지. 쭉.”
그리 말하는 왕의 눈엔 분노와 슬픔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세계를 넘으면서 담담해질 법도 하건만, 딸을 잃은 아버지의 감정은 미처 버릴 수 없던 걸까.
“그때 현자가 권유했다. 시바를 살릴 방안을 마련해주겠다고. 하지만 배신당했어. 해주할 포션을 깨부수곤, 시바를 죽게 내버려뒀지.”
“왜.”
“…내가 그 길로 경지를 넘었지.”
이 세계의 현자와 다른 세계의 현자는 동일 인물이 아니다.
하물며 지금 현자는 마로니에였으니까. 그때와는 사정이 다르다.
“정리해볼까.”
하나, 세피로트가 시바에게 관심을 가져 저주로 온갖 실험을 자행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세피로트가 아직 시바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리고. 몇 가지. 상태창으로 구한 비료와 물에 독이 섞여 있었다.”
“……이건 내 세계랑은 관련 없는 일인데.”
“시바의 정체가 빨리 퍼져나간 경우, 그리 죽더군.”
그런가.
나는 어지간한 모든 사건에 시바를 대동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납치됐을 때 굶어 죽는 경우도 많았다.”
알파와 베타에게 휘말린 내가 미발견 던전에 강제 이송당했을 때를 말하는 것 같다.
그땐 세영과 달래가 번갈아 시바의 새싹을 돌봐주었다.
그녀들이 없었다면 시바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진달래가 엄마라고 했지. 미안하지만, 그 여자에 대해선 잘 모른다. 너무 기억이 오래되어서. 그리고… 뭐, 좋은 결말도 아니었으니.”
달래의 생존이 시바와 직관되어 있었나.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생각인데…. 세계수는 시바를 이용할 수도 있겠어.”
“왜?”
“그게 아니라면 살려둘 필요가 없거든. 넌 시바를 버린 셈이니. 겉보기엔 그렇지 않나?”
세계수는 모든 걸 보고 있지 않다.
가끔가다 힘을 써서 어떠한 현장을 확인하는 것 정도야 되겠지만,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시바를 알아채는데 늦었다.
알아챘지만, 나는 시바를 버리고 홀로서기를 선택했다.
그리고 시바가 내게 느끼는 감정이 부정적이라면… 충분히 이용할만하다고 판단했겠지.
“…세력의 균형이 유지되는 덕도 크지. 나에게 신경을 쓸 틈이 없었어.”
“그런가.”
내 말에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플라워와 세계수의 냉전은 쭉 이어지고 있다.
당시에는 나보다도 플라워의 위험성이 컸다.
만약 날 몰아붙이길 택했다면 세계수는 진작 멸망했으리라.
시바가 잘 자랄 수 있었던데에는 아주 많은 사정이 겹쳐져 있었다.
순결의 세계수의 압박도 도움이 되었을 테고 말이다.
“결정적인 건 내가 최대한 정보를 지운 것과, 시바를 달래한테 맡긴 건가.”
“……지랄맞군. 내 딸을 살릴 방안이, 내 딸을 버리는 거라니.”
허탈하게 웃는 왕.
초연하게 굳은 미소가 참으로 버거워보인다.
“아직 물을 게 많다.”
“나도 그래.”
사실상, 미래를 엿보는 거나 다름없는 것.
나는 미소를 걸치며 왕을 바라보았다.
미래의 나.
그 수혜를 한 번 받아볼까.
오늘 이 순간은, 나와 내 주변 모든 것을 뒤바꿀 천상의 기회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