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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를 따먹다-547화 (547/657)

< 547화 > 토벌 계획 (1)

왕관과의 동화를 무사히 마친 뒤.

나는 즉시 내 세력으로 향해 모두에게 알렸다.

뚜벅뚜벅 회의실을 가로 지으며 구슬을 비롯한 녀석들에게 말했다.

“토벌 일자를 앞당긴다. 배출할 인원을 말하지.”

왕이 힘을 모으게 둬서는 안 된다는 판단.

시바의 친분이 더 깊어지기 전에 일을 치러야겠다는 생각도 조금은 있었다.

“갑자기…? 세계수의 세력을 약화시키자는 쪽 아니었어?”

서류를 가슴에 안은 제복 차림의 구슬이 무슨 일이냐는 듯 시선을 던졌다.

다른 간부들도 전부 마찬가지. 눈 회복을 앞둔 동백도, 엔가헤로도 내 섣부른 선택에 우려를 표했다.

“시헌님, 그, 다치는 일이 아닌가요?”

“폐하. 말씀의 진의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나는 엔가헤로를 흘기곤 자리에 앉았다. 노골적인 시선에 어깨를 움찔거리는 엔가헤로.

그 비굴한 노인네의 표정이 제법 볼만하다.

왕에게 들은 놈에 대한 문제는 차후 천천히 해결하도록 하고, 나는 여유롭게 양손을 모아 이야기를 멋대로 진행 시켰다.

“치유의 세계수, 구슬. 홍연. 그리고 인내 너.”

“저는 왜요?”

“까라면 까. 솔직히 많은 인원을 할애할 필요는 없어, 상대는 한 명이고. 세계수 측도 움직이고 있으니.”

다소 일어날 수 있는 불만을 강제로 잠재운다.

이에 손을 든 구슬이 끈질기게 되물었다.

“아니, 잠깐. 잠깐! 이야기가 너무 빨라서 그런데…. 뭘 어떻게 하라고?”

여러 요소로 판단한 결과, 시련의 악마를 바로 쓰러뜨리는 것이 후환에 좋다고 생각했다.

세피로트가 왕에게 관심을 보이기도 했거니와, 혹시 녀석이 한 번 더 왕에게 접근한다면 일이 틀어질 확률이 있었다.

하물며 왕이 내 딸에게 다가갔다는 사실도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런 거라면야, 이해는 하는데.”

내가 평소에 시바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고 있는 구슬로서는 벙어리처럼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는 홍연이 손을 들었다.

“도원아, 너무 급작스런 선택이 아니더냐?”

“충분히 생각했고, 변수까지 고려해서 내린 선택이니까. 이해해줘.”

“…네가 그렇다면 말리지는 않겠다만. 나는 뭘하면 되느냐?”

“그것까지 말해줄게.”

찬찬히 준비할 게 많다.

싸움은 장기전이 될 전망이다. 포션을 전부 끌어모을 필요가 있었다.

생명 하나의 가치가 있는 최고급 포션은 전쟁터에서 역전의 용사들을 몇 번이나 더 기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지표가 된다.

그 역전의 용사라함은 당연히 경지를 넘은 존재.

이 세력 내엔 나밖에 없다. 요컨대 내가 싸우고 나머지는 나를 보조한다는 소리다.

치유의 세계수는 내 권능보다도 더 강한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인내 또한 내게 마력을 건네줄 수 있고, 구슬은 삼재(三災)로 경지 급의 인물에게도 충분한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알바가 준 포션도 쓸 필요가 있겠어.’

이번 싸움에는 알바의 모유 숙성 포션 또한 당연히 사용한다.

내가 꺼리던 최상급의 포션들도 입에 머금을 필요가 있었다.

“일시랑 작전은 천천히 짜보자고. 세계수의 동태도 살펴야 하니까.”

“…일단 알았다. 세력 방침은 그대로인가?”

“어. 그 부분은 연이랑 동백이 신경을 좀 써줘. 할 수 있지?”

동백과 홍연의 답변을 들은 후. 나는 자리에 앉아 머리를 굴려대기 시작했다.

왕을 철저하게 몰아붙여야 한다. 막말로 수목의 왕만 쓰러뜨린다면, 나머지는 일도 아니었다.

1시간에 걸쳐 회의를 빙자한 내 일방적인 설득을 끝낸 후.

까만색 목검을 쥔 흑단이 훈련실에서 나와 나를 찾아왔다.

“사부님.”

“오, 운동하고 있었어?”

흑단이의 땀에는 약간의 목탄 향이 맡아진다.

변태적인 의미가 아니고 사실이 그렇다.

방금 전까지 검을 휘둘렀는지, 손에 쥔 겨우살이를 허리에 맨 흑단이 극세사 수건으로 뺨을 닦으며 싱긋 웃었다.

“네, 이제 조금 마기를 다룰 줄 알 것 같아요.”

내 지도에 따라 훈련을 하고, 그 덕을 톡톡히 보는 흑단이다.

“그리고 그… 천마신공? 그건 아직.”

“괜찮아. 그건 원래 배우기 어려운 거야.”

백도까지라면 모를까.

모든 오의를 익히려고 내가 얼마나 고쳐 죽었는지 모른다.

마기를 먼저 가르치는 것은 순서가 어긋난 행동이긴 하지만,

빨리 강해지고픈 흑단의 요구에 따르기로 했다.

“대신. 알지?”

“이 힘을 쓰기 전엔, 사부님의 허락을 맡아야 한다는 거요?”

사경을 헤매는 상황이거나, 혹은 자신이 무언갈 죽도록 바랄 때.

그 두 경우를 제외한 나머지 상황에는 내 허락을 받아야 한다.

마기가 폭주하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나도 장담하지 못하니까.

그나저나 벌써 마기를 다룰 줄이야.

싹수를 보기는 했다만, 이렇게 키울 맛이 있는 제자는 처음이다. 흑단이가 내 첫 제자이긴 한데 아무튼 그렇다.

“잘했어. 이제 씻고 밥 먹어야지?”

“네 사부님, 그런데.”

“왜?”

“요즘, 바쁜가 해서요…. 막히는 곳이 너무 많아서.”

이번 일만 처리하면 여유가 꽤 많이 있다.

나는 무릎을 꿇고 흑단이와 눈맞춤을 한 뒤, 머리를 쓰다듬었다.

땀이 흥건한 정수리를 어루만지자 흑단이 살짝 뒤로 물러섰다.

“땀 많이 났어요…. 쓰다듬는 건 좀.”

“에이 그게 뭐. 몇 달 전만 해도 서로 안고 잤는데.”

“안 그랬어요.”

“그런가?”

내 기억이 조작됐을 수도 있지.

뭐 확실한 건 흑단이는 내가 준비하고 있는 비밀병기 중 하나라는 거고, 얼마 안 가서 구슬의 자리를 노리리라 믿어의심치않는다.

‘검술에 한정하면, 그 어느 누구보다도 재능이 있어.’

기술이 좋다고 만사형통은 아니지만, 흑단이가 보여주는 검술은 스승님 이상이다.

마기의 적성. 마력 운용의 실력까진 뒤떨어지는 면이 있더라도.

‘……넝쿨째 굴러온 축복이나 다름 없긴 하네.’

흑단의 전투 센스 자체는 무궁과 견줄만했다.

비교되는 대상이 경지급인 것만 생각해도, 이 녀석의 성장은 나날이 가속화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 보여줄 수는 없다.

나는 싫어해하는 흑단의 머리를 매만지며 사정을 설명했다.

“지금은 힘들어. 할 일이 많거든. 그래도, 한 달 내에 일이 끝나니. 그때 훈련을 봐줄게.”

“끄응, 알았어요 사부님. 그러니까 머리 좀 그만….”

“그리고 뭐, 필요한 거 있어?”

훈련에 필요한 거라면 얼마가 들더라도 지원할 예정이다.

내 말에 흑단이는 귀를 쫑긋 세우더니, 불쑥 자기 가슴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

뭘 하려는 걸까.

가만 보니 가슴부위에 달린 옷 안쪽 주머니에 커다란 종이쪼가리를 숨겨둔 것 같았다.

흑단은 땀에 젖은 구겨진 스티커판을 내게 내밀었다.

“그럼, 스티커… 붙여 주세요.”

공란이 몇 개 남지 않은 스티커판.

얼마 지나지 않아 소원을 들어줄 때가 오리라.

“그래. 하나 주지.”

“하나만 더 줘요….”

“안돼.”

처음에는 칭찬할 일만 생기던 스티커도, 슬슬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얘가 뭘 요구할까 상상하니 약간 두려워지기도 했고.

“…치.”

시무룩한 흑단의 얼굴이 퍽 귀여워, 나는 소리내어 킥킥 웃었다.

*****

떨어진 하나의 궤적을 따라 흙이 비산한다.

오각형으로 쪼개진 검짓. 전선의 중앙에 선 한 남자를 향해 달려든 시스투스의 분신이 무수히 터져나갔다.

-쾅!!

“…미리 죽여뒀어야 했는데.”

두꺼운 갑옷을 뒤채며, 장검을 휘두르는 정시우의 몸에서 흰빛이 뿜어져 나왔다.

시스투스의 분신이 어떻게든 그 뒤를 잡으려 해도, 풍압에 의해 밀려날 뿐이었다.

-쿠구구구!

검술의 극치.

움직이는 검기의 궤도가 흐릿해 잘 보이지 않는다.

홀로 플라워의 군대를 깨부수는 정시우의 존재감은 전쟁 병기 그 자체.

아무리 정예로 이루어진 군대가 아니라지만, 상대는 시스투스의 분신을 더불어 양질의 용병을 대동한 상태.

쉽지 않은 상대를 유린하는 정시우의 모습은 전장에 나선 여러 군인의 이목을 한눈에 끌어모았다.

-…저게, 정의의 세계수님의 축복을 받았다는.

-말도 안 돼.

용사.

3년의 세월을 넘어 그가 무던히 피워낸 꽃은 오늘날 개화해, 그 힘을 뽐냈다.

이렇게.

-콰지지지직!

번개처럼 솟아오른 검기가 주변을 파도처럼 휩쓴다.

잘려나간 플라워의 용병들이 무어라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사지가 조각조각 잘려나갔다.

정시우와 몇 합을 나눌 수 있는 실력을 가진 베테랑 용병은, 한 순간의 아집으로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미 도망간 상태.

“정시우.”

“…왜?”

정시우의 검격을 가까스로 피한 시스투스의 분신이 그의 코앞에 다가가 말했다.

소름끼치는 미소를 품은 아이의 분신이 그에게 소리쳤다.

“기억해두지.”

“영광이네.”

무감정하게 중얼거린 정시우가 검을 아래로 내리쳤다.

시스투스가 얼마나 많은 유아를 죽이고, 분신으로 만들었는지 생각하면…. 역겨워 토가 나올 정도다.

-서걱.

어린 아이의 머리에 빗금이 그어지며, 그 몸체가 미끄럽게 잘려 떨어진다.

마음 같아서는 그 몸을 흙에 묻어두고 희생당한 아이들의 명복을 빌어주고 싶지만.

아직은 전장.

정시우는 피를 닦을 여유도 가지지 못한 채. 앞으로 걸어나갔다.

‘이게 끝나면, 다음은….’

시련의 악마.

원래였다면 전선에서 더 전쟁을 이끌어야 했지만, 최근 악마의 기류가 바뀌었다.

듣기로는 무수한 세계수를 잡아먹고 있다던가.

정의의 세계수는 하여금 정시우로써 그 괴물을 토벌하려는 듯했다.

*****

홍연과 구슬, 인내와 치유.

전투와 보조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할 인재를 찾는다면. 지금 내 세력에서 손에 꼽는 녀석들이다.

‘다만….’

이 정도로 왕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바보의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

왕관과 동화해 한순간 ‘인자’와 교류를 나눈 것으로, 나는 왕이 구사할 수 있는 힘의 정도를 예측할 수 있었다.

왕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 세계에 찾아온 게 아닌, ‘시련’의 형태로 내 앞에 나타났다.

하여 그 힘을 펼치는데 애로사항이 많고, 권능으로 그 힘을 떨쳐내는데엔 여러모로 시간이 필요했다.

그것은 또한 내가 왕을 빠르게 무찌르려는 이유 중에 하나기도 했다.

“왕은 왕관에 침식된 상태야. 그러니까 이게 무슨 의미냐면, 인간의 몸이 아니란 것. 가까스로 이성을 유지하는 목귀라는 거지.”

왕의 겉모습은 인간과 엔트를 합쳐놓은 느낌이지만, 그것은 껍데기일 뿐 폭주한 세계수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왕의 힘을 극단적으로 진화시켜, 왕관에 집어삼켜진 형태.

그럼에도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왕의 ‘인자’를 말 그대로 복종시켰기 때문이었다.

이는 놈이 천마의 힘을 사용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왕의 힘과 천마의 힘은 상극.

신체의 단전을 허물어뜨리면서까지 왕의 힘을 발전시킨 놈은, 무슨 짓을 해도 마기를 발현할 수 없다.

‘뭐 이야기를 들어보면… 애초부터 천마의 힘을 발전시킬 기회도 없었지.’

녀석의 세계에서 천도는 훨씬 빠른 시기에 죽음을 맞이하였으니.

하물며 과거에 다녀온 적도 없었다고.

마기에 대해서 알고는 있었지만, 발전시킬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선택과 집중.

그런 표현을 쓸 필요도 없이, 왕의 힘이 수십 배는 더 유용했다.

신체를 그렇게 조작했으니 당연할 따름.

“이해했어?”

나는 눈앞에 앉아있는 여인에게 물었다.

커다란 가슴을 가린 갑주, ‘사냥꾼’이라는 이명.

산수유는 떡볶이를 입 안에 머금으며,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그릇 내놔.”

“…잉.”

이 녀석은 꼭 두 번 말해야 알아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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